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274화 (274/350)

제24편 각기삭골(刻肌削骨)

“크허헉?!”

단말마(斷末摩)의 비명과 함께, 기관 본영 마당에서 저항하던 최후의 기관무사가 쓰러졌다.

차랑.

요요한 금속음과 함께, 그의 숨통을 끊은 검이 허공을 한 바퀴 돌아 주인인 탈명귀검에게 돌아왔다.

"......."

이것으로.

적들의 주요 전력은 분쇄된 것과 마찬가지였지만.

탈명귀검도.

그의 동료들인 특임대원들도, 승리의 환호성 따윈 지르지 않았다.

“퉷 .”

쓰러진 기관무사의 갑주에 가래침을 뱉은 특임대원 하나가 품에서 연초를 꺼내어 물었다.

"......."

죽어 나자빠진 주인의 피가 튀었지만.

여전히 기관의 상징인 그 중갑주는 은빛으로 고고히 화톳불을 반사하고 있었고.

연초에 불을 붙이는 특임대원의 손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고생하셨습니다.”

그런 특임대원에게 기관의 지휘무사 명이 다가와 손을 모아 인사했다.

“그딴 말은 됐소.”

머리가 허옇게 센 특임대원은 씁쓸한 눈빛으로 고개를 내젓고는 명을 바라보았다.

“그대야말로 고생이 많구려.”

그 짧은 말에서 전해지는 상대의 위로와 공감에.

"......."

명은 피가 가득 튄 가면의 안쪽에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

그뿐만 아니라, 명과 함께 일어났던 이들은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사방에 가득한 것은.

가족과도 같았던 기관의 형제들의 시신이었고.

군데군데 불타고 있는 것은, 집과도 같았던 그들의 본영이었다.

“제길…!”

참지 못한 기관무사 하나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시선을 하늘로 돌렸다.

죽어 나자빠진 이들 중에는, 아는 얼굴이 너무나 많았다.

“멍청한 놈들!”

악다문 그의 이빨 사이에서 물기 어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어째서, 권력 따위에 눈이 멀어서는…!”

그것은 승전이었지만.

결코, 즐길 수 있는 승전이 아니었다.

은빛 중갑주로 상징되는 검가의 자부심이던, 기관의 명예는 땅에 떨어졌고.

그들이 그 명예를 되찾으려면.

앞으로 오늘 입은 인적 물적 피해를 복구하는 것 이상의 시간이 들 것이다.

“위로는 감사하지만.”

명은 억지로 침착함을 되찾으며, 고개를 들었다.

“…아직 끝이 아닙니다.”

그것은 일견, 기관은 아직 끝난것이 아니다.

다시 일어날 수 있다, 따위로 들릴 수 있었지만.

“아직.”

하지만.

그것은 희망찬 이야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본영 안쪽에 적들의 수뇌부가 남아 있습니다. 그들이 수를 쓰기전에 전부 처리해야 합니다.”

아직, 죽여야 할 기관의 형제가.

아직, 죽여야 할 검가의 가족이 남아 있다는 말이었다.

“일단. 비밀 탈출구를 막고, 본영을 중심으로 포위를 해서-.”

특임대원이 고개를 저었다.

“전략이나 전술에 대한 이야기는 나에게 해 봐야 소용없소. 나는 일개 무사일 뿐이니.”

“그렇다면, 어느 분께-.”

명의 말을 끊은 것은 탈명귀검의 외침이었다.

“특임대! 원로원에서 다음 명령이 내려왔다!”

특유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시신으로 가득한 마당에 울려 퍼졌다.

“지금부터 우리는 기관 본영에 대한 완전 봉쇄를 실시한다! 각 조의 조장별로, 인원 보고 후 임무를 확인하도록!”

“탈명귀검 선배님!”

이리저리 원로원 쪽에서 받은 지시를 전달하는 탈명귀검에게 명이 급히 다가갔다.

“봉쇄도 좋지만, 지금 당장 내부를 진압해야 합니다!”

명이 다급한 목소리로 건의했다.

“이 기관의 본영에는 최상부만이 알고 있는 탈출 방식이 많을 겁니다! 그러니 지금 당장 본영 내로 진입해야 합니다!”

“그럴 필요 없다.”

탈명귀검의 단호한 대답에, 명이 당황했다.

“그것은 어째서-?”

탈명귀검은 원로원으로부터 내려받은 지령을 확인하며 짧게 대답했다.

“본영의 안쪽엔, 가야 할 사람이 이미가 있으니까.”

“가야 할 사람, 말씀입니까?”

탈명귀검이 화톳불에 비춰 보는 원로원의 지령서는, 이미 그의 손에 묻은 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그래."

어차피 명령 전달은 끝났다.

짧게 욕설을 내뱉은 탈명귀검은 화톳불에 지령서를 던져 넣었다.

“마땅히, 저들의 죄를 물을 자격이 있는 사람 말이다.”

지령서는 허무할 정도로 쉽게 타버려, 한 줌도 되지 않는 재가 되어 흩날렸다.

* * *

기관 본영 내부.

“확보된 탈출로는 아직인가?!”

기관 본영 내의 가장 안쪽에 위치한 상황실은 혼란스럽기 짝이 없었다.

“죄, 죄송합니다! 특임대로 추정되는 인원들이 너무 빠르게 탈출로를 확보하고 있어서…!”

“그게 말이 되나?!”

부기관장.

기관의 이인자가 목에 핏대를 세우고 고래고래 고함을 치고 있었다.

“어떻게 놈들이 우리 기관의 비밀 탈출로를 그리 빨리 확보한단말인가?!”

“저, 저희도 모르겠습니다! 확인하는 비밀 탈출로마다, 이미 특임대가 대기 중이라…!”

“아무래도, 우리의 대의에 반대하는 이들이 적들에게 정보를 넘긴것이 아닐까 합니다!”

“이런, 망할 놈들!”

부기관장이 주먹으로 자신의 책상을 내리쳤다.

“조직의 기밀을 다른 이들에게 그리도 쉽게 나불거리다니, 이 배반자 놈들…!”

지금 상황에서, 누가 누구더러 배반자라 하는지.

“게다가 대체, 원로원은 무슨 권한으로 본가 내부의 일에 관여를 하고있는 것이야?!”

“…부기관장님.”

문서 처리 담당인 수하 하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검가법전상에 본가의 위기 상황에서는 원로원이 자체적인 판단으로 개입 가능하다는-.”

“그 말은 우리가 조직의 미래를 위해 내린 고귀한 결단이 본가의 안위를 위협하는 일이라도 된단 말인가?!”

“그, 그것이 아니오라…!”

부기관장이 수염을 빳빳이 세우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사방에 분노를 토하고 있었다.

“이공자 측은 뭘 하고 자빠진 것이야?! 장로들을 움직여서라도, 원로들의 만행에 제동을 걸어야 할 것이 아닌가?!”

“포위 이전에 있었던 이공자 측의 마지막 연락에 따르면….”

[기관장님]

자신의 자리에 앉아 묵묵히 침묵을 지키며, 상황을 주시하던 기관장에게 그의 비서가 전음을 전했다.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기관장이 전음으로 답했다.

[...알고 있다』

사실,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은지 오래였다.

원로원이 특임대를 통해, 무력 개입을 한 것은 부수적인 문제였고.

'애초에, 최고운영회의가 냄새를 맡았을 때부터 계획은 크게 틀어진 것과 마찬가지였어.'

기관장은 수하들에게 보이지 않게 주먹을 틀어쥐었다.

'죽은 지 오래된 지금에 이르기까지도. 이렇게 나의 미래를 막는겁니까…!’

그의 머릿속에 전임 기관장과의 마지막 대화가 불현듯 떠올랐다.

“쿠, 쿨럭!”

등에 검이 박혀.

숨이 끊어져 가던 상황에서도.

“이대로, 당장에는 기관이 네 손에 들어가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

전임 기관장은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자신을 쏘아보았었다.

“이 검가에는 '그분'께서 계신다는 것을 잊지 마라…!”

그날.

그날은 자신이 전임 기관장을 등뒤에서 찔렀던 날이었다.

“그분께서 결국, 너를 찾게 될 것이야…!”

기관장은 이를 악물었다.

숨이 끊어지던 전임 기관장이 남긴 그 말은, 지금까지도 자신을 저주처럼 얽매고 있었다.

그때.

“부기관장님!”

상황실로 뛰쳐 들어온 기관무사가 다급한 목소리로 보고했다.

본영의 본관 이 층에서 긴급 지원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이 층에는 이미, 사령무사를 둘이나 지원해 주었지 않나?!”

사령무사는 벽을 넘은 이들만이 될 수 있는 자리였고.

고수가 두 명이라면, 웬만한 중소 문파의 전체 전력 이상이었다.

게다가 심지어, 이미 이 층 방어선의 책임자로 사령무사가 하나 있었으니.

고수가 세 명이나 이 층의 방어선에 투입되었단 말이 아닌가.

“특임대 놈들은 본관에 돌입은커녕, 아직 포위망을 구성하고 있는 중이라 하지 않았나?!”

“그, 그렇습니다만…!”

눈이 벌게진 부기관장이 악을 쓰다시피 외쳤다.

"대체 몇 놈이나 침입했기에 이 난리를 치고도 제압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야?!”

“그, 그것이. 저도 보고를 받고 재확인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있는 정보라-.”

“몇 놈인데?!”

수하가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본관에 침투한 적은 한 명! 혹은 많아야 두 명이라고 합니다!”

부기관장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 * *

본관 이 층의 방어선을 지휘하던 사령무사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대체…?!”

바닥에는 이미 쓰러진 수하들이 복도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방어선을 지휘하던 자신과 지원을 온 사령무사 두 명뿐.

사실상, 남은 그들을 제외하면.

기관 본영 내 방어선은 와해되어 버린 것과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다.

“당신이 어째서 여기에?!”

그들의 시신 위에서 한 '노인'이 나직한 숨소리와 함께 호흡을 고르고 있었다.

일견, 평범해 보이는 인상 속에 현기(玄機)가 숨어 있는 노인.

이 낙양검가에서도, 대체 어떤 노인이 있어, 기관의 사령무사 둘을 동시에 상대하며 무사들을 전부 도살하다시피 할 수 있겠는가.

사령무사 하나가 그의 이름을 비명처럼 외쳤다.

“검존(劍尊)! ”

검존.

현역에서 은퇴한 뒤.

검가 무공학관의 관장으로 지내며, 유유자적 여생을 즐기고 있다고 알려진 노인.

그리고.

낙양검가 최고운영회의의 의장이기도 한 그가 그곳에 있었다.

"후우...."

노인은 한숨처럼 한차례 길게 호흡을 고르고 입을 열었다.

“이 노부의 업(業)은 노부가 직접 거두어야 할 것이 아닌가?”

사령무사들은 노인의 말을, 그 한 마디 한 마디에 깃든 짙은 회한(悔恨)을 이해할 수 없었다.

“업이라니?! 검존과 우리 기관이 무슨 관계가 있다고…?!”

“있지. 있다네.”

최고운영 회의의 의장으로서 .

가주가 부재중인 가문을 제대로 이끌어 가지 못한 자로서.

“아주 많은 관계가 있지.”

“늙은이가 대체 무슨 헛소리 중인지는 모르겠지만!”

살아남은 세 명의 사령무사들이 일제히 검을 틀어쥐고 검존을 겨누었다.

“오늘 살아서 돌아갈 생각은 버려라!”

세 고수가, 늙고 지친 단 한 명의 노인을 노리는 상황에서도.

오히려, 세 명의 고수가 역으로 압박을 받는 것같이 느껴지는 것은.

착각만이 아니리라.

“겨우, 세 자루의 검으로. 이 검존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은가?”

검존이라는 이름의 무게가 가져다주는 막대한 무게에.

사령무사들이 발작처럼 외쳤다.

“이미, 체력을 모두 소진한 것을 알고있다!”

“방패로 삼았던 우리 수하들도 전부 쓰러졌으니, 이제 그 맨몸으로 우리 세 명을 상대해야 할 것이야!”

그러면서도 그들은 눈짓의 교환을 통해 두 명이 슬쩍 발걸음을 옮겨 검존을 포위하기 위해 움직였다.

[노인이라고 절대 얕보아선 안 되오]

[철저하게 차륜전으로, 상대의 체력과 내공을 완전히 소진하게 만들어야 할 것이오]

“그렇군.”

검존이 자신의 얼굴에 깊이 난 주름을 따라 흐르는 땀을 닦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이 늙은이가 혼자 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인 것 같습니다.”

갑자기, 영문을 알 수 없는 검존의 존댓말.

사령무사들이 채 의문을 표하기도 전에,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것참.”

그것은 어딘가 오만하게까지 느껴지는 소년의 목소리였다.

“혼자서 자신의 업을 거두어 보겠다고, 고집을 피울 때는 언제고….”

사령무사들의 검끝이 일제히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했다.

“누구냐?!”

“정체를 드러내라!”

검존은 그런 그들을 무시하고, 흘흘하고 이 빠진 소리로 웃어 보였다.

“제가 언제 혼자서 다 하겠다고 했습니까? 힘이 닿는 데까지 해 보겠다고 했었지요.”

“허어? 이젠 내 기억력을 의심하는 것이오?”

복도에 들어찬 시신들이.

기관의 타락한 자들이 벌이는 마지막 발악이 마치 아무것도 아닌양.

“기억력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다소 의사소통에 오해가 있을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 오랜 시간 동안 검을 놓고 정치질만 하다보니, 이제 그 말솜씨가 본가의 장로들에 비견하시는 구려.”

“과찬이십니다.”

그렇게 한가롭게 잡담을 하듯 검존과 대화를 나누는 이가, 사령무사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뭐, 어쩔 수 없군.”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소년.

낙양검가의 대공자.

연소현이 두 팔의 소매를 걷으며 말했다.

“그럼, 본 대공자가 한 팔 거들어 보겠소.”

“허허, 잘 부탁드립니다. 대공자님.”

복도의 좌측에는 검존.

복도의 우측에는 대공자.

세 명의 사령무사가 역으로 포위가 된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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