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273화 (273/350)

제23편 퇴물(退物)

몇달전.

겨울이 끝나 가고 봄이 찾아오던 무렵.

연소현의 앞에 탈명귀검이 섰다.

“문지기. 뭐냐?”

문지기라는 명칭에 탈명귀검의 사나운 인상이 한층 더 사납게 일그러졌다.

“그 뭣이냐….”

하지만 욱했던 것과는 달리, 탈명귀검의 말투는 공손했다.

이상한 일이지만.

다른 이가 대공자처럼 그를 대했다면, 문답 무용으로 검부터 뽑아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기이한 소년, 대공자 연소현에게는 그럴 수 없었다.

“…그때 대공자님께서 제게 해주셨던 말이 무슨 뜻입니까?”

"무슨 말?”

단문으로 되묻는 연소현의 말에 탈명귀검이 어물거렸다.

“그, 있지 않습니까. 저번에. 저보고 '여전히 장난감 같은 검이나 차고 다닌다'라고 하셨을 때 말입니다.”

“아, 그때?”

몇 마디 듣는 것만으로, 기억을 떠올리는 연소현이었다.

기억력이라면, 천하의 누구도 따를 수 없는 것이 그였으니.

연소현은 지나가듯, 스치듯 던졌던 말이라도, 대화라도.

잊어버리는 것이 이상한 인물이었다.

“그 말이, 왜?”

탈명귀검이 자신의 가짜 검을 만지작거리면서 말했다.

“'검이 녹슬어서, 뽑고 싶어도 뽑지 못할 때가 온다' 어쩌고 하셨던 그 말씀의 뜻이 뭡니까?”

“정확히는, '그대의 검이 낡아서, 무엇을 위해서도 뽑을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때가 오게 될 것이야.'라고 했지.”

연소현이 그의 부정확한 기억을 되잡아 주며 혀를 찼다.

“중요한 말을 들은 것 같으면, 좀 정확하게 기억을 해 두든가. 아니면 어디 좀 써 두든가 해라.”

평소처럼 마치, 수습무사를 혼내는 듯한 연소현의 말투.

“그게 아니라! 계속 머릿속으로 생각을 하다 보니까. 막상, 말로 다시 하려니 말이 꼬여서…!”

탈명귀검은 뭔가 항변을 해 보려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언제나처럼, 또 대공자에게 말려들고 있었다.

어디 가서, 언변이 부족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는 탈명귀검이었건만.

대공자를 상대하면 항상 똑같았다.

뭔가, 억울해졌다.

“'그때'라는 것이 대체 뭡니까?”

탈명귀검이 말을 보태어 질문을 보강했다.

“대공자의 말씀이 단순하게. 제 실력이 줄어서 검을 뽑아도, 뭘 하지 못할 때가 온다는 말씀이신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그의 질문에 앞서서 정원을 거닐 던 연소현의 발걸음이 멈췄다.

"......."

뒤를 따르던 탈명귀검의 발걸음도 함께 멈췄다.

“…그래, 그렇지.”

연소현이 뒷짐을 진 채.

시커먼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이대로 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 검가는 멸문을 하게 될 것이야.”

툭 던진, 연소현의 말에 탈명귀검은 숨이 턱 하고 막혔다.

“…며, 멸문이라요?”

“아버지의 부재 이후, 본가가 얼마나 썩어 빠졌는지는 그대도 알지않나?”

탈명귀검은 현직에서 물러났을뿐.

본가의 분위기가 바뀌고 있는 것까지 모를 정도로 무신경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얼마 후에 본가가 멸문한다는 말씀은 너무 극단적-.”

“사상누각(沙上樓閣)이라더니, 지금의 본가가 딱 그 꼴이야.”

연소현이 그의 말을 끊었고, 제 할 말을 이었다.

“아버지의 부재 이후, 본가가 얼마나 더 부유해졌는지 또한 알고있나?”

“…예."

숫자 놀음에는 약해도.

평생을 낙양검가에 몸담아 온 만큼, 얼마나 낙양검가가 비대해지고 있는지.

탈명귀검도 체감은 하고 있었다.

“모래톱 위의 누각이 날이 갈수록 거대해지니, 가주라는 기초가 부재한 지금의 검가가 버틸 수가 있을 리가 없지.”

"......."

연소현이 생각에 빠진 탈명귀검에게 말했다.

“본가가 멸문하게 되면, 그때가 되면. 그대가 검을 바칠 대상도. 검을 뽑을 이유도 전부 사라지게 될 것이야.”

* * *

그때, 사실.

탈명귀검은 연소현의 말을 반신반의(半信半疑)했었다.

하지만, 이제.

연소현이 했던 말의 근거가.

낙양검가라는 초거대 가문이 무너지려 한다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전조(前兆)가.

그의 눈앞에 명명백백하게 드러나 있었다.

“심지어, 가장 중요한 단 하나의 임무였던. 가주님의 보호에도 실패한 놈들이….”

최고운영회의의 눈과 귀가 되어, 낙양검가의 구석구석까지 살펴야 할 기관이.

지금 이 순간, 완전히 타락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너희는 오늘 여기서 모두 죽는다.”

선언(宣言).

탈명귀검이 이를 가는 섬뜩한 소리가, 마치 내공이 실린 것처럼 모두에게 선명하게 들렸다.

그 선언에 대한 대답은 어떻게 할 것인가.

“아무리 고수들로 이루어진 특임대라 할지라도, 놈들은 이미 한물간 퇴물(退物)들에 지나지 않는다!”

기관의 사령무사가 발악처럼 외치며, 수하들에게 손을 내저었다.

“모두 쳐라!”

하지만, 그의 명을 받은 기관의 무사들이 움직이기도 전에.

“어딜 빠지려고.”

탈명귀검의 신형은 이미, 그의 눈앞까지 들이닥쳐 있었다.

"큭..!"

사령무사는 이를 악물었다.

'제아무리 탈명귀검이라 한들. 이미 현역에서 물러난 지 오래된 퇴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은 현역의 고수였다.

물러나는 것처럼 보이던, 사령무사의 뒷발이 포석을 디뎠다.

그 뒷발은 마치, 거대한 포신을 지탱하는 축이라도 된 것처럼 그의 몸을 단단히 떠받쳤다.

그리고, 그 뒷발에서부터 시작된 힘이 단단한 하체를 타고 올라와 단전을 지나쳐 허리를 휘감고.

막대한 경력(勁力)이 되어 팔의 경맥을 타고 검에 실렸다.

검심검명(劍心劍鳴).

속검세(速劍勢).

오의(奧義), 흉참요란(凶慘擾亂).

과거, 환검(幻劍) 의 극의라 불리는 화산의 매화검법(梅花劍法)을 낙양검가가 개량하여 만들어 낸 검법.

그 오의가 탈명귀검이 짓쳐 드는것을 막아서고 있었다.

사령무사의 검끝에서 무수히 탄생하는 검광(劍光)에는 가공할 살상력이 담겨 있었고.

그 검광은 순식간에 수십, 수백 개가 어우러져, 검광으로 만들어진 벽(壁)이 되었다.

“흡!”

그리고, 그렇게 검광으로 벽을 만들어 낸 사령무사는 그 뒤에서.

마치 들숨에서 날숨으로 이어지듯 자연스럽게 다음 검법으로 나아갔다.

검가비검(劍家秘劍).

검가육십일검법(劍家六十一劍法).

'일천광푸-.'

다음 검을 뻗어 내려던, 사령무사의 눈이 찢어질 듯이 커졌다.

'이런, 미친?!’

탈명귀검의 신형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다섯 자루의 검으로 급소만을 보호한 채.

사령무사가 자아낸 검벽에 들이박고, 그대로 뚫고 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

아무래 급소는 방어했다지만.

수십의 인간을 산 채로 갈아 버릴 위력의 검벽을 뚫고 들어오다니,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 증거로.

먼저, 검벽 안으로 들어온 탈명귀검의 머리통은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이어서 밀고 들어오는 그의 몸도 검광에 난자(亂刺)당하고 있었다.

“크흐.”

사령무사는 처음엔 자신이 잘못들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크흐흐흣

그것은 웃음소리였고.

분명, 피투성이가 되며 검벽을 통과하고 있는 탈명귀검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살기로 번들거리는 그의 눈알은, 검광 속에서도 정확히 사령무사를 주시하고 있었다.

“......!"

전신에 소름이 돋은 사령무사였지만.

그럼에도 그 또한 벽을 넘어 경지에 이른 자.

그 손에 든 검이 멈추는 일은 없었다.

일천광풍뢰(一千狂風雷).

우르릉-.

비산하는 유리 조각이 빛을 반사하듯 번쩍이던 검광이, 이제는 뇌성(雷聲)을 동원한 전광(電光)이 되었다.

“으오오오!”

단전을 통해 구강을 통과하여 터져 나오는 기합.

사령무사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끔찍한 위력을 담은 번개가 한 줄기 한 줄기 늘어나며, 탈명귀검의 전신을 가르고 태워 버리는 듯 했다.

하지만.

“고작, 이것뿐이냐.”

어느새, 탈명귀검의 급소를 보호하던 검들이 번개를 한 줄기 한 줄기, 끊어 버리기 시작했다.

“으오오오오오!”

사령무사는 혼신의 힘을 다해 검격을 쏟아 냈지만.

“이게, 너의 전부냐?”

탈명귀검의 오른손에 쥐어진, 검.

색(色)이 중검의 묘를 담아 번개들을 터트리고.

탈명귀검의 왼손에 쥐어진, 검.

수(受)가 속검의 묘를 담아 번개들을 쪼개 버렸다.

“으아아아아아…!”

이제는 사령무사도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 기합인지 비명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극한까지 팽창된 혈도가 찢어지고, 손끝은 죽은피가 모여 시커멓게 죽어 갈 정도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지만.

상(想), 행(行), 식(識).

탈명귀검의 세 자루의 검은 그런 그의 발악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흐흐흐, 하하하하!”

탈명귀검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광소와 함께.

오히려 사령무사의 검법을 탐욕스럽게 잡아먹으며, 역으로 타고 오르고 있었다.

'이, 이것이, 탈명귀검의…?!'

수라오음극(修羅五陰極).

낙양검가에서도 유일하게, 탈명귀검만이 다룰 수 있다고 알려진 극한(極限)의 이기어검.

한 줄기 뇌광이 탈명귀검의 뺨을 그었지만, 탈명귀검의 검은 사령무사의 발목을 잘랐고.

한 줄기 뇌광이 탈명귀검의 등을 찢었지만, 탈명귀검의 검은 사령무사의 왼손을 갈랐으며.

한 줄기 뇌광이 탈명귀검의 옆구리를 찔렀지만.

"…큭!,,

탈명귀검의 세 자루 검은 이미 사령무사의 배 속을 전부 갈기갈기 찢어발긴 뒤였다.

“쿠, 쿨럭…!”

사령무사가 입에서 검게 죽은 피 한 움큼을 토했다.

배 속이 전부 찢어지고, 내장이 다 흘렀는데, 어찌 아직 토할 피가 남았는가.

사령무사가 한탄하듯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원통하구나…!’

평생을 가면을 쓰고 얼굴없는 호위무사로 음지(陰地)에서 살아왔건만.

어찌, 이름 한 번 떨쳐보지 못하고 이렇게 끝나는가.

“우리가 한물간 퇴물이라고 했나, 애송이?”

탈명귀검이 히죽하며 귀기어린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하지만, 상대에게선 대답이 없었다.

"......."

내장이 모두 갈린 사령무사는 선 채로 이미 숨이 끊어졌던 것이다.

서겅.

허공을 날아 사령무사의 목을 베어 낸 탈명귀검의 검이 돌아와 검집에 들어갔다.

탈명귀검은 자신의 피와 상대의 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온다!”

팔이 하나만 남아 은퇴해야 했던, 한 특임대원이 발검을 준비하는 행동은 너무도 뻔해 보였다.

“막아라!”

타락한 기관의 무사들이 뭉쳐 내력을 끌어 올리고, 중방패를 한데 모았다.

“흡!”

짧고 건조한 기합.

동시에.

온몸을 뒤틀어 자아낸, 폭발적인 발검술이.

단 한 수에 중방패와 중갑에 보호되는 몸통들을 모두 수평으로 갈랐다.

일격필살의 발검술.

그것이, 손과 함께 평생을 같이한 쌍검술을 잃었던 무사가 택한 길이었다.

“끄아악!”

다른 한쪽에선 다리를 잃었던 무사가 있었다.

그는 제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서, 거검을 휘둘러.

무자비하게 기관의 타락한 무사들을 썰어 대고 있었다.

"커흑!"

또 다른 한쪽에선 양쪽 눈을 모두 잃은 무사가 있었다.

그는 상실한 시력 대신 다른 감각을 폭주시켜, 한바탕 피의 춤사위를 벌이고 있었다.

"......."

그들은 전성기 때처럼.

부상이 없었을 때처럼, 아득한 경지를 보여 주고 있지는 못했다.

기관의 타락한 무사들이 쓰러져 갈수록.

특임대원들이 입어가는 상처도 늘어만 갔다.

“그래. 어쩌면, 우리는 퇴물들까지는 아니더라도, 퇴물이 되어 가는 처지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래도 말이다.”

탈명귀검과 그의 동료들.

과거 일세를 풍미했던 고수들의 인생에는 굴곡이 가득했고.

검법은 기형(畸形)이 되었지만.

그들이 든 검은 그들의 마음처럼, 곧고 또 곧기만 해서.

일말의 휘어짐도 없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네놈들을 전부 쓸어버릴 정도로는 충분하다!”

탈명귀검과 그의 검들이 일제히 포효하는 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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