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272화 (272/350)

제22편 무사(武士)들의 분노

낙양검가.

기관 본영(本營).

쿠르릉-.

멀리 들려오는 아련한 포성은 지금 순간에도 이어지고 있었다.

'...낙양 한복판에서 포격이라니.'

기관의 지휘무사는 슬쩍 낙양 시내 방면을 바라보았다.

'대공자님은 괜찮으시려나….'

그는 다름 아닌, 연소현에게 기관의 타락에 대한 보고서를 보낸 기관의 지휘무사, 명(明)이었다.

'하긴.'

그는 피식하고 바람이 새는 듯한 소리로 웃었다.

'내가 지금 대공자님을 걱정할 때가 아니지.'

캉!

그는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적의 검을 자신의 중갑(重鉀)을 이용해 튕겨 냈다.

그리고.

검심검명(劍心劍鳴)

기관식(機關式) 변형(變形)

반검세(返劍勢).

상대의 공격에서 얻은 충격을 그대로 이용해, 몸을 한 바퀴 돌려 검을 내뻗었다.

누가 보아도, 감탄을 했을 법한 이상적인 반격검.

하지만

캉!

그가 했던 것과 거의 똑같은 모습으로 상대는 지휘무사의 검을 중갑의 어깨 부위로 튕겨 냈다.

똑같은 수법에.

똑같은 모습일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같은 기관의 형제(兄弟)에게 검을 겨누느냐! 너희는 맹세를 잊어 버린 것이더냐?!”

그가 기관의 가면이자 면갑(面甲) 아래서 목소리를 높였다.

“너희는 지금 모든 것을 바쳐 지켜야 할 최고운영회의를 배신하고, 본가를 배신하고 있단 말이다!”

상대 또한 그와 마찬가지로 기관의 무사였기 때문이었다.

"......."

"......."

나직이 호흡을 고르는 소리만이 들려올 뿐.

상대들로부터 대답은 없었다.

그 또한 지휘무사 명이 너무나 익숙한 모습이었다.

그것이 기관의 교전 수칙이었으니.

"적들의 숫자가 너무 많습니다!”

지휘무사 명에게 동조하는 소수의 인원들이 그를 중심으로 기관식 원형진(圓形陳)을 구성했다.

"......."

그리고 그런 그들을, 적들이 더 큰 원형진으로 포위했다.

“이런, 미친놈들...!”

중갑의 어깨와 중갑의 어깨가 맞닿고, 자신의 등을 형제의 등이 보호한다.

평소였다면.

한없이 든든하고, 가슴이 벅차오르는 순간이었겠지만.

그들이 대치하고 있는 이들 또한 그들의 형제였으니.

“출입구가 바로 코앞인데….”

“탈출하긴 틀린 것 같습니다.”

적들은 이미 기관 본영의 출입구를 완전히 봉쇄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형제들이여!”

지휘무사 명을 따르는 무사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외쳤다.

“잘못된 명령에는 과감히 항명(抗命)할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용기다! 형제들 또한 알고 있지 않느냐?!”

하지만 여전히 그에게 검을 겨누는 기관의 무사들은 묵묵부답이었다.

“…놈들은 들을 생각도 없어. 저 놈들은 이미 글러 먹은 것들이다.”

지휘무사 명은 사방에서 늘어나 기만하는 적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고개를 저었다.

“상부의 명령이기 때문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타락한 상부에 줄을 선 것이야.”

“그런...?!”

그것은 이미, 지휘무사 명을 따르는 소수의 기관무사들도 느끼고 있는 바였지만.

쉽사리 인정하기엔, 너무도 힘든 사실이었다.

“…중립을 지킨다며, 자신의 무사들을 후퇴시킨 지휘무사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내전이라는 혼란스러운 상황에.

기관의 수많은 이들이 개입하는 것보다, 당장 한 발 빼는 것을 택했다.

“제길. 그들만 우리를 도와주었어도-!”

"어이쿠.”

과장된 목소리를 내며 모습을 드러낸 상대에게 지휘무사 명과 그를 따르는 기관무사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이쪽은 아직 처리가 다 안 됐구먼.”

모습을 드러낸 것은, 명보다도 훨씬 상급자이자 선배인 기관의 사령(司令)무사 중 일인이었다.

“죄송합니다. 적들의 반항이 너무 거세어….”

사령무사가 고개를 내저었다.

“괜찮아, 괜찮아. 너무 서두를 필요도 없다.”

느긋한 어조.

“어차피 거의 다 끝나 가니까.”

상대는 이미 자신들의 승리를 확신하는 듯했다.

“…대체, 형제들을 얼마나 죽인 것이오?”

지휘무사 명의 시선은 그가 들고 있는 검을 향하고 있었다.

사령무사의 검에는 시뻘건 선혈이 지금도 뚝뚝 흐르고 있었으니.

“형제들이라니?”

그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투로 능청을 떨었다.

“대의(大義)도 모르고, 무엇이 진정 이 기관을 위한 일인지도 모르는 멍청한 놈들은, 내 형제였던 적이 없다.”

“대의?!”

명의 입에서뿐만 아니라, 그를 따르는 무사들의 입에서도 부득하고 이를 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기관을 사유화하여 권력 집단으로 만드는 것이, 대체 무슨 대의란 말인가?!”

“멍청한 놈이 여기 또 있었군.”

한 기관무사의 외침에, 사령무사는 불쌍한 것을 보는 듯한 태도로 혀를 찼다.

“'진정한 무사는 가진 바 자신의 힘을 다룰 수 있어야 한다'라는 말을 모르나?”

사령무사가 자신의 검을 내저어 바닥에 피를 뿌렸다.

“우리 기관은. 그 막강한 힘이 있으면서도, 단 한 번도 제대로 다룬 적이 없다는 말이다.”

“그게 무슨...?!”

무사들의 무공에 대한 검가의 금언(金言)을.

사적인 권력 추구에 대입하여 왜곡하는 사령무사의 말에, 무사들의 말문이 막혔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렇게 비열 한 기습을 할 필요가 있었소?”

“비열한 기습?”

지휘무사 명의 말에 사령무사가 어깨를 으쓱였다.

“최고운영회의에 도움을 요청하고 비열한 기습을 먼저 준비한 쪽이 누구였더라?”

"......!"

명의 낯빛이 굳었다.

가면 아래 감춰졌기에, 그의 낯빛을 상대가 그대로 읽지는 못했지만.

“그래. 네가 먼저였지.”

기관에서 평생을 몸담아 온 사령무사는 마치 명의 가면을 꿰뚫어 보듯이 조소했다.

“그리고 멍청하기로는 네놈의 형 또한 마찬가지였고.”

그가 킬킬거리며 도발을 했지만, 명은 넘어가지 않았다.

겨우, 도발에 넘어갈 정도로 그의 수양은 얕지 않았다.

“믿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는 이들에게만 전했던 작전인데, 새어 나가다니….”

명의 말대로.

그는 대공자 연소현과 최고운영회의를 돕기 위해,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을 신중하게 모으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어떻게 적들에게까지 들어간 모양이었다.

“기관은 내 생각 이상으로 썩어 빠졌던 모양이군. 그런데 한 가지 물어보겠소.”

명은 혀를 차며 물었다.

“우리를 전부 진압한다고 치고. 대체,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할 생각이오?”

그는 그렇게 상대의 말을 유도하며, 수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자신이 맡은 방위를 철저히 살펴라. 언제든 적들은 틈을 발견하면 기습적으로 밀고 들어올 것이야]

정예 중의 정예로 구성된 기관의 중갑 무사들이 구성한 원형진은, 같은 기관의 무사들이 무너뜨리기에도 부담스러운 수준이었다.

만일 부담스럽지 않았다면 적 또한 굳이, 명을 도발하는 행동 따위는 진즉에 집어치우고 밀어닥쳤을 것이다.

[나는 시간을 최대한 끌 것이다. 만약 전투가 시작되면, 너희 또한 최대한 버텨라. 반드시 구원은 온다…!]

“어떻게 수습할 생각이냐고?”

사령무사가 웃었다.

“그야, 쉽지.”

“쉽다고?”

“이 일이 끝나면, 최고운영회의에는 이렇게 보고가 올라갈 것이야.”

그가 손을 들어 지휘무사 명과 그를 따르는 기관의 무사들을 가리켰다.

“우리는 지휘무사 명과 그의 형이었던 전임 기관장의 고귀한 뜻을 받들어, 기관의 내부의 타락한 이들과 맞서 싸웠다고. 그리고 승리했다고.”

“......!"

“하지만 지휘무사 명은, 고결한 전투 속에 불행히도 전사했다고 말이지!”

그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웃었다.

"오늘 여기서 죽을 너희들이, 바로 기관의 타락자들로 남게 되는 것이고.”

사령무사는 들었던 손가락을 자신들에게 향했다.

“우리가 바로, 너희 타락자들과 맞서 싸워 기관을 지킨 영웅들이 되는 것이다!”

기관이라는 조직의 폐쇄적인 특징을 이용해, 타락 세력과 개혁 세력을 바꿔치기하겠다는 말이었다.

“그런 구멍투성이의 급조된 계획이 제대로 통할 것 같은가?!”

명이 악을 쓰듯 외쳤다.

“나는 이미 명단을 제출했다! 아무리 너희가 은폐하고 왜곡해도, 결국에 진실을 파헤치는 자들이 나타날 것이다!”

“거기까지 네놈이 걱정해 줄 필요는 없고....“

그것은, 이공자가 대공자의 세력을 전부 박살 내고.

그리하여 대공자를 중심으로 뭉치고 있는 낙양검가 내의 개혁 세력이 무너지면.

구멍투성이든, 급조되었든.

계획은 통하기 마련이었으니.

“이쯤 되면.”

피식 웃은 기관의 사령무사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리 시간을 끌어도, 지원군따윈 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겠지?”

"......!"

그 말에.

명을 둘러싼 기관무사들의 낯빛이 거무죽죽해졌다.

“이제 끝내도록 하지.”

명이 시간을 끌었던 만큼, 기관의 사령무사도 마찬가지로 시간을 벌었다.

“사령무사님. 명하신 대로, 병력을 최대한 모아 왔습니다.”

기관 본영의 앞마당에는 이제 압도적인 수의 적이 가득했다.

“좋아. 모두 죽여라.”

기관의 사령무사가 자신의 검을 들어 올리자, 명과 수하들을 둘러싸고 있던 기관의 무사들이 일제히 포위망을 좁혀 오기 시작했다.

“참, 어이가 없군.”

사령무사가 킬킬거리며 웃었다.

“이미 눈과 귀가 막히고, 손발이 끊어진 최고운영회의가 무슨 병력을 어떻게 보내겠다는 건지.”

“어떻게 보내기는.”

그 대답은 그의 뒤에서 들려왔다.

“이렇게 보내는 거지.”

"……?!"

사령무사가 급히 고개를 돌리자, 기관 본영 정문 위에 올라선 인영 하나의 모습이 보였다.

“누구냐?!”

“…너무 오래 쉬면, 이게 문제라니까.”

그 인물이 한숨을 쉬며, 앞마당을 밝히고 있는 화톳불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놈들이고, 저놈들이고, 얼굴도 제대로 못 알아본단 말이지.”

짧게 자른 머리.

오십 대 정도로 보이는, 섬뜩할 정도로 사나운 인상의 중년인.

그는 제복으로 탄탄한 몸을 감싸고 있었다.

그 특징적인 제복의 모습을 기관의 사령무사가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원로원 직속 특임대?”

특임대 제복을 입은 중년인이 한숨을 쉬었다.

“역시, 알아보는 건 내가 아니라 제복인가.”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양 옆구리와 등에서 검들이 뽑혀 나왔다.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

검명을 흘리며, 허공을 자유로이 노니는 다섯 자루의 검을 보고도.

“이기어검(以氣馭劍)?!”

그의 정체를 알아채지 못하는 이는, 검가에 없었다.

“탈명 귀검(奪命鬼劍)이다…!”

“검가의 가장 흉포한 검…!”

포위진을 구성하던 기관의 무사들에게서 기함하는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저자가 혈신악귀라 불린 그 탈명귀검이라고?!”

“강남의 악몽…!”

“분명, 죽었다고 들었는데?!”

전투 작전 중엔 침묵을 철저하게 지키는 기관의 무사들이, 그렇게 외칠 수밖에 없을 정도로.

탈명귀검이라는 이름은, 검가 내에서 전설과도 같았다.

“그래. 이제야, 알아보는군.”

만족한 듯한 미소를 지은 탈명귀검이 가볍게 발을 놀려 앞마당으로 내려왔다.

“…탈명귀검 선배셨구려.”

기관의 사령무사는 검을 세우며, 탈명귀검에게 물었다.

“그런데, 원로원 직속 특임대가 기관에는 무슨 볼일이시오? 원로원은 검가법전상, 본가의 일에 개입이 불가능한-.”

“몰라, 그런 어려운 거. 내가 알게 뭐냐?”

탈명귀검이 사령무사의 말을 끊었다.

“검가의 무사가, 까라면 까는 거고….”

말을 잇는 그의 얼굴에 살기와 광기 가득한 미소가 걸렸다.

“죽이라면 죽이는 거지.”

실로, 패도(覇道)적인 기세.

포위망을 구성하고 있던, 그 많은 기관의 무사들이 일제히 움찔하고 몸을 떨 정도였다.

“…허 참. 오검광인(五劍狂人)이라더니. 참으로 명성에 어울리는 기세구려.”

하지만 사령무사는 그 기세에도 물러서지 않았다.

“선배가 한때 이름을 사해(四海)에 떨쳤더라도, 혈혈단신(孑孑單身)으로 기관의 본영에서 무엇을 할수 있단 말이오?”

그 말은 사실이었다.

당장에 사령무사 본인부터가, 벽을 넘은 고수였고.

검가의 현역 최정예 집단이라 해도 부끄러움이 없는 기관의 본영에는, 그런 고수들이 많았다.

“혈혈단신?”

탈명귀검이 사령무사에게 조소를 보냈다.

“네놈의 눈에는 내가 혼자로 보이나?”

그의 말과 동시에, 기관 본영의 담 위로 인영들이 속속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나는 말이다.”

그들 모두가 탈명귀검과 같은 제복을 입고 있었고.

“네놈들 같은 쓰레기들이 세상에서 가장 싫다.”

그들 모두가 탈명귀검과 마찬가지로, 분노에 이글거리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우리가 밖에서, 눈알에 손가락에, 심지어 손발까지 잃어 가면서….”

누군가는 양 눈을 잃었고.

누군가는 오른손이 없었으며.

누군가는 왼발의 발목이 비어 있었다.

“자신을 바쳐 적들과 싸워 검가의 이름을 드높이는 사이에.”

그들 모두가 탈명귀검과 마찬가지로, 검가를 위해 자신을 바쳤던 이들이었다.

“안에서는 네놈들 같은 쓰레기들이 그 이름을 자기 것처럼 여기고, 휘두르려 들지.”

원로원 직속 특임대.

모든 것을 바쳐, 검가를 위해 헌신했고, 또 마지막까지 검가를 위해 쓰이길 원한 무사들의 집단.

“심지어, 가장 중요한 단 하나의 임무였던 가주님의 보호에도 실패한 놈들이….”

그들의 분노가 기관에 도래했다.

“너희는 오늘 여기서 모두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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