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편 보이지 않는 손(手)
“…아무리 높이가 수십 장에 이르는 거목(巨木)이라 한들. 그 뿌리가 썩으면 다 소용이 없다더니.”
최고위원 중 하나가 탄식했다.
“지금의 본가가 딱 그 모양이구나…!”
최고운영회의라는 이름을 가진, 이 낙양검가 최고 의결 기구의 원래 명칭은 '비상대책회의'였다.
그리고 그 비상대책회의는 본디, 비상 상황에서 적법한 후계자에게 권력을 넘겨주기까지의 공백을 감당하기 위한 임시 기구에 불과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우리 선배들의 업보(業報)이자 원죄(原罪)요.”
신입 최고위원들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
비상대책회의를 구성하고 있던 이들은, 낙양검가라는 천하제일 가문을 손에 넣고 싶어 했고.
그 결과, 그들은 평소 가주의 당부도 무시한 채.
적법한 후계자인 연소현을 협박하고 위협하여, 그 권력을 찬탈하였었다.
“…우리, 최고위원들이 높은 곳에서도 그토록 세세하게 본가를 살피려 노력한다 했건만.”
“얼굴도 정체도 숨겨야 하는 우리의 눈과 귀가 나서서 우리를 기만하게 되는 지경까지 오다니.”
최고위원 중 하나가 착잡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기구의 원래 역할은 어디까지나, 권력 이양을 위한 임시 기구에 불과하지. 그런 임시 기구를 무리해서 최고운영회의라는 체제로 전환했었으니.”
신입 여성 최고위원이 자신의 머리를 감싸 쥐었다.
“…처음부터.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었군요.”
선배 최고위원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예전부터 수많은 시간을, 이 체제를 보완하는데 공을 들여 왔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는 실패했다는 것이 명백히 드러났구려.”
이 모든 짓거리를 벌였던, 그들의 선배이자 원흉들은 이미 자리에서 사라졌건만.
그들이 남긴 업보는 그대로 남아서, 낙양검가라는 거목의 뿌리를 썩게하고 있었다.
“의장님.”
과거의 인물 중 유일하게 현역으로 남아 있는 의장에게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대체, 대공자님은 어떻게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까?”
의장이 답했다.
“그것은 하나의 제보에서부터 시작되었다네.”
“제보 말입니까?”
의장은 대답 대신 줄을 당겨, 밖의 인물을 불렀다.
묵직한 철문이 열리고,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가 비동 안으로 들어왔다.
“처음 뵙겠습니다, 본가의 최고 위원들이시여.”
이윽고 드러난 그녀의 모습을 확인한 최고위원들이 아연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대는?”
“분명 그대는, 얼마 전까지 기관에 근무했던 이가 아니던가. 현장 지휘무사 출신으로 이름이, 분명-.”
비동의 유등 불 앞에 서서, 얼굴을 드러낸 중년 여인이 침착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청수입니다.”
그녀는 바로, 기관을 그만두고 연소현에게 검을 바쳤던 그 청수였다.
다선랑을 암살 위협에서 구하고, 한동안 모습을 감추었던 그녀가.
지금 여기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렇군, 그래. 분명 청수였지.”
“그대가 기관을 그만두고, 기관의 중갑(重鉀)을 반납했다는 소리에. 이곳에서도 아쉬워했던 이들이 적지 않았네.”
오랜 세월을 기관에 충성을 다해온 그녀를 알아보는 최고위원들이 있었다.
“그래. 그대가 대공자께 기관의 타락에 대한 제보를 올렸던 것인가?”
“아뇨.”
의외로 청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저는 기관을 그만두는 김에, 그 제보가 담긴 보고서를 대공자께 전달하기만 했을 뿐. 제보자는 지금도 기관의 내부에 있습니다.”
그 말에 최고위원들이 웅성거렸다.
“지금도 현직이라고?”
“그렇다면 그 인물이 어째서 우리에게 직접 제보를 하지 않고….”
신입 남성 최고위원이 말을 하다가 말꼬리를 흐렸다.
그는 이곳에서는 신입이지만.
낙양검가에서 평생을 몸담으며, 산전수전을 모두 겪은 인물이었다.
“…그렇군. 그 인물은 최고운영회의를 믿지 못한 것이었군.”
기관의 타락.
그 배후에 최고위원이나, 최고운영회의가 있을 것이라고, 의심하는 것은.
지극히 타당한 논리였다.
“그렇습니다.”
청수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 또한, 대공자님의 명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이 자리에 서는 것은 절대 하지 않을 짓이었지요.”
가차 없는 청수의 말.
최고위원들은 참담한 심정에 고개를 떨구었다.
"......."
"......."
그들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최고운영회의라는 체제가 가진 근본적인 문제가 있고 없고를 떠나서.
자신들은 그 오랜 기간 검가에 모든 것을 바쳐 헌신했던 이들의 믿음조차 얻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그 보고서의 사본이니, 다들 읽고 확인하시오.”
의장이 허공섭물(虛空攝物)로 각 최고위원마다 사본을 전했다.
“이런…!”
“…하아.”
보고서를 읽는 이들의 입에서 탄식과 한숨이 터져 나왔다.
대공자는-, 아니. 대공자님은.”
떨리는 손으로 보고서를 내려놓은 신입 남성 최고위원이 허탈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째서, 우리에게 진작 이 보고서를 전해 주시지 않으셨던 것인가?”
청수가 물음을 물음으로 받았다.
“지금과 같은 일이 벌어지기 전이었다면, 대공자님을 믿으셨겠습니까?”
"......."
그럴 리가.
다른 최고위원이라면 몰라도, 틀림없이 자신은 대공자가 후계자 경쟁에서 앞서기 위해 수를 쓴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도 어떻게든 우리가 내부 조사를 해서 확인하려 했을 것이고-."
청수가 말을 끊었다.
“지난 수년간 반복되었던 그 뻔한 내부 조사에, 다들 꼬리를 끊고 모습을 감추었겠지요.”
“…그랬겠군.”
애초에 누굴 믿어도 좋을지, 누구를 믿어서는 안 될지 알 수도 없는 상황에서.
무슨 내부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 질 수 있단 말인가.
“내, 앞서 말했듯.”
내공이 담긴 의장의 목소리에 실의에 빠져 있던 최고위원들이 정신을 차렸다.
“이것은 대공자께서 만들어 주신 천재일우의 기회라네.”
“확실히, 그렇습니다.”
의장만큼은 아니지만, 오랜 세월 최고위원으로 봉사했던 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 순간이라면. 어느 누가 우리에게 올라와야 할 정보를 차단하고 있는지. 드러날 수밖에 없지요.”
“기관의 변절자들을 골라낼 완벽한 기회요.”
“…하지만.”
최고위원 중 하나가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이 상황에서 누가 우리의 믿을 수 있는 귀가 되어 주고, 손이 되어 준다는 말씀입니까?”
그 말에 최고위원들이 침음했다.
“…내원총관이라면?”
“그자와 대공자 간의 첨예한 갈등은 유명하지 않소? 이 일이 대공자의 손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면, 그가 어떻게 움직일지 장담할 수 없소.”
“게다가, 지금도 강력한 그에게. 여기서 권력을 더 실어 준다는 것은….”
“그렇다고, 다른 이들을 끌어들 이면…."
이 초유의 사태 앞에서, 그들은 철저한 무력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 부분이라면. 다들 걱정하지 않아도 좋소.”
의장이었다.
“지금 밖에, 대공자님이 독자적으로 구축한 본가 내 정보망의 책임자가 와 있으니.”
"대공자님이 독자적으로 정보망을 구축했다고요…?”
“아니, 그게 무슨?!”
믿기 어려운 소식에 경악하는 이들의 반응을 뒤로하고, 의장이 청수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반갑습니다, 최고위원 여러분.”
청수가 모셔 온 인물이, 두 손을 모아 그들에게 인사했다.
“여기서 제 얼굴을 모르는 분은 없으시겠지요?”
물론이었다.
최고위원들이 결코 모를 수 없을 정도로 낙양검가의 핵심 인물 중 하나였으니.
“집사부장…!”
모습을 드러낸 것은.
낙양검가 집사부의 수장이었다.
“…집사부장께서 대공자님을 지원하시고 있었던 것이오?”
“무슨, 그런 말씀을.”
집사부장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대공자님을 지원하고 있던 것이 아니라, 나의 주군이신 대공자님께서 나를 지원해 주시던 것입니다.”
"......!"
집사부장과 연소현의 상상하지도 못했던 관계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아무튼. 정보는 걱정하지 마시지요. 제가 이 일이 끝날 때까지 근처에서 대기하며, 직접 여러분들의 눈과 귀가 되어 드릴 터이니.”
집사부장의 신경질적인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걸렸다.
“이미, 기관과 정보부처를 중심으로 정보원들을 대량으로 풀어놓았으니. 여러분은 저를 믿어도 좋을 것입니다.”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아도.
이 자리에서 집사부장의 능력을 의심하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집사부장은 이미 이전에 충분히 장로원에 입성하고도 남았을 수완가에, 심지어 태상가주 때부터 그 능력을 증명해 왔던이다.
'대체, 대공자는 어떻게 이런 인물의 충성을 받아 낸 것인가. 이들의 관계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단 말인가.'
“의장님.”
최고위원들이 혀를 내두르며 의장에게 물었다.
“…이렇게 우리의 눈과 귀가 되어 줄 이를 대공자께서 준비해 두셨으니.”
“그렇다면, 설마. 우리의 손과 검이 되어 줄 이들까지도 준비가 된 것입니까?”
의장이 즉답했다.
그렇소.”
설마, 하던 것이 사실이었다.
여기저기서 흘러나오는, 실소에 가까운 웃음소리를 배경으로, 집사 부장이 입을 열었다.
“대공자님의 요청으로, 원로원(元老院)에서 여러분들을 도울 것입니다.”
“원로원이…?!”
“낙양검가의 원로원이라면-.”
“원로원의 특임대가 나설 것이란 말이오?!”
특임대는 부득이한 사유로 은퇴한 고수들의 집단.
원로원 직속의 명령에만 복종하는 그 고수들이 나선다면.
누구보다도 믿을 수 있는 손이 되고, 누구보다도 날카로운 검이 되어 주리라.
“하지만, 원로원은 절대 본가 내부의 정치에 간섭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 아니오?”
그렇기에, 원로들이 언덕배기에 마을을 하나 만들고 농사를 짓고 가축을 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던가.
“거기엔, 단 하나의 예외 사항이 있소.”
“그렇군…!”
의장의 말에, 검가법전에 통달한 신입 남성 최고위원이 자신의 이마를 쳤다.
“원로원은 본가의 존립에 위협이 될 정도의 일이 발생하면, 원로원의 자체적인 판단에 의해 움직일 수 있다는 조항이 있소!”
그 조항을 기억해 낸 다른 최고 위원 또한 감탄했다.
“일반적으로는 당연히, 존립의 위협은 거대한 외적(外敵)의 공격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그런, 세부적인 단서 조항 따윈 없으니, 해석하기 나름이지요!”
의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가 좌중을 둘러보며, 물었다.
“지금 이 상황이, 본가의 존립에 위협이 되는 상황이라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 분이 계시오?”
있을 리가 없었다.
“허허.”
신입 남성 최고위원이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나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사문화(死文化)된 그런 예외 조항을 대체 어떻게….”
그는 자신이 질문을 던지다가, 자신이 답을 찾았다.
“설마, 이것도 대공자께서…?”
“만약. 본가에서 본가의 가법에 가장 해박한 이를 찾자면.”
집사부장이 어깨를 으쓱였다.
“당연히, 나의 주군이신 대공자님이 아니겠습니까?”
"......."
"......."
모두가 할 말을 잃었다.
황도에서 연소현이 벌이고 있는 일을 보고받았을 때만 해도, 충분히 놀랐다고 생각한 그들이었지만.
일이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준비가 되어 있자, 완전히 말문이 막혀버린 것이다.
'이것은…!’
'마치 대공자의 보이지 않는 손이 모든 곳에 존재하는 것 같구나…!’
이쯤 되면, 자신들 모두가 처음부터 연소현의 손바닥 위에서 춤추는 꼭두각시가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다들, 집중하시오!”
그런 그들의 의식을 깨운 것은 의장의 호통이었다.
“지금 대공자께서는, 우리에게 이 시간을 벌어 주기 위해서. 적들의 포격을 인내하고 계신다는 것을 잊지 마시오!”
그랬다.
퍼뜩 정신을 차린 이들이, 행동을 시작했다.
“...그, 그렇습니다!”
그럼 당장…!”
대략적인 얼개는 연소현이 준비해 주었지만.
구체적인 계획과 그 실행은 그들, 최고위원들의 손에 달렸다.
그리고 평생을 검가에 헌신해 온 그들은 최고위원이라는 이름에 아깝지 않게.
순식간에 계획을 수립하고 지시를 사방에 전달하기 시작했다.
'…대공자님.'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의장의 머릿속에.
연소현에게서 이 모든 계획을 들었던, 그날이 떠올랐다.
바로
암천존자의 얼굴을 한 대공자 연소현을 만났던 그 날 밤의 기억을.
* * *
“기관이 정녕, 이렇게까지 타락했다는 말씀입니까…?”
의장은 자신도 모르게 암천존자에게 받았던, 기관에 대한 보고서를 움켜쥐었다.
“명심하게, 의장.”
쇳물이 끓어 넘치는 목소리로, 암천존자는 말했다.
“기회는 단 한 번뿐이다. 이공자 측이 물러날 곳이 없어지면. 타락한 기관의 관리자들은 반드시 최고위원들의 눈과 귀를 가리기 위해 움직일 터이니.”
“…대공자께 명심하겠다고 전달해 주시지요. 그런데.”
의장은 그 보고서를 품에 소중히 넣으며 암천존자에게 물었다.
“이 보고서는 누가 작성한 것입니까?”
암천존자는 처연하게 미소 지었다.
“과거, 기관에 검가의 대공자와 친구였던 이가 있었지. 나이 차이가 크지만, 그들은 마음이 잘 맞았다더군.”
의장의 심중에 짚이는 것이 있었다.
“…임무 중 순직했던, 전임 기관장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는 임무 중 순직했지만, 적에 의해 죽은 것이 아니었다. 사고도 아니었지.”
"......!"
적에 의해 죽은 것이 아니고 사고도 아니라면, 아군에게 살해당했다는 뜻이었다.
“대공자도 나중에 알았지만. 그는 오래전부터, 기관 내에서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는 자들을 비밀리에 추적해 오고 있었다고 하더군.”
“…그들에게 살해당했던 것이로군요. 임무 중 사고로 위장되어서.”
그것은.
씁쓸하기 짝이 없는 진실이었다.
“그의 동생을 대공자가 얼마 전에 만났는데.”
암천존자가 한숨을 지으며,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형의 뒤를 잇듯이. 기관에 들어가 지휘무사가 되었다더군.”
전임 기관장의 동생.
그리고 지휘무사.
의장은 어렵지 않게,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유추할 수 있었다.
“…얼마 전, 내원에서 책값 소동이라 불리는 그 난리가 있고 나서. 대공자님을 최고운영회의에 소환할 당시. 분명 그의 동생이 대공자님을 모시러 갔었지요.”
의장이 탄식하듯 말했다.
“그가 전임 기관장이었던 형의 뒤를 이어, 기관의 타락을 계속 수사하고 있었군요…!”
“그렇다.”
암천존자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 보고서는 검가에 누구보다도 충성하던 한 형제의 피와 노력이 깃든 소중한 물건이다.”
으드득 하고, 이를 가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암천존자의 눈에 귀화가 피어올랐다.
“대공자가 기회를 만들면.”
그의 시선이 의장을 향했다.
“의장, 그대는 반드시 놈들을 찾아. 전부 잡아들여야 할 것이야!”
그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대기가 흔들릴 지경이었다.
다른 대답이 필요하겠는가.
의장은 그 순간.
자신과 대공자가 서로 정체를 감추어야 한다는 것도 잊고, 두 손을 모아 예를 올렸다.
“충(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