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267화 (267/350)

제17편 전운(戰雲)

죄악의 골짜기.

어둠이 골짜기에 내리깔린 가운데.

곳곳에 모닥불이 피어오르고 있었고, 그 주변으로 무장한 이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연소현의 병력이었다.

“…그러므로, 오늘과 같은 상황에서. 현장 지휘관은 눈앞의 적을 많이 해치우는 것- 전과(戰果에만 집중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이오.”

갑주를 걸친 이가 모닥불 앞에서서, 강의 겸 오늘 있었던 전투의 사후 검토를 진행 중이었다.

“전선의 상황 파악, 진형의 유지, 주요 목표와 부차적 목표까지. 지휘관은 이러한….”

놀라울 정도로 훌륭한 강의를 이어 나가는 이는 당연하게도, 전쟁 자문단의 무사장이었다.

자애원의 중간 간부들은 말할 것도 없고.

… 대단하군.”

“호오..”

심지어 후속 처리를 위해 남아있던 관병들의 중간 지휘관들까지도 넋을잃고 강의를 경청 중이었다.

“오늘의 돌파는 훌륭했다. 하지만 일차적인 돌파이후, 아군과의 좀더 긴밀한 연계가 부족했어.”

다른 한쪽에서는, 원각정 하녀단들이 노파의 이야기를 경청 중이었다.

노파.

남만의 와룡이라 불리는 곽 노인은 평생을 전쟁에서 활약했던 인물인 만큼.

그녀에게는 뼈와 살이되는 이야기가 무궁무진했다.

“…부상을 입은 전우에 대한 조치는….”

계곡, 곳곳에서 가장 말단 병사에게까지도.

그렇게 강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광경을 묵묵히 집무실에서 창을 통해 내려다보고 있는 이가 있었다.

"......."

연소현이었다.

항상 그렇듯.

그의 심연처럼 깊은 눈에는, 무슨 사유가 떠도는지 알 수가 없었다.

“대공자.”

그런 그의 뒤에서부터,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체 무슨 재주를 부렸기에, 최고운영회의가 구양 태상부인과 사법 거래를 시도하게 만든것이오?”

걸걸한 목소리의 주인은.

자신의 의족을 바닥에 두드렸다.

“그 작자들이 얼마나 엉덩이가 무거운지는 내가 잘 아는데.”

최고운영회의를 작자들이라고 부를 만한 이는 낙양검가에 거의 없었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검가건축의 총수인 그가 그 극소수의 인물 중 하나였다.

“단지. 황제를 돕는다는 명분만으로, 순순히 그대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지는 않았을 터인데?”

그는 흥미진진함을 느끼고 있었다.

검가의 최고운영회의를 직접 상대해야 할 일이 많은 총수로서는, 어떻게든 연소현의 비법을 배워 두고 싶었던 것이다.

“내원총관의 소식은?”

연소현은 대답 대신, 역으로 질문을 던졌고.

“뭐, 내원총관 본인에 대한 정보는 없지만. 내원의 분위기를 보면, 그대의 예상과 큰 차이는 없을 것이오.”

검가건축 총수는 입맛을 다시면서도, 순순히 대답했다.

“기껏, 대선상회에 대한 급습을 성공시켰더니. 가장 맛있는 부분은 그대가 쏙 빼먹었지.”

그가 말하는 가장 맛있는 부분은, 구양 태상부인을 말하는 것이리라.

“지금, 내원총관이 벽에다가 그대의 짚신 인형을 걸어 두고 대못을 박고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소.”

그가 껄껄 웃었다.

지난 십여 년간.

검가의 노괴라 불리는, 내원총관이 정치적 수싸움에서 한방먹는 일은, 전례가 없었던 일이었다.

당장에는 수세에 몰린 것처럼 보였다가도, 결국에는 그의 승리로 끝났던 것이다.

그런데, 저번 책값 사태에 이어.

이번 일까지.

그 내원총관이 대공자에게만 연속으로 두 번이나 두드려 맞은 것이다.

“내원총관, 그 늙은이는 가주님께서 쓰러지신 이후부터. 좀 이상해졌소.”

검가건축의 총수가 썩 통쾌하다는 투로 말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정신을 좀 차렸으면 좋겠는데 말이오. 그런데….”

거기까지 말하던, 그가 자신의 의족을 들어 바닥을 쿵쿵 두드렸다.

“이제, 그만 뜸을 들이고. 설명을 좀 해 주시오, 대공자!”

연소현이 피식 웃으면서, 그를 향해 돌아섰다.

“황제 폐하의 장강 수로 확장 정비 사업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있소?”

으음, 자세히는 아니지만.”

검가건축 총수가 자신의 흉터가 득한 턱을 쓰다듬었다.

“장강의 상류 사업은 이미 사천당가와 대리단가의 합의가 있었고, 하류의 사패천을 '설득'하기 위해서 구양 태상부인과 사법 거래를 하려했다는 정도?”

“호오….”

본인 입으로는, 자세히까지는 아니라고 하지만.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일을.

그는 연소현이 살짝 놀랄 정도로 정확하게 사태를 파악하고 있었다.

'...과연, 검가건축의 총수인가.'

낙양검가의 정보부처와 별개로, 그는 개인적으로도 철저한 정보망을 갖추고 있으리라.

고개를 끄덕인 연소현이 말을 이었다.

“사패천과 교섭이 이루어지면 말이오. 하류에서도 수로 확장 정비 사업이 시작되지 않겠소?”

“그렇지.”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검가건축 총수는 인내심을 가지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 사업이 완전해지는 것이니까.”

“그렇다면 하류에서 사업은 누가 진행하게 될 것 같소?”

“진행이라….”

그 어려운 질문에 검가건축 총수가 눈을 가늘게 떴다.

“사천당가와 대리단가는 절대 안되겠지.”

그가 혼잣말을 늘어놓으며 추론을 시작했다.

“호시탐탐 대양으로 통하는 항구를 탐내는 그 가문들이 자신들의 영역에 발을 디디는 것을, 사패천은 절대 용납할 수 없을 테니까.”

사천당가와 대리단가가 대양 항구를 탐내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그들은 서양 제국들과의 해외무역에서, 매해 엄청난 흑자를 기록하고 있는 낙양검가와 사패천처럼 되고싶은 것이다.

장강을 확장 정비하여, 해외의 범선이 상류까지 올라올 수 있게하길 원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그렇다면, 사패천이 직접?”

연소현의 말에 검가건축 총수가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는 터무니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사패천 놈들은 삽이나 제대로 뜰줄 알면 다행이지, 그런 초대형 토목 공사를 진행할 능력이 없잖소? 우리, 검가건축이라면 모를까. 제방하나 제대로 쌓지도 못하는 놈들이….”

거기까지 말하던 검가건축 총수의 눈이 커졌다.

그의 추론이 머릿속에서 해답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설마?”

“그렇소.”

연소현이 손가락을 들어 그를 가리켰다.

“장강 하류의 공사는, 낙양검가. 즉, 검가건축이 담당하게 될 것이오.”

“그래서…!”

연소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최고운영회의가 '그 무거운 엉덩이'를 움직여, 구양 태상 부인에게 사법 거래를 제안한 것이오.”

“초대형 규모의 토목 공사 수주를 검가가 차지하게 될 테니까!”

“그렇소.”

“그것도 우리 검가건축이!”

“그렇소.”

연소현이 슬쩍 그를 바라보았다.

“장강 하류, 즉 강남은 사패천의 영역. 사업 진행중에는 매일같이 사패천과 사사건건 마찰이 일어나겠지. 엔간한 배짱과 힘이 없다면 시작도 할수 없을거요.”

연소현은 검가건축 총수를 바라보며 입가에 도발적인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있소?”

“자신이 있냐 물은 것이오?”

검가건축의 총수가 파안대소를 터트렸다.

“천하에서 이 내가 아니라면, 감히 누가 배짱을 논할 수 있겠소?”

그가 자신의 두툼한 팔근육을 두드리며 이를 드러냈다.

“고맙구려! 대공자 덕분에. 과거, 가주님의 강남정벌에 참가하지 못했던 한을 달랠 수 있겠군!”

그가 다시 한번 껄껄 웃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 나는 돌아가서 계획 시안부터 짜 봐야겠소!”

“그러시오.”

연소현은 그렇게 검가건축 총수를 일별하고, 돌아서서 다시 창밖의 야경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말이오. 대공자.”

문고리를 잡은 검가건축 총수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어째서, 아직도 병력을 쉬게 하지 않고 있는 것이오?”

처음부터 그의 마음속에서 꺼림칙하여, 묵혀두던 질문이었다.

그는 등을 보이고 있는 연소현의 표정을 살필수 없었다.

연소현은 이번에도.

질문에 질문을 역으로 던졌다.

“구양 태상부인은, 최고운영회의의 사법 거래에 응했다고 하오?”

“본격적인 움직임은 아직이지만.”

검가건축 총수가 어깨를 으쓱였다.

“충분히 사법 거래를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전했다더군.”

“그 이야기는 제대로 된 진행은 되지않고 있다는 뜻이지.”

연소현의 목소리가 나직해졌다.

“…그리고 동시에, 그 이야기는. 아직 일이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고.”

“…그렇군.”

연소현의 말투엔 뭔가 오싹한 것이 있었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창가에 펼쳐진 밤하늘에 가득한 구름이.

유난히 어둡게 느껴지는 것은 총수의 기분 탓만이 아니리라.

“행운을 비오, 대공자.”

문을 열고 나서며 검가건축 총수는 속으로 생각했다.

'...전운(戰雲)이 아직 가시지 않았던 것인가.’

* * *

황도.

십육가문 현 가주들의 회의는 잠시 휴회(休會)에 들어갔다.

이공자가 낙양에서 받은 소식의 충격때문이었다.

“절대, 태상부인께서 사법 거래를 받아들여서는 안 되오!”

“그것은 이 전쟁에서 패배했다는 것을, 우리측이 인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요!”

이공자의 참모진들이 옥신각신 다투고 있었다.

“그렇다면, 어찌할 것인가?!”

“자네들이 직접 태상부인께, 하옥(下獄)당하시라. 그렇게 권유라도 할 것인가?!”

“그, 그것은…!”

그들이 전략을 짜내려 토의를 시작한지 한참 되었지만.

뾰족한 수 따위는 보이지도 않았고.

토의가 아니라, 소모적인 말싸움의 양상을 띠기 시작한지 오래였다.

"......."

그런 참모진의 난장을 뒤로한채.

이공자는 뒷짐을 지고서.

자신의 황금 가면 너머로, 창밖을 주시하고 있었다.

까드득.

그의 왼손을 감싼 먹빛 갑주가 불편한 소음을 자아냈지만.

평소와는 다르게, 그 소리는 참모진의 고성이 오가는 중에 그대로 묻혔다.

'연소현….'

자신의 배다른 형제.

연소현의 이름을 한 마디씩 또박또박, 씹어뱉듯이 되뇌는 그였다.

'나는 한 번도, 그놈을 얕보질 않았건만.'

연소현이 첫 공식 행보로 북망산을 방문한 그 즉시.

자신은 이곳, 황도로 향했다.

연소현이 십육가문의 전대 가주들을 모았을 때, 그는 즉시 십육가문의 현 가주들을 모았다.

상대가 황궁에서 움직임을 보이자.

그도 현 가주들을 모아, 대응을 시작했다.

한수.

또, 한 수.

상대와 번갈아 가며, 말을 옮겨 장기를 두고 있다고 생각했건만.

알고 보니.

연소현이라는 인물은 어느새 혼자서 수십 수를 두고 있었다.

'이대로, 패배를 인정할 수는 없다.’

'최후의 수단'은 있었다.

자신의 어미인 구양 태상부인은, 지금 착실히 그 수단을 위해 시간을 끌고 있으리라.

'하지만.'

아직, 이미 기울어 가는 판을 뒤집기엔 결정적인 한 수가 부족했다.

'암천존자(暗天尊者).'

결정적인 문제는 그 암천존자라는 미상의 존재였다.

연소현은 마치, 그가 최후의 수단을 동원하리라는 것을 예지라도 했던 것처럼.

암천존자라는 존재가 자신과 관련이 있음을, 이미 슬쩍 드러내 두었다.

그가 이를 부득하고 갈았을 때.

“이공자님, 계십니까?”

방의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소란이 일었다.

“자넨, 누군가?!”

“허가도 없이 들어오다니!”

“밖에 무사들은 무엇을 하고 있나?!”

대답하는 목소리는, 기괴했다.

“무사들은 피곤한지, 잠이 들어 있더군요.”

마치, 두 사람이 동시에 목소리를 내는 것만 같았다.

“그, 그러고 보니. 자네, 우리 측 강남사단의 책사가 아닌가?”

창가에서 돌아선 이공자의 시야에, 방문객의 모습이 보였다.

온몸의 피가 전부 빠져 버린 것처럼, 창백한 피부에.

혈관이란 혈관은 구불거리며 전부 푸르게 물들어있는 얼굴.

그 얼굴을 가리키며, 이공자의 참모 중 하나가 기억을 되살리며 말했다.

“분명, 자네는 강남사단의 한명휘가 아닌가?”

그 이름을 기억하는 다른 참모가 기억을 떠올렸다.

“한명휘? 그 며칠 전에 실종되었다던 책임 책사가 아닌가?”

대답은 한명휘가 아니라.

그들의 주군에게서 나왔다.

“전부 자리를 비워라.”

이공자는 분명.

그 기괴한 목소리의 중첩을 들었던 기억이 있었다.

“예? 하지만, 주군…!”

“당장.”

그의 참모진이 자리를 비우는 것 을 보며, 한명휘라 불린 인물이 킥킥거리며 웃었다.

"잘들 나가시게.”

하지만 그 웃는 모습조차도 기괴했다.

한명휘라 불린 인물은 도무지 가만히 있질 못하고, 발작을 하듯 사지가 조금씩 뒤틀렸고.

그때마다 뼈마디와 근육이 뒤틀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킥킥거리는 소리는, 웃는 것이 아니라.

마치,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들렸다.

“오랜만입니다, 검가의 이공자님.”

이공자는 그 얼굴을 알아보았다.

한명휘.

그의 참모진들이 말했던 것처럼.

그는 며칠 전 낙양 거리에서 실종되었다던, 강남사단의 책사.

한명휘였다.

과거, 내원 책값 사건 때 연소현의 움직임을 예측하여 공을 세웠던 그 한명휘.

“오랜만이군.”

하지만 이공자는 그의 이름을, '다르게' 불렀다.

“금질(金蛭)."

한명휘의 가죽을 뒤집어쓴 금질이 활짝 미소를 띠었다.

“그 암천존자라는 존재 때문에 고민 중이신가 보군요?”

한명휘의 성대(聲帶)를 통해, 금질이 말했다.

“제가 그 해답을 준비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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