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264화 (264/350)

제14편 큰 그림(Big picture)

낙양.

창가에 서서, 석양빛에 물든 낙양 거리를 내려다보던 강호가 혀를 내둘렀다.

“노마들을.., 아니.”

그는 방에 함께 있는 공량의 눈치를 보고는 급히 말을 바꾸었다.

“십육가문의 전대 가주들에게는 다시 권력을 잡을 기회를.”

강호의 비상한 기억력과 명석한 머리로도 한 번에 이해하는 것이 어려웠기에.

그는 굳이 들었던 이야기를 입 밖으로까지 꺼내며, 차근히 정리를 해 보았다.

“그리고 그 전대 가주들을 내세워, 사천당가와 대리단가가 극적인 합의에 도달하게 했고.”

공량이 입을 열어 말을 보태었다.

“잊지 말게. 사천당가나 대리단가에는 더 많은 거래가 끼어 있었지.”

강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중경 도시 개발 사업까지 엮인 그들의 갈등을 각자 해소해주는 거래들이 있었지요.”

연소현은 아미파가 이권을 토해 내게 만들어, 원수같은 두 거대 가문이 중경 도시 개발 사업과 장강 수로 확장 정비 사업을 진행시킬 수 있는 단초를 제공했고.

더해서 사천당가에는 추가적으로, 낙양 진출의 기반을 약속했었다.

“하지만, 크게 보면-.”

“기본적인 틀에서는 자네의 시각이 맞네.”

“…그리고 그 거래는 이제. 황도에 계신 황제 폐하에게까지 연결이 되는군요.”

공량이 자신의 바퀴 달린 의자에 앉은 채, 미소를 지었다.

“장강 수로 확장 정비 사업은 선대 황제 폐하의 숙원 사업이었으니 만큼.”

“그 사업이 황제 폐하의 이름 아래 진행되기 시작하면. 황제 폐하께서 그 위업을 통해, 최소한의 위신을 확보하실 수 있게 되겠지요.”

정리한다고 정리를 했지만.

간추린다고 간추려 보았지만.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의 이야기였다.

“…누가 이 계획을 제게 미리 말해 주었다면,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치부했을 겁니다.”

그렇게 중얼거리는 강호를 보며, 낄낄 하고 웃은 공량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더 충격적인 것은. 따로있지 않나?”

“…그렇습니다.”

강호는 공량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려, 연소현을 바라보았다.

“이 모든 일을 진행시키는 동안….”

강호는 마른침을 삼키고, 말을 이었다.

"대공자께서는 낙양에서 단 한 발자국도 나가신 적이 없다는 것이죠.”

석양을 등지고, 석양이 만든 그림자 속에 표정을 감추고 앉아 있는 연소현의 모습은.

강호에게 있어서.

어째서 일까.

지극히 비인간적인 무언가로 느껴졌다.

“그 부분도 놀랍긴 하지만. 자네가 충격을 받은 것은 역시 그 부분인가?”

“예…?”

공량의 말에 불현듯 정신을 차린 강호가 그를 돌아보았다.

“여기서 뭔가, 제가 눈치채지 못한 것이 더 있습니까?”

당황한 강호의 표정에 공량이 나직하게 웃더니, 자신의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모르겠는가?”

그는 들었던 손가락으로 연소현을 가리켰다.

“이 모든 일은, 황제 폐하가 교지를 보내 도움을 요청하기 전에 이루어진 일이었다네.”

"......!"

그러고 보니, 그렇다.

분명, 황제의 교지는 연소현이 칩거를 끝낸 이후에 도착했지만.

연소현이 움직인 것은 그보다 훨씬 이전에 있었던 일이 아닌가.

“…에. 어라? 에?”

그 말에

어떻게든 정리되고 있던 강호의 머릿속이 단박에 다시 전부 꼬여버렸다.

“대공자님? 이게 대체-?”

문을 정중하게 두드리는 소리가 강호의 물음을 끊었다.

“주인님. 사공자님께서 지금 복귀하셨사옵니다.”

연소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사공자 연비가 들어와 먼저 공량에게 공손하게 손을 모아 인사했다.

“공량 어르신, 처음 뵙겠습니다. 낙양검가의 사공자, 연비라고 합니다.”

“공량일세.”

호의와 신뢰를 담은 시선을 주고받은 두 사람의 인사는 짧았다.

사공자는 공량이 연소현에게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었고.

공량은 사공자가 연소현에게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큰형님.”

사공자 연비가 연소현에게 보고했다.

“누님들의 사업체는 얼추 정리가 되었습니다. 정치적 문제가 생기기 이전에는 경영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니. 처분은 그만큼 빨랐습니다.”

연소현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고, 연비는 자신의 자리를 찾아 앉았다.

“주인님."

정아의 목소리.

이어서 들어온 이는 공담웅이었다.

“일러 주신 대로, 가주들에게 모두 전했습니다.”

연소현의 아래에 들어오려 하던 그들 가문에는 충성을 증명할 기회가 주어졌다.

공담웅의 보고가 끝나자, 자신의 손자의 얼굴을 유심히 보고 있던 공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이 바뀌었구나.”

공담웅이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만졌다.

“그렇습니까…?”

“그래. 이젠 너도 그저 혈기에 못이겨 날뛰던, 천둥벌거숭이 티를 조금은 벗은 것 같구나.”

공담웅이 담담히 미소를 지었다.

“주먹으로 날뛰는 것보다. 저라는 사람이, 제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뿐입니다.”

그 말에 공량이 끌끌하며 기분 좋게 웃었다.

'십 년이 넘게 고치려고 했던 것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더니. 대공자에게 맡기니 금방이로구나.'

드디어

속만 썩이던 자신의 손자가.

후에, 공씨 가문을 물려받아야 할 후계자로서의 마음가짐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다.

“마침 잘왔다.”

공량이 한쪽의 의자를 가리켰다.

“지금, 대공자가 너희에게 큰 가르침을 줄 것이니 잘 듣도록 하여라.”

구석에 위치한 자리에 불과했지만.

공담웅은 불평 한마디없이 얼른 자리를 꿰차고 앉았다.

'예전이었으면, 복잡한 이야기라면,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빠져나갔을 녀석이….'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인 공량이 좌중으로 눈을 돌렸다.

“대공자.”

그가 그렇게 운을 떼자.

강호, 사공자, 공담웅의 시선이 연소현에게 집중되었다.

“황제 폐하의 요청이 도달하기 전에 먼저 움직였던, 대공자의 행동에 대한 의미를. 그 가르침을 이 아이들에게 부디 베풀어 주시오.”

“…가르침이라.”

그렇게 중얼거린 연소현이었지만.

이미,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이들에게 전수하리라, 그렇게 마음먹고 있었다.

낙양검가의 사공자, 연비.

십육가문 중 공씨 가문의 차기 후계자, 공담웅.

황도의 명문가, 강씨 가문의 차기 후계자인 강호까지.

'내가 부재할 시에는:'

연소현의 머릿속에 자신이 제암진천경과의 사투로 의해 하루 꼬박 의식이 없었던, 기억이 떠오르고 있었다.

'이들이 각자의 분야에서, 나를 대신해야만 한다.'

연소현은 한차례 고개를 끄덕이고, 가르침을 시작했다.

“진정한 왕은 미래를 예견하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미래를 만들어 간다는 말이 있지.”

그 말에 즉시 고개를 끄덕인 것은 사공자와 강호였다.

“분명히, 운남(雲南)에 그런 말이있다는 것을 들어 보았습니다.”

“과거, 대리국의 왕가였던. 대리단가에서 내려오는 말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 그렇다. 그것은 어찌보면 간단한 말이지.”

연소현이 자신을 주목하는 이들과 시선을 맞추었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이. 아니. 거의 모든 사람이 그 말의 뜻은 어렴풋이 이해해도 실행하지 못한다.”

공담웅이 어깨를 으쓱였다.

“원래. 아는 것보다 행하는 것이 어렵다고 하지 않습니까?”

공량이 탁 하고, 자신의 의자 손잡이를 내리쳤다.

“녀석아! 그런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다!”

찔끔하여 입을 다문 공담웅을 보며, 공량이 연소현을 대신해 말을 이어나갔다.

“세상을 살아가는 절대다수의 인물은 그저, 눈앞에 닥쳐오는 세파에 대응하기에 급급하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연소현이 그 말을 받았다.

“어느 누군가가. 복잡하고 다난한 세상의 변화를 예측하고 그 대응법을 만드는 것만으로도, 칭송을 받기 마련이지.”

이야기를 거기까지 듣고,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역시, 가장 처음부터 이야기를 듣고 있던 강호였다.

“…대공자께서 황제 폐하의 요청 이전에 그 모든 것들을 대비하셨던 것처럼 말씀이십니까?”

“아니다.”

하지만 연소현은 고개를 저어 부 정했다.

“나는 '대비'를 한 것이 아니야.”

“…그렇다면?”

“황제 폐하의 요청을 미리 짐작 하고 움직인 것이 아니라, 과거의 내가 만든 미래가 황제 폐하를 움직인 것이다.”

"......!"

연소현의 눈이 번뜩였다.

담이 크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공담웅조차도 순간적으로 그 박력에 움찔했다.

“어르신께서 방금 말씀하셨지.”

연소현이 공량의 방향을 슬쩍 보고 말을 이었다.

“평범한 이들은 세파를 견디고, 뛰어난 자들은 세파를 예측하고 대비한다고.”

그는 다시 시선을 돌려, 중원국의 미래를 책임질 자들의 면면을 바로 보았다.

“내가 만드는 미래가, 바로 그들의 미래이고.”

그것은 광오하기까지 한, 선언에 가까운 말이었다.

“내가 바로 그들이 견디고, 대비해야 할 거센 세파(世波)다.”

경청하던 이들이 숨을 죽이고, 연소현을 올려다보았다.

연소현은 그들을 향해 엄숙하게 말했다.

“그리고 이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이 아닌. 세상을 움직이는자의 시각이며 마음가짐이다.”

"......."

"......."

강호도 공담웅도 침묵을 지키고 있던 가운데.

가장 먼저 고개를 끄덕인 것은, 의외로 그들 중 가장 어린 사공자 연비였다.

“…그렇군요.”

나이가 어리고, 아직 경험이 부족하다는 것만이 유일한 단점으로 꼽혔던 소년이 입을 열었다.

“모든 것은 시각과 마음가짐의 문제였군요.”

그것을 이해했다고 해서, 단번에 연소현처럼 될 수는 없겠지만.

그저 연소현의 행동에 감탄하기만 하고, 그 행동에 대한 해석에 급급하기만 하던 때와는, 달리.

“…이제 머릿속의 안개가 조금은. 옅어진 기분입니다.”

강호도, 공담웅도 무언가 느낀바가 있었지만.

그들은 사공자처럼 쉽게 개안(開眼)하지는 못했다.

"......."

"......."

그렇지만 골똘히.

무섭도록 치열하게 깊은 생각에 잠긴 그들을 보며, 공량이 미소 지었다.

'…중원국의 미래가 밝아지고 있구나.’

노인의 시선이 연소현을 향했다.

'지금 이 순간, 또 한 번. 대공자가 미래를 만든 것이야.'

한참을 그렇게, 창을 통해 석양 빛 속에서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던 강호가 입을 열었다.

“대공자님.”

연소현이 자신을 바라보자, 강호가 조심스럽게 질문을 꺼냈다.

“그렇다면. 장강 수로 확장 정비 사업의 두 번째 난제(難題). 장강의 하류를 차지하고 있는 사패천은 어떻게 하실 예정입니까?”

그 질문에 자신의 깨달음을 되새기고 있던 사공자도 눈빛을 빛냈다.

“소제도 그것은 궁금합니다.”

공담웅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연 대협의 말씀대로라면, 그 두 번째 난제에도. 이미 연 대협께서 개입하셨겠지요?”

분명.

저 멀리 황도의 황궁에서 황제에게 고하는 강상도 같은 맥락으로 말했었다.

“이미, 그 문제 또한. 검가의 대공자가 해결을 위한 작업에 착수한 상태이옵니다.”

그 질문에 연소현이 빙긋 미소 지었다.

“물론이다.”

공량은 자신의 긴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흐음. 노부도 궁금하구려. 과연, 대공자께서 사패천의 승낙을 받아내기 위해서, 무슨 일을 해 두셨는지.”

연소현이 공량을 향해 미소를 보냈다.

“이미,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으음?”

공량의 긴 눈썹이 꿈틀거렸다.

“노부가 이미 잘 알고 있다고 했소?”

연소현은 대답 대신 문을 바라보았다.

“아마, 지금쯤이면 작전이 시작되고, 보고가 들어올 것인데….”

“주인님.”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정아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현월각주가 주인님을 뵙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정아의 목소리에 살짝 반가운 기색이 어려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현월각주는 정아의 친언니이자, 연소현의 외부 정보단체 현월각의 수장인 세아였으니까.

“들라 하라.”

연소현의 허락이 떨어지자, 현월각주 세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주군.”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여유 있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런 그녀의 표정에 연소현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직접 보고를 하기 위해 여기까지 오다니. 대선상회가 물러나니, 이제 살만해진 모양이군.”

세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마, 조금만 늦었어도. 현월각이 사라졌을 겁니다.”

자기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막대한 힘을 가진 대선상회를 상대로, 그렇게라도 버틴것이 기적이었다.

“그렇군. 이제 시작되었나?”

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방금 중앙감찰각과 내원이 대선상회에 대한 작전을 개시했습니다.”

그때, 공량이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로 외쳤다.

“과연, 그랬군!”

모두의 시선이 공량을 향했다.

“그랬군요!”

이번엔 사공자다.

그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큰형님께서 너무 순순히 내원의 개입을 허가하셨던 것이, 제게는 계속 의문이었습니다!”

소년이 자리에서 팔짝팔짝 뛰며 흥분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그리고 큰형님께서 분명, '대선상회에 대한 급습은 성공하지만, 수사는 실패할 것이다'라고 하셨었지요!”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대선상회의 총책임자는 이공자의 어머니인 구양 태상부인이지.”

공량도 껄껄 웃더니, 말을 거들었다.

“그리고 검가의 구양 태상부인은, 분명 사패천 련주의 여식(女息)이었어!”

그의 시선이 연소현을 향했다.

“대공자! 그대는 처음부터 구양 태상부인의 구명(救命)과 장강 하류의 사업권에 대한 허가를 교환할 생각이었군!”

“그래서, 큰형님께서 급습이 성공해도 수사가 실패할 것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사공자가 더 큰 소리로 외쳤다.

“본가의 최고운영회의는 당연히 구양 태상부인의 처벌보다는, 황제 폐하의 사업을 성공시키는 일에 손을 들어 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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