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263화 (263/350)

제13편 위신(威信)

황궁 (皇宮).

“폐하, 그들이 입궐하여 이곳으로 향하고 있다고 하옵니다.”

“…알겠다.”

그렇게 대답하는 황제는 침착해 보였지만.

강상의 날카로운 눈썰미는 황제의 얼굴에 깃든 긴장감을 놓치지 않았다.

“폐하...”

강상이 황제의 얼굴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굳이, 폐하께서 그 노마들을 직접 만나실 필요는 없사옵니다.”

노마들.

십육가문의 전대 가주들은 과거, 황제를 지금의 위치까지 추락시킨 장본인들이었다.

두 번의 재상을 역임하며, 산전수전을 모두 겪은 강상조차도 그들을 다시 보기가 거북한데.

어린 시절, 그들에게 휘둘리기만했던 젊은 황제는 오죽할 것인가.

“소신(小臣)이 먼저 그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폐하께 제가 그 내용을 전달해 드리는 것이-.”

“아니.”

황제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라오, 재상. 그래서는 안 될 일이지.”

황제의 이마에 식은땀 한 방울이 흐르고 있었다.

“짐은, 짐의 두려움을 직시해야만 하지. 언제까지 누군가의 뒤에서 보호받는 '꼬마 황제에 머무를수는 없어.”

"......."

황제는 이를 악물었다.

오랜 시간 칩거하던 낙양검가의 대공자, 연소현이 돌아왔다.

하늘에는 천살성이 다시 떠올랐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직시했다.

단 한 번도.

연소현을 직접 만난 적이 없었지만.

황제는 그가 얼마나 깊은 각오와 고통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짐도, 아니. 나도 할 수 있다.'

강상은 황제가 주먹을 꾸욱 하고 쥐는 것을 보았다.

그는 의복을 단정히 하며, 황제의 옆에 자리 잡고 허리를 폈다.

노인의 거대한 몸이 마치 철옹성을 보는 것 같았다.

“소신이 폐하의 곁을 지킬 것이옵니다.”

“…고맙소, 재상.”

“그들 또한, 한배를 타야 하는 처지. 누구보다 눈치가 빠른 자들이니 결코, 뻣뻣하게 굴지만은 않을 것이옵니다.”

“…그러기를 바라야지.”

“폐하….”

그 말에 강상이 무어라 답하려 했을 때, 밖에서 늙은 내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십육가문의 전대 가주 십사(十四) 인이 폐하를 알현하고자 청하고 있사옵니다.”

황제는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근엄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들을 들라 하라.”

* * *

낙양.

날이 저물어 가고.

창가에서 석양빛이 길게 뻗어 들어와 실내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대공자.”

바퀴 달린 의자에 앉은 공량이 입을 열었다.

“알다시피 노부는 그대의 계획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지지한다오.”

연소현의 요청이라면,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드는 일이라도 받아들일 노인이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이 앉은 의자의 손잡이를 강하게 쥐었다.

마음만이라면.

당장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한달음에 황도로 뛰어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 노마들이 또다시 황제 폐하를 농락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된다오.”

석양이 짙은 만큼, 그림자도 짙었기에.

내공이 없는 공량은 석양을 등지고 앉은 연소현의 표정을 제대로 볼 수는 없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 르신.”

하지만 공량은.

연소현이 그림자가 진 얼굴로 스 산한 미소를 짓고 있다고 느꼈다.

"그자들의 목줄은, 제가 단단히 틀어쥐고 있으니까요.”

연소현이 자신의 손을 들어 보였 다.

“이제 그자들은 결코, 자신의 힘 으로 그 목줄을 떼어 낼 수 없습니다.”

그 손은 맨손에 불과해, 그저 석양빛만이 가득했지만.

어째서인지.

공량의 눈에는, 낙양의 한구석에 앉아 있는 연소현의 손에 줄이 들려 있고.

그 줄이 저 멀리, 황도에까지 이어진 것처럼 보였다.

* * *

황궁

열린 문으로 석양빛이 가득 들어 오고 있었고.

"......."

"......."

젊은 황제와 늙은 강상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폐하…!”

노마들은 황제가 있는 방에 들어 오지도 않았다.

그들은 임시 숙소의 작은 마당에, 그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소인들을 죽여 주시옵소서!”

그렇게 대표로 목을 놓아 외치는 것은, 다름 아닌.

과거 어린 황제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보필했었던, 환관.

공손나강이었다.

“죽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공손나강을 따라 열네 명의 노마들이 흙바닥에 몸을 던져, 목을 놓아 외치고 있었다.

“과거…! 폐하께 저지른 그 무거운 죄는 저희의 목숨으로도 부족하옵니다!”

“폐하를 능멸하고, 황실을 모독한 저희를 벌하여 주시옵소서!”

“벌하여 주시옵소서!”

아주 충신들이 따로 없었다.

강상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대체, 대공자는 이 노마들에게 무슨 방법을 썼단 말인가…?’

과거, 이 노마들에게.

황제란 황권의 상징이었을 뿐이며.

그저 그들 자신이 가지지 못한, 고귀한 혈통의 상징에 불과했었으니.

“저희를 죽여 주시옵소서!”

짐작이 가는 부분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마, 대공자는. 북망산으로 추방당하다시피 했던 이자들에게 권력의 달콤함을 다시 맛보여 주었던 것이겠지.’

하지만 그럼에도, 놀라운 점은.

'노마들이 마치, 한 몸처럼 움직이고 있지 않은가?’

저들은 평생을 서로 물어뜯던 사이였다.

서로를 원수로 여기는 사이도 있었다.

'노마끼리 견제가 지나치게 벌어져 계획이 무너지는 것을 막을 각오를 했건만….’

하지만 연소현은.

무슨 주술 같은 일을 벌인 것인지.

저들을 한 무리의 사냥개처럼 묶어 버리는 것에 성공한 것이다.

'대체, 대공자는...?’

그것은 과거.

연소현이 그들과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강상과 황제로서는 품을 수밖에 없는 깊은 의문이며.

동시에 충격이었다.

“폐하! 부디 저희를-!”

황제가 손을 내저었다.

"그만!"

그 외침에, 울부짖다시피 하던 노마들의 목소리가 딱 하고 그쳤다.

"......."

"......."

심지어, 목소리뿐만 아니라.

행동까지도 멈췄다.

그 모습은 마치, 극한까지 훈련을 마친 사냥개 집단을 보는 것 같았다.

“그대들이 과거의 일을 뉘우치고 있다는 것은 알겠소.”

강상은 틈을 만들어 준 황제에게 감사의 눈빛을 보내고, 자신이 나섰다.

“하지만, 정말로. 그대들이 목숨까지 내어 놓을 정도로 뉘우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소.”

그 말에 노마들이 속으로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정확한 사실이었으니까.

다시, 각자 가문의 가주로 돌아가고 싶어 시작한 일인데.

목숨을 잃는다면 권력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것은-!”

뜨끔한 공손나강이 무어라 목소리를 높이려 했지만, 황제가 나섰다.

“짐은 그대들에게 발언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것은.

무리해서 억지로 친 큰소리도.

과거의 기억에 눌려, 새어 나오는 것 같은 목소리도 아닌.

중원국의 황제다운 목소리였다.

"......."

공손나강을 비롯한 노마들은 다시 입을 다물었고, 강상은 황제를 대리하여 자신이 할 말을 이어 나갈 수 있었다.

“지금의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길지 않소. 황제 폐하께 그대들이 가져온 소식을 올리도록 하시오.”

연소현이 성공적으로 허허실실의 계책을 성공시켰고.

강상과 노마들이 아무리 재주 좋게 황궁에 몰래 들어왔다지만.

현재, 사실상 황도를 지배하는 십육가문의 현 가주들에게 그 이야기가 들어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폐하.”

공손나강이 깊이 고개를 숙여 땅에 이마를 댔다.

“부디 이 늙은이가 폐하의 앞에서 지켜야 할 황실의 법도를 생략할 수 있게, 윤허해 주시옵소서.”

황제는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허한다.”

그리고 공손나강 또한 즉시 본론으로 들어갔다.

“황제 폐하께서는, 현재 황실에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옵니까?”

* * *

낙양.

연소현이 강호에게 설명하듯 찬찬히 말을 해 주었다.

“현 황실에, 그리고 현 황제 폐하께 가장 필요한 것은 위신(威信)이다.”

“확실히….”

강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랫동안 꼭두각시로 여겨지며, 중원국의 권력자들에게 있어 황제 폐하와 황실은 그저 상징적인 존재에 불과하게 되었지요.”

그렇기에, 황제와 황실에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위엄과 신망.

즉, 위신이었다.

“그렇다면.”

이번엔 연소현이 강호에게 질문을 던졌다.

“황제 폐하가 위신을 얻어, 다시 세력을 모으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겠느냐?”

강호가 즉답했다.

“업적(業績)."

그는 자신의 할아버지가 자신을 붙잡고 떠들던, 황도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도. 중원국 전체에 황제 폐하가 더 이상 꼭두각시가 아니라는 의미를 전달할 수 있을 정도로 큰 업적이 필요합니다.”

* * *

황궁.

공손나강이 고했다.

"폐하께서는 승하하신 선대 황제 폐하의 숙원 사업을 기억하시옵니까?”

“어찌 그것을 짐이 꿈에라도 잊을 수 있겠는가.”

황제가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장강의 수로를 확장 정비하여, 강남(장강 이남)의 세력들에 의해 독점되고 있는 부를. 남부 지역 전역으로 분배하는 것이 아버지 선황 폐하의 숙원이셨지.”

“하지만 큰 난제(難題)들이 산적하여, 결국에 제대로 진척되지 못했었지요.”

“그렇다.”

황제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먼저. 각자가 한 지역의 패자인 사천당가와 대리단가가 문제였었지.”

수백 년, 어쩌면 수천 년을 반목해 온 그들 가문은 물, 기름과도 같았다.

원한과 증오.

불신과 반목(反目).

역사 속에서 거듭된 그들의 대립은, 장강 수로 확대 정비 사업의 첫 번째 관문이었다.

“그 문제를.”

공손나강이 길게 읍하며 황제에게 말했다.

“낙양검가의 대공자의 주도 아래, 해결했사옵니다.”

“뭐라…?!”

황제가 경악했다.

“앞으로 어떻게 해결할지에 대해서, 그 해결 방안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이미 그가 해결을 했단 말인가?!”

연소현과 두 가문의 거래.

그 내막을 파악하고 있는, 강상이 고개를 숙여 답했다.

“예, 폐하. 그러하옵니다.”

공손나강이 품에서 서신을 꺼내어 황제에게 바쳤다.

“이것이 사천당가와 대리단가의 합의문이옵니다.”

늙은 내관이 그 서신을 받아 황제에게 공손하게 전했다.

“어찌, 이런…!”

서신을 펼쳐 읽은 황제의 손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선황조차 풀기를 포기했던, 그들의 관계가 아니던가.

그런 문제를 불과 얼마 전까지 칩거 중이었던, 낙양검가의 대공자가 해결을 했다니.

'이 일은,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해 알고 있는 짐이 아니었다면 그 누구도 쉽사리 믿지 못했으리라…!’

그 모습을 보며, 공손나강은 미소를 지으며 황제에게 고했다.

“그들은 대공자의 중재 아래. 저희에게 사업 진행의 관리 감독을 일임했사옵니다.”

“그러하오니, 부디.”

다른 전대 가주가 나서서 말을 이었다.

“저희가 앞으로 기울일 모든 공적과 노력이 황제 폐하의 이름을 높이는데 사용될 수 있도록. 부디 윤허해 주시옵소서!”

“윤허해 주시옵소서!”

그 말 그대로.

황제가 사업 진행을 선언하여, 그 위업을 성취해 달란 말이었다.

그것은.

“…틀림없이, 이 일은. 짐이 이 중원국의 황제라는 것을 알리고, 위신을 세울 수 있는 반석이 되겠지.”

“그렇사옵니다, 폐하.”

강상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비록, 이 업적 하나만으로 모든 것이 제자리를 되찾지는 못하겠지만-.”

황제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강상의 말을 받았다.

“충신들을 다시 불러들이고, 짐에게 충성하는 이들이 세력을 만들수 있게 하는 시작이 될 것이야…!”

“역시…! 영명하시옵니다, 폐하.”

그렇게 말하는 공손나강도.

굳이 얼굴에서 희색을 지우지 않았다.

이 일은.

노마들에게 있어서도, 자신들의 가주 자리를 되찾는 커다란 진일보(進一步)가 될 터이니.

황제도 좋고, 자신들도 좋은.

금상첨화의 일이 아니던가.

'대단하오, 대공자. 실로 대단해!’

북망산에서 연소현에게 계획을 들었을때부터, 감탄을 금치 못했건만.

이렇게 막상 황제까지 그 계획에 엮어, 황제의 앞에서 이 일을 고하고 나니.

새삼스레 감탄만이 나올 뿐이었다.

“잠깐. 그런데….”

무언가를 떠올린 황제의 낯빛이 굳어졌다.

“사천당가와 대리단가의 문제는 이 사업에서 첫 번째 난제였지. 분명, 두 번째는….”

강상이 고했다.

“당시. 장강 하류를 사실상 지배하다시피 하고 있던 이들이 두 번째 난제였사옵니다.”

황제가 굳은 얼굴로 수염을 쓰다 듬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그들이 하나의 연맹으로 뭉쳐, 새로운 세력을 만들었다고 들었네. 분명 그들의 이름이….”

“사패천(邪覇天)."

강남 지역을 지배하던 네 개의 세력이 한데 묶여 탄생한, 초거대 세력의 이름.

“그들의 이름은 사패천이옵니다.”

강상이 고한 그 이름을 들은 황제의 낯빛이 더더욱 굳었다.

“과거. 그들은 흩어져 있을 때도, 자신들의 이익만을 탐할 뿐. 황실에 표하는 충성은 최소한에 불과했었다.”

하지만 그것조차 황실의 힘이 그 나마 멀쩡했던, 선대 때의 이야기였다.

황실의 위신이 땅에 떨어진 지금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 그들이 한데 뭉쳤으니. 그들이 이 사업에 순순히 협조를 할것 같지는 않구나.”

만약, 사패천이 성립 직후.

연소현의 아버지, 검가의 태상가주에게 호되게 당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거의 독점하다시피 는 해외 무역을 기반으로 지금쯤, 상상도 하지 못할 세력이 되었으리라.

“폐하,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강상이 미소를 지었다.

“설마…?”

그 미소를 보며 눈이 커진 황제를 향해 강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그 문제 또한. 검가의 대공자가 해결을 위한 작업에 착수한 상태이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