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262화 (262/350)

제12편 운명(運命)

“어째서, 검가의 대공자였습니까?”

그것은 강상에게 처음부터 존재하던 가장 깊은 의문이었으니.

강상은 그 질문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째서 검가의 대공자인가.

어째서 연소현인가.

“낙양검가의 '그 대공자'가 칩거를 끝내고, 다시 세상 밖으로 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

강상과 마주한 황제는 분명 자신의 입으로 이렇게 말했다.

“짐은 그것이, 짐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깨달았소. ”

황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대라면 그렇게 물을 줄 알았소:"

길게 늘어나는 말꼬리와 황제가 입가에 띤 씁쓸한 미소.

황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만큼이나, 길게 뜸을 들였지만.

중요한 문제였으니만큼.

강상은 조용히 황제의 입이 열리길 기다렸다.

그리고.

황제의 입이 다시 열렸을 때.

“…짐은 이미 오래전부터. 누구보다도 먼저. 낙양검가의 대공자.”

강상은 황제에게서 자신이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연소현이라는 이의 행적을 지켜 봐 왔다오.”

황제가 말을 덧붙였다.

“그가 태어났던, 바로 그날부터.”

“……?!”

강상은 황제 앞에서 지켜야 할 예의도 잊고, 감히 고개를 들어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는 그런 강상을 책하는 대신, 천장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중원국 전역에서 가장 변화가 느린 곳. 가장 마지막에 변화가 찾아오는 곳은 바로 이 황궁이지.”

황제는 손을 들어 자신을 가리켰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전통을 지킨다는 명분 아래, 가장 변화가 느린 곳이 바로 황실(皇室)이고.”

황제의 말은 영문을 알 수 없는 이야기로 이어졌지만, 강상은 일단 수긍했다.

“…그렇사옵니다.”

그의 머릿속에 오늘 보았던 황궁의 풍경이 떠올랐다.

어린 나이에 그가 관직에 올라, 처음으로 입궐했을 때부터.

그가 관복을 벗어 두고, 황궁을 떠났을 때도.

그리고 돌아온 오늘도.

황궁의 모습은 천장의 모습 하나까지도 한결같았다.

황궁이 그러할 정도니.

그 중심에 있는 중원국의 황실은 더더욱 변화에서 거리가 멀었다.

“그리고 그렇기에 황실에는 하늘의 변화를 관측하고 거기서 길흉을 점치는 이들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지.”

황실에는 하늘과 관련된 제사를 주관하거나, 황실의 위패를 모시거나, 기상과 홍수를 점치는 등.

상식과 사리(事理)를 벗어나 미신의 영역과 관련된 수많은 군소 조직이 있었다.

“…천문역관(天文譯官)들 말씀이시옵니까.”

“그렇다.”

황실 직속이지만.

출세나 권세와 거리가 까마득히 멀어서, 누구도 관심이 없는 조직들이었기에.

재상을 역임한 강상 정도는 되어야, 그들의 이름이나마 기억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십칠 년 전. 아버지, 선황께 비밀리에 보고를 하나올렸지.”

황제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것은 천살성(天殺星)의 출현에 대한 보고였네.”

“…천살성이라.”

천살성 아래에서 태어난 이의 운명은, 세상을 피로 물들이게 된다 하였으니.

온갖 지식에 해박한 강상이 어찌 천살성에 대해 모르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상상 속의 별이 아니었사옵니까? 떠오른 것을 봤다는 이들은 존재하지만, 한 번도 증명이 된 적이 없다고 들었사옵니다만.”

“그렇지. 그때도 마찬가지였었다고 들었네.”

누군가는 밤하늘의 한 지점을 가리키고 그 불길함을 역설(力說)하지만, 절대다수는 거기서 아무런 별의 흔적도 보지 못했다.

“그렇기에 그저 별것 아닌 일로, 넘어가는 듯했었지.”

“…평소엔 전혀 주목받을 일이 없는 조직이 예산을 유지할 방법은 가끔 그렇게 소란을 피우는 것뿐이니 말이옵니다.”

“하지만 말일세, 재상.”

황제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늙은 내관의 무공으로 외부의 모든 소음이 차단된 방 안에서.

“그때는 달랐다고 하더군.”

황제의 목소리는 유난히 스산했다.

“황실의 천문역관들뿐만이 아니라. 곧 중원국 전역에서. 재야의 이름난 술사(術士)들의 경고가 황실에 쏟아졌다.”

"......?!"

그것은 황실의 고유한 영역이라, 당시 재상이었던 강상조차도 처음 듣는 일이었다.

“점을 치는 자. 천기를 읽는다는 자. 미래를 엿본다는 자. 귀신을 다룬다는 자. 영과 소통을 한다는 자.

신령을 섬긴다는 자 등등. 음지에서 이름을 떨치는 그들이, 누구랄것 없이.”

호랑이도 사냥할 정도로 담이 큰 강상도 이 순간에는 소름이 끼칠수밖에 없었다.

“그들 모두가 한날한시에 똑같은 내용의 경고를 황실에 전한 것이지.”

황제는 그날의 경고를 입에 담았 다.

“'천년고도(千年古者B)에 천살성이 떴다.’"

"......."

중원국의 현 수도는 황도이지만.

중원국의 천년고도라 함은 낙양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리고 십칠 년 전.

그 모든 이야기가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강상은 둔하지 않았다.

“…검가의 대공자가 천살성을 타고 태어났다는 말이옵니까?”

“그들의 주장은 그러했네.”

강상이 고개를 흔들었다.

“…터무니없사옵니다. 해석에 다른 가능성은 없었사옵니까?”

“그게 아니라면.”

황제가 쓴웃음을 지었다.

“멸망한 마교(魔敎)의 새 교주가 낙양에서 낙양검가의 대공자와 같은 날에 태어났다는 의미라고 하더군.”

마교의 새 교주라니…!

"......."

강상은 속으로 침음을 삼키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검가의 대공자가 천살성이라는 것이 확인되었다는 것이옵니까?”

“아니.”

황제는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날 이후 천살성이 모습을 감추었다고 하더군.”

“…모습을 감추었다고 하셨사옵니까?”

“황실의 천문역관들 사이에서도 온갖 설이 난무했지.”

황제는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었다.

“천살성의 아이가 죽은 것이다. 애초에 그렇게 죽을거였으면, 천살성을 타고 태어날 수 없다. 누군가가 천기(天氣)를 거스르고 운명에 개입을 한 것이다, 아니면. 처음 부터 천살성이 아니었다, 등등.”

“…결국, 진위는 가릴 수가 없게 되었군요.”

“하지만, 황실이 검가의 대공자를 계속 주목하게 하는 정도에는 충분했지.”

“아…!”

그랬다.

처음부터, 이 이야기는.

황제는 어째서 검가의 대공자를 주목한 것인가.

황제는 어떻게 그의 존재를 처음부터 주시하고 있었느냐에서 시작되었다.

“과거. '약 선녀'라 불린 이가 있었지.”

황제의 말에 강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자의 어머니인 약소유 말씀이시군요.”

“그렇다. 기적에 가까운 일들을 연달아 보여주며, 새로 종교가 창시되기까지 했던 그녀의 업적.”

“…선녀교단을 정식 종교 단체로 인정할 것인지에 대해서, 중원국 모든 정식 종교 단체들이 모여 대회의까지 벌어졌었지요.”

그리고 그 결과.

선녀교는 정식 종교 단체로 인정받았고, 만방(萬方)에 그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었다.

“그랬지. 그런데….”

황제의 시선이 강상을 향했다.

“세간에 그런 약 선녀의 기적이라 알려진 업적 중 절반 가까이가. 사실은 그 대공자의 업적이라는 것은 자네도 처음 듣는 일이겠지.”

"......!"

“여러 명예 직위를 받았던 약 선녀는 생전. 황실에도 수많은 장계를 올렸지.”

황제가 과거의 기록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대홍수를 막고, 큰 가뭄을 예측하고, 새 농법을 개발하고, 의서들을 편찬하는 등.”

그중 절반이 어린 대공자의 손길이 닿았다는 말이었다.

“황실이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주목하고 있지 않았다면, 결코 알 수 없었을 사실이었지.”

“…놀랍군요. 하지만.”

강상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 대공자의 지인으로서, 딱히 놀랍지만도 않은 일이군요.”

“그런가?”

황제가 웃음소리를 흘렸다.

“하지만 짐에게는 무엇보다도 놀라운 일이었고. 놀라운 인물이었네. 그래서 과거부터 짐은 누구보다도 그를 본받고 싶었지.”

"......!"

“그래서 짐은 그에 관련된 모든 보고를 챙겨 보았었지.”

그것은 그 누구도 모르는, 황제의 속에 든 이야기였다.

“짐보다 어린. 그 아이가 짐의 영웅이었고, 짐은 그 대공자와 같은 인물이 되고 싶었네.”

황제는 지금 이 순간.

그 어느 때보다도 진솔했다.

“그 연소현이라는 소년처럼 될 수 있다면. 나 또한 중원국 역사, 아니. 이 대륙의 역사에서 가장 훌륭한 황제로 남을 수 있을 것만 같았지.”

“…폐하!”

과할 정도로 진솔한 이야기에.

강상이 몸 둘 바를 모르며, 고개를 바닥에 조아렸다.

강상은 이어질 이야기를 예측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이야기를 감히 입에 담을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머리를 더욱 깊이 조아렸다.

황제는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짐은, 그와 달리 무능했지.”

"......."

선황이 급사하고, 혼란 속에 태자이던 자신이 황위를 물려받았다.

그리고 당시.

가장 큰 충신이던, 황도십육가문의 가주들이 일제히 숨기고 있던 이빨을 드러냈다.

어리기만 했던 황제는 그들의 꼭두각시가 되었다.

“그리고 짐의 마음속 영웅이었던 그 대공자마저도….”

혈사라 불리는 사건.

낙양검가의 대량 숙청 사건 이후, 칩거에 들어갔다.

“천살성이란 가혹한 운명에 결국, 그가 굴복했던 것일까.”

황제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니면, 그것조차 그의 숙명이었던 것일까.”

결국.

어린 자신을 마음대로 휘두르던, 노마(老魔)들은 북부 전쟁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지만.

그것은 황실의 힘이 아니라, 십육가문 내에서 벌어진 정쟁의 결과물에 지나지 않았다.

황실의 위신은.

이미 오래전에.

땅에 떨어졌다.

무력했다.

“짐은, 아니….”

황제가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나는 사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있었다네….”

"......."

“시간이 속절없이 흐르며, 충신들은 쓸려 나갔고. 중원국 각지의 가문들은 더욱 강력해졌고. 이제는 새로 황후가 된 민씨 가문까지….”

황제는, 아니.

평범한 청년이 자신의 두 손을 들어 보였다.

“…나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네.”

황제가 쏟아 내는 솔직한 고백에, 강상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폐하.”

여기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러나.

강상이 무슨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던 얼마 전. 내게 충격적인 소식이 도착했다네.”

“무슨 소식이었사옵니까?”

이어지는 황제의 말은 자조와 거리가 멀었고.

“그것은 간신히 아직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황실의 천문역관들의 보고였네.”

오히려 황제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기까지 했다.

“천살성이 다시 떠올랐다더군.”

“…천살성이, 다시?”

“그리고 얼마 후.”

강상은 듣지 않아도, 내용을 짐작할 수 있었다.

“검가의 대공자가 칩거를 끝냈던 것이로군요…!”

“그렇다네.”

황제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돌아온 것일세.”

황제는 마치 자기 자신을 납득시키듯, 혼잣말을 하며 연거푸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드디어 돌아온 것이야.”

황제가 어째서.

연소현이 칩거를 끝낸 것이, 자신의 마지막 기회라고 했는지.

강상은 이해할 수 있었다.

'비슷한 연령에, 비슷한 상황.’

황제는 운명 앞에 무력했던 자신의 상황을 연소현의 상황과 동일시하여, 그에게 감정을 이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로써.

과거에 증명되지 않았던, 연소현과 천살성의 관계가 확인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는 돌아오자마자, 대형 사건을 연달아 터트리고 있다고 하더군.”

그렇게 말하는 황제는 즐거워 보였다.

“…대공자는 잃었던 자신의 입지를 급속히 확보하는 중이지요.”

그리고 가는 곳마다.

피가 흩날리고, 비명이 치솟았다.

'천살성이라….'

어차피 미신의 일환.

황제의 이야기는 신비롭기는 했지만.

공자 왈(曰), 군자불어 괴력난신(君子不語怪力亂神)이라.

연소현을 오랫동안 직접 알아 온, 강상에게는 큰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알게 되면 새로운 것이 보인다고.

그에게 연소현의 행보가 새삼스럽게 다시 느껴졌다.

“폐하께서는….”

강상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대공자가 천살성이라는 것이, 꺼림칙하지는 않사옵니까?”

“아니.”

황제는 즉각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잘되었다고 생각하네.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이 바로 그것이야.”

황제는 이를 드러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예로부터. 역사가 크게 변하는 시기에는 언제나 큰 피바람이 불어왔지. 모든 변화에는 저항이 따르고, 역사가 변할 정도의 변화에는 더 큰 저항이 따를 수밖에.”

그 모습은 약한 모습을 보여 주던 황제의 얼굴과 큰 차이가 있어, 강상은 신선하기까지 한 충격을 느꼈다.

“…과연. 그러하옵니다.”

“그러니 말해 주게.”

황제는 강상을 향해 손을 펼쳐 보였다.

“자네가 가져온 소식을.”

연소현이라는 이름의 희망에 불  붙은 황제는 더 이상 무력하지 않았다.

“그 대공자의 지략을 부디 짐에게도 알려 주게.”

“예, 물론이옵니다. 폐하.”

그 모습에 강상이 미소를 지으며, 다시금 고개를 숙여 읍했다.

연소현이 돌아오길 기다린 것은.

강상과 공량.

늙은 충신들뿐만이 아니었다.

황제 또한.

연소현을 그토록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제게 들으시는 것보다. 당사자들에게 직접 들으시는 편이 좋을 듯하옵니다.”

“당사자들이 라고?"

“예, 폐하.”

강상이 고개를 숙인 채, 고했다.

“지금쯤이면, 이 황도에. 대공자의 명을 받은 그 노마들이 숨어들어 몸을 감추고 있을 것이옵니다.”

지금이라도 약속된 신호를 보내면, 그들이 즉시 입궐하리라는 말이었다.

"......!”

황제의 눈이 경악에 부릅떠졌다.

“그것은 자네가 황궁에 들어오는것을 감추기 위해 소문을 퍼트린것이 아니었단 말인가?!”

강상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진해 졌다.

“허허실실(虛虛實實)이라.”

노마들에 대한 소문을 퍼트려 강상의 움직임을 감춘다.

강상이 움직임을 드러내, 노마들의 움직임을 감춘다.

“이 모든 것이 대공자의 지략이 었사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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