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261화 (261/350)

제11편 만인지상(萬人之上)

만인지상(萬人之上).

과거로부터, 무수한 왕조가 만들어지고, 또 스러지며 대륙을 거쳐 갔지만.

언제나 그것이 의미하는 인물은 단 하나.

바로 이 대륙의 패권을 지닌 제국의 황제를 칭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황제의 첫걸음이라….”

황도십육가문의 현 가주가 말하는 '황제'라는 단어에는 그 만인지상의 권위라고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약관(弱冠)이 지나서야 첫걸음이라니.”

황제가 직접 움직여, 재상을 임명했다는 결론에 다다른 가주들이었지만

그들 중 누구하나 과하게 긴장하거나 초조해하는 이가 하나 없었다.

“우리 황제 폐하께서는 꽤 걸음마를 늦게 시작하셨구려.”

오히려 누군가 그렇게 농을 던지자, 다들 비릿한 웃음을 흘리기까지 했다.

마치, 황제는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였다.

“하지만.”

가주 하나가 인상을 쓰며,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었다.

“노마들의 움직임으로 교란을 펼치고, 그 틈에 황제가 직접 첫걸음을 내딛는다니. 대체 어떻게 한 것이지?”

* * *

황궁 (皇宮).

'...입궐(入闕)했구나.'

거인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의 신장과 덩치를 지닌 노인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비록,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하고자.

뒷길로 숨어들듯 들어오게 된 황궁이지만.

'...내가 이 나이를 먹고, 다시 이렇게 황궁으로 돌아오게 될 줄이야.'

어째서 자신의 늙어 버린 심장이 이리도 뛰는지.

걸음을 옮기며 노인은 솥뚜껑같은 손을 들어, 천천히 황궁의 돌담을 쓰다듬었다.

'…모든 것이 그대로구나.’

그날.

그는 자신의 관복을 훌훌 벗어 버리고, 황궁을 떠났었지만.

황궁의 모습은, 마치 그날이후 멈춰 있었던것처럼.

그 자리에 그 모습 그대로 노인을 맞이하고 있었다.

"......."

감개무량(感慨無量)이라.

그만 나이에 맞지 않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

그런 노인의 심정을 감히 헤아릴수조차 없는 늙은 내관(內官)은 안내를 마칠 때까지.

단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이곳입니다.”

중원국의 황궁에는 화려하기로는 그 어디에도 비견되지 않는, 일천(一千)하고도 구백구십구(九伯九十九) 개의 방이 있었지만.

그가 도착한 곳은, 가끔 기상(氣象) 따위 때문에 궁에 발이 묶인 하급 문관들이 사용하는 한 칸짜리 작은 건물이었다.

"......."

문이 열리고, 거대한 노인은 허리를 굽혀 낮은 입구를 통과했다.

천장이 낮은 입구.

그것은 모두의 위에 황제가 있다는 것을, 언제나 신하된 도리를 자각하라는 의미였다.

노인은 그 신장 때문에, 과하게 허리를 굽혀야 했지만.

"......."

입구를 지났음에도, 허리를 다시 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허리를 더욱숙여, 아예 무릎까지 꿇었다.

“만세만세만만세(萬世萬世萬萬歲).”

그 영생 기원을 인사말로 받을 수 있는 것은, 중원국에서 오직 단 한 명.

“소신(小臣), 강상. 황제 폐하의 부름을 받고 궁으로 돌아왔사옵니다.”

하급 문관을 위한 임시 숙소에서, 가부좌를 틀고 조용히 앉아 있던 청년이 감고있던 눈을 떴다.

“…실로 오랜만이오, 재상 영감.”

아직 젖살도 모두 빠지지 않은 얼굴.

턱수염은 아직 듬성듬성하여 어색하기만 했다.

어디서든 눈에 띄는 미남자도 아니고,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있는것도 아니다.

특징 없는 얼굴.

특징 없는 체구.

어딜 보아도, 범상한 그가.

바로 이 중원국의 황제였다.

“짐은 그대가 황궁에 돌아온 것을 진심으로 환영하는 바이오.”

* * *

두 사람은 좁은 방 안으로 자리를 옮겼다.

황궁의 수많은 눈을 피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강상이 정식으로 재상으로 임명되기 전, 어디까지나 비밀리에 이루어지는 비공식적인 만남이었다.

“황후의 눈을 피해, 직접 짐이 그대를 임명하고자 일을 추진하자니 머리끝이 쭈뼛하고, 등에 흐르는 식은땀이 멈추지 않더구려.”

청년 황제는 그렇게 말하며, 겸연쩍게 미소지어 보였다.

“짐은 그때 느꼈소.”

조심스럽게 자신을 올려다보는 강상의 시선앞에서 황제가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고백했다.

“짐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의 힘으로 한 발을 내디뎠다는 사실을 말이오.”

강상이 즉시 머리를 숙였다.

“이 늙은이의 능력이 부족하여, 폐하의 옥체(玉體)를 움직이게끔 하다니, 이는 너무나 큰 불충이라-."

“불충 같은 소리는 집어치우시오, 재상 영감. 쓸데없는 허례허식(虛禮虛飾)은 되었소.”

황제가 불편하다는 듯이, 대번에 손을 내저었다.

그의 행동과 표정은 중원국의 만인지상 황제라기에 소탈하기 짝이 없었다.

“약관이 지나서야, 처음으로 자기 힘으로 일거리 하나를 처리한 한심하기 짝이없는 몸이라오.”

강상은 다시 한번 고개를 조아렸지만, 그 또한 입을 더 열지는 않았다.

“황도에 있는 십육가문의 가주들은, 틀림없이 지금 짐의 행동을 보며 조소하고 있겠지.”

황제가 씁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겠지. '이제 황제가 첫걸음을 뗐다면, 걸음마는 언제 뗄 것이냐'고.”

"......."

황제의 말처럼.

강상이 계속 자신의 탓으로 돌려봐야, 황제만 부끄럽게 만들 뿐이었다.

“게다가 자신의 힘으로 일을 처리했다고는 하지만. 결국, 그 일조차도 짐의 능력이 부족하여, 일을 대신 판단하고 처리할 그대를 불러들이는 것에 불과했소.”

"......."

강상은 고개를 더욱 깊이 숙였다.

그의 가슴속 깊은 곳이 아려 왔다.

자신의 앞에 있는 청년 황제는.

그 타고난 성정이 유하고 선량하여, 백성에게까지 감정을 이입할수 있는 좋은 사람이었다.

황제의 권위가 바로 선 시기에 황위를 물려받았다면.

틀림없이 중원국을 태평성대(太平聖代)로 이끌어 성군이 되었을 인물.

“짐은 스스로에 대해서 잘 알고 있소.”

청년 황제는 노신의 침묵 속에서 자조적인 미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평화로운 시기에 황제가 되었다면, 그럭저럭 백성들을 살필 줄 아는 황제로 역사에 이름 한 줄이나마 남길 수 있었겠지만.”

"......."

“이 혼란한 시기에 황제가 되었으니, 무능한 암군(暗君)으로 역사에 기록될 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폐하.”

충신의 목소리엔 물기가 어려 있었다.

밖에서 황궁의 무공을 펼쳐, 소리가 새어 나가는 것을 차단하던 늙은 내관이 입술을 깨물었다.

"......."

자기 자신을 너무나 잘 아는, 더없이 훌륭한 자질을 가진 군주는 힘이 없었고.

그리고 그 군주를 누구보다도 잘 보필할 수 있는, 유능하기로는 손에 꼽을 만한 신하는 스스로 관직을 내려놓아야만 했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이.

황궁의 가장 변두리에서, 가장 초라한 방에서 만나고 있었으니.

어찌 안타까움을 느끼지 않을 수가 있다는 말인가.

“그래서라오.”

청년 황제가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낙양검가의 '그 대공자'가 칩거를 끝내고, 다시 세상 밖으로 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 표정에서는 어떠한 종류의 결연함이 느껴졌다.

“짐은 그것이, 짐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깨달았소.”

* * *

낙양.

“이것이 내가 칩거를 끝냈을 때, 받았던 황제 폐하의 교지다.”

연소현이 엄중히 보관되고 있던 황제의 교지를 꺼냈다.

조심스럽게 받아 든 강호가 그것을 펼쳐 보았지만.

“…대공자님. 이건 그냥 일반적인 내용입니다만?”

강호의 말처럼.

교지에는 유려한 필체로 그저 '앞으로 중원국을 위해서 많은 일을 해 주기 바란다.’ 정도의 글이 적혀 있었을 뿐이었다.

“그렇지.”

단지, 칩거를 끝낸 것으로 황제의 교지를 받는다는 일은 놀랍기는 하지만.

그 대상이 천하제일가라 불리는 낙양검가의 대공자 정도되면, 특이한 일이라고도 볼 수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입을 연 것은 공량이었다.

“황제 폐하의 교지는 전달되기까지 거쳐가는이만 수십 명.”

강호에게 그것을 넘겨받은 공량이, 앙상한 손으로 교지를 천천히 쓸어내리며 말을 이었다.

“당대 황제가 권력이 막강하다면 모를까, 어떤 내용도 보안을 유지할 수 없네.”

강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렇겠군요. 황궁에는 황제 폐하의 교지만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기관도 있을 정도니….”

그리고 그 기관 또한 보나마나 황도십육가문의 현 가주들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으리라.

“게다가 황제 폐하의 일거수일투족은 내관들에 의해서, 모두 파악되고 있지요.”

거기까지 말을 이어 나가던 강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다면, 어떻게 대공자께서는 황제 폐하와 연락을 주고받으신 것입니까?”

연소현이 황도에 있는 현 십육가주들을 교란하고.

그 틈을 타서 황제가 기민하게 움직여, 강상을 불러들인다.

그것은 긴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연락을 주고받으며 시기를 조율해야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아니.”

하지만 뜻밖에도.

연소현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황제 폐하와 연락을 주고 받던 것이 아니었다.”

"…예?"

공량에게서 교지를 넘겨받은 연소현이.

단숨에 비단 족자에서 종이를 뜯어내 버렸다.

"......."

황제의 교지가 훼손된 상황.

외부에 알려지면, 삼대(三代)가 참수되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으니

강호는 새하얗게 질려 입을 뻐끔거릴 뿐.

차마 비명을 지르지도 못했다.

“…대, 대공자님! 이게 대체-!”

“과연!”

강호가 대체 무슨 짓이냐는 말을하기도 전에, 공량이 눈을 부릅뜨고 감탄했다.

“이런 방법이었군…!”

그 말에, 연소현이 강호에게 잘 보라는 듯이 종이가 뜯겨나간 비단 족자를 들어 보였다.

"아…!”

그 모습에 강호 또한 부지불식간에 감탄했다.

“등하불명(燈下不明)이라.”

연소현이 공량과 강호의 반응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누구도 감히 황제 폐하의 교지를 뜯어볼 생각을 하지 못하지.”

당연한 말이었다.

천하에 연소현을 빼고는 누가 있어.

감히 황제가 손수 문자를 남긴 종이를 훼손하기까지 하면서, 교지를 뜯어볼 생각을 하겠는가.

강호는 비단 족자에 드러난 글자를 소리 내어 읽었다.

“'대공자. 자네의 아버지가 짐의 아버지 선(先)황제를 도왔듯. 이번엔 자네가 짐을 도와다오'"

그가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이 말은…!”

“그래.,,

연소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받은 것은 황제 폐하로부터의 구원 요청이었다.”

* * *

“아니…?!”

강상이 아연한 표정으로 황제에게 물었다.

“대체 그런 연락 방법은 어떻게 준비하신 것이옵니까? 그리고 대공자는 어떻게 그것을 알았던 것이옵니까?”

그는 황제와 합(合)을 맞출 것이라는 연소현을 말을 전해 들었을뿐이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런 그의 반응에 황제가 미소를 지었다.

“그 방식은 그의 아버지인 검가의 가주에게 선황께서 접촉하실 때 썼던 방식이라네.”

“…아!"

그렇다면, 연소현이 그 연락 방식을 아는 것도 납득은 갔다.

“선황께서는 중원국 곳곳의 조율을 위해, 언제나 검가에 많은 협조를 구하셔야만 했지. 하지만….”

강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개 가문이 너무 많은 성은을 받으면, 검가에도 선황께도 결코 좋은 일이 되지 못할 것이 뻔한 일이 되었을 것이옵니다.”

많은 협조 요청이 공개적으로 이루어 졌다면.

그 모든 일에 황실의 상이 일일이 뒤따라야 할 것이고, 안 그래도 강력한 검가에 너무나 많은 권력이 더해졌으리라.

아무리 검가의 가주가 충심이 깊은 인물이라 한들.

당장에 당시 재상이었던 그부터가 반대했을 것이다.

“그래. 그렇게 아버지 선황과 검가의 가주는 손발을 자주 맞추었고. 나는 그 흉내를 내 본 것이네.”

“아…!”

황제가 빙긋 웃었다.

“그는 내 요청에 응하듯, 십육가문을 뒤흔들어 주었고. 나는 그것이 대공자가 보낸 신호라는 것을 알았지.”

“과연….”

그리고 그 틈을 노려, 황제는 강상을 불러들이는 데까지 성공한 것이다.

'이 일은 대공자의 기지와 황제 폐하의 순발력이 어우러진 일이었군...!'

그렇게 납득을 하며 고개를 끄덕이던, 강상이 문득 의문을 표했다.

“아니, 잠깐.”

그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눈썹을 찌푸렸다.

“검가의 대공자가 황제 폐하의 교지를 뜯었다는 이야기가 되지 않사옵니까?”

“그렇겠지.”

황제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용을 확인하려면 뜯어야 하니,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강상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대공자에게는 멀쩡한 교지가 있어서, 십육가문의 전대 가주들에게도 보여 주었다고 들었사옵니다만…?"

황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 뜯어본 다음. 다시 다른 종이를 붙여 둔 것이 아니겠나?”

"예…?”

“새 종이에 내 필체를 흉내 내서 붙여 넣는 것은 그에게 아무 어려움도 없었겠지.”

“…만일 그렇다 해도, 교지에 사용되는 종이와 먹은 외부에서 구하기가 불가능하지 않사옵니까?”

"그렇지."

황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면, 아예 처음부터 뜯은 적 이 없었다거나…?”

"예?”

* * *

“처음 뜯어본 것이라고요?!”

강호가 비명처럼 외쳤다.

“그럼, 대체 어떻게 황제 폐하의 구원 요청을 알고, 모든 것을 준비하신 겁니까?!”

연소현이 으쓱였다.

“뜯지 않고도 볼 수 있는 법이 있으니, 가능했던 것이지.”

“예?”

연소현은 꿰뚫어 보는 일이라면, 따를자가 없는 자신의 시녀장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 * *

“오히려 그것보다 짐은….”

황제는 눈빛을 빛냈다.

“짐이 강상 자네를 불러들일 것을 알고, 자네를 미리 준비하게 한 대공자의 능력이 놀랍다네.”

"......."

강상은 말문이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교지의 훼손과 그 위조를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황제나, 실제로 그것을 행한 것으로 의심되는 연소현이나.

일반적인 상식을 뛰어넘기는 매한가지인 인물들이 아닌가.

"......."

말문이 막혔지만.

황당했지만.

강상의 입가엔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것은 강한 기대감이 깃든 기분 좋은 미소였다.

'서로 일면식도 없는 황제 폐하와 대공자가….’

어찌도 이리 죽이 척척 맞을 수 있단 말인가.

그 어리기만 하던 황제가 어느새 이렇게 성장했단 말인가.

'이 일은 내 기대 이상의 결과가 될지도 모르겠군…!’

강상은 입을 열어, 마지막으로 황제에게 물었다.

“폐하.”

그것은 그가 칩거를 끝낸 연소현에게 서신을 받은 이후부터 품고있었던 의문이기도 했다.

“어째서, 검가의 대공자였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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