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260화 (260/350)

제10편 첫걸음

세상을 등지고 칩거를 택했던 이, 연소현.

패전을 막기 위해 은퇴를 할 수 밖에 없었던, 강상.

동지들을 모두 잃고 홀로 분투하다가 병상에 눕게 되었던, 공량.

그 모두가 다시 돌아왔다.

* * *

“…그렇다면.”

충격에 빠져 있던 강호의 비상한 머리가 자연스럽게 다음 결과를 도출해 냈다.

“대공자께서는 단순히, 저를 대선상회를 노리는 작전에서 제외하신 것이 아니라….”

공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자는 자네를 보호하고, 나아가서는-.”

강호가 말을 받았다.

“나아가서는 황도의 할아버지를 보호하신 것이로군요.”

“그래.”

연소현이 답했다.

“자네의 조부가 궁으로 복귀한다는 이야기는 이미, 황도에 퍼지기 시작했을 것이야.”

“황도의 권력자 중에 자네를 강상 어르신이 보물처럼 아낀다는 것을 모르는 이가 없지.”

연소현의 말을 거들듯이, 공량이 강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해했습니다.”

강호가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앞으로 철저하게 몸을 사려야겠군요.”

“앞으로라고?”

연소현이 피식 웃었다.

그 반응에 강호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방금 뭔가 말실수를 했습니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공량으로부터 나왔다.

“앞으로가 아니라, 자네는 처음부터 조심해야 했네.”

“…처음부터라니요?”

"대공자님.”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밖에서 시녀 일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백 대주께서 대공자님을 뵙고자 합니다.”

“들라 하라.”

당백이라니, 강호는 못 들어 본 이름이었다.

중원국의 명가들과 그 피를 이은 이들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는 강호였지만, 사천의 칼잡이 이름까지도 알 정도는 아니었으니.

'하지만. 대공자께서 이 자리에 들이는 자라면, 틀림없이 나름의 이유가 있는 중요한-.'

강호의 생각은 거기서 끊어졌다.

문이 열리며 흘러들어 온 지독한 악취(惡臭)에, 자신의 입을 틀어막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

당백은 수급(首級)들을 들고 있었다.

“여기 올리게.”

연소현의 명에 당백이 다가왔다.

묵직한 소리와 함께, 머리들이 탁자에 놓였다.

들기 쉽게끔 머리카락을 한데 묶어서 매듭을 만든 머리통들이었다.

방금 죽은 것은 아닌 듯, 머리들의 피는 검게 말라 있었지만.

썩기 시작한 머리통들은 끔찍할 정도의 악취를 풍기고 있었다.

"......."

강호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지만, 이내 이어지는 당백의 말에 숨을 쉴 수도 없게 되었다.

“명하신 대로, '강호'라는 이를 감시하던 낙양의 정보상 놈들의 머리입니다.”

강호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나를 감시하고 있었다고?!’

“순수하게 감시 의뢰만 수행 중이던가?”

“아닙니다.”

당백의 삭막한 목소리가 실내에 울려 퍼졌다.

“이미 오래전부터. 황도에서 연락이 오면, 즉각 강호라는 이를 납치 혹은 암살할 준비까지 마쳐 두었더군요.”

머리들이 어째서 세상 모든 고통을 한 몸에 진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지.

그리고 당백이 어떻게 그들의 의뢰 사항을 전부 파악하고 있는지.

강호는 단박에 이해했다.

“고생했군.”

연소현이 치하하는 말에 당백이 고개를 저었다.

"저야 하던 대로, 수급을 회수하기만 했을 뿐. 수고는 전부 현월각의 요원들이 해 주었습니다.”

당백의 말은 딱 거기까지였다.

감히 칼잡이가 낄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그는 너무 잘 알고 있었으니.

“그럼.”

당백은 정중하게 손을 모아 좌중을 향해 인사를 올리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

시녀 일령이 조용히 움직여 창문들을 더 활짝 열어놓고, 문을 닫고 나갈 때까지.

"......."

강호는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죽은 지, 꽤 되어 보이는군.”

공량은 아무렇지도 않은 기색으로 머리들을 살피더니.

“이제부터 처리를 할 예정인 줄 알았더니, 이미 처리를 마쳐 두었던가? 역시 대공자로다.”

오히려 그는 흥미롭다는 표정까지 지었다.

그것은 예술품을 감상하듯, 머리를 감상하는 것도 아니었다.

“당백이라는 자는 사공자의 부하였지? 그리고 당백이라는 자가 말하길 현월각이 수고를 해 주었다고. 그렇다면….”

연소현이 담담한 표정으로 차를 한 모금 마시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끝났지만. 어제까지만 해도 홀로 대선상회의 공격을 버티던 현월각의 지원을 위해서. 사공자의 수하들을 보내 주었었지요.”

“그런 김에 이들까지도 처리했었던 것인가? 훌륭하군. 훌륭해.”

연소현의 또 한발을 앞서는 일 처리에, 공량이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했다.

“겸사겸사 미리 처리해 두었을뿐입니다.”

연소현은 평소처럼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굴었다.

“대공자도 대단하지만, 그 사공자의 수하들이라는 자들도. 현월각도 보통은 아니야.”

공량이 혀를 찼다.

“우리 집안의 아이들도 이런 걸 좀 배워야 하는데. 가진바 권력에 의지하다 보니, 다들 게을러 터져서 말이야. 쯧쯧.”

“지금 치르고 있는 전쟁에서, 그들도 배우는 것이 많겠지요.”

“그렇지. 배워야지.”

“배우지 못하면, 도태될 뿐이니까요.”

연소현과 공량.

둘, 모두.

탁자 위의 머리 따위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

"......."

그렇게 강호는 이 순간.

그 언제보다도 이 두 사람이 자신과 거리가 먼 인물들이라는 것을 생생하게 느끼고 있었다.

탁자를 가운데 두고 둘러앉은 이들 중에서 자신만이 저 멀리 멀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황도 개혁파의 수장이었고, 일각에서는 노마 중의 노마라고도 일컬어지는 공량.

그리고 자신은 감히 짐작조차 할수 없는 깊은 어둠을 품고 있는 것이 분명한 낙양검가의 대공자, 연소현.

“어떤가?”

자신을 향하는 공량의 시선에, 강호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자네는 뭔가 배웠는가?”

강호는 한차례, 깊이 숨을 들이켰다.

악취가 비강(鼻腔)을 지나 뇌를 찌르는 듯했지만, 깊이 들이마시자 오히려 코가 마비되기 시작했다.

감찰부에 있을 때, 검시의원(檢屍醫員)에게 배운 요령이었다.

“…굳이, 두 분이 직접 확인하지 않으셔도 되고. 심지어 방금 죽은것도 아닌 이들의 머리를 가져오게 하신것은.”

강호는 아직 경험이 부족할지언정, 결코 능력이 부족한 이가 아니었다.

“공량 어르신의 말씀처럼, 제가 배워야할 것이 있기 때문이겠지요.”

“호오?”

공량의 입가에 '이것 봐라'라는듯한 미소가 걸렸다.

그 미소에서도, 탁자에 놓인 머리통들의 시선에서도 눈을 돌리지않고.

강호가 말을 이어 나갔다.

“심지어 공직을 마다한 저를 낙양에서까지 감시하고, 유사시 암살까지도 감행하려 했던 황도의 이들.”

안경의 뒤에서 강호의 눈가가 잘게 떨려 오고 있었다.

“광기가 느껴질 정도의 집착과 하나의 변수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철두철미함.”

상황상, 그런 이들은 딱 하나밖에 없지 않은가.

강호가 그 이름을 입에 올리기 전에, 마른침을 삼켰다.

“…현재 황도에 있는 십육가문의 현 가주들.”

그들은 유사시를 대비해, 강호를 납치하거나, 혹은 살해하여 강상에게 타격을 주려 했을것이다.

“그들은 은퇴하고 사냥이나 하러다니던 할아버지를. 지금까지도 견제 중이었던 것이군요.”

차라리 대범하게 헛웃음이라도 지을 수 있다면 좋겠건만.

안경을 고쳐 쓰는 강호의 손길이 부들부들 떨려 오고 있었다.

“…그날의 비사로부터, 끝나지않은 것은 여기계신 여러분과 할아버지뿐만이 아니었군요.”

강호는 자신을 감시하다가, 유사시 언제든 납치나 암살을 하려 했던 이들의 머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들의 텅 빈 눈알을 통해, 황도의 최고 권력자들을 떠올렸다.

“황도에 있는 십육가문의 현 가주들 또한. 그날의 비사로부터 무엇 하나 끝낸 것이 없었어요.”

“그래, 자네 말대로다.”

공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오늘 같은 일이 발생했을 때-.”

공량이 말하는 오늘같은 일은, 강호의 조부가 다시 입궐(入闕)한 것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강호가 이해했다는 듯이 그의 말을 받았다.

“저를 납치하거나 죽였겠군요.”

연소현도.

"......."

공량도.

"......."

굳이 대답은 하지 않았다.

대답이 필요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리고, 오히려 그런 그들의 무응답이 더욱더 강호에게 깊게 박혔다.

“…오늘 일로 많이 배웠습니다. 아니.”

강호가 고개를 저어 보이고, 말을 고쳤다.

“많이 깨달았습니다.”

그때까지 별말이 없던 연소현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이제 강호 자네는 무엇을 해야 할까?”

최대한 안전한 곳에 머물기?

믿을 만한 사람과 아닌 사람을 구별하기?

순간, 수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강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다음과 같았다.

“…저와 가까운 사람들에게 주의나 경고를 주고, 그들을 안전하게 만들어야겠군요.”

강호가 안경 아래에서 서늘하게 눈빛을 빛냈다.

지성의 눈빛을 빛내던 것은 이전과 같았지만, 그 서늘함은.

강호라는 인물의 성장을 뜻했다.

“그들이 저를 직접 노리지 못하게 되었으니, 저를 노리기 위해서 제 주변을 이용할 테니 말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강호를 어떻게든 끌어내어, 조부 강상을 엮어 내려 할 것이라는 예측이었다.

“좋은 대답이로군.”

공량이 만족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또한, 강호는 연소현의 입가에도 미소가 걸리는 것을 보았다.

“그래.”

연소현은 비어 버린 강호의 잔에 새 찻물을 부어 주며 말했다.

“이제, 강호 자네는 중원국 정점(頂點)의 권력 싸움에 첫발을 내디딜 자격을 얻은 것이야.”

연소현은 두 손으로 공손하게 찻잔을 붙잡은 강호를 바라보았다.

“자네는 이제부터, 나의 비서역을 해야 할 것이야. 나를 따라다니며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모든것을 배워라.”

강호의 눈이 커졌다.

“저를 대공자님의 비서로 삼아주신단 말입니까?”

“그래. 너는 최대한 빨리. 모든것을 배워야만 한다.”

처음엔 연소현의 후의(厚意)에 당황하던 강호는 그의 말에서 뭔가모를 긴박감을 느꼈다.

“최대한 빨리, 말입니까?”

그에 대해 입을 연것은 공량이 었다.

“강상 어르신은 지금까지는 나이를 무색하게 할 만큼 정정하시지.”

강상은 의자에 앉은 채 실려 다니는 공량이 어르신이라고 불러야 할 정도로 노령이었다.

“두 분께서는…!”

강호는 공량이 하고자 하는 말을 모두 알아듣고, 입을 쩍 벌렸다.

“두 분께서는, 할아버지 이후까지의 일까지도. 지금 이 순간에 이미 준비를 시작하신 것이로군요…!”

* * *

황도.

낙양검가의 이공자 연자청과 십육가문 현 가주들의 긴급회의.

회의가 길어질수록, 천장에 자욱하게 깔린 연기는 더욱 짙어져 가고 있었다.

“그 강상의 손자 쪽은?”

다른 가주가 길게 연기를 뿜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낙양에 사람을 보내 명령을 전하라 했소. 가능한 한에서 납치를 해 보고, 안되면 확실하게 죽이라 했지.”

아끼는 손자인 강호가 죽기만 하더라도, 강상은 물심양면으로 큰 타격을 받게 될 것이다.

“놈이 이미 숨었을 경우, 차선책은?"

“그 강호라는 손자 놈의 주변을 이 잡듯이 잡아야지.”

“가까운 이들이 고초(苦楚)를 겪으면, 알아서 기어 나올 수밖에 없으니 말이오.”

“이미 준비를 하고 있다오.”

가주 하나가 이를 부득 갈았다.

“친가, 외가 할 것 없이. 그놈의 젖형제부터, 서원 시절 친구까지도 전부 털어야 할 것이오.”

“낙양검가 쪽은….”

조용히, 황금빛 가면 너머로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던 이공자 연자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게 맡겨 주시지요.”

비록

강호 그놈이 이공자 자신이 영향력을 행사하기 힘든, 중앙감찰각 소속이라는 것을 들었지만.

검가 내에 있다면, 어떻게든 할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럼, 그런 것으로 알겠소.”

오늘 회의의 진행을 맡은 가주가 그렇게 말한 후, 자신의 장죽(長竹)으로 원탁을 탁탁 두드렸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자, 그가 좌중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다들 지금쯤. 이상한 점을 느끼고들 있겠지.”

모두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중에는 물론, 이공자 연자청도 있었다.

“아무리 우리가 노마들에게 정신이 팔렸다지만.”

“강상. 그 미친 늙은이가 이리 소리 소문 없이 입궐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상하오.”

“특히나 이곳은 황도란 말이지.”

황도는 중원국 행정의 중심이기에, 모든 일 처리는 그 덩치에 맞게 굼뜨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강상의 재상 임명은 번갯 불에 콩을 구운 것처럼 신속하게 진행되어 버린 것이다.

“개혁파 놈들은 공량, 그 노마를 잃고 여러 계파로 쪼개졌고….”

“황실 충성파들은 상당수 이미 축출되어, 그 정도의 일을 소리 소문 없이 처리할 능력이 되지 않소.”

혼자, 머릿속으로 생각하든.

다 같이, 머리를 맞대고 생각하든.

결론은 동일한 곳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 폐하께서 직접 움직인것이군.”

황제.

중원국의 황제가 그 오랜 세월 끝에.

드디어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