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편 충신(忠臣)
비록 아직 의자에 앉아 이동하는 신세였지만.
공량의 눈만은 형형하게 살아서, 그 어떤 이상을 품은 젊은이보다도, 빛을 내고 있었다.
“흘흘, 대공자. 이 노부는 아직도 그날이 눈에 선하다오.”
연소현은 이제껏 강호가 보지 못했던 호의적인 태도로 노인의 말을 받아 주었다.
“그날이라면 역시, 본인이 재상이 되셨던 날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래. 그날이라오.”
감히 입을 열어 대화에 끼어들수 없는 자리라는것을 아는 강호는 속으로만 고개를 갸웃거렸다.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본인이 재상이 된 때를 말씀 하시는 이유가…?’
“그날은….”
그의 의문은 이어진 공량의 대답으로 자연스럽게 해소가 되었다.
“황도십육가문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북부전쟁의 결사안에 마지막까지 반대한, 강상 어르신이 재상직을 내려놓은 날이기도 했지.”
그 말에.
“어? 어르신. 제가 알기로는….”
강호는 자신도 모르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재상 정도의 인물이 그만두면, 그다음 후임을 임명하는 것은-.”
“그렇지. 후임 임명은 한참 뒤에나 이루어져야 했을 일이었네.”
강호가 강상의 손자임을 알고 있는 공량은 그의 무례를 받아 주었다.
“원래라면, 관례상. 재상이었던 분을 존중하고 기리는 뜻에서. 후임 재상은 최소 한두 달 이후에나 임명 절차가 이루어지지.”
강호는 이 대화에 끼어들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조부와 관련된 일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 어째서 공량 어르신께서 바로 재상직에 임명되셨던 것입니까?”
그 대답은 연소현에게서 나왔다.
“네 조부, 강상 어르신께서 너무 큰 충격을 주고 궁을 떠나셨기 때문이었어.”
“…예? 충격이요?”
연소현은 더 이상 대답을 하지않고, 그저 쓴웃음을 지었다.
“그날."
대답은 공량에게서 나왔다.
“강상 어르신은 황제 폐하의 어전 앞에서, 북부전쟁을 하면 안 될 이유를 고했다. 그 이유가 무려 열 여섯가지나 되었어.”
강호가 비명처럼 외쳤다.
“저는 그런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황궁의 모두가 그 일을 비밀에 묻었으니까.”
공량이 피식하고 웃었다.
“게다가 진짜 충격은 그 열 여섯가지 이유 때문이 아닐세.”
"예?"
* * *
과거의 그날.
사람이 아니라 곰보다도 거대한 체구를 지닌 거구의 노인이 우뚝 서 있었다.
“…여기까지가 이 전쟁을 절대 해서는 안 될 이유였사옵니다.”
거인(巨人)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노인, 강상이 절대 꺾이지 않을 신념을 담은 눈으로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폐하, 이래도 이 전쟁을 윤허하시겠습니까?”
“그, 그것이….”
어린 황제는 힘이 없다.
“분명, 전쟁은….”
'피해야 한다'는 말은, 어린 황제의 입에서 나오지 못했다.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은 충분했지만, '감히'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 대답은 황제의 옆에서 나왔다.
“재상!”
카랑카랑한 목소리.
“이 전쟁 결의안은 이미 황제 폐하께서 윤허하셨다는 것을 재상도 알고 계시지 않소?!”
그 목소리의 주인은, 당시 황제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섬기던 환관, 공손나강이었다.
“그런데 폐하의 어전에서 이렇게 무례하게 굴다니! 이것은 불충이오!"
“불충(不忠)이라….”
자조적인 어조로 불충이라는 말을 되뇌는 강상을 대신(大臣)들이 몰아붙였다.
“아무리 재상이라 해도, 이러실수는 없는 것이오!”
“이것은 황실에 대한 모독이오!”
문무백관(文武百官)이 그를 공격했다.
칼날처럼 날아드는 말들이 강상의 몸을 난자하는 것처럼 보였다.
화살처럼 발사된 말들이 강상의 몸을 무수히 꿰뚫는 것처럼 보였다.
“재상...."
황제가 재상 강상을 염려하는 말은 대신들의 노성(怒聲)에 묻혀 공허하게 스러졌다.
하지만 오히려 재상 강상은, 그 거대한 몸을 꼿꼿이 세우고, 그 모든 공격을 홀로 견뎠다.
"......."
"......."
강상을 따르던 충성파든, 아니면 개혁파든, 소수에 지나지 않는 이들은 감히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
'재상....'
그 개혁파들의 사이에는 그들의 우두머리인 공량도 있었다.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하오.'
대세는 이미 주전파(主戰派) 쪽으로 크게 기울었다.
'전부. 시작도 하지 않은 전쟁의 승리가 가져다줄 이득에 눈이 멀었다....'
지금 나서 봐야.
전쟁에 반대했었던 소수파들은 강상의 행동에 한데 묶여 극심한 피해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
그러나.
오히려 강상은 공량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따스한 눈빛을 한차례 던졌다.
"......!"
공량은 그 눈빛의 의미를 순간적으로 느꼈다.
'나서지 마시오.’
'그리고 뒤를 부탁하오.'
공량은 이를 악물었다.
'강상 어르신…!’
“재상은 당장에 무릎을 꿇고 무례에 사죄해야 할 것이오!”
“재상은-!”
그때.
강상으로부터 벼락같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소신(小臣), 강상!”
단 두 마디의 목소리에, 어전이 침묵에 잠겼다.
아니.
침묵에 잠긴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도 발악처럼 외치고 있는 이들이 있었지만, 강상의 목소리는 그 모든것을 뚫고 선명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던 것이다.
“재상직을 내려놓고자 하니, 마지막까지 불충한 소신을 용서치 마소서!”
그러고는….
“어어?!”
“지, 지금 뭘 하는...?!”
재상은 그 자리에서 관모를 벗어 바닥에 두고, 자신의 관복을 훌렁훌렁 벗기 시작했다.
“재상!”
그가 옷을 벗을수록, 나이를 무색하게 하는 근육이 어전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어전에서 대체 이게 무슨 짓이오?!"
공손나강의 얼굴이 분노로 달아올라 시뻘겋다 못해, 폭발할 정도로 붉어졌다.
“무슨 짓이냐니.”
강상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대답하며 옷을 계속 벗었다.
“이 늙은 신하가 입고 걸친 모든것이 황제 폐하의 은혜에서 비롯된 것이니.”
그는 마침내 모든 옷을 벗었다.
“관직을 내려놓으면, 모든 것을 돌려 드리고 가야 하지 않겠소?”
"......!"
근육질의 몸을 모두 드러낸 거인이 황제를 향해 엎드렸다.
오체투지(五體投地)였다.
“폐하! 불충한 소인은 물러나오니, 부디 만수무강하시옵소서!”
“저, 저런 미친 자가…?!”
내관들이 즉시 달려들었지만, 몇이 달려들어도, 알몸뚱이의 노인을 어전에서 끌어낼 수가 없었다.
“부디 전쟁에 고통받을 만백성들을 생각하시옵고…!”
쾅! 쾅!
이제 노인은 머리를 바닥에 찧기 시작했다.
“부디 국력을 보존하여, 서방(西方)의 열강(列强)들이 이 나라를 노리는 것을 막아 주시옵고…!”
쾅! 쾅!
머리를 찧을 때마다, 노인의 두개골에 금이 가고, 피가 튀었다.
“부디 이 나라의 국운이 쇠하지 않게 하여, 종묘사직을 온전히 보전하소서…!”
쾅! 쾅!
말리는 내관들 쪽이 오히려 내팽개쳐졌다.
노인의 머리는 이미 봉두난발에 피투성이 였다.
그리고 그 기행(奇行)은 황제가 내려와 직접 그를 말릴때까지 이어졌다.
* * *
“세상에…!”
누구에게도 듣지 못했던 비사에 강호가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할아버지께서 과거로부터 기행을 많이 하셨었기에, 황도의 광인(狂人)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셨다고는 들었지만….”
황제의 어전에서 알몸으로 오체투지를 하다니…!
“그런 일까지 하셨을 줄은…!”
“그게 끝이 아닐세.”
공량이 낄낄 웃었다.
“그렇게 관직을 내려놓은 강상 어르신은 알몸 그대로, 걸어서 자택까지 걸어가시려 했었지.”
“예에?!”
강호가 입을 쩍 하고 벌렸다.
“다행히도, 우리가 결사코 뜯어말려 그것까지는 막았지만.”
연소현이 고개를 내저었다.
“이미, 황궁의 대문앞까지는 알몸으로 걸어 나갔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랬지. 그랬어.”
공량은 아직도 선명한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낄낄 웃었고.
연소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아, 할아버지.”
강호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푹 하고 숙였다.
“막을 수도 없는 흐름이었는데, 왜 그런 짓까지 하셔서-.”
“그런 짓이라고?”
나지막한 공량의 목소리.
"......!"
오싹함을 느낀 강호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역시 그분의 핏줄을 이어받았지만, 아직 애송이에 불과한 것인가?”
공량의 날 선 말에 강호가 당황하자, 연소현이 중재하듯 입을 열었다.
“강호. 자네의 조부가 그날 자신의 체면을 버리고 하신 일 덕분에…."
연소현의 어조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아니었다.
“중원국의 역사가 바뀌었다.”
강호가 눈을 크게 떴다.
“역사가 바뀌었다고요…?”
역사의 개변(改變).
너무나 거대한 규모의 일이라.
강호로서는 짐작도 가지 않는 말이었다.
“그래.”
연소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여, 원래. 철저한 패전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북부전쟁이. 강화(講和) 협정으로 끝날 수 있게 되었지.”
거기까지 말을 들은 강호가 대화의 처음에 들었던 말을 기억해 냈다.
“그날이라면 역시, 본인이 재상이 되셨던 날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래. 그날이라오.
"아...!"
무언가를 깨달은 강호가 공량을 바라보았다.
“할아버지께서 그렇게 큰 충격을 주고 물러나셨기에…!”
자신의 조부인 강상이 충성파의 수장이라면,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이 인물, 공량은 개혁파의 수장이었다.
“황제 폐하께서 개혁파의 수장이시던 공량 어르신을 재상으로 임명하실 수 있었던 명분을 얻으셨던 것이로군요!”
“그래.”
연소현이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게다가 그 충격과 혼란을 수습해야 한다는 명분이 있으니, 관례를 무시하고 즉각적으로 새 재상 임명이 가능하기도 했지.”
“그래서…!”
공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노부는 재상직에 올랐지만, 전 재상이 갑작스럽게 물러나는 바람에, 인수인계를 하나도 받지 못했다는 명분을 얻을 수 있었지.”
“그것 또한, 할아버지의 노림수였군요!”
강호가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 덕분에 이 노부는 주마간산(走馬看山)으로 만들어진 허술하기 짝이 없는 전쟁 계획을, 처음부터 수정할 수 있었지.”
“그렇게 패전이 될 뻔한 전쟁의 향방(向方)을 바꾸셨군요!”
이미 결정된 전쟁을 막을 수는 없었지만.
전쟁의 결과는 바꿀 수 있었다.
"그럴 수가…."
이제 강호는 조부의 기행이 '역사를 바꾸었다'는 말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도 이 대화를 따라오는 것을 보니, 그저 평범한 애송이는 아니었군.”
공량이 충격에 잠겨있는 강호를 보며 평가를 수정했다.
"핏줄은 속일 수가 없다는 것인가. 어린 호랑이라도, 호랑이는 호랑이라는 것이군.”
강호에게는 그 칭찬이 들리지도 않았다.
'그저 할아버지의 기행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안에 들어 있는 고도의 정치적인 노림수와 그것을 맞아떨어지게 만들어 내는 힘.
그것이 두 명의 황제를 거쳐 재상직을 수행했던 인물의 관록(貫祿)이었다.
“그리고 당시에.”
공량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강상 어르신과 이 노부가 북부 전쟁의 결과를 확신할 수 있었던 이유는 따로 있었네.”
“그렇죠.”
충격에 잠겨있던, 강호는 다시 공량에게 집중했다.
“두 분 모두. 당시 시작하지 않은 전쟁의 결과에 확신이 있었어야, 그 모든 일을 해내실 수 있었겠지요. 그런데….”
거기까지 말하던 강호는 안경을 고쳐쓰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떻게 전쟁의 결과를 확신하신 것입니까?”
공량이 즉답했다.
“강상 어르신과 이 노부는 결과를 어렴풋이 예측은 하고 있었지만.”
강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신을 할 수는 없으셨군요.”
당연한 일이었다.
그 미래의 일에 대한 예측을 '자신'할지언정,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예언이라도 하듯 확정 지을 수 있을 리가 없잖은가.
“하지만 우리에게 서신이 도착했네.”
“서신이요?”
“그것은 어느 날. 자신이 전쟁의 결과를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한 어린 소년의 서신이었네.”
말을 이어 나가는 공량의 시선이 연소현을 향하고 있었다.
“설마…!”
공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서신은 여기 있는 대공자가 보낸 것이었네.”
"......!"
“그리고 우리는 각자 그 서신을 읽고, 전쟁의 결과를 확신할 수 있을 만큼 설득되었지.”
“…그랬군요.”
강호는 놀라긴 했지만, 그렇다고 당황하거나 이야기의 진위를 의심치는 않았다.
어린 소년의 서신에, 황도의 계파 수장 두 명이 확신을 가지고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
원래라면. 황당하기 이를 데가 없는 말이었지만.
지금의 강호에게는 연소현이라면 충분히 가능했을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던것이다.
“그리하여, 이 모든 일이 가능했던 것이지.”
그렇게 공량의 이야기가 마무리 되었다.
어째서 맨 처음에.
“네 조부(祖父). 강상(姜尙)에 대해서 너는 얼마나 알고 있느냐?”
연소현이 강호, 자신의 조부에 대해 물었는지도.
이제는 강호도 전부 이해하게 되었다.
그가 연소현을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대공자가 칩거를 끝내셨죠.”
그리고 다음으로 공량을 바라보았다.
“공량 어르신이 공씨 가문의 가주로 복귀하셨고요.”
그리고 다음으로 창문 너머로 펼쳐진 풍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황도가 위치한 방향이었다.
“그리고 이번에 할아버지께서 다시 입궁하신다는 말씀까지.”
강호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세 가지의 사건은 별개의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결코 별개가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그 모든 비사는 과거의 그날 거기서 끝나지 않고, 지금까지도 여러분을 통해 이어지고 있는 것이군요.”
공량이 미소 지었다.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