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258화 (258/350)

제8편 노신(老臣)

연소현은 새 동맹 가문의 가주들에게 충성을 맹세하라 했고.

가주들은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라고 펄쩍 뛰었었다.

“밖에 투자가들의 줄을 보셨소?”

“돈 냄새를 맡은 것이지.”

“엄청나게 모였더군. 대공자는 한동안 사업에 돈이 마를일은 없겠소.”

하지만.

황제와 십육가문 전대 가주들의 만남에 대해서 떠들던 그들의 이야기도 이제 바닥을 드러냈고.

밖에 모인 투자자들에 관한 이야기까지 마치고 나자.

“…으음.”

“흠.”

새삼스레 자신들의 처지가 다시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한 그들이었다.

'지금이라도 가서, 대공자에게 충성을 맹세해야 하나…?’

이것 참. 먼저 움직이자니, 다른 가주들의 눈치가 보인단 말이지.'

'그렇다고 지금 움직이지 않으면, 늦어 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다들 계산은 대충 끝난 것 같은데….'

그들이 서로서로 눈치를 살피며, 형성된 미묘한 무게중심은.

한 사람의 등장으로 무너지기시 작했다.

“오셨습니까.”

서씨 가문의 데릴사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은 어찌 되셨습니까?”

그는 돌아온 자신의 부인에게 공손하게 물었다.

“다행히 잘 풀렸답니다.”

데릴사위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거 잘되었군요.”

가주들은 그들의 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옷매무새를 고치러 간다더니?’

'뭐가 잘 풀렸다는 거지?’

서씨 가문의 가주 대행이 손을 내저었다.

“이제, 떠나죠. 이곳에 더 이상 용건은 없습니다.”

하녀 따위에게 부탁해서, 조용히 자신의 남편만 불러내어 떠났어도 좋을 상황에서.

굳이 직접 그녀가 돌아와 말을 하는 이유를.

그녀의 눈치 빠른 남편이 알아챘다.

“첫 번째 명령이 내려온 것입니까?”

“그래요.”

서씨 가문의 가주 대행은 자신들을 바라보는 가주들에게 들으라는 듯이 말했다.

“우리 가문의 '주군'께서 첫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그녀의 말에, 가주들이 백주 길가에서 난데없이 뒤통수를 맞은 것같은 표정을 지었다.

"......!"

“바, 방금 주군이라 하셨소?”

“설마, 그사이에 대공자에게 충성을 맹세한 것이오?!”

그녀에게 그리 다그치듯 묻는 가주들도 있었지만.

눈치가 더 빠르고.

행동이 더 빠른 이는.

"나, 나는 볼일이 있어서 말이오. 잠시…!”

“어허! 기다리시오! 나도 같이 가잔 말이오!”

당장에 문을 박차고 나섰다.

이미 미묘한 무게중심은 무너졌다.

충성을 맹세한 이가 벌써 나와 버린 이상.

그들이 더 이상 서로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었으니까.

접객실에서 뛰쳐나가, 대공자를 만나려는 이들로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체면도, 체통도 없군요.”

순식간에 비어 버린 접객실에서 데릴사위가 어깨를 으쓱였다.

“잘했습니다.”

그런 그를 향해서 가주 대행이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에 재치 있게 잘 받아 주었어요.”

그녀의 말에 그가 미소를 지었다.

“기왕 전쟁터에 나서게 된 거. 우리의 새 주군을 위한 '고기 방패'는 하나라도 더 있는 것이 좋겠지요.”

“요즘 화기가 많은 강남에서는 '총알받이'라는 말도 생겼다고 하더군요.”

그들 부부의 미소는 묘하게 닮아 섬뜩한 구석이 있었다.

* * *

“네 조부(祖父).”

연소현이 강호에게 말했다.

“강상(姜尙)에 대해서 너는 얼마나 알고 있느냐?”

“저희 할아버지 말씀입니까….”

타인의 입에서 할아버지의 이름을 듣는 것은 정말 오랜만의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할아버지는 중원국의 그 누구도 이름을 쉬이 부를수 없는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전대 황제 폐하의 충신 중의 충신이었으며. 선황(先皇) 폐하 때와 현 황제 폐하 시기, 두 번에 걸쳐 재상을 역임하신 분이시죠.”

그런 인물의 이름을 스스럼없이 부른다는 것은.

그만큼 연소현이 자신의 조부와 친분이 두텁기 때문이리라.

“…주저리주저리. 남들이 다 아는 이야기라면 한없이 떠들 수도 있지만.”

하지만 연소현이 그에게 '강상에 대해서 얼마나 아느냐'라고 던진 질문에는 더 깊은 뜻이 있으리라.

"대공자께서 오히려 저보다 더 할아버지에 대해서 더 깊이 알고 계실 것 같습니다.”

강호가 시선을 들어 연소현을 바라보았다.

“저와 저의 할아버지의 관계는 매우 친밀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조손(祖孫) 관계였으니까요.”

그의 시선에는 숨길 수 없는, 연소현을 향한 부러움이 담겨 있었다.

애초에 강호, 그가 전시에서 수석을 하고도 낙양검가로 향했었던 일부터가.

그의 조부, 강상이 매일같이 연소현에 대해서 강호에게 떠들었기 때문이 아니던가.

'허허, 강호야. 소현이 녀석이 보낸 이 서신 좀 보아라. 너는 이 탁월한 식견을 감히 이해할 수 있겠느냐?’

자신의 할아버지는 대공자의 서신을 하나하나 전부 소중히 보관했고.

'허어. 소현이 그 녀석이 칩거만 하지 않았어도, 지금쯤 큰일을 했을 터인데….’

비가 오는 날이면, 울적한 기분을 술로 다스리며 대공자의 이야기를 했고.

'…이 모든 일이, 녀석의 이야기를 귀담아듣지 않았었던 내 잘못이야,

가끔, 머리도 꼬리도 없이.

영문을 알 수 없는 혼잣말을 불쑥 할 때도, 연소현이 관련된 이야기임은 틀림없었다.

그중에서, 강호의 완전 기억 능력 이전에 그의 뇌리에 깊게 박힌 기억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자만하지 마라.'

모두가 강호, 자신을 천재라고 치켜세워 줄 때.

그의 조부가 했었던 말이었다.

'진짜 천재는 연소현. 그 녀석을 말하는 것이다. '

그가 어릴 적부터 신동(神童)이니, 영재(英材)니, 온갖 이야기를 들었어도.

그가 서원에서 압도적인 성적을 기록해도.

그가 황제 폐하의 앞에서 펼쳐진 전시에서 수석을 따냈어도.

조부의 생각은 바뀌질 않았었다.

“그런데 저희 할아버지야, 어차피 이미 오래전에 은퇴하신 분이 아닙니까. 그런분이 어떻게 현재 황도의 지각변동과 관련이-.”

“그 전에 잠시.”

조심스레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연소현이 손을 들어 보였고, 강호는 입을 다물었다.

“주인님…! 지금 동맹 가주들께서 일제히 주인님을 뵙겠다고…!”

밖에서 들려오는 일령의 목소리에는, 그녀답지 않게 당혹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가주들이라면, 아까 서씨 가문의 가주 대행과 같은 처지의 자들이지 않은가.'

그들이 어째서 단체로 몰려왔는가.

강호가 생각을 시작하려 할 때.

“…서씨 가문의 가주 대행이 그들을 부추긴 모양이군.”

연소현은 이미 답을 내어 놓았다.

“어떻게든 함께 싸울 머릿수를 늘리기 위함이었겠지.”

그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며, 중얼거렸다.

“알아서 움직여 주니, 편하군.”

지금 동맹 가주들이 몰려왔다는 것.

그 전에, 서씨 가문의 가주 대행이 가장 먼저 충성을 맹세했었던 것.

그리고 여러 제반 사항들.

그 사실들은 강호도 이곳에 있었던 만큼, 잘 알고 있었지만.

그는 '추리'를 해야 했고.

연소현은 즉시 '해답'에 이르렀다.

“…그렇군요.”

강호는 쓴웃음이 새어 나온 표정을 감추기 위해, 자신의 앞에 놓여있던 찻잔을 들었다.

'할아버지….,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요즘, 소손(小孫)은 할아버지의 말씀처럼. 하늘위엔 더 높은 하늘(天外天)이 있다는 것을, 잘 느끼고 있습니다.'

“들라 하라.”

연소현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가주들이 문을 부수듯이 밀어닥 쳤다.

“대공자님!”

“저희 가문의 충성도 받아 주시면…!"

“어허, 밀지 말게! 순서를 지키란 말이야!”

“저희 가문은 서씨 가문보다 훨씬 유능합니다!”

한번 둑이 무너지자, 대세를 거역할 수 없는 일이 되고.

끝까지 눈치나 보던 가주들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공자님…!”

그리하여.

지금 연소현 앞에서, 그들이 한편의 촌극(寸劇) 같은 꼴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강호가 눈살을 찌푸리면서 생각했다.

'대공자께서 당장 충성을 받아들인다고 하여도, 이래서는 모양새가 좋지 않겠어.'

서씨 가문의 가주 대행은 최소한의 격식을 갖추고 예라도 표했지만.

이들은 지금, 오일장의 장돌뱅이처럼 충성을 받아 달라.

그렇게 기세로 우기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추하게 구는군.’

이들이 결정을 미루고 또 미루며, 질질 끌고 있던 것은, 강호도 잘 알고있는 만큼.

그들에 대해서 결코 곱게 볼 수가 없었다.

'대공자께서 뭔가 방법이-.'

슬쩍, 연소현을 바라본 강호는 그의 여유로운 표정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대공자께서는 수가 있는 모양이시군.'

그리고 그 연소현의 '방법'은 그의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연소현의 집무실을 방문했다.

“주인님, 말씀하셨던 손님이 찾아오셨…!”

일령이 뭐라고 외치지만, 가주들이 피우는 난리에 묻혔다.

“모두 예를 갖추시오!”

쩌렁쩌렁한 내공으로 가득한 목소리.

겨우 내공이 담긴 목소리에, 위세 높은 유력 가문의 가주들이 위압당할리가 없었다.

"......."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침묵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황도십육가문 중 공씨 가문의 현(現) 가주이시자, 재상직을 역임하셨던 공량 어르신께서 친히 검가의 대공자님을 방문하셨소이다!”

격전을 치른 후 얼굴만 대충 씻고, 옷만 갈아입은 공담웅이 바퀴 달린 의자를 밀고 들어왔다.

"......."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은, 공량.

노마 중 일인(一人)이자.

공씨 가문의 현 가주가 직접 연소현을 찾아온 것이다.

“왜 이리 잡것들이 소란스러운 것이야? 여기가 장터라도 되나?”

“잡것이라니…!”

잡것이라는 말에 순간 울컥했던 가주들은 공량과 눈이 마주치자, 즉시 고개를 숙이고 눈을 깔았다.

'병상에서 일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더니?!’

'저 눈빛은 대체…!’

그들은 간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대공자.”

모두가 고개를 숙이고 눈을 피했음에도, 공량의 표정은 어딘가 불만족스러웠다.

“이 잡것들이 새로 전장에 투입될 전력들이오?”

“그렇습니다.”

연소현이 빙긋 웃으며 긍정을 표했다.

“마음에 차지 않으십니까?”

공량이 투덜거리듯이 말했다.

“그래도 유력 가문의 가주들이라는 자들이. 꼴이 무슨 꿔다놓은 보릿자루 같구먼.”

가주들을 살피는 그의 눈빛은 무심하여 섬뜩하기가 짝이 없었다.

“명필(名筆)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연소현이 웃음기를 담고 그리 말하자, 공량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명필은 아니지만. 뭐, 지금같은 상황에서는 찬밥 더운밥 가릴수는 없지.”

“저, 저기 대공자님…!”

가주 중 하나가 용기를 짜내어 입을 열었다.

“대체 지금 이게 무슨 상황입-?”

“시끄럽다, 이놈아!”

그러나 그가 용기를 겨우짜내 꺼낸 말은, 마무리도 지어지지 못했다.

“충성을 바치니 어쩌니 하던 놈들이, 감히 윗분들의 대화에 함부로 끼어들어?!”

내공도 없고, 얼마 전까지 병상에 있었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성량.

“죄, 죄송합니다!”

말을 꺼냈던 이뿐만 아니라, 나머지 가주들조차도 식은땀을 흘렸다.

“너희는 대공자에게 충성을 바쳤고, 대공자는 너희의 통제권을 내게 넘겼으니. 너희는 앞으로 나의 지휘에 따라야 할 것이야.”

"......!"

공량의 지휘라니.

가주들이 숨을 삼켰다.

“너희 가문들은 지금 즉시, 이공자 측 동맹 가문들과의 전쟁에 투입될 것이야.”

공량이 가주들을 바라보며, 이를 드러내며 미소를 만들어 보였다.

“너희는 이제 내 아래에서 피를 흘려, 자신들의 가치를 증명하는것과 더불어서. 너희가 제대로 충성을 바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할 것이야.”

"......."

"......."

그 모습에 드디어 만족한 듯이 공량이 웃었다.

“이 대접에 불만이 있으면, 결정을 못 내리고 질질 끌며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깎아 먹었던 자기 자신을 원망해라.”

거기에 무슨 말을 더하겠는가.

"......."

가주들은 연못 속의 물고기처럼 말은 못 하고 입만 뻥끗뻥끗하다가, 결국 고개를 떨궜다.

그러자 공량이 드디어 만족한 듯이 미소를 지었다.

“다들 내 손자를 따라가라.”

“공담웅입니다.”

공량의 손자, 공담웅이 가주들을 향해 예를 표해 보였다.

“이 녀석이 너희가 투입되어야 할 전선을 친절하게 알려 줄 것이다.”

그들은 방금 징병당한 빈민처럼.

고개를 푹 숙인 채, 공담웅을 따라 얌전히 출구를 향해 나갔다.

그들이 자리를 모두 비우고, 문이 닫히자.

공량이 연소현을 향해 환하게 미소 지었다.

“대공자! 오랜만이오!”

단, 며칠 만이건만.

몇 년을 보지 못한 듯, 구는 노인의 모습에서는.

방금까지 살기를 풀풀 흘리던 모습을 전혀 떠올릴 수가 없었다.

“잘 오셨습니다, 어르신.”

손을 모아 정중히 예를 표하려는 연소현에게 공량이 손을 내저었다.

“어허…! 우리 사이에 무슨 예를 차리고 그러시오?”

“하하, 이것 참. 어르신도.”

두 사람은 예를 차리는 대신, 간단한 포옹으로 '동지를 만난 반가움을 표했다.

"......."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강호가 혀를 내둘렀다.

'공씨 가문이 대공자님의 편을들어 나섰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믿기지 않았는데….'

두 사람의 친분을 확인하자, 어째서 이 전장에서 공씨 가문이 선뜻 연소현의 편에 섰는지.

강호는 단박에 납득할 수 있었다.

'할아버지도 그렇고, 대공자님은 공량 어르신과도 친분이 있던 것인가…!’

시간이 갈수록, 대공자와 자신의 차이는 더욱 실감이 났다.

자신이 서원에서 애송이들과 문자를 익히고 있을 시절, 대공자는 시대에 남을 이들과 친분을 만들고있었던 것이다.

“대공자!”

공량이 즐거움을 감추지도 않고 표정과 목소리에 그대로 드러냈다.

“내 그대를 위해, 좋은 소식을 가져왔소!”

그 말을 들은 연소현의 얼굴에 안도의 표정이 스쳐지나갔다.

“…황도에서의 작전이 성공했군요.”

“그렇소! 그것도 대성공이라오!”

공량이 큰 소리로 웃었다.

“놈들은 눈을 시퍼렇게 뜬 채로, 우리에게 뒤통수를 얻어맞았지!”

* * *

황도.

“검가의 이공자!”

“왔군!”

공씨를 제외한 십육가문의 가주들이 모여 있는 회의장에 들어선 이공자를 부르는 목소리에는.

단지, 다급함만이 가득할 뿐.

호의라고는 한 점 없었다.

“대공자와 전대 가주들의 만남! 그리고 전대 가주들의 황제 폐하에 대한 알현 소문! 이 모든 것이 눈속임이었소!”

회의실의 가주들이 이를 갈았다.

“전부, 우리의 눈을 속이기 위함이었소!”

이공자가 가면 아래에서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무슨 상황인지, 누가 제대로 말 좀 해 주시지요.”

자리에 앉기도 전에,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우리가 전부, 전대 가주들의 움직임에 정신이 팔린 사이에, 뒤통수를 맞았어!”

가주 하나가 두꺼운 회의용 책상을 내리쳤다.

“황실 충성파 놈들과 개혁파 놈들이 합심해서…! 강상, 그 미친 늙은이를 다시 궁으로 불러들였단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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