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편 바뀌는 흐름(流)
대공자의 죄악계곡 사업 본부.
옥상.
“이제, 이 동맹에서 그대들의 위치를 충분히 자각했겠지?”
연소현의 이 발언은 이제 더이상 오연하게만 느껴지지는 않았다.
내리깔아 보는 듯한 시선도.
뒷짐을 진 자세도.
더 이상 오만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 대공자 연소현은.
마땅히 그런 언행을 해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으니.
"......."
새 동맹 가문의 가주들이 다들 서로 눈치를 보고 있을 때.
“…대공자의 말씀은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가장 먼저 나선 것은 서씨 가문의 젊은 가주 대행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최대한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애초에 저희 서씨 가문은 이 동맹에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고, 그 증거는 대공자님도 확인하지 않으셨습니까?”
여전히 밖에 쌓여 있는 인두(人頭)의 탑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런 저희 서씨 가문에 위치를 자각하라 하셔도. 더 이상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할지-.”
연소현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충성(忠誠).”
짧지만, 강한 단 한 마디.
그 한 마디에 대번에 좌중이 술렁였다.
“충성이라니….”
“대공자는 동등한 위치에서의 동맹 관계 대신, 충성을 기반으로 한 동맹 관계를 원하는 것인가…!”
연소현의 시선이 좌중을 훑었다.
“나는 이 동맹의 맹주(盟主)로서, 모든 동맹 일원의 충성을 바란다.”
분명 여기 있는 인물들은 자신의 위치를 자각했다.
그리고 당연히 이 동맹에 헌신하겠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연소현이 그들에게 원하는 것은 그다음 단계.
그 이상이었다.
“맹주와 충성이라니….”
서씨 가문의 가주 대행이 치를 떨었다.
“터무니없습니다. 저희더러 대공자의 봉신(封臣)이라도 되라는 말씀입니까?”
그녀의 남편인 서씨 가문의 데릴 사위도 나섰다.
“낙양검가에는 중원국 각지에 봉신가(封臣家)라 불리는 이들이 있었지요. 대공자께서 원하시는 것은 저희 가문들이 그런 봉신가가 되길 원하시는 것입니까?”
“본가의 봉신가?”
그 말에 연소현이 피식하고 웃었다.
“본가의 봉신가들은. 예로부터 본가에 무한한 헌신을 통해 충성을 증명하고, 그 대가로서 봉신으로 임명을 받은 것이다.”
이제, 연소현의 말투는 완전히 하대가 되었다.
“그런데 그런 봉신가의 위치를 거저먹겠다니, 욕심이 지나친 것이아닌가?”
연소현의 시선이 불쾌함을 담았다.
“본 대공자가 너희 가문들에 원하는 것은 무조건적인 충성일 뿐이다.”
“하…!”
지금 여기, 누가 생각해도 연소현의 요구는 지나쳤다.
“분명.”
그러자 그때까지 눈치를 보던,
다른 가주들도 반발하기 시작했다.
“대공자님의 실력도 잘 보았고, 저희의 필요성이 그만큼 줄었다는것도 체감했습니다만….”
하나가 나서기 시작하자, 줄줄이 입을 열어 떠들기 시작했다.
“무조건적인 충성이라니, 그건 아무래도 좀 어려운 요구라고 생각합니다.”
“저희 가문들이 비록. 이공자나 삼공자와의 나쁜 관계로 인해, 그 성장세가 멈췄다고는 하지만.”
“그 와중에도 저희 가문들이 낙양의 유력(有力) 가문 위치를 유지하고 있을 정도의 힘이 있다는 것은 명심하셔야 할 것입니다.”
"대공자님.”
서씨 가문의 가주 대행이 쐐기를박듯 한 발 더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잊지 마시지요. 저희의 가치가 줄어들었다고 해도, 여전히 대공자는 저희가 필요한 상황이시니.”
그녀의 날 선 목소리가 연소현을 말로 난자하려는 듯이 섬뜩했다.
“구장들을 잘 구슬려, 어떻게 넘어가긴 했지만. 그들이 이끌고 온 관병을 보면 모르시겠습니까?”
그녀의 손이 계곡 상류를 향했다.
“저들은 자신들이 통제하는 관병뿐만 아니라, 중앙 관청의 관병들까지도 몰고 왔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의 시선은 연소현에게 날카롭게 꽂혀 있었다.
“중앙 관청의 관병이 나섰다는 것은, 낙양의 최고위 관료들 중에 자신들이 서야할 줄을 결정한 이들이 나왔다는 말이지요.”
처음, 연소현이 북망산을 방문했던 이래로.
최고위 관료들은 한 발씩 뒤로 물러나 중립을 지키고 있었다.
황도십육가문의 전대 가주들이 그만큼 두려운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공씨 가문을 제외한 십육가문의 전대 가주들은 제대로 모습도 보이지 않고 있지요.”
데릴사위가 그녀의 말을 거들었다.
“대공자의 북망산 방문에 따른 효과가 이제 끝났다는 뜻입니다.”
단언(斷言).
주변의 가주들이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당연히.
“최고위 관료 중 일부가 자신이 서야 할 줄을 결정했다고?”
“최소한. 중앙 관청의 관병 동원 결정을 내린 이들이, 대공자님 이외의 줄을 선택한 것은 명확하지요.”
연소현은 동의하지 않았다.
“전혀. 본 대공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네만.”
데릴사위가 한숨을 쉬듯 말했다.
“대공자님. 당장 대공자님이 그 힘을 과시하고, 기세가 등등한 시점이라 해도.”
그는 연소현을 달래듯 은근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기세만으로 현실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연소현이 손을 들어, 그 말을 끊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의 시녀장 정아의 청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주인님. 가효구와 탄륭구의 구장들께서 주인님을 뵙길 청하고 있습니다.”
“마침 잘되었군.”
연소현이 가주들에게 말했다.
“저들이 낙양의 최고위 관료의 일원이니. 저들에게 최고위층의 분위기를 직접 전해 들으면 되지 않겠나?”
“…대공자께서 원하신다면, 그리 하시지요.”
서씨 가문의 데릴사위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황하의 강줄기는 뒤틀릴지언정, 그 하구(河口)의 위치가 바뀌지는 않는 법인데….”
그의 말은 혼잣말이었지만, 연소현이 들으라고 한 말이 분명했다.
하지만 연소현은 신경도 쓰지 않고, 시녀장 정아에게 손을 까닥여 보였다.
“구장들을 들라 하라.”
그리고.
가효구와 탄륭구의 구장들.
최근에 이공자 측의 대선상회에 대한 수사망에서 빼주는 대신, 연소현의 동맹이 되기로 선택한 이들이었다.
“검가의 대공자를 뵙소이다.”
“급히 전할 소식이 있어, 이리 다시 방문하게 되었소.”
그들은 가주들을 알은체도 하지 않았다.
"......."
"......."
가주들 또한 그들을 알은체하지 않았다.
구장들이 과거 이공자 줄에 서서, 그들 가문에 많은 행정적 불이익을 줬던 역사가 있기 때문이었다.
'급한 소식이라.’
평소라면 그들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질색했을, 서씨 가문의 데릴사위는 오늘따라 그들이 반가웠다.
'분명 최고위 관료들에게서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있는 것이겠지.'
이공자 측과 삼공자 측이 아무리 정신이없고 손이 모자라는 상황이라 해도.
그들이 대공자가 마음대로 활개치도록, 그대로 둘리가 없었다.
'현실을 확인하면, 대공자. 그대도 우리 가문들에 대한 터무니없는 요구를 무를수밖에 없을것이오.'
서씨 가문의 데릴사위뿐만이 아니었다.
모든 가문의 가주들이 두 구장에게 기대감을 품은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래. 무슨 소식이오?”
가효구의 구장이 나섰다.
“우리는 지금, 이 자리를 빌려. 대공자에 대한 낙양 중앙 관청의 입장을 밝히고자 하오.”
품에서 입장문을 꺼내든 그가 뜸을 들이지도 않고 그것을 읽었다.
“중앙 관청에서 이번 상인들의 습격 사건에 대해, 대공자를 향한 수사를 명한 것은 명백한 실수이며….”
"......!"
입장문을 듣던, 가주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에 대해 낙양검가의 대공자 연소현에게 심심한 사과와 유감의 뜻을 전한다.”
'최고위 관료들이 이렇게 맥없이 물러난다고…?!’
서씨 가문의 가주 대행이 연소현을 순간적으로 바라보았고.
그녀는 연소현이 아무렇지도 않게.
당연하다는 듯이 입장문을 듣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낙양 중앙 관청은 공식적으로, 낙양검가의 어떤 후계자도 지지하지않고 중립을 지킬것을 다시한번 명확히 밝히며.”
입장문을 읽는 가효구 구장의 목소리에는 거침이 없었다.
“그에 따라 당연히 검가의 대공자에 있어서도, 앞으로도 어떤 종류의 정치적 방해 공작이 없을 것을 약속한다.”
입장문의 대독이 끝나자, 옆에 서있던 탄륭구 구장이 연소현을 향해 말했다.
“이상. 여기까지가 낙양지사 대행직을 수행중인 부지사가 최고위 관료들을 대표하여 직접 쓴 입장문이었다오.”
가주들은 멍하니 선 채.
"......."
"......."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머릿속이 텅 비어 버려서, 뭔 말을 하려 해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대공자.”
오히려 입을 연 쪽은 구장들쪽 이었다.
“우리도 이 입장문을 전달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황당하기가 그지 없었소.”
“그래서. 얼른 중앙 관청에 방문하여 상황을 알아보았다오.”
“그랬더니, 중앙 관청의 최고위 층을 중심으로 신뢰도가 무척 높은 정보 하나가 돌고 있더군.”
두 구장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연소현에게 말했다.
“정보에 따르면.”
“몇몇을 제외한 십육가문의 전대 가주들이 황도(皇都)에 도착하여, 황제 폐하를 알현할 예정이라는데….”
멍하게 서 있던 가주들이 경악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
"......!"
황제(皇帝).
아무리 황권이 약한 시대라지만.
그 이름이 가진 무게는, 감히 일개 가문 따위가 범접할 수도 없을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연소현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아까, 그대가 황하 하구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지.”
“아? 예.”
그의 시선은 서씨 가문의 데릴사위를 향하고 있었다.
“물줄기는 뒤틀린다 해도, 하구의 위치는 바뀌지 않는다고 했던가.”
"예, 그리 말했습니다만….”
연소현이 혀를 찼다.
“사실, 황하의 하구는 역사적으로 몇 번이나 크게 위치가 바뀌었다.”
“예…?”
연소현이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그에게 설명해 주었다.
“수천 년 전에 황하는 당시 발해국(渤海國) 북부로 흘러 나갔고, 태산의 남쪽으로 흘러 나간 적도 있다네.”
연소현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걸렸다.
“지금 자네가 보고 있는 것이 바로, 황하의 하구가 위치를 바꾸고있는 모습인것 같군.”
대세 (大勢).
흐름이 바뀌고 있다는 연소현의 말
"......."
서씨 가문의 데릴사위는 감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 * *
“줄을 서십시오! 다들 순서를 기다리셔야 합니다!”
죄악계곡의 사업 본부는 새로 방문한 이들로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루고 있었다.
“자네도 소문을 듣고 왔는가?”
줄을 서서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는 투자자에게, 말을 거는 이가 있었다.
“…자네?! 분명, 오늘 오전에 죄악계곡에 투자한 돈을 돌려받으러 간다 하지 않았던가?”
“그랬었지.”
줄을 서서 대기 중인 투자자에게 말을 건 것은, 다름 아닌.
투자금을 회수하러 왔었다가, 다시 투자를 하겠다고 달려들었던.
바로 그 투자자 중 하나였다.
“하지만, 직접 방문한 이후에. 생각을 바꾸어서, 기존의 세 배를 투자하기로 결정했다네.”
그는 그 과정에서 심히 추한 모습을 보였던 것과, 기존의 투자금은 한 푼도 건지지 못했던 일 따위는 생략했다.
“아아! 나도 좀 빨리 움직일 것을…!”
그래야 상대가 발을 동동 굴리는 모습에서 우월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자네는 대공자가 믿음직스럽지 못하다고, 처음부터 투자할 생각이 없었었지.”
“아니…. 그거야 위험한 투자이니 그랬지.”
그 말에 발을 구르던 상대가 입맛을 다셨다.
“일이 이렇게 되어 버릴 줄을 그 누가 알았겠는가?”
“그건 그렇소.”
옆에서 그 대화를 듣고 있던 투자자들도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대공자가 검가의 전력을 빌린것도 아니고, 자신의 힘으로 죄악 계곡을 정벌해버리고….”
“중앙 관청의 최고위 관료들에게 사과 서신도 받았다고 하니까 말이지.”
“뭔가, 황도에 관련된 소문도 있던데…."
투자자 한 명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오전까지만 해도, 상인들이 마구 죽어 나가자. 대공자의 잔혹함이 그 형제들과 다를바가 없다는 말까지도 돌았는데.”
“오후가 되니. 모두가 어떻게든 얼굴이라도 한번 보려고 기대한다니 말이오.”
“무섭구먼 무검자(無劍者).”
“검이 없이도,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이루어내는 인물이라.”
“누가 재해석을 한 별호인지는 몰라도, 아주 제대로 했어.”
그렇게 대화를 주고받던 이들의 시선은 곧 세 배를 투자했다는 투자자를 향했다.
그들의 시선에는 부러움이 담겨 있었다.
“이제는 최소 투자 금액의 단위가 달라졌다던데.”
“투자가 이렇게 늘어나니, 배당도 기존에 비해서 압도적으로 줄었다고 들었소.”
“이제는 안정적인 사업이다, 모두에게 이렇게 인식된 것이지.”
“이 모든 일이 생기기 전에, 세 배를 투자했다는 그대가 진정한 승자구려.”
그 말에 투자자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그저 운이 좋았던 것뿐이라오!”
사실, 그 또한 다시 계약서를 쓰게 되면서 상당히 불리한 조건을 감수해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구 밖으로까지, 길게 줄을 서 있는 투자자들의 행렬을 보면서.
그는 기쁘게 미소 지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