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254화 (254/350)

제4편 피를 흘려야 할 자(者)들

죄악계곡 상류.

시체들이 즐비한 광경은.

낙양이라는 거대 도시의 포쾌로 경력을 쌓아오며, 나름 익숙하다면 익숙한 광경이지만.

“......."

오늘만큼 한 장소에서 많은 시체를 본 것은, 박 포쾌도 처음이었다.

시체는 시체일 뿐이라.

삼오통방이든, 백골파든, 흑강패든 상관없이 뒤섞여 계곡을 빼곡하게 뒤덮고 있었고.

시체들에서 흘러나온 피가 계곡의 경사를 타고 모여들어 개울이 되어 흐르고 있었다.

“…결국, 대공자는 우리 관병들의 도움조차 필요가 없었던 것인가.”

“그러게요.”

옆에서 후배 포쾌가 연초 연기를 뿜으며 말했다.

“우리는 그냥 뒤처리 담당이군요.”

그는 전신에 피가 튄 상태였다.

그리고 그 꼴은 박 포쾌도 마찬가지였다.

“엄청난 전력이야. 안 그래도 대공자 이야기로 소란스러운 낙양인데 말이지. 이젠 아예 대공자 이야기밖에 돌지 않게 되겠군.”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그 치욕의 상징이나 다름없던, 무검자의 이름이 이렇게 바뀔 줄이야.”

“…무서운 인물이다. 대공자는.”

“저는 오히려 환영인데요?”

“환영…한다고?”

"예."

후배 포쾌가 킬킬하고 웃으며, 자신의 창을 내리찍었다.

"큭..!"

숨을 헐떡이면서 꿈틀거리던 암흑가 패잔병의 목숨이 그대로 끊어졌다.

관병들은 전투가 끝난다음에나 배치되어, 이렇게 패잔병들을 처리하는 중이었다.

“선배. 이제야, 뭔가 제대로 돌아가는 것 같지 않습니까?”

후배 포쾌는 물고 있던 연초를 한차례 빨아들였다.

“…그런가.”

“그렇지요.”

후배 포쾌는 꿈틀거리며, 자신의 발을 붙잡는 또 다른 패잔병의 가슴팍에 창을 박아 넣었다.

“흣차.”

깊이 박혔던 창을 빼 드는 후배 포쾌는 딱히 감흥도 없는 표정이었다.

“용봉지회 경기장, 빈민 노동자들의 봉기에 대한 소문. 선배도 들으셨지 않습니까?”

“…들었지.”

박 포쾌가 새 연초를 물었다.

“검가의 삼공자 측이 몰래, 전부 무력으로 진압하려 했는데. 오히려 그들이 암천존자에게 당했다는 이야기가 있더군.”

그가 뿜은 연기가 계곡의 피 냄새 실린 강한 바람에 휩쓸려 순식간에 흩어졌다.

“그리고 대공자가 마무리 공정을 이어받았다지.”

“선배. 제 말이, 그 말입니다.”

후배 포쾌는 미소를 지으며, 확인 사살을 이어 나갔다.

“그 죄 없는 노동자들을 도살하려한 검가의 삼공자 측이든. X같은 암흑가 놈들이든.”

그의 입가에 띤 미소는 일견 상쾌하기까지 했다.

“마땅히 피를 흘려야 할 놈들이, 피를 흘리고 있는것 아닙니까?”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그가 내지르는 창질에도 힘이 실렸다.

“…오늘 상계에서 벌어진 일은?”

후배 포쾌가 어깨를 으쓱였다.

"자신들이 원해서,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드는 자들입니다. 어쩔 수는 없는 법이지요.”

“......."

약간 지친 듯.

후배 포쾌가 시체에 박은 창에 기댄 채로 박 포쾌를 바라보았다.

“선배는 다르게 생각하십니까?”

“…모르겠다. 하지만 대공자의 손속이 과했던 것은 사실이다.”

“대공자가 손속이 과해요?”

후배 포쾌가 피식 웃었다.

”선배."

그가 바닥에 가래침을 뱉었다.

“오늘. 다들 처음에 예상했었듯이. 대공자가 우리 관병을 먼저 투입했다면, 어땠을까요?”

그가 손을 들어서, 관병들이 한데 모으고 있는 시체 더미를 가리켰다.

적들의 시체를 쌓고 있는 중앙 관청의 관병들은 온몸이 피와 오물로 범벅되어 있었으나.

그들 중에, 당연하지만.

부상자도, 사망자도 없었다.

“적어도 우리 둘 중에, 하나는 저 녀석들과 함께 묻혀 있었을걸요. 우리 애들 전체랑 같이.”

“......."

“대신 대공자는 자신의 병력 희생을 크게 줄일 수 있었을 겁니다.”

전멸하다시피한 적들과는 달리, 희생이 적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연소현 측에 피해가 없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지.”

“그렇죠.”

후배 포쾌가 미소를 지으며, 연초를 빨았지만, 연기가 들이마셔지지는 않았다.

어느새 얼굴에 튄 암흑가 조직원의 피가 연초를 꺼트렸었기 때문이었다.

“선배. 저는 말입니다.”

후배 포쾌는 미련없이 꺼진 연초를 던져 버렸다.

“아예, 이참에 대공자가 검가를 물려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참입니다.”

“…네가 무슨 검가의 장로도 아니고.”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박 포쾌가 피식하고 웃었다.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고, 뭐가 달라지긴 하냐?”

후배 포쾌도 낄낄거리며 웃었다.

“당연히, 전혀 달라질 것이 하나도 없지요.”

한참을 웃던 후배 포쾌가 자신의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냥 생각이 그렇다는 거죠, 뭐. 그냥 생각이 말입니다.”

그가 시선을 멀리 죄악계곡의 최상류로 향했다.

“하지만 말이다.”

후배와 같은 광경을 바라보며, 박 포쾌가 말했다.

“누가 우두머리가 되든. 우리 같은 아랫사람들의 삶에 있어 달라지는 건 크게 없다.”

“......."

박 포쾌의 말에는 인생의 선배로서 가지는 특유의 무게가 있었다.

“적어도 오늘은 우리 차례가 아니었지만 말이다. 결국, 언젠가는 우리 피도 이렇게 흐르게 될 것이야.”

“그럴지도요.”

“게다가, 크게 뒤처져 있던 대공자가 차기 가주가 되려면. 다른 이들보다 훨씬 더 많은 피가 흐르게 될 것이고.”

“요즘처럼 말이지요.”

“요즘 이상으로.”

“…그렇겠죠.”

후배 포쾌는 창에 기댄 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그의 입이 열렸다.

그가 하늘 같은 선배의 말에 토를 다는 것은 드문 일이었기에, 박 포쾌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 대공자가, 낙양검가의 우두머리가 되면 말입니다.”

선배의 시선을 받으며, 후배 포쾌가 흐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 순서가 어느 날 찾아와, 피와 내장을 줄줄 쏟게 되는 날이 오게 되더라도….”

그의 목소리가 약간 잠겨 있었다.

“그 피가 마땅히 흘러야 할 방향으로 흐를 것 같다는 말이죠.”

표현 자체는 의뭉스러웠지만.

“…마땅히 흘러야 할 방향이라.”

그만큼 담긴 의미를 되씹게 하는 힘이 있는 말이었다.

“…그럴지도 모르겠군.”

박 포쾌는 후배의 시선을 따라 죄악계곡의 최상류를 바라보았다.

계곡은 시체들로 가득한 모습이지만.

어째서인지 그들에게는 이전보다 훨씬.

깨끗해 보였다.

* * *

낙양, 하씨 상회의 응접실.

상석에 앉아 있는 소녀들의 모습이 있었다.

상회의 주인인 낙양검가의 삼공녀 연다은과 사공녀 연다혜였다.

그런데 그녀들은 침착하게 앉아 있었으면서도, 그 안색은 유달리 창백했고.

“......."

맞잡고 있는 손은 살짝 떨리기까지 하고 있었다.

“......."

“그러니까 말입니다, 누님들.”

사공자는 손발을 내저으며, 필사적으로 설명했다.

“큰형님께서는 그저 분노를 표출하고 기분을 풀기 위해서, 그 상인들을 전부 죽이-.”

그가 급히 말을 골랐다.

“처리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큰형님을 열심히 변호 중이었다.

“큰형님께는 선택권이 없었어요.

머리가 영리하기로는 검가에서도 손에 꼽히는 사공자 연비가, 큰형님 연소현이 어떤 부분을 가장 두려워하는지.

모를리가 없었다.

“그 상인들은 이공자 측의 사주를 받아, 오만하고 뻔뻔한 방식으로 큰형님을 능멸한 것이며. 감히, 검가의 공녀이신 누님들을 능멸한 것이니.”

사공자가 확신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누님들의 신변 보호를 위해서도, 장기적으로 반드시-.”

삼공녀 연다은이 그의 말을 받았다.

“필요한 살상이었단 말이지?”

삼공녀와 사공녀.

그녀들이 연소현의 편을 들자마자.

그녀들을 따르는 이들이 운영하는 상회가 공격을 받았고.

곧 그것은 낙양이 공포에 잠길 정도로 학살에 가까운 일로 이어졌다.

'…어느 정도. 누님들이 충격받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야.'

그녀들의 시선을 받으며, 사공자가 한숨 섞인 대답을 했다.

“…예. 필요한 살상이었습니다.”

구구절절하게 연소현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서, 말을 어떻게 해보아도.

상인들은 검가의 권력 다툼에 휘말려, 비명횡사한 것이고.

그 상인들을 죽이라 명한 것은 연소현이었다.

“이 일은 큰형님의 탓도, 누님들의 잘못도 아닙니다. 그저-.”

“비아(翡兒)야.”

자신의 아명을 부르는 누님의 목소리에 연비가 고개를 숙여 대답했다.

“…예, 누님.”

그녀가 사공자에게 물었다.

“우리가 그들이 어찌 될지 몰랐다고 생각하니?”

사공녀 연다혜 또한 입을 열었다.

“큰오라버니께 상회가 공격받았다고,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지, 우리가 아무것도 몰랐을까?”

“…예?”

순간적으로 머리가 굳어 버린 사공자 연비를 바라보며, 연다은이 슬픈 얼굴로 미소지었다.

“너는 우리를 아직도 어린 시절에 머물러 있는 한낱 아이들로 보는구나.”

“하긴. 너는 어릴 때부터, 주변의 어른들 이상으로 영특했지.”

사공녀 연다혜가 과거를 떠올리듯, 시선을 흐리며 말했다.

“그런 네가 보기엔, 우리가 깨지거나 상처나기 쉬운 도자기처럼 보이는 것은 알겠다.”

“하지만.”

삼공녀 연다은이 자신의 말에 힘을 주었다.

“우리는 더 이상. 아이들이 아니란다.”

“이 가문의 공녀로 태어난 이상. 더이상 아이로 머물러 있을수도 없고.”

“머물러서도 안 되지.”

그녀들의 말에, 사공자 연비가 탄식했다.

“…누님들께서는 이미 각오를 마치셨었군요.”

열네 살에 불과한 두 소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는 각오했다. 우리가 피를 흘릴 각오도.”

“그리고 남을 상처 입힐 각오도.”

“......."

연비는 몸을 뒤로 기대어 의자 깊이 묻고, 입을 굳게 다물었다.

'...빌어 처먹을 검가.’

자신과는 다르게.

어릴 적부터 두 누님은 얼마나 순수하고, 착한 존재이던가.

이 저주받을 가문은, 사공자 자신도 모자라서 결국에 자신의 누님들까지도 피에 물들이고 있었다.

“우린 괜찮단다.”

그런 그에게 연다은이 부드럽지만 단호한 미소를 지었다.

연다혜도 똑같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늘은 우리보다 적들에게 힘든 날이니까.”

그들이 정신적으로 힘겨운 상황이라면, 적들에게는 혼란과 죽음이 가득한 상황이다.

두 쌍둥이 자매는, 적어도.

시야가 좁아진 채, 자신들의 감정에 매몰된 것이 아니라.

상황을 넓게 보고 그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사공자는 잠시 침음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누님들께서 그렇게 받아들이신다니. 다행이군요.”

사공자는 그치지 않고,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입니다. 다행이에요.”

늦든 빠르든.

모두가 언젠가 어른이 되어야 한다.

이 세상에 어른이 되지 못하는 아이는, 어른이 되지 못한 채 목숨을 잃은 아이밖에 없으니까.

“…이번 일은, 낙양 상계의 모두에게 보내는 경고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사공녀 연다혜가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우리는 어쩌면. 이번 일이 그와 동시에, 큰오라버니께서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신일이라고도 느낀단다.”

사공자가 물었다.

“…큰형님의 가르침이요?”

삼공녀 연다은이 대답했다.

“큰오라버니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이든 하고싶은 대로 하라고. 그렇게 말씀하셨었지.”

“큰오라버니께서는 누구도 우리를 건드리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도 하셨어.”

거기까지 들은, 사공자가 그녀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했다.

“…책임과 대가.”

두 쌍둥이 자매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모든 자유에는 책임과 대가가 뒤따른다는 가르침이라고.”

“우리는 그렇게 생각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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