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252화 (252/350)

제2편 사면초가(四面楚歌)

거인을 방불케 하는 덩치의 젊은 사내.

공씨 가문의 차기 후계자, 공담웅이 덩치 큰 암흑가의 무림인을 감싸 안았다.

정직한 것을 넘어, 투박하기 짝이 없는 공격이었다.

“멍청한 놈!”

그에게 붙들린 흑도 무림인이, 자신의 무게와 천근추의 수법으로 버티며 공담웅을 비웃었다.

그의 독 발린 단도가, 자신을 감싸 안느라 훤히 드러난 공담웅의 등판을 난자했다.

“…어?!”

공담웅의 배면(背面) 갑주가 걸레짝처럼 찢어발겨졌지만.

어째서인지 등판의 강건한 근육에는 생채기 하나 나지도 않았다.

“으오오오오오!”

금강나한공(金剛羅漢功).

공담웅이 눈에서 금빛 광채를 흘리며, 상대를 번쩍 안아 올렸다.

"큭?!"

상대도 암흑가 뒷골목에서 산전수전을 모두 겪은 무림인.

그의 내력을 가득 실은 단도가 공담웅의 정수리에 내리꽂히고, 반대 손으로는 공담웅의 눈알을 후볐지만

제대로 공격이 들어가기도 전에.

우드득! 하는 소름 돋는 소리와 함께, 암흑가 무림인이 축 늘어졌다.

공담웅이 마치 곰(熊)처럼 그의 몸통을 졸라 척추를 꺾어 버렸던 것이다.

“우오오오!”

그러고는 아직 온기가 남은 흑도 무림인의 시체가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공담웅은 다음 흑도 무림인에게 돌진했다.

콰앙!

가공할 위력의 돌진에, 공담웅과 흑도 무림인 사이에 있던 암흑가 조직원들이 거칠게 사방으로 튕겨나갔다.

소림(少林), 금강나한공.

철우경지(鐵牛耕地).

그 모습은 사람이 아니라, 마치.

두 마리의 영물을 앞세운 채 돌진하는 철갑요새를 보는 듯했다.

“미친…!”

흑도 무림인이 그런 공담웅의 돌진을 피해서, 신법으로 몸을 공중에 띄웠다.

하지만 그런 그를 기다리는 이는 따로 있었다.

"......."

한마디 기합도 없이.

표홀한 신법으로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여인, 아미파 사감 비구니의 검이 사방으로 번뜩였다.

아미(峨嵋), 비전절기(祕傳絶技).

난피풍검(亂披風劍).

사지가 찢어진 채 공중에서 피보라를 뿌리며 떨어지는 흑도 무림인이었던 시신을 뒤로하고.

사감 비구니가 떨어져 사뿐히 발을 디딘 곳은 암흑가 조직원의 정수리 위였다.

“…죽여!”

“죽어라!”

사위를 가득 메우고 있던 조직원들이 목속에 취하여 눈이 시뻘게진채 그녀를 향해 무자비하게 무기를 휘둘렀다.

"......."

이전과 마찬가지로, 사감 비구니는 기합도 없이 공중으로 다시 한번 도약했고.

“크악?!”

그녀가 밟고 있던 조직원은 사방에서 쏟아지는 아군의 무기에 난자당해 피를 쏟았다.

그 옆에서는.

“좋아! 그대로 버티기만 하면 된다! 머리를 차갑게 하란 말이다!”

눈이 시뻘게지다 못해, 이성을 상실한 것처럼 적들이 방패 벽에 달려들고 있었다.

“허리에 힘을 실어! 밀리지 마라!”

마치 실제 공성전이 진행 중인 성벽처럼, 그 아래에 시신이 수북하게 쌓였지만

오히려 적들은 아군의 시신을 밟고 방패 벽 위로 기어올랐다.

“그아아아!”

자애원의 중장무장단이 쉴 새 없이 내지른 창이 그들을 무자비하게 꿰뚫고.

방패 틈 사이로 적들의 피가 타고 쏟아지지만.

“죽어! 죽어! 죽어!"

오히려 창에 꿰뚫린 쪽이 방패 틈 사이로 손을 뻗어 무기를 찔러 넣기까지 했다.

배(倍) 이상 많은 적.

지금도 상류의 골목 틈틈이 쏟아져 나오는 흑도 무림인들.

그럼에도 버티고 있는 연소현 측의 전선.

난전(亂戰).

그 이상 이 상황을 표현할 말이 있을까.

* * *

“좋아! 잘하고 있어! 적들을 뭉개 버려라!”

땀이 흥건한 손으로 난간을 쥔 흑강패의 패주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대기하고 있던 병력 전체를 동원해서 정면을 밀어붙여!”

쉰 목소리로 소리를 치면서도, 흑강패의 패주는 쉼 없이 머리를 굴렸다.

'대공자 놈의 알려진 전력 중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은....'

“놈들의 장갑마차는 혼전에서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할 것이야!”

아군과 적군이 뒤섞이면, 장갑마차의 돌진력은 무의미해진다.

사기도 낮고, 훈련도도 낮은 후방의 관병들이 참여할 여지도 주지 않는다.

“그러니 놈들을 더욱더 밀어붙여라!”

쉼 없이 내공을 담아 외치느라, 단전이 허할 정도였다.

'이대로 상류에서 밀어내기만 하면…!’

흑강패 패주가 슬며시 얼굴에 희색(喜色)을 띠었다.

연소현 측보다 많은 병력.

연소현 측보다 많은 무림인.

난전으로 인해 제대로 기동하지 못할 적의 장갑마차.

목속에 취해, 목숨을 돌보지 않고 뛰어드는 암흑가의 병력들.

전선이 밀리면 합류는커녕, 같이 도주하기 바쁠 관병들.

'승기(勝氣)가 보인다!’

그의 머리에 계산이 섰다.

* * *

멀리, 계곡 하류의 옥상에서 전황을 파악하던 노군사가 가로되.

“물면 같이 물고, 누르면 튀어나오니. 단순하기가 그지없어, 들개보다도 못한 지능을 가진 자로다.”

적 지휘부에 대한 혹평이었다.

“하지만, 노인장.”

지금까지 예상이 계속 빗나가기만 했던, 서씨 가문의 데릴사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지금 귀측(貴側)의 장갑마차가 무용해진 것은 사실이지 않소?”

노인장에, 귀측이라니.

표현도 한결 조심스러워진 모습이었다.

"한편, 적들의 기세는 꺾일줄을 모르고 오히려 바람을 탄 불길처럼 거세지고 있소이다.”

자존심이 여러 번 상하긴 했지만.

그도 단순한 멍청이가 아니었고.

눈앞의 노인을 일반적인 군사 책략가의 선에서 판단하면 안 된다는 정도는 명확하게 느끼고 있었다.

“뭔가 노인장에게 뾰족한 방법이라도 있소?”

서씨 가문의 데릴사위는 슬쩍 대공자를 바라보았지만, 대공자는 아까부터 그다지 말이 없었다.

"......."

그저 팔짱을 낀 채, 상류의 전황을 지켜만 볼 뿐이었다.

'자기 일이 아닌 것처럼 구는군.'

대체, 무슨 생각 중인 것인지.

대공자의 속내는 짐작이 가지도 않았다.

“전황을 풀어낼 뾰족한 방법 말이오? 기책(奇策) 같은?”

출신도 신분도 알 수 없는 노군사가 말을 높이지도 않자, 데릴사위는 순간 울컥했지만.

현재, 이곳에서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고 헛기침을 하며 입을 다물었다.

“...흐흠.”

그런 데릴사위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아니.

정확히는 전황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노군사가 미소를 지었다.

“전장에서 상황이 어려워지면, 누구랄것 없이 군사에게 모든 상황을 한 번에 뒤집을 수 있는 기책(奇策)을 요구하지. 하지만.”

혼잣말처럼 슬쩍 운을 뗀 노군사가 자신의 양손을 들어 보였다.

“그러한 종류의 기책은 지고 있는 상황에서나 필요한 것이 아니겠소?”

“그 말은…?”

노군사가 오른손을 내젓자, 옥상의 망루에서 그를 바라보던 신호수가 새 깃발을 들고 흔들었다.

마치, 산봉우리마다 배치된 봉화가 번져 가는 것처럼.

계곡 곳곳에 배치된 신호수들의 깃발이 순차적으로 휘날리더니.

상류에서 고동 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다.

노군사가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이미, 전장을 통제하고 있다면. 의미가 없지.”

* * *

"우측!’,

탑 위에서 사방을 둘러보던 수하가 비명처럼 외쳤다.

“삼오통방이 맡은 우측에 이상이…!"

그 말에 흑강패 패주가 고개를 우측으로 돌리기 무섭게.

“무, 무너집니다! 우측 전열이 무너집니다!”

그것은 '비명처럼'이 아니라, 숫제 비명이었다.

“뭐라고?!”

그의 시선에도, 우측 전열을 구성하던 삼오통방의 병력이 뒤로 쫓기듯 물러나는 것이 보였다.

그가 안력을 돋우어 보자, 밀려 나는 삼오통방의 병력을 더욱 강하게 밀어붙이는 자들을 볼 수 있었다.

“무, 무림인?!”

그가 경악했다.

“대공자 놈에게 저 정도 숫자의 무림인이 더 있다고?!”

우측 전열이 무너진다.

흑도 무림인들을 중앙에 투입한 이상, 필연적인 결과였다.

* * *

“전장에서 진정으로 경계해야만 하는 것은, 적의 강력한 주력 전력이 아니라.”

노군사가 상류를 향해 마치 조언이라도 하듯이 혼잣말을 했다.

“적의 숨겨진 전력이지.”

[낙양의 봄]

그들을 알아본 연소현이 짧게 전음으로 말했다.

[낙양을 빠져나가지 않고, 남아있던 젊은 협사들이군.]

노군사가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대공자님.”

내공에 재능이 없었기에, 노군사는 덜 민감한 내용만을 가지고 육성으로 대답했다.

“수배가 되지 않았기에 낙양을 빠져나갈 필요가 없던 이들이지요.

푹 쉬었으니, 체력이든 공력이든 남아돌 것입니다.”

나이 든 협사들은 죽을 자리나 마찬가지였던 용봉지회 경기장 건설 부지에, 젊은 협사들이 들어오는 것을 막았고.

그렇기에 젊은 협사들은 애초에 노상강도짓에 참여하지도 못했고.

결과적으로 그들은 낙양에 그대로 남아 있는 연소현의 훌륭한 전력이 되었다.

“수배라니? 저들은 대체 누구입니까, 대공자님?”

새 동맹 가문의 가주 하나가 연소현에게 물었을 때.

“신호수들의 깃발 신호가 끝나지 않았다고…?”

서씨 가문의 가주 대행이 중얼거렸다.

그녀는 상류의 전황 변화를 지켜 보던 중이었다.

“신호가 끝나지 않았다고요?”

“그래요.”

데릴사위의 질문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적들의 우측 전열이 무너지던 시점에 신호가 바뀌더니….”

그녀의 손이 바뀐 신호가 연결되는 방향을 따라갔다.

“좌측?”

* * *

“오른쪽! 아직 투입이 끝나지 않은 무림인들을 전부 오른쪽으로 돌려!”

그의 지시에 따라, 정면에 합류하기 직전의 이들이 오른쪽으로 달리기 시작하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지형과 거리 때문에.

그들이 도달할 때까지 우측 최종 방어선이 버틸지 알 수가 없었다.

“절대!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한 번에 골목까지 내어 줘선 안 된다! 어떻게든 골목에서 막아!”

이제는 너무 쉬어 버려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목으로.

흑강패의 패주가 목이 터져라 외쳤다.

“적들에게 골목까지 내어 주면 답이 없단 말이다!”

그 지시에 대한 대답대신.

“끄아아악!”

아래층으로부터 수하들의 비명이 들려왔다.

아니.

들려온다 싶었더니, 금방 그쳤다.

“무, 무슨 일인지 알아봐라!”

흑강패 패주의 말에 수하 하나가 아래층으로 향하는 문으로 머리를 밀어 넣었다.

“어이…! 다들 거기 무슨 일-!"

아래층을 향해 외치던 수하가 말이 없다.

“…뭐야? 이 자식아. 왜 아무 말이 없어?”

패주가 그 수하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그러자.

머리통을 잃은 수하의 몸이 뒤로 나자빠졌다.

"......!"

핏방울이 비산하는 그 순간.

패주는 온몸에서 끌어낼 수 있는 내력이라는 내력을 모두 끌어 올려, 옥상 밖으로 몸을 던졌다.

하지만.

기척도 없이 날아든 검은 뱀과 같은 형체가 그의 발목을 칭칭 감았다.

“……?!”

그러더니 콱, 하고 그의 허벅지에 박혀 들었다.

“크악?!”

거꾸로 매달린 채, 발이 묶이고, 허벅지가 꿰뚫린 그가 전후좌우의 벽에 이리저리 튕겼다.

공력을 끌어 올려 강하게 박차고 뛰어내렸던 만큼, 벽면들에 부딪히는 힘도 강했다.

눈앞이 하얗게 변하고, 머리가 핑핑 돌고, 비명이 절로 튀어나왔다.

“으으으?!"

그가 그 와중에도 침착함을 되찾으며 자신의 허벅지를 물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것은....

“사, 사슬낫…?”

그의 다리를 묶고 있는 것은 검은 사슬이요

그의 허벅지에 박혀 든 것은 검은 낫이었다.

크그그극-!

사슬낫의 주인이 사슬을 잡아당기자, 패주는 낚싯바늘에 꿰인 물고기처럼 퍼덕이는 재주밖에 할 것이 없었다.

“끄아아, 끄아아아악!”

그리고 그가 고통에 퍼덕일수록.

필연적으로 사슬은 더욱 조여 오고, 허벅지에 박힌 낫은 더욱 깊이 파고들었다.

“아아아아악!”

이윽고.

다시 옥상까지 거꾸로 매달린 채 끌어 올려진 그가 보게 된 것은, 흑의를 입은 삭막한 인상의 중년인이었다.

딱, 보기에도 결코 범상치 않은 인물.

하지만 그보다도.

흑강패 패주의 시선을 끄는 것은 그 인물의 허리께에 묶여 있는 다른 이의 머리였다.

“삼오통방의 방주…?”

그 머리의 주인은 삼오통방의 방주였다.

투석을 피해 지하 공간으로 대피한다 싶었더니, 이렇게 머리만 남은 채 '수확'되어 온 것이다.

“어, 어떻게…?”

흑강패주가 허벅지를 타고 내린 자신의 피를 맞으며 중얼거렸다.

“사공자 측의 정예들은 전부, 대선상회와의 전선에 발이 묶여 있을 것인데….”

대답은 없었다.

대신 삭막한 인상의 중년인은 그 인상 이상으로 무감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흑강패의 패주, 맞군.”

사슬낫의 주인.

당가의 혈풍차사(血風差使).

차마고도(茶馬古道)의 수급수집가(首級蒐集家).

당백의 반대 소매가 펄럭이고, 차라랑 하는 소리를 들은 것이.

"......!"

흑강패 패주의 마지막이었다.

* * *

“가장 얇아진 적들의 좌측 진형으로 침투를 성공했군.”

멀리, 최상류의 한 건물 옥상에서.

당백이 피워 올린 푸른 신호 연기를 확인한 연소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끝났어.”

그의 옆에서 노군사가 끌끌거리며 낮은 목소리로 웃었다.

“애초에 사공자님의 정예들이 복귀한 순간 저들에게는 승산이 없는 싸움이었지요.”

“대선상회는 이제, 중앙감찰각과 내원이 맡고 있으니까.”

대선상회가 빼돌리던 막대한 검은돈을 확보하기 위해서, 중앙감찰각과 내원이 그들을 물었다.

그렇기에.

더 이상 사공자 측의 정예들이 현월각과 대선상회의 전선에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대선상회라니? 그건 이공자 측의….”

가주 하나가 알고 있는 명칭에 반응하며 연소현에게 말을 걸었을 때.

"아…!”

서씨 가문 가주 대행의 입에서 감탄하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모두의 시선이 그녀가 바라보는 계곡 상류를 향했다.

“적들의 우측으로 우회 돌파한 것 또한 성공했군요.”

머릿수로 중앙을 밀어붙이던, 암흑가 병력들의 뒤로.

낙양의 봄 젊은 협사들이 뚫어 낸 적들의 우측 진형을 우회 돌파하여,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리고 모습을 드러내기 무섭게 적들의 뒤를 그대로 들이받은 그것은.

“장갑마차….”

대공자 측의 장갑마차 행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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