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246화 (246/350)

제21편 마지막에 웃는 자

“처음부터라니….”

사공자는 아연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큰형님. 그 처음이 대체 어느 처음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글쎄.”

연소현은 누구에게도 시선을 주지 않은 채, 햇볕이 드는 창가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언제부터 일까?”

햇볕에 허공을 부유하는 먼지들이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칩거를 끝내셨을 때부터?”

"......."

대답은 없었다.

사공자가 자신의 얼굴에 흘러내리는 땀을 훔치며, 시기를 하나씩 열거해 나가기 시작했다.

“책값 소동으로 내원에 방문하셨을 때?”

"......."

사공자 연비가 보는 자신의 큰형님, 연소현의 표정은 이례적으로 낯설었다.

“그렇다면, 설마….”

연소현이 변했던 날.

사공자는 기어코, 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던 그날을 떠올렸다.

“큰형님께서. 방만하게 굴던, 원각정의 하인들을 모두 쫓아내셨던 그날입니까? 처음이라는 것이?”

"......."

끝끝내.

사공자는 연소현으로부터 대답을 듣는 것은 실패했다.

그럼에도 연비의 표정은,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이 사람이….'

연비의 시선이 연소현을 향했다.

'이분이, 나의 큰형님이시다!’

구름보다도 높은 곳에서, 유유히 지상을 내려다보는 대붕(大鵬).

그는 당장이라도 문을 열고 뛰쳐나가, 만나는 사람마다 자랑을 하고 싶었다.

그런, 사공자의 귓가에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쯤 하면, 사담(私談)은 충분히 한 것 같소.”

한겨울에 얼음물을 한 바가지 뒤집어쓴 기분을 들게 하는 목소리.

“이미, 시간이 많이 지체되고 있으니…."

그것은 내원총관의 목소리였다.

사공자와 대공자의 대화에서 무엇을 느꼈는지.

그의 자세는 이전보다도, 더욱 꼿꼿해졌고, 그 표정은 더욱 단단히 굳어, 비인간적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이만 본론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소.”

그러고 보니, 이런 큰형님의 사고를 읽어 낸 것이 바로 눈앞의 이 노괴였다.

“그, 그렇군요.”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있던 사공자는 다시 자신의 자리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두 사람의 회담(會談)에 조금이라도 방해가 되지 않겠다는 표현이었다.

'이 대화에서는 내가 모르는 점이 많다. 무엇보다도-.'

그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자신의 큰형님이 내원총관에게 물었다.

“나의 노림수를 전부 꿰고서도, 이곳에 내원총관이 직접 행차한 이유는 무엇이오?”

그 질문에 사공자의 시선이 내원 총관을 향했다.

이미 예전에 고사(枯死)한 것 같은 피부가 꿈틀거리는 광경은 기괴하기까지 했다.

“물론. '이번에는' 검가의 재산이 증발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라오.”

사공자가 표정을 단속하며, 속으로 침음했다.

'연씨 혈족이 낙양 밖으로 빼돌리던 재산들을 이야기하는 것이로군.'

사공자의 시선이 슬쩍 내원총관을 다시 살폈다.

'아마도, 내원총관도 오랜 세월 동안 자체적으로 그 재산들을 쫓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리고 아마도.

연소현에게 선수를 가로채인 것이리라.

그런 사공자에게는 시선도 주지않고, 내원총관의 눈알은 대공자에게 못 박힌 것처럼 고정되어 있었다.

“구양 태상부인이 대선상회를 통해 유용한 자금들은 본디, 모두 검가의 것이지.”

오로지 낙양검가를 위해서.

오로지 낙양검가의 가주를 위해서.

일생 모든 것을 바쳐 헌신해 온, 노괴의 눈알이 샛노랗게 번들거리는 듯했다.

“그러니 검가의 것은 동전 하나도 빠트림 없이 모두, 검가로 환속(還屬)되어야만 하오.”

그 순간.

영특한 사공자는 깨달았다.

'아…!'

그가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달싹이려다가, 급히 입을 다물었다.

'내원총관이 했던 말의 의미를 이제 이해하겠어…!’

그의 머릿속에 내원총관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오히려, 노부와의 만남을 감추고 싶은 쪽은 대공자 쪽일 터인데?”

내원총관은 어째서, 자신이 이곳에 있음을 감추지 않았는가.

그 이유가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그렇소.”

내원총관의 시선에, 사공자가 자신도 모르게 대답했다.

"...예?"

“사공자의 추측이 옳다고 했소이다.”

노괴의 말은 마치 연비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며 하는 것 같았다.

“노부가 이곳에 있다는 소문은, 지금도 당장 이곳을 노리고 있는 고위 관료들을 중심으로 퍼져 나가고 있을 테지.”

이공자 측에까지 대공자와 내원 총관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 들어가는 것은.

이제 그야말로 시간문제가 되었다.

다른 이였다면, 이 순간에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라도 띠었으리라.

“이렇게 된 이상. 우리 내원의 협력없이 대선상회를 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오.”

하지만.

내원총관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무덤덤한 표정 그대로 외통수를 선언했다.

“...하."

사공자는 자신도 모르게.

허파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몸을 뒤로 기댔다.

“그렇다면, 내원총관이 원하시는것은…?”

“곧 있을 중앙감찰각의 대선상회 급습에, 내원의 인원들과 함께할것.”

내원총관이 입술을 달싹여, 자신의 입장을 정리했다.

“회수한 금액 전체는, 일절 유용되는 일이 없이. 본가의 금고로 돌 아가게 할것.”

그의 목소리만이 나직하게, 실내에 울려 퍼졌다.

“그 이후 있을, 구양 태상부인에 대한 중앙감찰각의 수사에 반드시 내원과 공조할 것.”

“내원총관께서 지금 뭔가 오해를 하고 계신 모양인데, 중앙감찰각은 누군가의 통제를 받는 기관이 아닙니다.”

사공자가 일단 당장에 부정할 수 있는 부분부터 부정했다.

“그렇기에, 이 자리에서 중앙감찰각의 수사에 대해서 협조를 운운하는 것은 무의미한-.”

“아니.”

내원총관이 방금 벼려 낸 칼처럼 날카롭게, 사공자의 말을 잘라 버렸다.

“사공자, 그렇지 않소.”

“그게 무슨 말씀인지…?”

끝까지 시치미를 떼보는 사공자에게 내원총관이 그 눈알을 데굴하고 향했다.

“저 대공자가, 자신이 통제할 수도 없는 힘으로 대선상회라는 진수 성찬을 노릴리가 없지.”

“중앙감찰각과 큰형님이, 이 건에 대해서 수사 정보를 제공하고 긴밀한 협조를 하고 계시긴 하지만…."

그 섬뜩한 시선에 사공자는 마른 침을 삼키며, 고개를 저었다.

“중앙감찰각은 어디까지나 정치적 중립을 지키는-.”

“노부는 알고 있소.”

이번에도 내원총관은 단칼에 사공자의 말을 잘랐다.

“대공자는 중앙감찰각주, 독고야연의 충성을 받았지.”

"......!"

사공자는 턱 하고 숨이 막혀 오는 듯했다.

이 노괴는 도대체, 그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다는 말인가…!

그때 그의 머릿속에 짧은 전음이 들려왔다.

[속지 마라. 넘겨짚은 것이다.]

'……!'

큰형님의 전음에, 사공자는 다시 한번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이 시점에서 갑자기 속임수라고?!’

절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순간에 나온 내원총관의 '넘겨짚기' 였다.

중원국 전역에 자자한 자신의 악명(惡名)과 이 자리에서 보여 준 능력을 이용해서.

상대의 틈을 찔러 넣어, 자신이 품고 있던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기 위한 넘겨짚기.

'이런, 정신 나간…!’

그야말로, 수준이 달랐다.

“중앙감찰각주에 대한 오해는, 일단 미뤄 두고….”

할 말을 찾지 못하는 사공자를 대신해서, 연소현이 자연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번 일에 대한 공은?”

내원총관의 시선이 자신을 떠나자, 사공자는 그때야 숨을 쉴 수가 있었다.

내원총관은 연소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물론, 내원의 공이 될 것이오.”

사공자는 순간.

내원총관의 입가에 미소가 스쳐 지나간 듯한 착각을 느꼈다.

“이런 상황에 내원의 협력이 없다면, 달성할 수 없는 성과가 아니오?"

“말도 안 되는 소리!”

사공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 다.

“기가 막힐 정도로 뻔뻔하시군요, 내원총관!”

분노로 인해, 그의 눈가에 녹색 안광이 번뜩였다.

“자신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드러내, 내원의 협력이 없으면, 제대로 풀어 나가지 못하게끔 일을 만들어 놓고…!”

사공자의 입에서, 전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박력이 넘치는 호통이 터져 나왔다.

“그래 놓고 내원이 없었다면 이룰 수 없는 성과라는 이유로 공을 가져가겠다고?!”

그 자리에 누군가 있었다면.

그것이 만약 검가의 장로였어도, 순간적으로 움찔할 수밖에 없을 정도의 위압감이었다.

“이것은 우리 형제를 우롱하는 행위로다!”

하지만 내원총관은 움찔하기는커녕,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렇게 느끼셨다면, 이 노부가 사과드리지요.”

마치, 사공자의 가공할 기세가 봄날의 온화한 산들바람처럼 느껴지기라도 하는 양.

“하지만….”

그는 사과를 해 보이고,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시간은 흘러가고 있다오.”

'…큭!'

사공자가 이를 부득 하고 갈았다.

'이 미치광이 노괴가…!'

연비가 소리쳤다.

“내원총관의 무리한 요구로, 일이 그르쳐지면, 웃는 것은 결국에 구양 태상부인이 될 것이야!”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가장 날카롭게 상대의 틈을 파고들었다.

“그대는 본가와 아버지께 충성한다고 해놓고, 자신의 알량한 공명심(功名心)에 본가의 정상화를 위한 일을 망쳐도 상관없다 이 말인가?!"

"글쎄요."

내원총관이 마치 예상하기라도한 것처럼 즉각적으로 대답했다.

"노부의 입장에서는, 대선상회로 세탁된 그 막대한 돈이 다른 '애먼인물'의 주머니에 들어가도 결과는 마찬가지라서 말이오."

"감히 큰형님을-!"

"한 가지만 밝혀 두겠소."

내원총관이 앙상한 가지 같은 손을 내저어, 사공자의 말을 막았다.

“어떤 방식으로든 그 돈을 외부로 유용한 자는, 영원히 이 노부와 내원의 적이 될 것이라오.”

그것은 선언이었다.

사공자는 그 말에서, 내원총관의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선(線)을 느꼈다.

“그리고 그 적은, 다시는 편히 두 발을 펴고 잠을 자지 못할 것이오.”

노괴의 몸에서, 다시없을 정도의 압력이 들끓었다.

“그 숨이 끊어지기 전까지 말이오.”

그것은 그 돈을 어떤 식으로 누가 차지하든.

원래 있던 곳으로 그 돈이 돌아오기 전까지.

지옥 끝까지라도 그자를 쫓겠다는 내원총관의 맹세였다.

"......."

사공자는 질린 표정으로 내원총관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연소현과 자신이 모색할수 있는 모든 길이 차단되었고.

이제는 눈앞에 딱 하나.

내원총관, 자신이 원하는 길만이 남겨져 있다.

'이것이 그 내원총관인가….’

어린 자신이 감히 헤아릴 수도 없는 세월 동안,

어린 자신이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일들을 헤쳐 왔던 인물.

그 까마득한 경험과 연륜, 그리고 무수히 연마해 온 실력에서.

어린 천재는 벽을 느꼈다.

“어떻소, 대공자?”

사공자의 말문이 완전히 막힌 것을 확인한 내원총관이, 그에게서 관심을 잃고 연소현을 향했다.

“결단은 대공자, 그대의 몫-.”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좋소.”

마치, 목석(木石)처럼 앉아 있던 연소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일은 내원총관 그대가 원하는 대로 하시오.”

"정말…."

너무도 쉽게.

흔쾌히 터져 나온 승낙에, 내원 총관마저 잠시 말을 더듬었다.

“그것이 정말이오?”

연소현이 재차 확인을 해주었다.

“그렇소.”

연소현은 내원총관의 가늘어진 눈매를 무시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가 공을 가져가든.”

연소현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본인은 그저, 본가가 조금이라도 정상화되기만 하면 기쁠 뿐이라오.”

그가 가볍게 손을 들어 출구를 가리켰다.

“그럼, 나는 이번 습격에서 완전히 빠질 터이니. 자세한 이야기는 중앙감찰각주와 나눠 주시오.”

그것은 축객령이었다.

* * *

중앙감찰각주를 만나러 가는 길.

"......."

달리는 내원의 마차 안에서 내원총관의 안색을 살피던, 총관비서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 대공자에게서 승낙을 받았다면, 이제 끝난 것이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이제, 더 이상 거리낄 것이 없었다.

저번 책값 사건으로 얼룩졌던, 내원의 이름을 바로 세울 시간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의문은 타당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리 표정이 어두우십니까?”

“끝이라고?”

마차 지붕의 그늘에서 눈을 감고, 가부좌를 틀고 있던 내원총관의 입이 열렸다.

“저 대공자를 상대로, 마지막까지 절대 방심해서는 안 된다.”

그의 마음속에 만남의 마지막에 연소현이 지었던 그 미소가, 목에 걸린 가시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 싸움은-.”

* * *

창밖을 통해, 내원의 마차가 멀어지는 것을 보던 연소현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 싸움은 마지막에 웃는 자가 승자니까.”

생각에 잠겨 있던 사공자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예? 뭐라고 하셨습니까, 큰형님?”

“아무것도 아니다.”

돌아선 연소현이 사공자를 향해 말했다.

“가서. 아까부터 기다리고 있다던, 구장들이나 데려오도록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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