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편 골짜기에 부는 바람(風)
죄악의 골짜기.
대공자 사공자 합동 사업 본부.
사공자 집무실 앞 복도.
막 동이 튼 이른 오전 시간
사공자의 집무실 앞을 오가는 문사들이 누구랄 것 없이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들이 흘긋거리는 쪽에는 길게 줄을 늘어선 이들이 있었다.
이른 오전.
공식 업무가 시작되는 이 시점부터, 저 많은 이들이 줄을 늘어선 것이다.
“…어제보다 더 늘었군.”
“…겁쟁이 같은 자들.”
문사들은 쑥덕거렸지만, 감히 큰 소리로 말을 하지는 못했다.
줄을 늘어선 자들의 신분이 감히 일개 문사들이 입에 담기엔 부담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죄악 계곡에 투자하겠다고, 누구랄 것 없이 달려들 때는 언제고. 쯧쯧.”
“조금이라도 빨리 투자할 수 없겠냐고, 담당자에게 뒷돈까지 찔러줬던 자들도 보이는군.”
그리고, 문사들의 대화처럼.
그들이 줄을 서서 사공자를 만나길 기다리는 이유는 그다지 좋은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복도 끝 휴게실.
“투자금의 회수라니….”
젊은 문사가 작은 창을 통해 그 광경을 지켜보며 혀를 찼다.
“아니, 노(老)군사께서는 지금 상황에 차가 넘어가시오?”
노군사라 불린 이는 다름 아닌, 염 장로의 심복인 그 늙은 군사였다.
어째서인지, 용봉지회 건설 부지에 있는 염 장로와 별도로, 죄악계곡에 와 있는 그였다.
노군사는 기어코 마시던 차를 한 잔 비우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무엇이 그리 불만이 많은가.”
그가 주름 가득한 손으로 손수 자신이 마신 찻잔을 정리하며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
“상황이 더욱 불안해지니 투자자들이 투자금을 회수하려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상황이 더욱 불안해지다니요?”
젊은 문사가 인상을 썼다.
“오히려 대공자님의 평판이 지금 낙양 바닥에서 수직으로 상승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투자를 더 해야 하는 상황이 아닙니까?”
노군사가 흘흘 하고, 빠진 이빨 사이로 바람 새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 수직 상승하는 까닭이, 다른 이유가 아니라. 싸움을 통해서 평판이 올라가고 있지 않나?”
“그건 그렇지만….”
젊은 문사가 말을 흐렸다.
“게다가.”
그런 젊은 문사를 보며 노군사가 곰방대를 꺼내 물었다.
“그 전쟁의 상대가 다른 이들도 아니고, 이공자와 삼공자지 않은가.”
"......."
이공자와 삼공자라는 말에 젊은 문사의 입이 굳게 다물렸다.
감히, 대공자가 아니었다면.
도대체 사공자가 무슨 재주로 지금 같은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겠는가.
“장수(將帥)가 전쟁 중에 전투의 대승(大勝)으로 얻은 명성은 전쟁에서 패배한 순간, 신기루처럼 사라지기 마련이지.”
노안이 찾아온 지 오래라, 침침한 노인의 눈에는 그 나이에 어울리는 현기가 어려 있었다.
“고사(故事)를 뒤지지 않아도, 주변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는 일이 아니던가?”
젊은 문사가 인상을 썼다.
“지금, 대공자께서 전투에는 이기고 전쟁에는 질 거란 말씀입니까? 염 장로님의 측근이라고, 너무 말씀을 쉽게 하는 것이 아닌지요?”
“이 사람아.”
무례하게 느껴질 수 있는 말에도, 노군사는 호통 대신 웃음을 터트렸다.
“지금 우리는, 내 이야기가 아니라, 저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았나?”
"아…."
노인의 손끝이 투자금을 회수하기 위해서, 길게 줄을 늘어서서 기다리는 이들을 향했다.
“어찌 한낱 필부(匹夫)가 장수의 능력을 판단하고 판을 읽어, 전쟁의 승패를 예상할 수 있으랴.”
“…그 말도 옳긴 하지만.”
문사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승패(勝敗)는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라 하지 않았습니까. 승패를 미리 점치는 것은 필부이고 아니고의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역사에 그 빛나는 이름을 남긴, 명장(名將)들도, 명군(名君)들도, 때론 패배하고, 고배를 마시는 일이 있었다.
“그건 그렇지.”
“…아니. 방금까지 실컷 필부들을 조롱하시더니.”
노군사의 즉답에 젊은 문사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도 저들과 똑같이 전쟁의 승패를 예측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까?”
“당연하지. 우리라고 저들보다 나은 점이 있어 보이는가?”
노군사가 빙긋 웃었다.
“그 대공자님이라면 모를까, 우리 따위가 무슨 신통한 능력이 있어서, 전쟁의 승패를 미리 알겠나?”
“노인장.”
그 웃음에 노군사를 부르는 말이, 한 계단 격하되었다.
젊은 문사가 인상을 썼다.
“아까부터, 논점을 흐리며, 말을 빙빙 돌려 하시는구려.”
그의 말에는 가시가 돋쳐 있었다.
“그래서 노인장께서 하고 싶은 말이 대체 무엇이오?”
“그딴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이네.”
"......!"
젊은 문사의 몸이 움찔했다.
느긋하게 의자에 몸을 묻고 있던, 노군사의 시선이 젊은 문사를 향했다.
“자네나 이 늙은이나, 저들과는 상황이 달라.”
노인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우리는 지금 이 전쟁의 당사자들이란 말이야.”
"......!"
“전쟁의 향방? 승패의 예측?”
의자에 몸을 깊이 묻은 노군사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이제 피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그딴 것은 우리 따위가 신경 쓸바가 못 된다.”
노인이 군데군데 빠진 이빨 사이에서, 여전히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말했다.
“우리는 병졸이야. 당장 눈앞의 적 병졸을 하나라도 어떻게 더 죽일지나 생각하게. 휴게실에 죽치고 앉아서 남이나 헐뜯을 생각은 하지말고.”
노인의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눈앞에 집중하지 못한다면….”
노인이 주름과 검버섯이 가득한 손을 들어 자신의 목을 그어 보였다.
“이 전쟁의 승패와 상관없이, 우리 같은 병졸들은 언제라도 목숨을 잃을 수 있으니까.”
"......."
젊은 문사는 할 말을 모두 잃고, 마른침만 삼켰다.
어느새 흥건하게 흘린 식은땀으로 전신이 축축했다.
노(老)군사.
그는 전장에서 평생을 살아온, 군사(軍師)라는 직위가 너무나 잘 어울리는 노인이었다.
“뭘, 아직도 멀뚱멀뚱 나만 보고있나?!”
노인의 입에서 호통이 터져 나왔다.
“당장에 자네 업무에 복귀하란 말이다!”
지금까지의 조곤조곤하던 목소리의 늙은이라고는 상상하기도 힘들정도로 커다란 성량(聲量)이었다.
“히, 히익-!”
젊은 문사가 허둥지둥 휴게실을 벗어났다.
“자네들도 괜히 복도에서 기웃거리지 말고 당장 업무로 복귀하게!”
“어, 어흠.”
“자 자. 돌아가세.”
휴게실 근처에 모여서 안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를 엿듣고 있던 문사들 또한 후다닥 도망쳤다.
“이제야 좀 조용해졌군.”
텅 빈 휴게실에서 노군사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의 시선이 길게 늘어선 투자가 들의 줄을 향했다.
'전쟁의 승패라….,
앞에 말이 나왔던 것처럼.
그의 오랜 경험 속에서도 당면(當面)한 전투라면 몰라도, 전쟁의 승패를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런 일은, 이미 예측의 영역이 아니지. 동전을 던져서 앞뒤를 맞히는 도박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하지만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는 한편으로 기대했다.
'대공자라면….'
그가 지금까지 지켜봐 온 그 대공자는 그런 기대감을 품게 만드는 인물이었다.
어째서인지.
머리로는 확신할 수 없지만, 그의 감은,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대공자는,
'동전을 던질 때마다, 자신이 원하는 면으로 떨어지게 만들 수 있는 인물이라고 말이지.'
그의 시선이 줄을 늘어선 이들을 쭉 거슬러 올라, 결국 집무실의 입구에 다다랐다.
사공자의 집무실이었다.
'그리고 저 어린 공자 또한 만만찮다는 말이야.'
어떻게 안에서 투자가들을 다루고 있는지는 몰라도.
아까부터 용무를 마치고 집무실을 떠나는 이들의 안색이 기이했다.
노인의 시선은 아까부터 집무실을 떠나는 투자가들의 안색을 일일이 확인하고 있었다.
'위축된 속에서도 안도하고 있고, 그리고 동시에 좌절과 공포를 느낀다고…?’
안에서는 도대체 지금 무슨일이 펼쳐지고 있는 것일까.
노인의 눈에 짙은 호기심이 서렸다.
* * *
사공자의 집무실.
“그래서 투자금을 돌려 달라, 이 말입니까?”
나이답지 않게, 나지막한 말투.
상석에 앉은 사공자의 말에 투자자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지금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조심스러워서 말입니다.”
“그래요?”
평소 방긋방긋 웃고 다니던 그 사공자, 연비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낯선 얼굴이 거기 있었다.
“원래 큰형님을 향한 멸칭(蔑稱)이었던 무검자(無劍者)라는 이름은 현재, 낙양에서 새로운 의미로 떠오르고 있더군요.”
“그, 그렇습니다.”
투자자가 손수건을 꺼내 자신의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대답했다.
“검(劍)이 없는 검가의 대공자라는 뜻에서, 이제는-.”
사공자가 그의 말을 가로챘다.
“검이 없이도, 원하는 일이라면 모두 할 수 있는 인물이라는 뜻으로 변했죠.”
“…감히 대공자님의 능력을 의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죠.”
사공자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낯선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대는 큰형님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이공자와 삼공자가 두려워서 발을 빼려는 것이니까.”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이번 투자가는 사공자의 짐짓 도발적인 말투에도 넘어오지 않았다.
“아니. 그 말씀이 정확하십니다. 허나, 사공자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그는 식은땀을 흘리는 와중에도, 사공자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지금, 이공자의 편에 서서 전쟁을 벌이던 그 명가들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알지요. 알고말고요.”
사공자가 스산하게 미소 지었다.
"그들 중 절반이 이미 박살 났고, 나머지 절반도 박살 나는 중이지요.”
“제, 제 말이 그 말입니다!”
투자가가 목소리를 높였다.
"대공자의 편에 서서 전쟁을 벌이던 청씨 가문도, 그 십육가문 중 하나인 공씨 가문도, 큰 타격을 입었다는 말입니다!”
그가 두려움을 감추지도 않고, 그대로 드러낸 얼굴로 외쳤다.
“저희 가문이 그런 꼴을 당하게 둘 수는 없습니다!”
사공자가 눈을 찌푸렸다.
“…겨우, 투자를 했다는 이유로 그대의 가문에 그런 일이 벌어지리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그 낙양검가의 일인데, 이 낙양 바닥에서 무슨 일이 불가능하다 하겠습니까?!”
그가 사공자의 인정에 빌어 호소하듯이 말했다.
“제, 제발 부탁드립니다! 사공자 님. 저는 가주로서 가족들과 가신들의 안전을 지켜야만 합니다…!”
그는 눈을 꼭 감고, 고개를 숙여 탁자에 머리를 박았다.
“사공자님, 부디 자비를…!”
일반적인 계약상, 빼가려면 얼마든지 빼갈 수 있는 것이 투자금이지만.
지금의 경우엔 말이 달랐다.
상대가 검가의 대공자와 사공자였기 때문이었다.
'이 정도면 먹혔겠지…?’
투자가는 머리를 탁자에 박은 상태에서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것참….”
사공자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가 속으로 짓는 미소는 더욱 진해졌다.
“저도 무척이나 아쉽습니다만…! 크흑!”
'그래, 천재니 뭐니, 떠들어 봐야 결국 어린아이일 뿐이지. 역시 인정에 호소하는 것이 답이었-.'
그의 생각은 사공자의 이어진 말에 의해 끊겼다.
“이공자와 삼공자는 그렇게 두려워하면서, 저와 큰형님은 별로 두렵지가 않은 모양입니다.”
사공자가 탄식하듯이 말했다.
“이렇게 민망할 수가 있을까….”
“그, 그런 말이 아니라-!”
투자가가 급히 고개를 쳐들었다.
하지만 그의 의지가 아니었다.
“그런 말이 아니면, 뭐?”
사공자가 고개를 박고 있던 그의 멱살을 잡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
진녹색으로 물든 사공자의 눈과 시선이 마주친 그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우리 형제가 두려웠다면, 지금 시점에서 투자금을 돌려 달라는 소리는 꿈에서나 지껄였겠지.”
사공자의 입김에는 코를 알싸하게 만드는 냄새가 섞여 있었다.
“어디서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그는 그 코를 찌르는 냄새와 녹색 안광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사, 사천당가의 독인(毒人)?!”
그에게는 어째서 직계도 아닌 검가의 사공자가 사천당가의 직계를 의미하는 독인의 모습을 보여 줄수 있는지, 의문을 가질 여유도 없었다.
“이제 좀 두려운가?”
사공자가 그를 향해, 후우 하고 입김을 불었다.
“히, 히이익?!”
독인은 그 숨결만으로도 사람을 뼈까지 녹인다고 했다.
“그, 그렇습니다!”
겁에 질린 투자가가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발 목숨만은...!"
그의 눈에 깃든 선명한 공포를 확인한 사공자가 코웃음을 쳤다.
"허억…!”
사공자가 멱살을 풀자, 그는 다리가 풀린 채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너의 가문명은 투자가 목록에서 빼주마.”
사공자는 그런 그를 경멸하는 시선으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
“허나.”
사공자가 허리를 숙여 그와 다시 한번 시선을 마주했다.
“투자금을 돌려주지는 않을 것이다.”
"......!"
투자자 명단에서는 이름을 빼주지만, 투자한 돈은 돌려주지 않겠다는 말.
명단에서 이름을 내리고 싶으면, 돈을 두고 가라는 뜻이었다.
“…그, 그것은!”
“너는 애초부터 명단에서 이름을 내려서 이, 삼공자의 표적이 되지 않길 원했던 것이 아닌가?”
"......."
그는 결국 고개를 떨구었다.
“…알겠습니다.”
“좋아.”
사공자가 장부를 들어, 그의 눈 앞에서 그의 가문명에 먹물을 길게 그었다.
“이걸로 투자는 없었던 일로 되었다.”
그가 짧게 말을 덧붙였다.
“당장 꺼져라.”
* * *
잠시 뒤, 그의 시녀장이 새로운 찻잔을 들고 집무실에 들어왔다.
“주인님.
그곳에는 혼자서 장부를 보며 희희낙락하는 사공자의 모습이 있었다.
“하하, 이거 좀 봐봐.”
그가 그녀를 향해 장부를 펼쳐 보이며 말했다.
“공돈이 이렇게 많이 생겼어.”
소년이 해맑게 웃었다.
“심지어 이제는 이 죄악계곡에 수익이 나도, 놈들에게 수익을 나눠 주지 않아도 된다고!”
엣헴, 하며 그가 어깨를 펼쳐 보였다.
“그거 잘되었군요!”
사공자의 시녀장이 손뼉을 치며, 미소 지었다.
“하지만 더 좋은 소식이 있답니다.”
“뭔데, 뭔데?!”
그녀가 사공자를 향해 눈을 찡긋했다.
“대공자께서 타신 철갑요새가 방금 도착했다고 합니다.”
콰당!
“…어머나.”
문이 거칠게 열린 채 덜렁거렸고, 사공자의 모습은 이미 저 복도 끝까지 달려가고 있었다.
“큰형니이이임-!”
밖에 줄을 서서 기다리던 투자가 들의 당황한 눈빛을 한 몸에 받은 그녀가 난감하게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