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236화 (236/350)

제11편 전호후랑(前虎後狼)

“아니. 아무리 대수로를 통과하는 것이 낙양으로 다시 돌아가는 가장 빠른 길이라고 해도 그렇지….”

“거기를 다시 들어가다니….”

탈명귀검의 기행에 가까운 행동은 협사들이 혀를 내두르게 하기 충분했다.

“되었네.”

나이 든 협사가 좌중의 주목을 모았다.

“우리가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할 무위를 지닌 분의 행동을 이러 쿵저러쿵 떠들 필요는 없지.”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탈명귀검 대협이 아니라. 지금 우리는 우리를 걱정해야 할 때가 아닌가.”

“그건 그렇지….”

그들 중 하나가 나이 든 협사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감(甘) 형께, 대형께서 따로 지시한 사항이 있지 않았소?”

감 형이라고 불린 나이 든 협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러고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대형께서는 내게 이름을 하나 불러 주셨을 뿐. 그리고 그저 이곳에 있으면 된다고 하셨을 뿐이네.”

협사들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름이요?”

“그냥 이곳에 있으면 된다고?”

"그게 무슨-?”

그때, 외곽에서 습관처럼 경계를 서고 있던 협사 하나가 경고 전음을 날렸다.

[기척, 접근 중!]

"......!"

다들 즉시 자신들의 무기를 손에 쥐고, 자세를 낮추었다.

[적인가?!]

혹시 급속히 우회하여 미리 기다리고 있던 탐랑의 조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들의 머리를 스쳤다.

[제길, 전음을 시전할 내공도 거의 남지 않은 상황인데….]

하지만 그들의 초조함은 금방 끝났다.

“이, 이게 왜 자꾸 옷에 걸리는 거지…?”

힘겹게 수풀을 부스럭거리며 헤쳐 나와 모습을 드러낸 것은, 어딜 봐도 평범한 인상의 이십대 여성이었기 때문이었다.

특징이라면, 키가 웬만한 남자보다도 큰 것이랄까.

“어?”

그녀는 무기를 꼬나들고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수십 명의 인원과 눈이 마주치고는 당황해서 손을 내저었다.

“그, 그리 경계하실 필요 없습니다! 협사 여러분!”

그 무해한 모습에 협사 하나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내공은 감지되지 않는데?]

그때 나이 든 협사가 신중한 눈초리로 그녀를 살피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안顔) 씨 성을 쓰시오?"

“네, 맞습니다!”

키 큰 여인이 자신을 소개했다.

“제 이름은 안송경(顔松瓊)!”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다선랑의 일원이자, 대공자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다선랑이라는 말에 좌중이 술렁였다.

“다선랑이라면, 그 유명한 상회의 이름이 아닌가?”

“대형께서 사천의 다선랑과도 인연이 있으시다고?”

협사들 중에는 당연히 여인들도 있었던지라, 그들은 다선랑이란 이름에 더 크게 반응했다.

다선랑이라면, 장신구라는 분야에서 현재 중원국에서 가장 주목을 끌고있는 이름이었으니.

“다들 좀 조용히 해보게.”

감 형이라 불리는 나이 든 협사가 앞으로 나서서 그 작은 소란을 가라앉히고, 안송경에게 말했다.

“그 이름과 외관은 틀림없이 대공자께 들었던 것과 일치하는구려. 그런데….”

그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내가 아는 대형은, 무공도 없는 여인을 홀로 이런 위험한 곳에 보내실 분이 아니라오.”

아까부터 입을 닫고 신중하게 상황을 지켜보던 협사가 그 말을 거들었다.

“혹시. 인피면구를 쓴 것이 아닌지, 변용술(變容術)이나 축골공(縮骨功) 따위로 얼굴을 바꾼 것이 아닌지 확인을 해야겠소.”

충분히 타당한 의심이었다.

강호에는 기인이사(奇人異士)가 모래알처럼 많고, 그들 가운데서도 기이한 재주를 가진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아, 그것은….”

안송경이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사실, 저는 혼자가 아닌데요?”

낙양의 봄 협사들이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

“무, 뭐야?!”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주변의 바위, 수풀, 나무 둥치에서 알수 없는 기척들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모두 주의!]

[범상찮은 자들이오!]

그림자와 어둠에서 솟아나듯이 모습을 드러낸 이들은 흑의로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

“다들 침착하게!”

[저들은 공격 의사를 보이고 있지 않소!]

몇몇 협사들이 반사적으로 날뛰려는 성질 급한 동료들을 말리는 사이.

[이렇게 바로 코앞에 있었는데,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고? 최소한 탐랑과 동급이거나 그 이상의 은신(隱身) 수준을 가진 이들이오.]

몇몇 관찰력이 좋고, 강호의 소문에 해박한 이들이 그들을 살피며, 의견을 교환했다.

[저들의 무기를 보게. 화북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기형적인 형태야.]

[저들이 입은 혹의 또한 재질이 비범하오.]

[게다가 저 흐릿하게 보이는 녹색 안광(眼光).]

협사 하나가 코를 킁킁거리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이 알싸한 냄새는.]

그들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자신들이 도달한 결론이 매우 어처구니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천당가의 그림자단(團)?”

대체.

사천을 휘젓고 다녀야 할 자들이, 도대체 이 먼 낙양에 와 있는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

물론 그림자단의 그림자가 대답을 해주는 일은 없었다.

그저, 그들의 눈에서 녹색 안광이 조금 더 섬뜩하게 번쩍였을 뿐.

'탐랑에 이어서, 그림자단이라니…!’

중원국의 어둠 속에서 활동하는 단체 중 가장 유명한 이들을 연달아 만날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하지만 그들이 놀랄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어, 흠흠.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별로 여유롭지가 않으니 설명에 앞서서, 먼저.”

안송경이 헛기침을 하여, 그들의 시선을 모았다.

“여러분들이 간단하게 재정비를 한 이후에 하셔야 할 일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

안송경이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뒷머리를 긁었다.

“아, 이게 참….”

낙양의 봄 협사들의 시선에 깃든 의아함이 점점 깊어지자, 그녀의 이마에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대공자께서는 어째 이런 난감한 임무를 내게 맡기셔서….'

그녀가 말을 제대로 해주지 않자, 협사 하나가 답답하다는듯이 가슴을 두드렸다.

“안 소저! 대체 우리가 해야 할일이라는 것이 무엇이오?!”

“…대공자님의 명입니다!”

안송경은 할 수 없다는 듯이, 눈을 질끈 감고 대공자 연소현의 명을 외쳤다!

“협사 여러분은 이제부터 '노상 강도단'이 되셔야겠습니다!”

노상강도단이라는 말에,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

* * *

“노상강도단이라니…!”

묘령의 여인이 뒤로 넘어지듯이 파안대소를 터트렸다.

그녀의 녹색 가닥이 들어간 머리카락이 머리와 함께 젖혀지며, 알싸한 향기를 풍겼다.

만일 그녀가 어릴 적부터 혹독한 제왕 교육을 받지 못했다면, 입에 들어 있던 술을 뿜었으리라.

소가주 그게 그렇게 웃기오?”

연소현의 질문에도 그녀, 사천당가의 소가주 당은랑은 한참을 꺽꺽거리며 웃었다.

“아이고, 대공자 덕에 태어나서 이렇게 웃어 보는 일도 있구려.”

그녀가 너무 웃어서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대공자는 당연히 잘 모르겠지만, 그림자단은 아주 콧대가 높은 자들이라오.”

연소현이 턱을 쓰다듬었다.

“당연히 중원국에서도 손꼽히는 정보단체이니 이해는 하오만….”

“아니,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오.”

당은랑이 손을 내저었다.

“그자들은 굵직한 임무가 아니라면, 제 손으로 물도 떠먹지 않는 자들이니.”

그녀가 다시 푸히히 하고 이상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대공자의 요청을 수락하고, 내가 직접 명을 하달했을 때. 그때 당숙부가 지은 표정을 대공자도 봤어야 했는데….”

그녀가 말하는 당 숙부는, 사천당가의 부가주이자, 그림자단의 수장.

그리고 가주의 최심복이기도 한 당귀호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연소현이 지난날 만났던 그의 얼굴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부가주가 좋아하지는 않았겠구려.”

“당연하오!”

얼굴 가죽이 두껍기로 유명한 당귀호의 그 떨떠름한 표정은, 당분간 그녀의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으리라.

“그 그림자단에게 노상강도 짓을 도우라니…!”

다시 한번 그녀가 껄껄거리며 호탕하게 웃었다.

“낙양검가의 대공자가 아니고서야, 중원의 어느 누가 그런 부탁을 할 수 있겠소?”

“…평소에 숙부에게 쌓인 것이 많았던 모양이구려.”

연소현이 술병을 들어 그녀의 빈잔을 채워 주고, 자신의 술잔도 채웠다.

“뭐, 그것도 있지만.”

그녀가 연소현이 따라준 술을 단숨에 들이켜고, 잔을 탁하고 내려놓았다.

“무엇보다도 그대의 그 끝을 알수 없는 지략에 감탄해, 수락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오.”

그녀가 연소현을 바라보는 시선은, 술을 이미 몇 병이나 해치운 사람의 것이라고는 믿어지지가 않을 정도로 또렷했다.

“중앙감찰각의 수사를 피해, 부정하게 쌓은 재산들을 빼돌리고 있는 연씨 혈족들을 노리다니.”

겸상 중이라 얼굴이 가까웠지만, 그녀의 입에서는 술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았다.

“애초에 중앙감찰각을 움직인 것도 대공자 그대가 처음부터 뒤에 있었겠지 ”

“다른 사람의 앞이라면, 본가의 중앙감찰각은 철저하게 정치적 중립을 지키는 조직이라고 하겠지만…."

연소현이 빙긋 웃었다.

“굳이 소가주 앞에서까지 부정하지는 않겠소.”

“놀랍군, 놀라워.”

당가의 소가주, 당은랑이 자신의 입술을 핥고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는 수배 중인 협사들을 낙양에서 빼돌리기 위해서, 삼공자 측의 낙양 봉쇄를 막는데, 연씨 혈족을 끌어다 썼지.”

그 모습은 요염하다기보다는, 칼잡이가 평생의 숙적과의 대결을 눈앞에 둔 것 같은 긴장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렇게 구해 낸 협사들로 하여금, 연씨 혈족이 부정하게 쌓은 재산을 빼돌리는 것을 저지하고, 그것을 강탈하게 하다니.”

“그냥 지나치기엔 너무 달콤한 기회이지 않소?”

연소현이 잔을 들어 술 향기를 음미하며 미소 지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장소에, 얼마나 많은 수법으로 숨겨 놓았는지 파악하기도 힘든 재산들이 일제히 움직이는 순간이니.”

술 향기가 유독 달콤했다.

“아직까지 중앙감찰각이 지난 십 년간 쌓인 비위 금액 전체를 파악하는 것도 못 하고 있을 정도라오.”

“게다가!"

당은랑이 자신의 무릎을 내리쳤다.

"그들의 방비가 가장 허술한 시점이기도 하지!”

연소현이 술을 한 모금 마시고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연씨 혈족을 건드리기 가장 어려운 이유는-.”

당은랑이 콧김을 뿜으며, 연소현의 말을 가로챘다.

“그들이 연씨 가문, 즉 검가 그 자체이기 때문이 아니오?!”

그녀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그런 그들이 알아서 검가의 시선을 피해, 움직여 주는 상황이라니!”

“듣기로는 본가의 정보부처의 시선을 떼어 놓기 위해서, 엄청난 정치적 자원을 소모했다고 들었소.”

당은랑이 다시 한번 크게 웃었다.

“앞문을 호랑이가 막으니, 뒷문으로 이리가 들어오니, 살아날 길이 없구나!”

전호후랑(前虎後狼).

앞에서 중앙감찰각이 수사를 시작하고, 뒤에서는 연소현이 냄새를 맡고 나타났다.

부정한 방법으로 축재해 왔던 연 씨 혈족에게는 그 말 그대로의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가장 흥미 로운 지점은…!”

당은랑의 녹안(綠眼)이 번뜩였다.

“그 연씨 혈족들이 아직 뒷문으로 이리가 들어왔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지!”

그녀가 아이 같은 미소를 지으며 손뼉을 쳤다.

“그대가 이런 잔치판을 벌여 놓았는데, 어찌 이 당은랑이 끼어들지 않을 수가 있겠소?!”

연소현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연씨 혈족들이 부리는 수족들의 눈을 속이고 그들을 미행할 정도의 정보단체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소.”

연소현의 정보단체인 현월각은 지금 현재,

어둠 속에서 이어지고 있는 이공자 측 정보단체, 대선상회의 공격을 막아 내고 있었다.

그렇게 그들을 묶어 놓는 것만으로도 기적이라고 해도 좋을 상황이 었으니.

“이제, 슬슬….”

당은랑이 천장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협사들이 움직일 시간이 되었군.”

연소현이 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녀에게는 시계도 없고, 이 공간에는 별과 달조차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가 시각을 알아채는 능력의 정확도는 놀라울 정도였다.

하늘이 보이지도 않는 사천 밀림에서.

당가의 혈족들은 자신들의 체내에 그 시각을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는 비법을 새겨 넣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대공자.”

연소현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겠소.”

그녀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그렇게 얻은 막대한 금액으로 대체 무엇을 할 예정이오?”

연소현은 대답하지 않고, 빙긋 미소만 지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