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233화 (233/350)

제8편 무검자(無劍者)

숨어 있던 청호위는 호흡을 억제하고, 허파에 남은 공기에서 진기를 짜내어 천천히 전신에 순환시켰다.

기습을 가할 수 있을 만큼 진기를 움직이되, 적들의 색적(索敵)에는 걸리지 않을 만큼.

"......."

그렇게 기다리다 보면, 적절한 기습의 순간이 오리라고.

대공자는 그렇게 말했었다.

그리고.

적절한 기습의 순간이란.

[지금.]

대공자가 명하는 순간이었다.

"......!"

청호위가 옷장을 박차고 튀어나와 가장 앞에 있던 적에게 냅다 일장(一掌)을 먹였다.

기습에도 불구하고, 그 악명 높은 탐랑의 일원답게, 상대는 방어에 성공해 피해를 최소화해 냈다.

평소에 그들이 어떤 훈련을 해오는지, 어떤 수라장을 거쳐 왔는지 알 수 있는 장면이었다.

"크흑!"

그럼에도 그는 사 층 복도의 난간을 부수고, 아래로 떨어졌다.

* * *

적절한 기습의 순간이란 언제인가.

"......."

"......."

적어도 지금의 연소현과 탐랑 대주에게는 무의미한 말이었다.

지금, 그들은 서로가 상대의 모든 신체 부위를 노리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연소현이 전음을 전하자, 숨어있던 협사들이 일제히 적들에게 기습을 시작했다.

“크흑!”

그리고 탐랑의 사냥개 하나가 사층 난간을 뚫고 떨어지기 시작하는 그 짧은 순간.

"......!"

자세를 낮춘 탐랑 대주는 일격을 위한 준비를 모두 마쳤다.

완벽한 자연체에서부터 시작되는 전투의 개막(開幕)은 그가 가장 선호하는 상황이었다.

강공(强攻)을 취하든 수비를 택 하든.

자연체는 언제나 그에게 상대보다 훨씬 더 신속하고, 한 수 빠르게 움직이게 해주었다.

탁!

사 층에서 떨어진 수하의 발끝이 바닥에 닿았다.

그 발끝이 지면에 닿기까지의 순간이,

탐랑 대주에게는 무한히 늘어나듯, 길게 느껴졌다.

일순(一瞬)을 넘어,

수유(須臾)를 꿰뚫고,

순식(瞬息)에 달한다.

수하의 발이 바닥에 닿으며, 뭔가를 눈치챈 그의 눈꺼풀이 한 번을 채 깜빡이기도 전에.

탐랑 대주의 장도가 칼집을 벗어나고 있었다.

치이이익-!

장도의 날이 칼집을 벗어나며, 마치 공기를 태우는 듯한 소리를 질렀다.

백열(白熱)하는 도신(刀身)이 작살에 꿰인 청새치처럼 거칠게 몸을 경련했다.

그 무자비한 발도(拔刀)의 궤적 안에 자신이 포함된다는 것을 깨달은 탐랑의 사냥개가 눈을 크게 떴다.

대주는 자신을 무시하고, 뒤의 대공자와 함께 공격 대상으로 택한것이다.

"......!"

그 크게 뜬 눈이 대주의 시선과 마주했다.

"......."

평소처럼 무감정한.

어떤 생각도 읽을 수 없이 텅 빈 탐랑 대주의 눈.

자신이 익히 알고 있는, 피도 눈물도 없는 대주의 시선.

'이것이 사냥개의 삶이니-.'

그 짧은 순간 삶을 정리한 탐랑의 사냥개가 눈을 감으려 했던.

그 순간.

도신이 닿기도 전에 그의 몸이 박살 나듯 터졌다.

탐랑 대주의 공허하던 눈에 강한 의혹이 깃들었다.

'어떻게-?!’

산산조각이 나서 흩어지는 수하의 몸을 뚫고, 피 칠갑을 한 대공자의 신형이 그를 향해 짓쳐들고 있었다.

'자연체보다도 반응이 빠르다고-?!'

그의 경악이 끝나기도 전에 연소현이 내뻗었던 일장이 그의 가슴을 강타했다.

콰앙一!

소림(少林).

칠십이종 절기(七十二種絶技),

대수인(大手印).

건물 내부의 모두가 반사적으로 움찔할 정도로 커다란 소리가 울려 퍼지기 무섭게.

연소현이 양손을 모아 쌍장(雙掌)을 내질렀다.

소림(少林).

칠십이종 절기(七十二種絶技),

항마복호장(降魔伏虎掌).

그 경력(勁力)이 대주의 몸을 완전히 꿰뚫기도 전에,

연소현의 팔꿈치가 그의 명치를 파고들고,

소림(少林).

칠십이종 절기(七十二種絶技),

나한권(羅漢拳).

백도일강(百道俏剛).

팔꿈치를 쓰느라 숙였던 자세에서 펴 든 주먹이 인중을 강타하고(달마십팔수; 達磨十八手),

양 손날이 종을 때리듯 그의 머리통 양쪽을 가격했으며(소림오권; 少林五拳),

대주의 흔들린 뇌가 현기증을 느끼기도 전에 그의 전신을 연소현의 주먹이 난타했다(아라한신권; 阿羅漢神拳).

“카학?!”

대주의 허파가 뒤틀리며 자신도 모르게 공기가 빠지는 비명을 내질렀을 때.

소림(少林).

칠십이종 절기(七十二種絶技),

무상각(無上脚).

일합종퇴(一合終腿).

연소현의 신형이 공중에서 날렵하게 한 바퀴 돌아 그의 가슴을 걷어찼다.

퍼엉-!

마치 대포를 쏜 것과 같은 소리와 함께, 대주의 몸이 구겨져 날아가 벽을 뚫고 사라졌다.

여기까지가 연소현이 직접 소림의 칠십이종 절기를 엮고 개량하여 만들어 낸 연환기(連環技).

소림 백팔연환기공(少林百八連環氣功).

“본 대공자가 소림의 무공을 쓴다는 것을 안다고 하지 않았나?”

바닥에 사뿐히 착지한 연소현이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 것치곤, 대처가 형편없군.”

자신의 대주가 형편없이 당해 버린 것이 충격이었을까.

“……?!”

정아와 검격을 교환하던 부관의 검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

그리고.

정아의 용안은, 상대에게 그 아주 잠깐의 순간의 흔들림도 허용하지 않았다.

추확!

부관의 머리통이 허공을 날았다.

머리를 잃은 몸통이 제자리에서 반 바퀴를 돌더니 나자빠졌다.

“주인님의 명을 수행했사옵니다.”

“잘했다.”

적절한 기습의 순간이란.

자신이 온전히 그 시점을 택할수 있는 순간이다.

그리고 연소현은 그 시점을 스스로 만들었다.

청호위를 비롯한 냑양의 봄 협사들에게 내렸던 지시.

[지금.]

탐랑 대주가 자신의 수하가 사층의 난간을 뚫고 낙하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발도의 준비를 했다면.

연소현은 자신이 지시를 내림과 동시에 '준비를 끝냈었다'.

그리고 그 차이가.

완성된 자연체를 이룬 탐랑의 대주를 상대로, 첫 일수 교환에서 연소현에게 완벽한 우위를 이끌어 주었다.

그리고 또한 까다로운 변수를 창출해 낼 수 있는 상대와의 교전에서 완전한 승기를 가져다주었다.

“뻔뻔한 녀석이군.”

연소현이 벽에 뻥 뚫린 구멍을 향해 말했다.

“아직 안 죽은 것, 다 알고 있다. 언제까지 내상과 호흡을 다스릴 참이더냐?”

그렇게 말하는 연소현의 가슴팍 무명옷이 너덜거렸다.

무자비한 연격이 이어지는 와중에서도, 탐랑 대주는 연소현의 가슴팍에 칼을 먹였던 것이다.

그것도 세 차례나.

만약 연소현이 적절하게 흑잠사 외투를 사용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가슴팍에서 세 줄기 피를 흘리고 있었으리라.

그것이 벽을 넘어 진정한 초인지 경에 들었기에.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이, 고수라 불리는 이들의 힘이었다.

“…강하군. 대공자.”

구멍에서 비척거리며 걸어 나온 탐랑 대주는 바닥에 침을 뱉었다.

그것은 침이라기에는 걸쭉했다.

시커멓게 죽은 피와 함께, 내장 조각이 바닥에 튀었다.

“터무니없군.”

머리를 강타당했을 때, 연소현의 암경에 의해 터져서 흘러나온 눈알의 잔해를 뽑아 버린 그가 말했다.

“그것은 소림의 무공이었지만, 또한 소림의 무공이 아니었다.”

그는 연소현과의 교전을 상정하여, 작전에 앞서 모든 소림의 무공을 다시 한번 숙지했다.

검가의 무공학관에 접근하는 것은, 그의 신분상 원래라면 불가능했을 터이지만.

삼공자 측 군사부의 힘으로는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준비가 쓸모없었다.

연소현이 사용하는 무공은 소림의 것이되, 온전히 소림의 것이 아니었으니까.

“당연하지. 본 대공자가 직접 가다듬은 무공이니까.”

탐랑의 대주가 잠시 할 말을 잊었다.

"......."

연소현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말했지만.

벽을 넘은 그가 파악하기로도,

연소현이 구사했던 모든 소림 무공은 그 근간만이 간신히 남아 있을 뿐.

그 형과 묘리가 전부 원형과 달랐다.

“…직접 무공을 개량했다고?”

이 정도 수준의 개량은 역사상 대종사(大宗師)라 불릴 이들에게나 가능한 일이 아닌가.

“어떻게 그 나이에 그토록 강할 수가 있지?”

게다가,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벽에 난 구멍 속에서 내상과 호흡을 다스릴 시간을 번 것이 아니었다.

연소현이 알고서도 추격타를 넣지 않았던 것뿐.

'대공자는 지금 시간을 충분히 활용하고 있다.’

시간은 대공자의 편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각 층에서 자신의 수하들이 공격당하고 있었다.

[중상자 발생!]

[서로 등을 맞대라! 적에게 뒤를 잡히지 마라!]

그들은 경험과 훈련으로 그저 당해 주고 있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기습을 당한 상황에서 깔끔하게 재정비하여 역습할 수 있을 만큼, 협사들의 수준이 낮지도 않았다.

'만약. 내가 직접 지하대수로로 내려갔다면….’

지금쯤.

그의 손에 죽은 협사들이 수두룩 했으리라.

대공자는 처음부터 노골적인 의도로 자신이 포함된 대주 직할조를 이곳에 불러들였다.

대공자는 자신이 자연체를 발현한 순간부터, 그 자신감을 역으로 꺾어 놓을 방안을 짜냈다.

대공자는 지금 이 순간에도, 도망치고 있는 낙양의 봄 협사들이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이미 예봉이 꺾여,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자신을 상대로 느긋하게 시간을 활용하고 있었다.

“도대체….”

이것은, 단지 무공의 수준이 문제가 아니었다.

터무니없이 넓은 시야.

터무니없이 깊은 심계.

그것은 무공 수준 이전의 문제였다.

“당신의 정체가 무엇-.”

연소현의 흑잠사 외투 자락이 펄럭였다.

탐랑 대주가 자신이 말을 하며, 방심을 유도했던 사이에 은밀히 투사했던 암기들이 흑잠사 외투에 튕겨 나갔다.

“재미있는 수법이군.”

심지어 그 뒤로 이어진 장도가 이리저리 꺾이며 구사해 낸 불규칙한 검기들도 모두 피해 버린 연소현이 말했다.

마치 모든 것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듯.

낙양검가의 대공자.

그 검주의 첫 번째 아들이 그를 향해 비틀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더 해보게.”

분명히 대공자는 탐랑 대주 자신과 비교하면 키가 작았건만.

어째서인지, 저 소년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탐랑이 가졌다는 그 기기묘묘하다는 수법들은 본가의 무공학관에도 없거든.”

연소현이 킬킬거렸다.

“그러니 전부 써보게.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시도해 보게.”

그렇게 웃으면서도 그의 시선은 탐랑 대주에게서 조금도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그의 모든 것을.

탐랑의 모든 것을 가져가기라도 하겠다는 양.

"......."

그때.

소리 없이 천장에서 떨어져, 연소현을 기습하려던 탐랑의 사냥개들이 허공에서 찢어져 나갔다.

후두두둑-!

피와 살점의 비가 내렸다.

쿵. 쿠쿵.

이리저리 갈라진 육체의 파편들이 바닥에 떨어졌다.

“흥미롭군.”

연소현이 턱을 쓰다듬었다.

“내게도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어. 아예 중원국의 무공과 궤를 달리하는 별도의 은신 체계를 구축한 것인가?”

연소현은 쳐다보지도 않았고, 반응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중원국이 아니라, 천하의 그 누구도 연소현에게 진정한 의미의 기습을 가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금안마녀(金眼魔女)에게 사각(死角)이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후우."

호흡을 고르는 소리가 연소현의 뒤에서부터 들려왔다.

연소현의 시녀장.

정아가 자신의 용안(龍眼)을 빛 내며, 검에 묻은 피를 털었다.

“자.”

연소현이 이를 악문 탐랑의 대주에게 손짓했다.

“어차피 자네에겐 선택권이 없어.”

그가 탐랑 대주의 마음속을 들여 다보듯이 말했다.

“여기서 끝까지 싸워, 나를 무찌른다는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쥐어볼 수밖에 없지 않나?”

탐랑 대주의 무표정이 깨지고, 얼굴이 완전히 일그러졌다.

“크아아아아—!”

그가, 그의 인생에서 얼마 만인지 모를 포효를 내지르며, 연소현에게 달려들었다.

'이후, 무검자라는 이름은 이전과 전혀 다른 의미로 천하를 울리게 되겠군.'

그것이 탐랑 대주의,

그가 그나마 논리적으로 할 수 있었던 마지막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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