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228화 (228/350)

제3편 투서(投書)

용봉지회 경기장 건설 부지.

낙양검가 전쟁부 병력 주둔지.

연소현의 철갑요새가 떠난 후, 한 사내가 절벽 끝에서 용봉지회 건설 부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석양이 드리우고 있었고, 석양쪽을 향한 사내의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그 육체가 바위처럼 단단하다는 것은 그림자로도 알 수 있었다.

비록, 굳건히 대지를 디디고 있어야 할 다리 하나가 가느다란 의족으로 대체되어 있더라도.

“이렇게 다시 보니, 감회가 사뭇 새로우십니까?”

어느새 다가온 염 장로가 사내에게 물었다.

염 장로를 잠시 돌아본 사내는 틀림없이 검가건축의 총수였다.

낙양검가의 살아 있는 전설 중 하나.

낙양검가의 핵심 사업체인 검가 건축의 사령탑(司令塔).

“감회가 새롭냐고요? 아니. 새롭지 않소.”

총수가 수염을 쓰다듬었다.

“나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이 건설 부지의 설계도와 조감도를 들여다보았소.”

역시 가장 밑바닥에서, 검가의 핵심 사업 하나를 책임지는 자리에 오른 사람다운 답변이었다.

염 장로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저곳을 속속들이 전부 알고 계실 수밖에 없겠군요.”

총수의 답변은 즉각적이었다.

“주경기장의 귀빈실에서부터 가장 하찮은 골목과 하수도까지.”

그의 시선이 염 장로를 향했다.

“전부.”

그가 손을 들어 자신의 머리를 가리켰다.

“이 안에 있소.”

“…대단하십니다.”

염 장로의 말은 순수한 감탄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보니 다르군.”

다시 아래를 내려다보는 총수의 표정은 어딘가 우울했다.

“설계도나 조감도로만 보는 것과는 다를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나는 설계도와 조감도만으로도 모든 것이 완성된 이후의 풍경까지도 전부 머릿속에 그려 낼 수 있소. 풍경과 건축물이 녹아드는 광경도, 기반이 다져지고, 뼈대가 세워지고, 지붕의 기와가 올라가는 그 순간순간 하나하나까지도, 전부 “

염 장로는 그때야 이 단지를 설계하고 구상한 것이 바로 눈앞의 사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럼 무엇이 다르다는 것입니까?”

하지만 총수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저곳에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소.”

"......."

그들이 내려다보는 건축 부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음식을 나르는 자들.

피리를 부르고, 춤을 추는 자들.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는 이들

한바탕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자애원의 발 빠르고 정확한 대처로, 지금도 그들을 위해 필요한 물자들이 속속들이 도착하는 중이었다.

그 광경을 보면서.

검가건축의 총수는 며칠 전 연소현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이 검가는, 이 검가건축은, 나의 고향이고, 우리의 고향이오!”

그는 연소현에게 고함을 쳤었다.

“우리가, 이 검가의 사업체들이 본가를 일구었고, 우리가 이 낙양을 만들었소!”

그때, 연소현이 그에게 뭐라고 했던가.

“하지만 그 낙양을 쌓아 올린 그 재료들은? 그 기반은?”

총수가 연소현이 했던 말을 혼잣말처럼 입에 담았다.

“...지금의 낙양은, 이 낙양검가는 빈민들에게서 쥐어짜낸 피와 땀으로 쌓아 올렸지.”

"......."

염 장로는 침묵을 지켰다.

그런 염 장로를 총수가 슬쩍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염 장로. 그대만큼 그 피와 땀을 잘 아는 이도 드물겠군.”

북부전쟁의 전쟁 영웅.

“그렇지 않소?”

그와 수하들이 흘린 피와 땀은 누구도 감히 그 무게를 헤아리기 힘들리라.

그가 빼앗았던 적들의 목숨에 달린 무게까지도.

한 사내가 검악(劍岳)이라 불릴정도로 정련(精鍊)되려면, 얼마나 많은 고통과 대가를 치렀던 것일까.

염 장로는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담담하게 할 말을 입에 올렸다.

“…그래서 마무리를 하시기 위해서 직접 현장으로 오신 겁니까?”

그 수많은 간부들을 제쳐 두고, 직접 총수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 얼마나 놀랐던가.

심지어 그 대공자조차도 의외라는 표정을 지을 정도였으니.

“최고운영회의의 명이니까.”

총수의 대답에 염 장로가 고개를 저었다.

“최고운영회의는 검가건축 측에 마무리 공사 부분에 대한 현장 지휘를 맡겼지요. 총수 개인이 아니라.”

“어쩌면 잊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엉뚱한 대답이었지만.

염 장로는 담담하게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잊으려고 했던 것인지도 모르지.”

총수는 어딘가 아련한 시선으로 건설 부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검가의 성장으로 검가를 지탱하기 위함이라는 핑계로, 애써 외면했던 것인지도 모르겠소. 그러나….”

그가 자신을 찾아왔던 소년을 입에 올렸다.

“그러나 대공자는 잊지 않았소. 잊으려 하지도 않았고, 외면하지도 않았지.”

염 장로가 자기 자신을 책하는 총수에게 위로라도 하듯, 농을 던졌다.

“그 대공자께서도 십 년이란 세월간 칩거를 하셨습니다.”

“그 귀하다는 검악파산의 농담을 듣다니.”

그 농에 총수가 피식 웃었다.

“죽을 때까지 술자리에서 자랑할 것이 생겼군.”

그 말에 염 장로도 미소를 지었다.

“저도 농담 정도는 하고 삽니다.”

잠시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던, 총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십 년간의 칩거라 했소?”

“예. 그것이 무슨…?”

“이제야 알 것 같군.”

검가건축의 총수가 쓴웃음을 지었다.

“검가건축에서 사람들이 가장 꺼리는 부서 중 하나가 안전에 대한 감시 관리 감독 부서라오.”

“…동료들과 척을 지게 되는 역할이라서입니까?”

“물로 그것도 있지.”

총수가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그보다는-.”

그가 입을 다물었다.

염 장로가 손을 들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

돌아보는 염 장로를 따라서, 총수도 몸을 돌렸다.

“이거 이거, 그 대단하신 총수님께서 이런 누추한 곳에 계셨소이까?!”

세 명의 장로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연소현이 검가건축을 방문했던 날, 마찬가지로 총수를 찾아왔던 장로들이 었다.

[이공자 측의 장로들이군요]

염 장로의 전음에 총수가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그들에게 말했다.

“그대들 말대로, 누추한 곳인데. 본가의 장로들께서 이 누추한 곳까지 무슨 일로 납시셨나?”

“지금 몰라서 묻는 것이오?!”

씩씩거리며 다가온 장로 하나가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총수가 우리와의 약속을 어겼지 않소?!”

총수는 이공자 측과 거래를 통해 대규모의 공사를 수주한 대신, 대공자의 의뢰를 받아들이지 않기로한 바가 있었다.

“내가 약속을 어겼다고?”

다른 장로가 부릅뜬 눈으로 총수와 염 장로를 번갈아 가며 노려보았다.

“우리가 제공한 사업권들을 받아먹고, 동시에 대공자의 일까지 받아들이다니, 총수. 후환이 두렵지 않은 것이오?!”

"후환?”

총수가 낯빛을 굳혔다.

이공자 측 장로들이 순간적으로 움찔할 정도였다.

“나는 약조를 어기지 않았다.”

“하지만 검가건축이 용봉지회 건설 부지의 마무리 공정을 맡아-.”

“이 일은 대공자와 아무 상관 없다. 검가건축은 최고운영회의의 명을 따르는 것뿐.”

“그런 억지가-!”

염 장로가 한 발 나섰다.

“조사 감시단의 책임자로서, 그점은 내가 보증할 수 있소. 검가건축의 개입에 대공자 연소현은 어떤 종류의 의뢰도 영향력도 행사하지 않았소.”

염 장로가 품에서 최고운영회의의 명령서를 내밀었다.

“이, 이런…!”

명령서를 읽는 장로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

그 서류에는 검가건축이 연소현을 도와 마무리 공정을 직접 현장에서 지휘 감독하라는 명이 분명히 적혀 있었다.

“뭐,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공자 측에서 맡긴 대형 공사들은 일정이 미뤄지게 되었소.”

그런 그들을 향해 총수가 어깨를 으쓱였다.

“부득이하게 말이지. 하지만 걱정 마시오.”

총수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대들이 우리 검가건축에 맡겼던 대형 공사들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우리가 책임을 지고 끝까지 해낼 터이니.”

대공자는 이 일을 이미 예상하고.

아니면 자신이 일을 이렇게 만들어 갈 것을 계획해 놓고, 총수에게 이공자 측의 약조를 받아들이라 했던 것일 터였다.

“검가건축을 믿어 주어서 고맙군.”

총수의 말을 굳이 해석하자면

잘 먹었습니다, 정도일까.

“이익…!”

“이런 식으로 우리를 엿 먹이고, 앞으로 아무 일도 없을 것이라 생각하지 마시오, 총수!”

“우리가 이 진창 구덩이 같은 곳에 손을 쓸 방법은 얼마든지-!”

이공자 측 장로들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그것은 지면 아래에 꿈틀거리던 용암이 터져 나오는 것과 비슷했다.

“이곳의 일을 망치겠다고?”

나직한 목소리.

그들 사이를 통과해서 날아온 쇳덩이가 염 장로의 손에 잡혔다.

평범한 무림인이라면 두 손으로도 들 수 없을 것 같은.

거대한 검이었다.

“이 내가 조사 감시를 담당하고 있는 일을?”

이공자 측 장로들은 숨이 턱 막혀 왔다.

“지금 내 얼굴에 대고 전쟁을 선포한 것인가?”

공기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지만, 그 공기가 수십 배 무거워져, 자신들의 허파가 내려앉는 것 같았다.

허공을 자유로이 누비던 바람조차, 무거워 주저앉아 버렸다.

'이, 이것은…'

이공자 측 장로 중 무공을 익힌 장로가 그 현상을 알아보았다.

'검악파산(劍岳破山) 염곽추의 파산경(破山勁)의 전조(前兆)…!’

천년 화산의 정수(精髓)를 한 몸에 받았던, 그 화산의 검군(劍君)을 꺾었던 최후의 일격이 바로 이 파산경이 었다.

그가 수십 배는 무거워진 자신의 손을 간신히 들어 보였다.

"그, 그만!"

그가 허파를 쥐어짜는 느낌으로 항복의 말을 내뱉었다.

“우리는 물러가겠소…!”

그들을 마지막 순간까지 노려보던 염 장로가 파산경을 거두자, 그들은 쥐새끼들처럼 도망쳤다.

후들거리는 다리가 풀려 진창에 엎어지는 자도 있었다.

“마지막에 떠나면서도 웃음을 주고 가는군.”

그 모습에 총수가 껄껄 웃었다.

“하지만 방심하시면 안 됩니다.”

염 장로는 자신의 거검을 바닥에 박으며 말했다.

“저들은 이공자 측에서도 낙양 계파에 속하는 이들로, 무공보다는 수작질에 능한 자들이니까요.”

염 장로가 멀어지는 이공자 측의 장로들을 노려보았다.

“방금도 흉계를 꾸미기 전에 반응을 떠보기 위해서 방문했던 것일 터입니다.”

“내가 이 자리를 도박판에서 운이 좋아 딴 것 같은가?”

염 장로가 마음에 든 것일까.

총수는 처음보다 한결 가벼운 말투로 염 장로를 대했다.

“걱정하지 말게. 내 정치 참모들이 알아서 할 것이야.”

하긴

염 장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염 장로 자신이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

지금 자신과 함께 있는 상대는 검가건축의 총수였으니.

“아까 하시던 말씀은 무엇이었습니까?”

“음? 아. 그 대공자에 대한 이야기 말이군.”

“대공자님요? 검가건축에서 다들 회피하는 부서를 말씀하시던 것이 아니었습니까?”

“맞네, 그 이야기가 그 이야기일세.”

염 장로가 가만히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매달 익명의 투서가 있었네. 어떨 때는 한 번. 많으면 수일에 걸쳐서 마구잡이로 날아올 때도 있었지.”

“무엇에 대한 투서였습니까?”

“그때그때 다르다네. 하지만 대부분이 현장에서의 안전 수칙들에 대한 문제점의 지적과 개량된 수칙들이었지.”

“…골치가 아팠겠군요.”

총수가 미소를 지었다.

“맞네. 새 규칙을 검토하고, 배포하고, 적용하고, 교육하고. 다들 똥줄이 빠질 정도로 일해야 했지.”

“하지 않으면, 그 익명의 투서가 다음엔 어디로 날아갈지 몰랐으니 말입니다.”

“그렇지.”

만약 그 투서를 무시했다가, 사고라도 크게 나서, 인적 물적 손실을 보게 되면.

감찰부에 들어가게 될 수도, 아니면 더 상부로 들어갈 수도 있는 문제였다.

“그 투서는 끊이질 않았어.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어도, 매월 오고 또 왔지.”

“그 익명의 투서를 보낸 사람이, 대공자님이었다는 말씀입니까?”

“그 익명의 투서는, 대공자가 칩거를 끝냈던 그 시기에 함께 끊겼네.”

“그것만으로는-.”

총수가 손을 들어서 아래를 가리 켰다.

“그리고 여기.”

검가건축이 삼공자 측과 문제를 일으킬 각오로 관리 감독을 했다면, 식량 배급에 문제가 생기지 않았을 현장.

"......."

염 장로가 입을 다물고 침음하자, 총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오늘에서야 확신했네.”

그의 시선이 다시 아래를 향했다.

“대공자는, 아니. 대공자께서는 칩거를 한 이후로도, 단 한 번도. 빈민 노동자들의 삶을 잊거나, 외면한 적이 없다는 것을.”

그가 말을 이었다.

“얼마 전 찾아오셨던 대공자께서 내게 말씀하셨지. 지금의 낙양은, 이 낙양검가는 빈민들에게서 쥐어 짜낸 피와 땀으로 쌓아 올렸다고.”

총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눈을 가렸던 나를 통렬하게 두들긴 말이었네.”

“…그래서 직접 현장을 감독하러 오신 것이었군요.”

“그렇다네.”

총수가 절벽에서 돌아섰다.

“돌아가세. 내일부터 시작될 공사를 대비하려면 앞으로 할 일이 많겠군.”

염 장로가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아, 그러고 보니. 그 노동자들의 지도자 역할을 했던 자 말일세.”

“예, 알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면담도 했었지요.”

“이야기를 나눠 보니, 아주 사람이 괜찮더군. 앞으로 내 밑에서 써도 좋을 것 같네.”

“…그자를요? 일이 좋게 수습되긴 했지만, 결국 봉기를 일으켰던 중심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타고난 반골(反骨)이지. 강골(强骨)이기도 하고.”

총수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아주 마음에 들어. 내 젊을 때 모습을 보는 것 같거든.”

“…총수님의 젊은 시절 이야기가 궁금하긴 하군요. 아는 이가 거의 없지 않습니까.”

“좋아! 그렇다면 오늘 야근을 하면서 내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지!”

“잘 부탁드리지요.”

두 사람이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며, 막사를 향해 걸어갔다.

그들의 대화는 곧 절벽 아래,

건설 부지에서 들려오는 노동자들의 축제 소리에 묻혀 사라졌다.

그 축제가 자연스럽게 자아내는 그 소리들은, 어째서인지.

단순한 축제의 즐거움을 넘어서, 듣는 이를 행복하게 하는 느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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