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편 광신(狂信)과 헌신(獻身)
용봉지회 경기장 건설 부지.
외곽 검문소.
이제 삼공자 측에 의한 포위망은 해제되었지만, 사실상 지역 전체가 거대한 수용소나 마찬가지가 되었기에.
외곽 검문소가 하는 역할은 달라지지 않았다.
“정지! 정지!”
검가의 검문소 조장 무사가 밖으로 나가려는 무리가 다가오자 정지 신호를 보냈다.
“서류와 신분증을 제시하시오.”
빈민 노동자들의 반란 행위는 삼족을 멸하는 대신 영구적 노역형으로 감형되었지만.
그들 중 누구도 마음대로 노역형에서까지 벗어나게 둘 수는 없었다.
“여기 있습니다.”
외곽 검문소의 무사가 출입 허가 서류와 신분증들을 확인하는 사이, 위병(衛兵)들이 일일이 인원의 숫자를 확인했다.
“자애원?”
“그렇습니다.”
자애원 무리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무녀가 합장을 하며 대답하자, 무사도 합장을 했다.
“좋은 일 하시는 분들이군.”
“약 선녀님께 받은 은혜를 그분의 가르침대로 베푸는 것뿐이지요.”
그러면서도 무사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자애원 무리를 살피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인원 확인 완료!”
사람이 숨어 있을 만한 수레 안까지 꼼꼼하게 모두 살핀 검문소의 위병들이 하나둘씩 보고를 올렸다.
“문제없습니다!”
조장 무사는 확인을 마친 서류와 신분증을 무녀에게 돌려주었다.
“고생들이 많소.”
“…별말씀을요.”
서류와 신분증을 돌려받는 무녀의 손끝이 살짝 떨리고 있었지만, 조장 무사는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낙양검가의 무사는 어디서든, 일단 외경의 대상이기 마련이었으니.
“통과!"
그가 허가를 내리자, 수하들이 검문소의 장애물들을 치웠다.
자애원의 인원들이 밖으로 나가는 것을 지켜보는 무사의 뒤로 복식이 다른 무사 하나가 슬그머니 다가와 물었다.
“아무런 문제도 없는 인원들이겠지?”
그 물음에 조장 무사가 한숨을 쉬며 답했다.
“당신도 직접 함께 지켜보지 않았소? 서류도 신분증도, 인원 숫자도 정확하게 들어갈 때와 같았지.”
“하지만….”
조장 무사가 신경질적인 눈초리로 뒤를 돌아보았다.
“여기서 더 무엇을 하란 말이오? 저들은 애초에 외부인이고, 아직 노동자들의 명단 작성이 완료되지도 않았는데, 교차 확인을 할 자료도 없지 않소?”
그 사나운 반응에 말을 걸었던 무사가 어깨를 으쓱이고 한발 물러났다.
“나는 그저 명을 받은 대로 모든것을 확실히 할 뿐이오. 누구도 부정한 방식으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그 말에 조장 무사가 인상을 썼다.
“나는 전쟁부 소속의 무사요. 당신이랑 다르게 삼공자의 수하가 아니니, 내게 명령조로 말하지 마시오.”
그러고는 바닥에 침을 뱉었다.
“그대들이 우리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그가 위병들의 눈치를 살피더니, 전음으로 말했다.
[그것도 공식적인 명령도 없이 말이오. 이것만 해도 충분히 나는 삼공자 측의 편의를 봐주고 있는 중이오.]
“…알겠소.”
삼공자 측의 무사가 순순히 물러났다.
“그대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하고있소.”
“그럼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좀 처박혀 계시오.”
뒤통수에서 들려오는 말에 유난히 가시가 돋쳐 있었다.
'X같은 전쟁부 놈들이, 우리를 무시해…?’
불쾌했다.
삼공자 측이 이곳에서 맥없이 후퇴하게 된 이후, 검가 내에서 삼공자 측 무사를 은근히 깔아 보는 이들이 부쩍이나 늘었다.
“정기 보고 할 시간 아닌가?”
그가 괜히 그늘에서 쉬고 있던 수하에게 짜증을 부렸다.
“예 예. 알겠습니다.”
수하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털며 대답했다.
“자애원의 인원들이 통과했고, 아무 이상 없다고 전달하면 될깝쇼?”
“그래. 당장 말을 달려라.”
수하가 탄 말이 달려 나가는 모습도 어딘가 터덜거리는 것 같았다.
그 의욕 없어 보이는 모습에 삼공자 측 무사가 이를 부득 갈았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전부 기합이 빠진 꼬락서니하고는….”
그는 속으로 타오르는 천불을 애써 다스리며, 안력을 돋우어 감시를 이어 나갔다.
'협사인지 나발인지 하는 망할 무림인 새끼들. 잡히면 내가 일일이 손수 주리를 틀어 주겠어…!’
찾고 있던 그 무림인- 낙양의 봄 협사들이 방금 자신의 옆을 지나 전부 빠져나간 것도 모른 채.
* * *
낙양 시가지 외곽 지점.
자애원의 인원들은 바삐 오가는 인파 사이를 뚫고, 뒷골목으로 스며들었다.
주변의 시선이 없는 것을 확인한 무녀가 일꾼들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쯤이면 될 것 같습니다.”
그녀의 말에 일꾼들 복장을 한 낙양의 봄 협사들이 메고 있던 짐들을 내려놓고 모여들었다.
“감사합니다. 이 구명지은(救命之恩)은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무녀가 고개를 저었다.
“저희는 약 선녀님의 가르침에 따를 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저희가 감사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니지요.”
무녀가 협사들을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그렇다면, 저희 지도자인 그분께 감사를 표하는 것이 옳은 것 같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두 번이나 사지(死地)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감사로도 부족한 일입니다.”
길게 대화할 시간은 없었다.
“약 선녀님의 축복이 함께하시길.”
낙양의 봄 협사들은 골목으로 스며들어 모습을 감추었다.
잠시 후.
약속대로 도착한 자애원의 진짜 짐꾼들이 다가와 협사들이 내려놓은 짐들을 멨다.
그들은 골목에 들어갈 때와 같은 모습으로.
그렇게 본산으로 돌아갔다.
* * *
주경기장 위령비 앞.
“아니, 아니.”
홀로 추리를 이어 나가던 호법원의 육부장이 고개를 거칠게 가로저었다.
“그건 불가능해…!”
그가 자신의 추리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연소현을 바라보았다.
“검문소는 인원의 숫자를 정확하게 확인할 것이고, 들어간 만큼만 나갈 수 있습니다. 게다가 삼공자 측 군사부가 풀어놓은 무사들까지 외곽을 감시 중입니다.”
그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니 자애원의 인원들과 무림인들을 바꿔치기하려 한다면, 그 말인즉슨…."
대공자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거칠게 뒤흔들렸다.
“그들과 바꿔치기해 준 자애원의 인원들이 이곳에 남아야 한단 말입니다…!”
그가 비명처럼 외쳤다.
“이곳에 남은 그들은 그 무림인들을 대신해서 평생 노역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음? 그런가?”
연소현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애초에 이곳에 없었던 협사들을 대신해서 노역을 하다니. 나는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군.”
자신이 그렇게 티 나게 연기를 피워 놓고, 태연하게 오리발을 내미는 연소현의 모습에 육부장이 고개를 내저었다.
“미쳤군, 미쳤어. 자애원의 인원들에게 평생을 희생하라는 지시를 내린 사람이나, 그걸 따르는 광신도들이나-.”
육부장은 말을 끝내지 못했다.
그 순간 그들에게서 조금 떨어져 있던 여인에게서 섬뜩한 살기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는 정신을 차렸다.
“…말을 함부로 했습니다. 대공자께 사죄드립니다.”
연소현은 그의 사죄를 받는 대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광신이라?”
그에게서 몸을 돌린 연소현이 위령비를 향해 다가가 문구가 새겨져있는 바위의 단면을 쓰다듬었다.
육부장이 연소현의 손이 향하고 있는 문구를 읽었다.
“…봄은 그저 오는 것이 아니다.”
연소현이 등을 돌린 채 나직하게 말했다.
“그렇지. 봄은 그저 오는 것이 아니라, 부르는 것일세.”
소년이 뒤를 돌아보자, 그 시선에 육부장이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자애원의 인원들은 누구보다도 그것을 잘 알고 있지.”
소년이 다시 위령비 아래에 앉았다.
“그것은 광신이 아니라, 헌신이다.”
"......."
문득 시선들을 느낀 육부장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멀리 떨어져서 휴식 중이던 장인들의 눈매가 사뭇 매서웠다.
내용은 듣지 못했어도, 그가 연소현에게 소리치는 것을 본 모양이었다.
“그들은 내세(來世)에 대한 약속을 믿어서 한 일도 아니고, 가혹한 현실을 피해 눈을 돌리려 신앙에 매진하는 것도 아니야.”
그때야 깨달았지만, 멀리서 수많은 노동자들이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행동을 감히 광신이라 깎아내릴 수 있겠나?”
정확히는 육부장,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가 연소현에게 조금이라도 해를 끼치려 들 것 같으면, 모두가 달려들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랬다.
'이곳은 대공자의 진영 한가운데나 다름없는 곳이었어.'
연소현이 식은땀을 닦지도 못하는 육부장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 헌신의 가치는 자네도 공감하고 있을 것 같은데, 육부장.”
그 말에 육부장의 눈가가 가늘게 떨렸다.
“…무슨 말씀입니까?”
위령비 아래 걸터앉은 연소현이 어깨를 으쓱였다.
“자네 또한 이 검가를 위해서 충성하고 또 헌신하기로 맹세한 자가 아니던가?”
육부장은 연소현의 시선을 피했다.
“…애초에 제대로 지킬 수도 없는 맹세였지요.”
“지금의 본가가 그만큼 썩었으니까.”
연소현이 혀를 차며, 가볍게 말을 이어 나갔다.
“호법원주는 정치적 중립을 운운하며, 연씨 혈족의 비위에 대한 조사를 거부했지. 그러면서도 삼공자 측의 좌우 대군사와 손잡고 이곳에 있는 자네에게 밀명을 내려 나를 압박한다?”
가벼운 말투였지만,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연소현이 킬킬 하고 웃어 보였다.
“정치적 중립이니 뭐니, 전부 개소리지.”
"......."
육부장이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것은 자신도 느끼고 있는 바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지금 어떤 말씀이 하고 싶으신 겁니까?”
연소현은 질문과 관계없이,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이어 나갔다.
“이곳에는 무림인들 따위는 없네. 삼공자 측이 반박 자료를 발표해 봐야, 애초에 그들은 내게 적대적이니, 신뢰성이 떨어지지.”
육부장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리고 저는 이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했지요.”
정직하게 조사를 마치고, 이곳에 아무런 무림인도 없었다고 발표해 봐야, 삼공자 측의 비난에 직면할 것이고.
그렇다고 일을 꾸며 내면, 대공자의 분노와 공격을 맨몸으로 감당해야 할 상황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고?”
연소현이 피식 웃었다.
“아니야, 아닐세.”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위령비를 받친 제단 위에 서 있는 대공자가 육부장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자네는 선택하지 않은 것뿐이지.”
육부장이 고개를 비틀었다.
“그 말씀은….”
그의 목소리가 덩달아 낮아졌다.
“저더러 대공자님을 따르란 말씀입니까?”
그의 질문에서 강한 거부감이 느껴 졌다.
하지만 연소현은 태연하게 미소를 유지하며 말했다.
“사실, 이 검가 내부의 사건을 조사하는데, 정치적이지 않은 건수가 몇 개나 있겠습니까?”
갑자기 무슨 말이냐고 반문하려던 육부장이 열리던 자신의 입을 다물었다.
어디선가 들어 본 말이 아니던가.
“이런 식으로 전부 쳐 내다 보면, 본가 내의 불온한 무리들이 더욱 날뛰게 될 것이고, 그건 결국 호법원의 위상과도 직결되는 문제가 되어 버릴 겁니다. ”
어중간한 정의감.
어중간한 각오.
그것은 자신이 이전 호법원의 간부 회의에서 했던 말이었다.
“어, 어떻게 그걸 대공자께서…?”
육부장이 어렵사리 유지하던 표정이 완전히 무너졌다.
“그 자리는 간부 회의였습니다! 참석한 이들은 전부 호법원의 부장 이상급이란 말입니다!”
그 자리의 간부 중 하나가 이미 연소현의 끄나풀이란 말인가.
“부장이면 어떻고, 간부면 어떻다는 말인가?”
연소현에게서 나직하게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내 눈과 귀는 검가의 어디에나 있다네, 육부장.”
소년의 눈가가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검가의 누구도, 어느 곳도, 나를 피해 갈 수는 없지.”
더 이상 육부장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이해하네, 혼란스럽겠지. 하지만 사실이 그렇다네.”
연소현이 천천히 다가오며 그런 그를 다독이듯 조곤조곤하게 말했다.
“이미 호법원에는 정치적 중립따위는 없어진 지 오래야.”
육부장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연소현이 마귀의 유혹처럼 속삭였다.
“본가에 여름이 다가올 걸세. 이제까지 누구도 겪어 보지 못한 가혹한 계절이 될 거야.”
이공자와 삼공자의 경쟁에서.
대공자가 끼어들어 삼파전 구도로 모든 것이 격변하고, 거칠어지고 있는 이 시점에서, 연소현의 예고는 너무나 현실적이었다.
“자네는 곧 그 뙤약볕 아래, 맨몸으로 서게 되겠지. 견딜 수조차 없는 열기가 자네의 몸에서 수분이란 수분은 전부 빼앗아 갈 것이고.”
"......."
눈을 질끈 감은 그의 귓가에 연소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누구도 자네에게 물 한 모금, 그늘 한 조각 제공해 주지 않을 걸세. 하지만.”
연소현이 육부장의 가슴을 쳤다.
육부장은 질끈 감았던 눈을 뜨고, 연소현을 바라보았다.
신산(神算).
천안통(天眼通).
몇 달 전, 부지불식간에 칩거를 깨고
이제 이 삼공자 측과 힘을 겨루고 있는 불가해한 인물이 그곳에 있었다.
“나는 그대에게 마르지 않는 강물이 되어 줄 수도 있고.”
연소현이 손을 들어 주경기장을 가리켰다.
“나는 그대에게 끔찍한 땡볕을 가려 줄 수 있는 거대한 그늘이 될 수도 있다네.”
거대한 주경기장 건물이 만든 그늘이 그들을 가려 주고 있었다.
“선택은 자네 몫이야.”
연소현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대의 대답을 오래 기다려 줄수는 없을 걸세.”
연소현은 그를 지나쳐, 걸음을 옮겼다.
“자네도 알다시피 지금 상황이 상황이라서 말이지.”
멀어지는 연소현의 뒤를 그의 시녀장이 조용히 따랐다.
"......."
그런 연소현의 등 뒤를 향해, 육부장이 손을 들었다가, 내렸다.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그리고 결국.
“대공자님!”
그가 대공자를 부르는 외침이 광장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