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225화 (225/350)

제25편 삶은 계속된다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던 인파는 흩어졌다.

자애원 본산의 인원들이 저 멀리서, 위령제의 뒷정리를 마치고 떠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한쪽에.

연소현이 서 있었다.

"......."

깡깡-, 하고 인부들이 내리치는 망치가 정을 때린다.

위령비의 비문이 음각되어 갔다.

그 글씨는 너무도 유려했고.

그것을 보는 연소현의 표정은 한없이 부드러웠다.

마치 그 순간, 시간이 정지한 것만 같았다.

정아는 주인의 그 표정을 언제까지고 지켜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주인님.]

그의 뒤를 홀로 조용하게 지키던 정아가 전음을 보냈다.

[인원 하나가 조금 전부터 계속 이쪽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용안의 탐지 범위 안에, 저 멀리 그늘에서 한 중년인이 초조하게 좌우를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알고 있다. 신원 파악은?]

정아는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용모파기들 속에서 중년인의 신원을 찾아냈다.

[본가 호법원의 호법육부장입니다.]

그녀의 말에 연소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알겠다.]

그렇게 그녀에게 전음을 남긴 연소현이 위령비로 다가갔다.

“대공자님.”

작업을 하던 장인들이 위령비에서 손을 떼고 물러섰다.

무슨 일인지 묻는 이도 없었다.

그들 또한 봉기를 일으켰던 빈민 노동자들이었기에, 그들의 연소현을 향한 태도는 정중하기가 이를 데가 없었다.

"......."

위령비 앞에 선 연소현이 그 거대한 바위의 단면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마치, 감히 만져서는 안 될 것을 만지는 사람처럼.

그의 손이 허공에서 몇 번을 망설이다가, 비석을 쓰다듬었다.

“…봄은 그저 오는 것이 아니다.”

연소현은 나직하게 자신이 쓴 위령문의 문구를 읽고는, 비석에서 손을 뗐다.

위령제는 살아남은 이들을 위한 것이다.

살아남은 이들이 계속해서 살아가게 하는 것을 돕기 위함이다.

위령제는 끝났다.

인간, 연소현을 위한 시간은 끝났다.

이제 다시, 낙양검가의 대공자 연소현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호법육부장을 불러라.”

“예, 주인님.”

위령비에서 돌아서는 연소현의 표정은 더 이상 부드럽지 않았다.

정아는 그것이 안타까웠다.

* * *

정아의 뒤를 따라 걷는 호법육부장은 몇 번이고 다리가 꼬일 뻔했다.

'제길.'

삼매진화를 일으켜 연초에 불을 붙일 정도의 무공을 익힌 자가, 제 다리에 걸려 쓰러진다면 얼마나 큰 추태일 것인가.

'제기랄.'

하지만 그는 그런 자신의 볼썽사나운 모습을 상상하기엔, 너무도 마음의 여유가 부족했다.

'왜, 내가….'

그는 위령비 아래 앉은 연소현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경기장이 만들어 낸 그늘에 앉아 멀리 보고 있는 소년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어째서 내가 여기까지 와서 저 대공자를 상대해야 하는가.'

하지만 그에게 대공자의 그 옆얼굴은 사신(死神)의 옆모습처럼 보였다.

“그래서, 저 진창에 다 같이 처박혀 뒹굴자고?”

자신의 선배, 일부장의 말이 떠올랐다.

'자네의가족들을 생각하게'

선배가 했던 말에 따르듯.

그는 지금까지 최선을 다해서 검가의 후계자 문제를 피해 왔었는데.

'이번 일도 그저 최고운영회의의 명을 따라 조사 임무를 맡은 것이었건만.'

어째서인지 어느새 이곳에 대공자가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 대공자를 상대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자네가 호법육부의 부장인가?”

연소현이 먼저 그를 아는 체했다.

"......!"

육부장은 그때야 자신이 무례를 범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죄, 죄송합니다.”

그가 손을 모아 인사했다.

“호법원의 아무개가 본가의 대공자님을 뵙습니다.”

모은 두 손이 맞닿은 지점이 축축했다.

“그래. 내가 대공자 연소현이다.”

대공자는 그를 향해 돌아앉았다.

육부장은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겨 그에게로 다가갔다.

자신이 발을 디딘 곳은 거대한 경기장 건물의 그림자였지만, 어째서인지 그 그림자가 대공자 연소현의 그림자처럼 느껴졌다.

그는 당장에라도 이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가 눈을 질끈 감고 운을 뗐다.

“예, 대공자님. 저는...."

연소현이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

“자네 용건을 듣기 전에.”

그의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가 육부장을 향했다.

“먼저, 이곳에서 있었던 항명 사건의 조사는 어떻게 되어 가고 있나?”

“…현재 진행 중인 조사에 대해서는."

“현재 진행 중인 조사에 대해서는 말할 수가 없겠지. 알겠네.”

연소현이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주동자였던 형산북류의 문주는 사망했고, 삼공자 측은 이곳에서 손을 떼야만 했다.

조사가 흐지부지되리라는 것은 이미 짐작하고 있는 바였다.

“그보다는 정식으로 '조사 감시단'의 법무 책임자로 임명된 것을 축하하지.”

삼공자 측이 모두 떠난 주둔지.

그 주둔지는 이제, 최고운영회의가 파견했던 병력의 주둔지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의 정식 명칭은 '용봉지회 경기장 건설 부지 조사 감시단'이 되었다.

조사 감시단의 목적은,

'봉기를 일으켰던 빈민 노동자들 전원에 대한 신상 파악과 그들의 감시 그리고 평가'였다.

그리고 육부장은 항명 사건의 조사에 이어, 그 조사 감시단의 책임자 중 하나로 임명됐던 것이다.

“가, 감사합니다.”

감사 인사를 하면서도.

육부장의 눈빛에는 의문이 깃들어 있었다.

'대공자는 어찌하여, 벌써 내가 법무 책임자로 임명된 것을 알고 있단 말인가?’

임명된 자신조차도 방금 먹물이 채 마르지도 않은 임명장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건만.

그가 생각을 채 이어 나가기도 전에, 대공자가 말을 이었다.

“용봉지회는 본가에 있어서도, 중대사. 그런 일에 참여한 것은 후에 자네의 승진을 위한 평가에 큰 도움이 될 걸세.”

그렇게 말하는 연소현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그 안에는 일말의 호의도 없음을 육부장은 느끼고 있었다.

“…그저, 본가의 행사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영광입니다.”

그의 말 안에는 일말의 진실도 없음을 연소현은 느끼고 있었다.

육부장은 지금 자신이 대공자와 엮인것만 해도, 당장에 새로얻은 직위고 뭐고 내팽개치고 도망가고 싶으리라.

“그래. 영광이겠지.”

연소현이 그 말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빈민 노동자들에 대한 조사는 어떻게 되어 가고 있나?”

“덕분에 무탈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들이 전면적인 협조를 해 주고 있기에, 신상 파악은 순조롭게 되어 가고 있습니다.”

“잘됐군. 그래서….”

그의 어조는 평온했고, 방금까지와 같이 아무렇지도 않게, 육부장에게 물었다.

“호법원주가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

"......."

순간 말문이 막힌 육부장이 숨을 삼켰다.

'대공자는 이미, 전부 알고 있는 것인가…?!’

그는 떨리는 눈으로 연소현을 바라보았다.

'아니, 어쩌면. 이미 알고 있는 편이 대화하기 좋을지도 모르겠-.'

그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이, 연소현이 말했다.

“그래. 자네가 호법원주의 밀명(密命)을 받아 왔음을 나는 이미 짐작하고 있다네. 그쪽이, 자네가 나와 대화하기 편하겠지?”

“…예.”

“그럼 말해 보게.”

입을 열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는 호법원주의 밀명을 말하려던 그는, 이어진 연소현의 말에서.

“어째서 호법원주는.”

그가 말해 보게.'라고 했던 말이, 밀명을 말해 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보냈던 연씨 혈족의 비리에 대한 자료는 못 본 척 넘겨 놓고, 내게 호의를 바라는가?”

"......!"

말문이 턱 막혔다.

연소현은 그런 그에게 혀를 찼다.

“호법원주는 내게, 봉기 세력에 가담했던 무림인들의 조사에 대한 협조를 바라고 있겠지?”

이쯤 되자, 육부장은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어차피 자신은 현재, 호법원주의 전령에 불과했다.

“…예, 그렇습니다.”

이어서 그는 호법원주가 일러 주었던 그대로 말했다.

“그 무림인들은 법을 알기를 우습게 아는 자들로, 이미 여러 차례 비슷한 성격의 사건에 연루된 것으로 의심되는 정황이 있습니다.”

호법원은 아직 '낙양의 봄'이라는 조직명까지는 알아내지 못한 듯했지만.

그들의 위험성은 파악한 모양이었다.

“그들은 이미 하나의 조직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이번 사건에도 크게 개입하여 노동자들에게 영향을 끼친 것으로 조사되고 있습니다.”

연소현의 따가운 시선 속에서도 육부장은 꿋꿋이 제 할 말을 이어 나갔다.

“낙양의 질서 유지에 큰 문제가 되기 전에 그들을 발본색원(拔本塞源)해야 한다는 것이, 호법원주의 입장입니다.”

연소현이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낙양지사의 명과 최고운영회의의 명으로 이미 죄를 감형받았네.”

“아닙니다.”

육부장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 명은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내린 것이지, 반사회적인 무림인 집단을 대상으로 하지는 않았습니다.”

"......."

그것은 어찌 보면 말장난에 불과했지만, 정확하게 허점을 찌르는 말이기도 했다.

연소현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그에게 물었다.

“그것이 호법원주의 생각인가?”

“예, 그렇습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연소현이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다시 한번 물었다.

“정말로 그것이 순수하게 호법원주 개인의 생각이라고?”

“…제가 알기로는.”

연소현이 앉은 자세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이곳에 어떤 조직이 노동자들을 돕고 있었고,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동조했는지는 아직 최고운영회의에도 보고가 올라가지 않았지. 그런데 호법원이 그것을 알고 있다고?”

“그것을 대공자께서 어떻게…?”

물음을 던지던 육부장이 입을 다물었다.

염 장로.

대공자 연소현과의 정치적인 거래의 주선자로 유명한 그가 이곳의 총 책임자였다.

위로 올라가야 했을 모든 보고가 연소현을 거쳤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침음하는 그를 무시하고, 연소현이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자네가 그것을 파악하기에도 너무 일러. 자네가 항명 사태에 대한 조사와 노동자 신원 파악에 얼마나 쫓기고 있는지는 나도 잘 알지.”

"......."

육부장은 연소현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를 택했다.

어떻게 호법원주가 그 사실을 알게 되었는지는 그 또한 궁금한 바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호법원주는 이곳의 사정에 대해서 잘 아는 자에게 정보를 들었다고밖에 할 수 없지.”

육부장이 자신도 모르게 탄식하듯 말했다.

“…삼공자 측이겠군요.”

이곳의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었으며,

걸림돌이 되고 있던 낙양의 봄에 대해서 조사를 할 수밖에 없었던 입장에 놓였던.

그리고 '제대로 된' 조사를 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한 자.

연소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삼공자 측의 좌우 대군사다.”

“…그들이 호법원주에게 정보와 함께 바람을 불어넣은 것이군요.”

육부장은 이제야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래. 호법원주에게 있어서는 공을 세울 기회이면서, 동시에 좌우 대군사가 나에게 한 방을 먹일 기회이기도 하지.”

그들은 연소현이 협조하지 않으면, 즉각 관련 자료를 공개하고, 연소현을 공개적으로 비난할 것이다.

“게다가 그뿐이 아닙니다. 추후 그들 조직이 또다시 비슷한 문제를 일으켰을 때….”

“나를 그들 조직의 배후로 지목하겠지.”

역시 좌우 대군사는 쉽게 볼 이들이 아니었다.

자신들의 본진이 극도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그들은 연소현에게 올가미를 던진 것이다.

'전투에서는 패배했지만, 그저 빈손으로 물러나지는 않겠다는 것인가.'

연소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내게 토사구팽(兔死狗烹)을 시키려 드는 것이지.”

토끼 사냥이 끝나고 사냥개를 삶아 먹는다는 뜻.

연소현이 협사들을 잡아들이는 것에 협조하게 하여, 낙양 사회의 아래에서부터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연소현의 명성에 타격을 주겠다는 노림수였다.

“…이쯤에서 그들을 '정리'하는 것이, 대공자께는 오히려 피해가 적은 방법일 수도 있습니다.”

육부장이 머리를 긁적이며, 연소현을 설득하듯 말했다.

“협사니 협객이니 하는 자들은, 외골수이기 따름입니다. 대공자께서 그들의 은인이기도 하기에, 당분간은 잠잠하게 지낼지도 몰라도, 결국 추후에 더 크게 문제를 일으킬 것입….”

열심히 연소현을 설득하려던, 육부장의 혀와 입술이 멈췄다.

“왜 그러나? 계속 말해 보지 그러나?”

대공자 연소현의 입에 어느새 미소가 걸려 있는 것을 봤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대공자는 이미 자신이 호법원주의 밀명을 받고 왔다는 사실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내용까지도 짐작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어쩌면, 대공자는.

그 대응까지도 준비해 놓았을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육부장의 등골을 따라 오싹한 한기가 치달았다.

“뭐, 말을 하지 않겠다고 해도 상관없지.”

연소현이 어깨를 으쓱였다.

“나도 지켜야 할 명성이 있으니, 자네에게 전면적으로 협조를 해 주지는 못하겠지만, 그렇다고 반사회적인 무림인 집단에 대한 조사를 막을 는 없지. 얼마든지 알아서 수사하게.”

"......."

너무도 순조롭게.

원하는 것을 얻었건만.

육부장의 표정은 더욱 굳어만 갔다.

“하지만 수사 결과. 그들 조직의 존재가 이곳에서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면. 자네는 어쩔 셈인가?”

연소현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그래서 내가 처음부터 그들이 이곳에 없었다고 주장하면?”

육부장의 시선이 흔들렸다.

“그 무림인들이 이미 이곳을 빠져 나갔다는 말씀이십니까?!”

연소현이 어깨를 으쓱였다.

“이곳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이들이 뭘 어떻게 빠져나갔다는 것인지는 모르겠군.”

"......."

육부장은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자신의 머리를 굴렸다.

'여전히 이곳의 외곽은 철저하게 감시되고 있어. 빠져나갈 구석이 없을 터인데?!’

이곳에 출입할 수 있는 것은.

낙양검가의 관계자.

그리고 빈민 노동자들의 인도적인 지원을 위해서 이곳을 방문했던, 자애원의….

“자애원?!”

제암진천경 - 1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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