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편 위령(慰靈)
용봉지회 경기장 건설 부지.
삼공자 측 지휘부는 가장 먼저 철수를 마쳤다.
하지만 굳이, 남들의 눈을 피해 남은 이들도 있었다.
“대공자님.”
연소현에게 질척거리는 자들이었다.
"대공자님. 혹시 저희 대호문(大虎門)이 제공해 드릴 수 있는 경비 업무 협력에 관심이 있으시면-.”
“관심 없소.”
연소현이 딱 잘라 거절했다.
“에잉, 쯧.”
삼공자 측에 발을 걸치고 있는 중소문파의 문주가 혼잣말을 구시렁거리며 돌아섰다.
“제대로 된 세력도 없이 혼자 얼마나 잘하나 보자.”
거리가 멀어진 데다가 그 성량조차 작아서, 내공이 없는 자라면 들리지 않았겠지만.
지금의 연소현에겐 충분히 들리고도 남음이 있었다.
“자네.”
“…예?”
저기까지 가던 대호문의 문주가 뜨끔 하며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대공자가 무공을 익혔다고-.'
그의 생각은 거기서 끊어졌다.
빠악.
그의 고개가 사정없이 젖혀졌다.
백보신권(百步神拳)이었다.
위력은 적당히 조절했지만, 대호문의 문주 따위가 버틸 위력은 아니었다.
"......!"
턱이 돌아간 대호문의 문주가 혼절하여 진창이 된 바닥에 그대로 나자빠졌다.
철퍽, 하고 얼굴부터 진흙탕에 처박는 꼴이 퍽 유쾌했다.
"문주님?!"
아무런 기척도 없이 펼쳐졌던 소 림의 절기에, 그의 제자들이 혼비백
산했다.
“문주님이 쓰러지셨다!”
낄낄 하고 웃으며, 연소현이 슬그머니 그 자리를 빠져나와 발걸음을 옮겼다.
“의원! 의원을 찾아와라!”
어머니가 달라도, 한솥밥먹으며 자랐던 것이 아니더라도, 남매는 남매라는 것일까.
비슷한 시각에, 낙양검가에서도 자신의 여동생들이 사람 하나를 때려 눕혔다는 사실은.
아무리 그가 연소현이라도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것은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그쪽 잡아!”
“넘어간다! 조심!”
연소현의 발걸음이 멈췄다.
한창 삼공자 측 병력이 주둔지를 철거하고 있었다.
결국, 자신들과 동료들이 흘린 피와 무관하게.
승리는 대공자 연소현의 것으로 돌아갔지만, 병력들의 표정은 오히려 묘하게 밝은 구석이 있었다.
“빨리, 빨리! 서둘러라!”
쏟아졌던 비로 진창이 된 바닥에 진흙탕을 철벅거리면서도, 연소현의 눈에 그들의 몸놀림은 가벼워 보였다.
“돌아가서 밥이나 제대로 먹어 보자고!”
“흙바닥에서 밥 먹는 것도 질렸다!”
그랬다.
정치적인 승리가 누구의 것이든.
저 높은 곳에서 누가 이득을 보았든.
그들과는 상관없었다.
“오랜만에 마누라랑 어머니 얼굴을 뵐 수 있겠어!”
자신의 생존.
동료의 목숨을 앗아 가려던 적.
눈앞에 위태로이 걸려 있던 것이 사라지자, 그들은 마치 다른 사람이된 것 같았다.
“부상자들의 후송이 완료되었습니다!”
귀청을 뒤흔들던 폭발.
폭우 속에 매캐하게 퍼지던 연기의 냄새.
피의 비가 내리고, 모두가 공포에 떨었던, 그날 새벽의 기억을 전부 이 주둔지에 묻어 버리고 가려는 듯이.
“이제, 돌아가자!”
누군가의 외침에 병력들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누구랄 것 없이, 하나둘씩 그 외침을 따라 외쳤다.
“그래! 누군지 몰라도 말 잘했다!”
“돌아가자!"
“집으로 가자!”
그들은 한바탕 왁자지껄 떠들며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맨 처음.
손을 모아 돌아가자고 외쳤던 연소현은 미소를 지은 채, 그들을 바라보다가 멀리 시선을 돌렸다.
"......."
주둔지에서 내려다보이는 용봉지회 경기장 건설 부지의 모습이 있었다.
청명한 하늘 아래.
따스한 햇볕 아래서, 여기저기 밥을 짓는 연기가 올라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지붕도, 거리도, 물기를 머금고 햇살에 눈부시게 반짝였다.
사람들이 바삐 오가는 모습이 작게 보였다.
완공 직전이었지만, 폐허처럼 보이던 그 풍경이.
지금은 으리으리하게 완공된 이후의 풍경보다도.
더 아름다워 보였다.
"......."
그 풍경을 눈부시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던 연소현의 뒤로.
“주인님.”
그의 시녀장, 정아가 다가왔다.
“아래에서 준비가 끝났다고 하옵니다.”
* * *
경기장 건설 부지에 발을 디딘 연소현이 맨 처음 보게 된 것은, 길게 줄을 선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말씀 좀 묻겠소.”
그는 맨 뒤에 줄을 선 이에게 다가가 물었다.
“예, 나리. 얼마든지 제가 아는 것이 있다면 대답해 드리겠습니다요.”
꾀죄죄한 빈민 노동자가 넙죽 고개를 숙였다.
그가 대공자 연소현이라는 것을 알아보지는 못했지만, 걸치고 있는 흑잠사 외투와 선녀같은 미인을 대동하고 있는 모습에 대한 반응이었다.
“이 줄이 무슨 줄인가? 식사라도 주는 것인가?”
“아닙니다요. 식사는 배급하는 곳이 많아져서, 크게 기다리는 자도 없습니다요. 모두 낙양검가 대공자님의 은혜입지요!”
“대공자의 은혜?”
"예, 그렇습니다요!”
빈민 노동자가 밝은 얼굴로 대답했다.
“검가의 대공자님께서 저희를 구해 주신 것도 모자라, 자애원에서 많은 사람들을 보내어, 저희를 돕게 하셨습니다요. 덕분에 그저 쌀밥만 먹는 것도 아니고, 반찬과 국까지도 먹을 수 있었지요!”
그의 설명은 경쾌했고, 끝이 없었다.
연소현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 즐거운 듯했다.
“그리고 이 줄은....“
그가 줄을 서 있는 이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자애원에서 무상으로 저희에게 옷가지와 생필품을 나눠 주고 있습니다요! 그래서 이렇게 다들 줄을 서있는 것이지요!”
“무상으로 받아 챙겨서 뒷돈을 받고 거래하는 자들은 없고?”
“아이쿠, 없습니다요!”
빈민 노동자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감히 그런 짓을 했다가는 천벌을 받게 될 것을 다들 알고 있습니다요. 이것은 비밀은 아니지만….”
그가 좌우를 살피고,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이틀 전에 큰비가 내리던 날. 하늘에서 피의 비가 내리고, 낙양검가의 무사들이 떼죽음을 당한 이야기를 모르는 이가 없습니다요.”
그날 일을 아는 자들이 감히 허튼 짓을 할 수가 없다는 말이었다.
“대공자님! 여기 계셨군요!”
연소현을 발견한 자애원의 현장 책임자가 외친 말에, 좌중의 시선이 일제히 연소현을 향했다.
“대, 대공자님…?!”
방금까지 연소현에게 이야기를 늘어놓던 빈민 노동자가 큰 눈으로 입을 뻐끔거렸다.
“고맙군. 이야기는 잘 들었네.”
연소현은 그의 어깨를 두들겨 주고, 자애원의 인원들에게 다가갔다.
“자애원의 지도자이신 대공자님을 뵙습니다!”
자애원 소속 인원들의 얼굴도 밝았다.
“그래. 물자 배급은 잘 이루어지고 있군.”
연소현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전부 어려운 일을 겪은 사람들이야. 도움에 모자람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일세.”
"예, 걱정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본산에 비축해 두었던 물자들부터 전부 끌어오는 중이니, 주문을 넣은 새 물자들이 들어올 때까지는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입니다!”
“잘 처리했군.”
연소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검가에서도 이곳과 관련된 일을 막는 일은 없을 것이고, 오히려 모든 협력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그의 말에 다들 수긍하면서도 슬그머니 눈치를 보는 것이 있었다.
“무엇이더냐?”
연소현의 말에 현장 책임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곳의 인원이 너무 많고, 필요한 물자 또한 많습니다. 다른 것은 문제가 없는데, 자금이….”
“자금?”
그 말에 연소현이 미소를 지었다.
“걱정하지 말거라. 이 부지의 공사가 끝날 때까지, 모든 비용은 검가가 부담할 것이야.”
그가 전음으로 바꿔, 현장 책임자에게 말했다.
[그러니 전부 아낌없이 나눠 줘 버리고, 비용 청구는 검가의 사업 지원단에 넣으면 된다.]
연소현이 눈을 찡긋하며 전음을 이었다.
[이곳의 완공은 검가의 중대사이고. 검가는 돈이 많아도, 너무 많아서, 비용을 '조금' 과하게 청구해도 신경 쓰는 자도 없을 것이야]
현재 본산에서 전달되는 물자들에 대한 비용과 주문을 넣은 물자들에 대한 비용을 넘어서.
낙양 이곳저곳에서 필요한 물자들에 대한 비용 청구까지도 재주껏 밀어 넣으라는 뜻이었다.
[더 말하지 않아도, 무슨 말인지 알겠지?]
연소현의 말을 알아들은 현장 책임자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본산에도 그렇게 전달하겠습니다.”
역시 이 바닥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자애원의 인물답게 눈치가 빨랐다.
“좋아. 그럼-.”
“대공자님!”
만족을 표하고, 발걸음을 옮기려던 연소현의 등 뒤로, 그를 부르는 소리가 있었다.
연소현이 돌아보자, 그와 대화를 나누었던 빈민 노동자가 그에게 절을 올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감사합니다요! 감사합니다요!”
줄을 서 있던 자들도.
물건들을 받은 이들도.
무슨 일인가 싶어, 기웃거리던 자들도.
주변의 모든 이들이 전부 연소현에게 절을 올렸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대공자님!”
절을 올리는 이들이 파도처럼 번져 나갔다.
그들의 감사 인사가 거리에 가득 울려 퍼졌다.
그 광경에.
연소현은 그만 코끝이 찡해져, 말문이 막힌 듯했다.
"......."
제암진천경 앞에서도 할 말을 전부 하던, 그 연소현의 말문이 막히는 순간이었다.
그의 눈 끝이 잠시 반짝이는 것을, 용안을 지닌 정아는 눈치챘지만.
그녀는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그저 그의 뒤를 지켰다.
"다들..."
연소현이 잠시 잠겼던 목소리를 풀고 다시 말했다.
“다들, 그동안 고생이 많았소. 그러나 모든 일이 끝난 것은 아니오. 그대들은 모든 조사가 끝날 때까지 이곳에서 갇혀 이 거리의 완성을 해야 할 것이고.”
하나둘씩 엎드린 자세에서 고개를 들고, 연소현의 말을 경청했다.
“또한, 이 거리가 완성되더라도 평생을 내 밑에서 노역속에서 살아야 하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오.”
“그래도 좋습니다!”
그 말에 연소현과 대화했던 빈민 노동자가 큰 소리로 외쳤다.
“대공자께 기꺼이 이 한목숨 바쳐 따르겠습니다요!”
그가 외치자, 모두가 머리를 바닥에 대고 외치기 시작했다.
“따르겠습니다!”
“바치겠습니다!”
꾀죄죄하고, 볼품없이 말랐으며, 교육을 받은 적도 없고, 무공이라고는 일절 모르는 이들이었지만.
어째서인지.
연소현의 눈엔 그들의 외침이, 무사들의 맹세만큼이나 무거워 보였다.
그리고 그의 생각을 확인이라도 해 주듯이.
[저들 전부, 진심입니다…]
정아가 그들의 마음을 읽고 전음으로 전달해 주었다.
“…다들 고맙소.”
연소현이 두 손을 모아 빈민 노동자들을 향해,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그 인사에 담긴 연소현의 마음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정말 고맙소.”
선의를 베푸는 것이야, 그의 입장에서 그리 어렵지는 않다만.
받는 이가 그것을 순수한 선의로 인지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이던가.
연소현의 구원은 급작스러웠을 것이고, 심지어 그들이 요청한 일도 아니었다.
빈민 노동자들의 지도부와는 달리, 저들은 제대로 된 설명을 듣지도 못했다.
전후 사정을 전부 알지도 못할 것이다.
“...진정으로 고맙소.”
약자들이 더욱 비열할 수 있고,
가난한 자들이 더욱 탐욕스러울 수 있다는 것을 잘 아는 연소현으로서는.
지금 이 순간이 마치 기적과 같이 느껴졌다.
* * *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자애원의 무녀들이 그 묵직한 북소리에 맞추듯, 너울너울 춤을 췄다.
어린 무녀들과 가락을 아는 이들이 넋을 기리는 노래를 불렀다.
위령제 (慰靈祭) 였다.
커다란 광장에는 수천에 가까운 빈민 노동자들이 전부 모였고, 그들은 고개를 숙여 묵념했다.
낙양의 봄에 소속된 지사들도 모두 그 속에 모였고, 빈민 지도자도 그들과 함께 섞여 있었다.
구덩이에 한데 모여 있던 시신들은 지난 하루 동안에 걸쳐 모두 수습됐다.
그 수백에 이르는 시신들을 태우는 연기가 자욱하게 깔렸지만, 모여든 군중의 눈이 매운 것은 연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이고, 아범아…!”
“먼저 가거라, 친구야! 나중에 보자!”
위령제를 위해 차려진 제사상은 풍성했다.
“그곳에서 듬뿍 들거라!”
“더 이상 굶주리지 말아라!”
제암진천경이 보여 주었던 환상 이상으로 수북하게 담긴 쌀밥에 그들이 생전 입에도 대 보지 못했던 진귀한 요리들이 제사상에 올랐다.
"붓을."
“여기 있사옵니다.”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연소현은 정아에게 커다란 붓을 넘겨받았다.
그가 시간과 공을 들여 직접 간 먹을 듬뿍 묻혀, 단면을 드러낸 커다란 바위 앞에 섰다.
그것은 주경기장 앞에 준비된.
위령비였다.
[이곳에, 선량한 이들이 자기 자신을 바쳐 봄을 불러왔다]
그의 손끝이 춤을 추듯 움직였다.
[그러니 후대의 이들이여, 잊지 말아라]
붓끝이 움직이는 모습이, 무녀들의 춤을 닮아, 망자들의 넋을 달래듯 너울너울 춤을 췄다.
[봄이 지나면, 혹독한 여름이 오고, 가을을 거쳐, 또 가혹한 겨울이 도래하겠지만.]
용사비등(龍蛇飛騰에 일필휘지(一筆揮之)라.
글을 모르는 이들도 모두가 숨을 죽이고, 그 붓놀림을 바라보았다.
[봄은 그저 오는 것이 아니라,]
그 위령비에 적힌 문구는, 후에 이곳을 방문하는 수많은 이들이 읽게 될 것이다.
[봄은 부르는 것이며,]
이곳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곳에 목숨을 바친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그들도 알게 되리라.
[그렇기에 봄은 더욱 소중하고]
그 소중함을.
[그리고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을.
연소현의 글자를 따라 음각(陰刻)하는 망치와 정의 소리가 하늘 높이 울려 퍼졌다.
폭우 속에서도 꿋꿋하게 꽃잎들을 피워 낸 벚꽃 조경수가 자신의 꽃잎을 아낌없이 휘날렸다.
이곳은 거대한 낙양이라는 도시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 곳이었지만.
그리고 삶의 고단함을 생각하면, 극히 잠시일 뿐일지라도.
분명히 이곳엔 봄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