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223화 (223/350)

제23편 만사여의(萬事如意)

대공자가 탄 우마차가 삼공자의 주둔지를 향하고 있던 무렵.

낙양검가, 사업 지원단.

“저분들은….”

“공녀들이군.”

삼공녀 연다은과 사공녀 연다혜가 사업 지원단의 본관에 들어서고 있었다.

본관 앞에서 모여 회의 시간을 기다리던 이들이 그런 그녀들을 보고 뒤에서 숙덕거렸다.

“...어제는 무단으로 퇴근하더니, 오늘은 무단 지각이군.”

“아무리 본가의 공녀들이라지만. 너무한 것이 아닌가?”

그렇게 숙덕거리는 이들은, 그녀들과 마찰을 빚고 있던 지원일부(支援一部)에 소속된 인원들이었다.

“자기들 마음대로 일이 되지 않았다고, 이젠 자기들 마음대로 행동하겠다는 건가?”

“놔두게. 어차피 애들이 아닌가?”

지원일부는 지원단장이 출장으로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이공자 측에 노골적으로 줄을 선 행태를 보이고 있었다.

“흥.”

삼공녀 연다은은 그런 지원일부의 인원들을 향해 코웃음을 쳤다.

“어리석은 녀석들.”

사공녀 연다혜 또한 비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녀들과 시선을 마주친 이가 찝찝함을 느꼈다.

어제까지는 자신들에게 적잖이 주눅 들어 있던 그녀들이었지만, 지금은 뭔가 달라 보였다.

“공녀님들.”

그가 슬쩍 그녀들에게 다가가 떠보려 했다.

“회의 시작까지는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았습니다만. 공녀들께선 참석하실 건지…?”

묘하게 말이 짧았다.

삼 사공녀의 하씨 가문은, 하씨 부인의 사망 이후, 현재 낙양검가 내에서 위세를 잃은 상태였다.

그녀들의 후견인이 되어 주던 지원단장은 검가에서 자리를 비운지 오래였기 때문이었다.

“회의?”

“어째서 우리가 겨우 지원일부의 회의에 참석해야 하는 것이죠?”

어제까지만 해도, 지원일부가 자신들을 따돌린다고 화를 냈던 그녀들이 아니었던가?

“…예?"

그녀들에게 회의 참석 여부를 물었던 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쓸데없는 참견은 마시고, 비키시죠.”

“그대 따위들에게 볼일은 없으니까요.”

그녀들은 도도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그게 무슨 말씀-.”

“공녀님들! 오셨습니까!”

지원일부의 인원이 뭐라 말을 꺼내려 했을 때, 중앙 계단 위에서부터, 뚱뚱한 노인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부단장님을 뵙습니다!”

그의 모습을 확인한 지원일부의 인원들이 급히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고개를 숙이기는커녕, 더욱 꼿꼿이 세우는 이들이 있었다.

“늦었군요. 지원부단장. 미리 연락이 들어갔을 터였을 텐데요?”

“우리를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참이었나요?”

두꺼비를 닮은 인상의 지원부단장은 뒤뚱거리는 걸음으로 급히 계단을 달려 내려왔다.

“아이고, 이거 공녀님들께 제가 크게 실례를 범했습니다! 연락을 받고 급히 이것저것 준비를 하느라, 그만-."

“변명은 됐어요.”

연다은이 그의 말을 끊었다.

“허허. 그렇지요? 제가 공녀님들을 붙들고, 이 누추한 장소에서 뭘 하던것인지….”

그가 두 손을 싹싹 비비더니, 두꺼비 같은 얼굴에 미소를 걸고 그녀들을 앞장서서 안내했다.

“자 자, 여기서 이러지 마시고. 귀빈용 접객실로 모시겠습니다. 이쪽으로….”

기름이 줄줄 흐르는 그의 얼굴을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두 쌍둥이 공녀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그를 따라갔다.

“참. 우리가 입맛이 까다롭다는 것은 아시죠?”

“우리는 하씨 가문에서 판매하는 찻잎밖에 즐기지 않는답니다.”

오랜만에 한껏 낙양검가의 공녀기분을 내어 보는 두 사람이었다.

“아이코,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계단 위로 그들이 사라지자, 남겨진 지원일부의 인원들이 혼란에 빠졌다.

“이게 무슨 일…?”

“어째서 지원부단장님이?”

그들 중 최고참이 이를 갈며 후배 하나를 가리켰다.

“너! 당장 이 일을 부장님께 알려라! 당장!”

“예! 옙! 알겠습니다!”

그가 화들짝 놀라서 달려가자, 몸을 돌린 최고참이 나머지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희는 뭘 쳐다보고 있어?! 당장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정보를 모아야 할 것이 아니더냐?!”

그는 두 공녀를 맞이해 사라진 지원부단장이 올라간 계단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그 교활한 두꺼비 같은 부단장이 찬밥 신세이던 공녀들을 귀빈처럼 맞아들인다고...?

무언가, 지금

자신들은 모르는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 * *

“뭐라고?!”

소식을 들은 지원일부장은 앞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당장에 귀빈 접객실로 달렸다.

'망할, 망할, 망할…!’

삼 사공녀가 검가전장에서 대공자를 만났다는 이야기는 언뜻 들었으나, 무시했던 기억이 났다.

신뢰도도 낮고, 정확성도 그리 높지 않은 소식에다가, 어차피 대공자는 그들이 현재 적대중이었던 자가 아니었던가.

'삼 사공녀가 대공자를 만나 봤자, 뭘 하겠냐고 판단했건만…!’

“일부장님!”

그가 귀빈 전용 층에 발을 디디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접객원이 그에게 총총 다가왔다.

“그래. 나 일부장이다. 지금 여기서 삼 사공녀와 부단장께서 만남을 가지고 계신다고 들었는데 그것이 어디-.”

“죄송합니다만.”

접객원이 딱 잘라 말했다.

“귀빈 전용 층에 누구도 들이지 말라는 부단장님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돌아가 주시지요.”

“나는 이 검가 사업 지원단 지원 일부의 부장-!”

"예외는 없습니다.”

한낱 접객원이 부장인 자신에게 이런 태도를 보인다?

'부단장 놈…!’

답은 하나였다.

'내 끈을 잘라 버린 것인가…!’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자신에게 이 일에 끼어들 생각은 전혀 없다고.

일부장이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호언장담을 하던 부단장이었다.

'이 X 같은 놈이…!’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이, 일부장님!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이거 놔라!”

그가 제지하는 접객원들을 물리치고 복도를 달렸다.

삼 사공녀가 어떤 방에서 부단장을 만나고 있는지 몰랐지만 상관없었다.

굳이 귀빈층으로 온 이상, 그들은 가장 호화롭고 고급스러운 접객실에 있으리라.

“멈추시오!”

“비켜!”

입구를 지키는 이들이 그를 제지하려 했지만, 차마 부장을 제압할 간덩이가 있는 자는 없었다.

“허허, 그래서 제가 단장님의 말씀을 평소….”

그가 문풍지 사이로 새어 나오는 소리를 들으며, 호화로운 문을 거세게 열어젖혔다.

“일부장?!”

공녀들을 상석에 앉혀 두고, 손바닥을 비비던 부단장이 펄쩍 뛰더니, 그를 향해 삿대질을 했다.

“자네 지금, 이게 공녀님들 앞에서 무슨 무례한 행동인가?!”

부단장의 터질 듯 부릅뜬 눈에는 분노로 인해 실핏줄들이 일어나 있었다.

평소 방관주의로 일관하며 허허거리던 부단장이라고는 믿어지지가 않는 모습에, 순간 움찔했던 일부장이 지지않고 입을 열었다.

“이게 지금 무슨 일-.”

“됐어. 어차피 자네를 부르려던 참이니, 잘됐네.”

자신을 부르려던 참이었다고?

일부장의 얼굴이 일그러지든 말든 무시한 부단장이 손짓했다.

'일단 이야기를 들어 보자.'

“…예."

그는 일단 부단장의 손짓에 따라 자리에 앉으려 했다.

그러자 부단장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자네 지금 뭐 하나?”

“예?"

의자를 잡고 멀뚱멀뚱 쳐다보는 일 부장을 향해, 부단장이 역정을 냈다.

“이 자리가 어느 자리라고, 자네가 앉으려 들어?! 이쪽으로 와서 내 뒤에 서게!”

그 순간.

일부장은 깨달았다.

일이 꼬여도, 그의 상상을 넘어서는 지경까지 꼬였다는 것을.

"......."

잠시 머릿속이 하얗게 되었던 그가 잠자코 시키는 대로 부단장의 뒤에 섰다.

“흠흠. 이거 부하가 주제를 모르고 실례를….”

노골적으로 자신을 비하하는 사과.

그 사과에 일부장의 얼굴이 다시 붉으락푸르락해지기 시작했다 .

“어머, 그럴 수도 있지요.”

“저희도 생각이 부족한 수하 때문에 고생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한답니다.”

삼 사공녀가 우아하게 손사래를 치며 너스레를 떤다.

일부장을 노골적으로 엿 먹이는 그녀들이 었다.

"하하, 이거 이해해 주셔서 다행입니다. 역시 그 단장님을 오랜 세월 보좌한 분들답게….”

부단장 또한 그녀들의 장단에 기꺼이 맞춰 춤을 춘다.

그 광경을 뒤에 서서 지켜보는 일 부장의 이마 여기저기 돋은 혈관이 점점 크게 불거졌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삼 사공녀는 신분은 자신보다 높을지 몰라도, 이 검가 사업 지원단에서는 자신보다 한참 낮은 직급이었다.

'이, 이, 이 계집들이…!’

속에서 천불이 치솟아 머리통이 폭발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 시선을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하, 그럼 이야기를 계속할까요?”

“그러시죠.”

부단장이 습관처럼 손을 비비며, 두꺼비 같은 얼굴에 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대공자님께서 용봉지회 경기장 마무리 공정의 책임자가 되셨으니, 마땅히 저희 사업 지원단이 노력을 아끼지 않고 필요한 지원을…, 아니!”

부단장이 자신의 가슴을 두드렸다.

“필요하신 그 이상으로 모든 지원을 해 드려야 마땅하겠지요!”

그 말에 삼 사공녀가 코웃음을 쳤다.

“물론, 당연하지요.”

“그것이 최고운영회의의 결정이니까요.”

그때야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서류에 눈이 간 일부장이었다.

그 서류에는 최고운영회의 행정각주의 직인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무조건적인 지원을 지시하는 명령서였다.

“자, 잠깐?!”

잠시 사고가 정지했던, 일부장이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

“대, 대공자가 용봉지회 경기장의 마무리 공정을 맡았다고요?!”

부단장이 버럭 소리 질렀다.

“자네는 좀 닥치고 있게!”

“죄, 죄송합니다….”

용봉지회는 낙양검가에서도 현재 가장 공을 들이고 있는 초대형 사업이었다.

그 마무리 공정을 대공자가 맡았다고?

삼공자 측은 어쩌고?

그것도 이렇게 갑자기?

“하하, 죄송합니다. 어쨌든, 공녀들께서 대공자님을 대리하여 직접 이렇게 내방하셨으니, 당장에 제가 봐드릴 수 있는 편의가 있을까요?”

삼공녀 연다은이 딱 잘라서 요구했다.

“지금 당장, 죄악계곡에 행해지고있는 지원일부의 방해 공작을 멈추도록 하세요.”

부단장이 잠시 굳었다.

"......!"

방해 공작을 펼치던 당사자인 일 부장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 그것은….”

부단장의 지방 가득한 얼굴에 육즙 같은 식은땀이 흘렀다.

'이공자와 대공자 중에 편을 들라고?’

그 모습에 사공녀 연다혜가 미소를 지었다.

“큰오라버니의 편을 들라는 것이 아닙니다. 저희 요구는 어디까지 방해 공작을 '멈추라는 것'에 있지요.”

“그 말씀은…?”

삼공녀 연다은이 자신의 큰오라비가 일러 준 대로 말했다.

“이미 사업 지원단의 추는 이공자에게 기운 것 같단 말이죠.”

사공녀 또한 들었던 그대로 말했다.

“여기서 부단장이 해야 할 역할은 사업 지원단이란 저울의 균형을 맞추고 유지해야 하는 일이 아닐까요?”

“중립 의무 말이죠.”

"......."

두꺼비를 닮은 부단장의 얼굴이 굳었다.

'이건, 공녀들의 생각이 아니다.'

제대로 된 권력이라고는 한 줌도 없는 그녀들이 할 만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이것은 틀림없이….

'대공자가 공녀들을 통해서 내게 경고하고 있는 것이야…!’

이 사업 지원단에서 단장이 부재한 지금, 누구보다도 많은 정보를 쥐고 있는 것은 바로 부단장이었다.

'대공자는 지금 떠오르는 태양이다…!’

감히 검가에 누가 있어, 이공자와 정면으로 힘을 겨루는 와중에, 삼공자의 뒤통수를 후려갈길 수 있다는 말인가.

그의 계산은 짧고 정확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불민한 탓에, 수하들이 벌이고 있는 일을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가 고개를 탁자에 박았다.

“부디! 대공자께는 앞으로 이런 일이 없을 터이니, 잘 부탁드린다고 전해 주시면…!”

삼 사공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부탁드리고 자시고 할 것도 없지요.”

“만일 그대가 사업 지원단의 중립 의무만 잘 수호한다면 말이에요.”

“허, 허허허. 앞으로는 제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직접 일들을 살필 것이니, 맡겨만 주시지요!”

그 대화를 듣는 일부장은 자신의 의식이 혼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머릿속이 핑핑 돌았다.

아니, 천장이 빙빙 돌고 있는 것인가?

'꿈인가?'

온 세상이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너무나 선명한 사실 한 가지는.

이공자 측에 노골적으로 줄을 대고, 대공자를 적대했던 자신은….

'이렇게 내 앞길이 막힌다고?’

이공자를 통한 출세.

최연소 부단장을 향한 꿈.

검가의 실권자가 되어 누려야 했을 권력과 향락.

모든 것이 지금.

그의 눈앞에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아, 안 돼-!”

그가 절규했다.

“안 돼! 안 돼! 안 돼! 이럴 수 없다!”

“이런 미친 작자가?!”

일부장은 자신의 외침을 저지하려는 부단장의 손을 쳐 냈다.

“이 망할 것들이…! 너희가 대공자 따위를 등에 업고, 나중에 무사할 것 같으냐?! 대공자 따위가 몇 번 대단한 모습을 보였다고, 그 거대한 사업을 제대로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으냐?!”

그가 침을 튀기며, 발작처럼 외쳤다.

“어리석은 자들! 어리석은 것들! 너희는 결국 모두-!”

그는 자신의 말을 끝맺지 못했다.

"......!"

그의 얼굴에 삼공녀 연다은의 무릎이 벼락같이 박혀 들었기 때문이었다.

삼공녀 연다은이 탁자를 박차고 뛰어 그의 면상을 무릎으로 찍어 버렸던 것이다.

이빨들이 부러지고, 찢어진 입에서 피가 흩날렸다.

"......!"

내공이 없기에, 그 순식간에 벌어진 광경을 입을 쩍 벌린 채 보기만 할 수밖에 없었던 두꺼비상의 부단주를 배경으로,

이어 달려든, 사공녀 연다혜의 정권이 그의 배에 박혀 들었다.

“쿠에엑…!”

일부장이 형편없이 나뒹굴어 구석에 처박혔다.

“후우. 속이 다 시원하네.”

삼공녀 연다은이 치마를 탁탁 털며 말했다.

“음. 어째서 언니가 뭔 일만 있으면 주먹부터 나가는지, 그 이유를 알것 같아.”

사공녀 연다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선을 마주친 그녀들이 꺄르륵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잘 부탁드려요.”

삼 사공녀가 활기찬 걸음으로 문 을 나섰다.

그녀들은 대공자 연소현의 대리인이었다.

일부장은 이제 정치생명이 끝난자에 지나지 않았다.

"......."

부단주는 멀어지는 그녀들에게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손수건으로 자신의 식은땀을 닦고, 또 닦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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