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219화 (219/350)

제19편 흑색 상황(黑色狀況)

몇 시진 전

쏟아지는 폭우를 뚫고, 강철의 바퀴가 맹렬하게 굴렀다.

잘 정비된 검가 내부의 큰길과 제대로 마쳐둔 정비가 아니었다면, 사고가 나도 몇 번은 났을 정도의 속도였다.

“이랴! 이랴!”

명백히 한계를 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고삐를 쥔 하녀는 영물들을 채근하고 또 채근했다.

"------!"

평소였다면 짜증을 냈을 두 영물은 사납게 콧김을 뿜으며, 그 네 다리를 조금도 쉬지 않고 달렸다.

“피, 피해라!”

“어이쿠!”

갑작스럽게 마주친 거대한 강철 우마차에, 배수로를 정비하던 검가의 하인들이 몸을 날려 피했다.

“…원각정 입구입니다!”

마차 안의 시녀장 정아에게 보고를 하기 무섭게, 고삐를 쥐지 않은 하녀가 그대로 달리는 우마차에서 몸을 날렸다.

가속도와 빗물 때문에 균형을 잃은 그녀는 앞으로 바닥을 굴렀다.

하지만 그 고통도 모르는 듯, 몸을 튕겨 일어선 그녀는 그대로 입구를 향해 신법을 전개했다.

그녀의 몸이 쏜살처럼 앞으로 치달았다.

“정문 개방! 정문 개방!”

다급한 하녀의 외침.

이미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것을 알아챈 정문의 특임대원들이 급히 폐쇄되어 있던 정문을 열어젖혔다.

얼마나 급했던지.

입구를 통과하는 우마차는 속도를 줄일 생각도 하지 않았고.

기어코 오른편으로 기울었던 그 육중한 몸체가 스쳐지나며, 원각정의 오른쪽 대문을 박살냈다.

콰드득一!

철갑요새가 그렇게 정문을 통과하여, 원각정의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특임대원들의 사이에서 어지럽게 전음이 오갔다.

[일급 보안 태세 발효!]

[훈련 상황이 아니다! 전 인원, 당장 움직여! 경계를 강화하라!]

우마차가 원각정의 앞마당에 도달하자 고삐를 잡고있던 하녀가 제동장치를 끝까지 당기며 외쳤다.

"멈춰!"

영물들은 네발을 대지에 뿌리박듯이 내리박았다.

철갑요새의 그 육중한 몸체가 옆으로 미끄러지며 바퀴들이 포석들을 박살 냈다.

마지막 순간에 철갑요새가 바깥쪽으로 크게 기울어져, 전복될 뻔 했지만.

한 중년인이 유령처럼 나타나 반대편 지붕을 밟아 누르자, 공중에 떴던 바퀴가 바닥에 떨어졌다.

기예에 가까운 천근추(千斤墜)의 수법이었다.

하지만 그 중년인의 수법에 감탄을 표할 정도로 여유가 있는 이는 없었다.

“탈명귀검!”

정아가 창밖으로 중년인의 별호를 외쳤다.

“당장, 어르신을…!”

그 다급한 외침에 중년인, 탈명귀검의 얼굴이 한층 더 굳어졌다.

“상황은?!”

그의 물음에 즉각 정아의 대답이 돌아왔다.

“흑색(黑色)! 흑색 상황!”

흑색-이라는 말이 들리자마자, 탈명귀검의 신형은 폭발적인 탄력을 이용해 원각정의 귀빈 숙소로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귀빈 숙소에 도달하기도 전에, 이미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오고 있는 노인을 발견할수 있었다.

맨발로 뛰쳐나와 달려오고 있는 그 노인은 그가 부르러 가려던, 중원국 최고의 의원.

살아 있는 전설.

약사여래의 현현이라는 약 선녀, 약소유의 스승.

약왕이 었다.

우마차의 안을 본 약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빌어 처먹을 마기가 하늘을 찌르더라니…!”

우마차의 좌석에 길게 눕혀진 연소현의 몸은 핏기 하나 없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으며, 끊임없이 잘게 발작을 거듭하는 중이었다.

하녀 하나가 옆에붙어 연소현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피거품을 제거하여 기도가 막히는 것을 방지하고 있었다.

“얼마나 되었나?!”

약왕의 고함에, 하녀들에게 정신없이 지시를 내리던 정아가 답변했다.

“주인께서 직접 흑색 상황을 알리고, 귀식대법(龜息大法)에 들어가신지, 이제 곧 사(四) 각째입니다!”

흑색 상황.

연소현이 제암진천경의 마기를 감당할수 없을 때를 알리는 표현.

연소현이 직접 개량한 귀식대법은 이런 상황을 위해 준비된 특단의 조치였다.

지금처럼 급격히 불어난 마기를 제어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을 때.

특수하게 고안된 귀식대법으로, 아예 신체의 신진대사를 극한까지 낮춰버리는 것이다.

“자네! 훈련대로 해야지! 지금 뭐 하고 있나?!”

의식이 없는 연소현을 보며, 하얗게 질린 탈명귀검의 정강이를 걷어찬 약왕이 외쳤다.

“이놈도 자네의 전(前) 주군처럼 잃고 싶지 않다면, 당장 움직여!”

그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탈명귀검이 연소현을 업고 달렸다.

그 방향은 연소현의 어머니, 약 소유의 위패가 모셔진 사당이었다.

와장창창!

연소현이 준비해 두었던 지침에 따라 거듭하여 훈련을 해왔던 하녀들의 움직임은 거침이 없었다.

그녀들은 내공까지 동원하여 사당 바닥에 가득하던 불상들을 박살 내듯 치워 버리고, 탈명귀검이 연소현을 눕힐 공간을 확보했다.

“어르신! 주인님의 의식이 점차 멀어지고 있습니다!”

연소현의 손을 붙잡은 정아가 금안을 빛내며, 비명처럼 외쳤다.

“알고 있다! 그게 옳은 순서다! 그러니 지금까지처럼 녀석에게 계속 말을 걸어라! 너라면 할 수 있다!”

하녀들이 날라 온 도구들을 점검하며 외치는 약왕의 목소리에, 정아는 연소현의 두 손을 부여잡고 계속해서 외쳤다.

“주인님! 정아가 여기 있사옵니다! 주인님!”

하녀들은 지침대로 행동한 이후, 어쩔 줄을 모르고, 하얗게 질려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

세뇌의 부작용.

죽은 자가 따로 없었다.

“준비가 끝났으니, 너희는 전부 나가라!”

약왕의 기이할 정도로 청명한 목소리가 심령을 자극하자, 그녀들과 탈명귀검은 급히 자리를 비웠다.

사당의 문이 닫혔다.

“버텨라, 이놈아!”

길게 눕혀진 연소현의 옆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약왕이 손을 내젓자, 그의 정은장침(正銀長針)들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비에 흠뻑 젖었던 그의 몸에서 빗물들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증발하기 시작했다.

“곧 거기서 건져 주마!”

연소현의 멀어지는 의식을 발견하기 위해서, 극한까지 금안의 힘을 끌어 올렸던 정아가 그 모습에 경악했다.

"......!"

그것은 그녀가 이제까지 보아 왔던 어떤 종류의 의술과도 달랐다.

지금 약왕이 펼쳐 내는 것은,

그녀의 눈에 비치는 급격히 모여드는 알 수 없는 기운들은,

애초에 의술조차 아니었다.

“너만은 이 할애비가 잃지 않을 것이야…!”

딸 같던 약소유에 이어서, 연소현마저 허망하게 잃을 수는 없었다.

* * *

칠흑 같은 어둠 속.

'저쪽인가….'

연소현은 허공을 향해 손에 든 것을 치켜들어 보였다.

그의 손에서 가늘게 떨리며 빛을 내는 그것은,

과거 어머니가 자신의 목숨과 교환하여 걸었던 '봉인 대법(封印大法)'이 파괴되고 남은 조각이었다.

[...어미는 우리 소현이를 정말 사랑한단다]

비록 미약한 빛은 연소현의 주변을 밝히는 것에 그쳤지만, 그 안에서 들려오는 그리운 목소리는.

이 얼어붙듯이 차가운 장소에서.

그의 영혼을 달래 주듯, 따스하기만 했다.

'...영감과 정아는.'

흑색 상황.

그들과 함께 수십 수백 번을 연습하고, 또 개량하여 이런 상황을 대비해 왔다.

그 전조는 그가 암천존자의 모습으로 죄악계곡을 청소한 다음부터 있었고.

할 수 있는 준비는 모두 해 두었다.

'...알아서들, 잘하고 있겠지.'

그들의 걱정을 할 때가 아니었다.

그들은 자기 몫을 해낼 것이고 남은 것은 이제.

자신의 의지였다.

"......."

연소현은 침착한 표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허리까지 차오른 피의 강이 거칠게 흐르며 그의 몸을 가차 없이 밀어냈지만, 한 걸음을 물러나면, 두 걸음을 걸었다.

두 걸음 밀려나면, 세 걸음을 걸 다.

그는 그렇게.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끊임없이.

목소리의 출현은 갑작스러웠다.

[특이한 귀식대법이군. 마기의 폭주를 억누르다니.]

그것은 그가 처음 제암진천경과 계약했을 때의 목소리였다.

[재주가 아주 많은 것은 알아줘야겠어.]

목소리는 그 울림만으로도, 연소현의 정신을 갈기갈기 찢어 버릴듯했다.

“준비는 언제나 든든히 해 놓는 편이라서.”

연소현이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대답이라도 하지 않으면, 내부에서부터 지금의 정신체(精神體)가 폭발해 버릴 것 같았으니.

[하지만 얼마나 더 저항할 수 있을 것 같은가?]

얼굴 곳곳에 끊임없이 혈관이 불룩불룩 불거져 나왔다.

“언제까지라도.”

악다문 탓에 이빨이 부러져 나갔다.

[언제나 미약한 존재의 발버둥은 우습군. 우스워]

“그래. 나도 그대가 우습다.”

부들부들 떨면서도 억지로 입가를 끌어올려 비웃음을 만들어 보이는 연소현의 말에 목소리가 물었다.

[이 내가 우습다고?]

또 하나의 이빨이 조각났다.

눈의 혈관들이 터져, 피눈물이 흘렀다.

“그래.”

그러면서도 연소현은 대답을 멈추지 않았다.

저항을 멈추는 순간 끝이다.

침묵은 동조의 행동이며, 패배의 인정이었으니.

“자신을 잃고, 자신의 의식을 한낱 마물과 동조하여, 마물의 위세를 등에 업고 날뛰니. 어찌 우습지 않겠나?”

연소현이 코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무시하고 말을 마무리 지었다.

“마물에게 굴복하고 패배한 연자따위가.”

[----!!]

목소리의 분노가 몸의 뼈를 모두부수듯 생생하게 느껴졌다.

광풍이 몰아닥쳤다.

피의 강이 더욱 거칠어졌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연소현의 입가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역시, 그랬군.'

과거에 영락한 신선은 연소현에게 그 목소리가 절대 제암진천경의 것이 아니라고 말했었다.

'영락한 신선과 화염 거인.’

연소현이 이제까지 만난 두 연자는 친절했고, 친근하게 굴었다.

그의 앞길을 걱정해 주었다.

'하지만 그런 이들만 있으리라는 법은 없지.'

지금의 목소리.

제암진천경과 계약을 종용했던, 그 목소리는 바로, 제암진천경에 의식까지 완전히 패배한 연자의 말로였다.

“패배자들.”

연소현은 그 급류와 광풍에도 떠밀려 가지 않았다.

오히려 한 번 더 '그들'을 조소했다.

[이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애송이가-!]

[당장 여기서 네놈을 갈기갈기 찢어주마-!]

[영원히 끝나지 않을 지옥을 거닐 것이다-!]

하나의 목소리로 들렸던 그것이 이제는 수백 개의 목소리가 되어 울려 퍼져, 연소현의 전신을 강타했다.

[네놈은 제암진천경과, 우리와, 영혼을 건 계약을 했다! 네놈의 영혼은 우리 것이다!]

연소현이 울컥하고 올라온 핏물을 뱉어 버리며 대답했다.

“언젠가는 그렇게 될 수도 있겠지.”

그의 눈 깊은 곳에서 도사리던 광기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네놈-!]

그리고 거의 동시에 하늘에서 한 줄기 가느다란 빛이 내려와 목소리들을 걷어 냈다.

그것은 선기(仙氣)였다.

선기의 향기가 그윽하게 사방을 메우는 것을 느끼며, 연소현이 혀를 찼다.

“…좀 더 빨리 움직이라고, 영감.”

[잊지 마라! 네놈이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더욱 끔찍한 결말이 네놈을 기다릴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이 지옥에서 너를 기다릴 것이야-!]

멀어지는 목소리들을 들으며, 연소현이 피식하고 웃었다.

선기를 내리쬔 덕분에, 자신의 정신체가 한결 가벼웠다.

“그래, 그래. 나중에 보자고들.”

그는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았던, 발걸음을 계속해서 옮겼다.

연소현 의식 세계의 가장 깊숙한 곳.

제암진천경조차 아직 도달하지못한 그곳에, 거대한 절벽이 있었다.

천인단애(千仞斷崖).

해골로 만들어진 절벽 아래.

연소현과 똑 닮은 이가 묶여 있었다.

그는 피의 강을 헤쳐 온 연소현을 보자마자,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좀 더 빨리 움직이라고.”

“이게 최대한 빨리 온 거다.”

그 오만한 말투조차 똑같다.

거대한 묵철 사슬들에 꿰뚫린 그가 자신의 손을 들어 보였다.

그 손에는 피의 강을 헤쳐 온 연소현이 들고 있는 것과 같은 빛의 조각이 들려 있었다.

“하마터면, 늦을 뻔했다고.”

그것은 어머니가 치렀던 대법이 파괴되고 남은 또 다른 조각이었다.

그 조각은 피의 강을 헤쳐 온 연소현이 든 조각과 공명하며, 자신의 위치를 알리고 있었다.

“그래, 그래.”

연소현이 정신체에 묻은 피를 대충 털어 내며 '또 하나의 자신'에게 다가갔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

묵철 사슬에 꿰뚫린 연소현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고생 많았지.”

그 미소는 지독할 정도로 오만하고, 또 자신감으로 충만했다.

그의 몸은 점차 시커먼 기운에 잠식당해, 부식되면서도, 그 오만한 미소를 버리지 않고 있었다.

“이 고생을 헛되이 만들지 말라고. 두 번째.”

온몸을 녹이는 마기를 줄줄 흘리며, 양의심공으로 나눠진 연소현이 말했다.

“그래. 첫 번째.”

연소현은 이제 걷잡을 수 없이 침식당하고 있는 '첫 번째 자신'에게 다가가 어머니의 봉인 조각을 치켜들었다.

푸욱-.

“뒤는 내게 맡겨라.”

본래 연소현이 받아야 했을 영육(靈肉) 침식의 대가를 대신 치르고있던 첫 번째 연소현이 가늘게 미소 지었다.

“바, 반드시…. 이 운명에서 벗어나….”

그가 소멸하며 흩날리는 광경을보며 두 번째 연소현이 조용히 합장을 올렸다.

그것이 어떻게 저항해도 피할 수 없는 침식을 피하기 위해 고안한 연소현의 방법이었다.

"......."

꿰뚫고 있던 자가 사라지자, 두꺼운 묵철 사슬들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져 뒹굴었다.

“좋아. 그러면….”

두 번째 연소현이 해골 절벽에 등을 기댔다.

“이번엔 내 차례군.”

그의 얼굴에 드러나는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각오였다.

“와라.”

푸욱-.

콰직-.

묵철 사슬들이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여 연소현의 온몸을 꿰뚫었다.

"......."

온몸을 내달리는 극한의 통증에 연소현이 피를 토하며 비명을 삼켰다.

그러든 말든, 그가 묵철 사슬의 형태로 고안한 정신 보완 체계는 그의 몸을 끊임없이 꿰뚫어 고정했다.

잠시 후.

고정이 끝났다.

“…비, 빌어, 먹게, 아프군.”

몇 번 각혈하고, 몇 번 비명을 질렀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제길….”

자신의 의식을 가장 밑바닥에 고정하여, 새로 대가를 받을 준비는 끝났다.

"......."

연소현이 묵철 사슬-보완 체계를 통해 정신을 집중했다.

육신의 경혈과 연결된 보완 체계는 그의 의지를 전달했다.

육신의 귀식대법이 풀려 가는 것을 느끼며, 그가 양의심공을 운기하기 시작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이제 됐다.”

운기를 멈추게 한 것은 연소현의 목소리였다.

"......."

사슬에 꿰뚫린 두 번째 연소현의 정신체가 고개를 들고 그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서, 성공했군.”

자신의 눈앞에는 멀쩡한 또 하나의 연소현이 있었다.

그는 개량에 개량을 거듭한 양의심공을 통해 복제(複製)된 새로운 자신의 정신체였다.

“그래, 성공했다. 내가 누군데, 실패할 것 같으냐?”

'세 번째' 연소현의 말에, 새로 제물이 된 두 번째 연소현이 피식하고 웃었다.

“…가라.”

그 말에, 세 번째 연소현이 바닥에 떨어진 어머니의 봉인 조각을 들었다.

첫 번째, 연소현이 소멸하며 바닥에 떨어진 봉인 조각이었다.

이 조각은 다음, '그의 순서'가 되었을 때,

공명을 통해 두 번째 연소현을 찾게 해 줄 것이다.

“그래.”

세 번째 연소현은 절벽에 꿰뚫린 두 번째 연소현이 어머니의 봉인조각을 꼬옥 잡고 있는 것을 보며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다음은 내게 맡겨라.”

“기다리마.”

인사는 그것뿐이었다.

모두가 자기 자신이니,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 없었다.

[...인님! 주인님…! 여기예요! 이쪽입니다! 이쪽이에요…!]

아까부터 들려오던 정아의 목소리를 들으며, 세 번째 연소현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밧줄처럼 가느다란 선기를 붙잡았다.

선기가 천천히 정신체를 위로 당겼고, 그의 의식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

세 번째 자신이 멀어져 가는 것을 보며, 절벽에 남겨진 두 번째 연소현이 이를 악물었다.

“크흑-!”

격통이 머리를 꿰뚫는 것 같았다.

귀식대법이 풀리며, 폭주하던 마기가 그의 정신을 사정없이 유린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큰형님!”

연비 녀석도 만났고.

“소현아!”

둘째 누님도 만났고.

“오라버니!”

귀여운 셋째와 넷째 쌍둥이 여동생들도 만났었다.

그래. 나는 버틸 수 있다….'

그가 어머니의 봉인 조각을 꽉 붙잡았다.

[...어미는 우리 소현이를 정말 사랑한단다.]

그 그리운 목소리는.

이 춥고 외로운 공간에서.

너무나 따스했다.

* * *

“...인님! 주인님!”

“이 녀석아! 정신이 드느냐?!”

깨어난 연소현이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정아와 약왕을 보며, 피식하고 태연하게 웃어 보였다.

“…둘 다, 세수 좀 하고 오시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