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218화 (218/350)

제18편 후폭풍(後爆風)

삼공자 측의 좌우 대군사가 예측했던 대로.

최고운영회의가 내보내 두었던 병력은 명령 불복종을 근거로, 즉각적으로 개입했다.

그리하여 삼공자 측이 구성했던, 섬멸을 위한 포위망은, 최고운영회의가 보낸 검가 전쟁부(戰爭咅)의 병력이 형성한 안전을 위한 경계선으로 대체되었다.

하지만.

최고운영회의의 의도대로 삼공자측의 병력이 곧장 철수하는 일은 없었다.

아니.

못하고 있었다.

* * *

용봉지회 경기장 건설 부지.

삼공자 측 주둔지.

분명히 날이 밝아 왔건만.

하늘에 짙게 드리운 구름은 여전히 비를 뿌려 대고 있었기에, 태양을 볼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 우중충한 날씨 이상으로, 주둔지에는 무겁고 뒤숭숭한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열다섯 번째 사례.

의예원에서 파견된 의원;

“그것은 피로 된 비였습니다.”

그는 허공을 응시하면서, 손짓까지 해 가며 열정적으로 설명했다.

“그것은 틀림없는 성혈(聖血)이었습니다. 대자대비하신 약 선녀님의 피눈물이 지상에 흐른 것입니다.”

새벽녘을 회상하는 그 시선에 깃든 것은 종교적 열의에 가까웠다.

그의 목에 걸린 선녀교단의 염주를 잠시 바라본 조사원이 그에게 물었다.

“그래서 그대는 그 혈우에서 신성함을 느꼈다는 겁니까?”

의원이 확신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암, 그럼요. 그것은 약 선녀님의 역사(役事)가 틀림없었습니다!”

스물세 번째 사례.

관군 소속 중간 지휘관;

“신성함이라고 했소?”

백 인의 병력을 통솔하는 중간 지휘관이 피우는 연초 연기가 실내에 가득했다.

“개소리.”

그가 한숨도 잠을 이루지 못해 충혈된 눈으로 조사원을 노려봤다.

“그것은 저주였소.”

“...저주 말입니까?”

“그렇소 그 빈민놈들이 기괴한 의식을 통해 이 땅에 저주를 내린것이오.”

중간 지휘관은 한 손에 쥔 비싸보이는 염주를 쉴 새 없이 돌렸다.

“틀림없이 대규모의 인신 공양(人身供養)이 있었겠지.”

반대 손으로는 연초를 들고 쉴 새 없이 연기를 뿜어댔다.

“인신 공양 말입니까? 실제로 그것을 보았습니까?”

“지금 내 말을 의심하는 거요?!”

중간 지휘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놈들은 악귀들이었어!”

그의 눈알에는 번들거리는 광기가 엿보였다.

“그 마교(魔敎)의 주구들이 틀림없었다고!”

그가 책상을 뒤집었다.

“그 눈빛은 뭐냐?! 뭐냐고?!”

대기하고 있던 전쟁부의 무사들이 즉시 달려들어 그를 제압했다.

“내 수하들이 놈들에 의해 이곳에서 얼마나 죽었는지 너희는 모른다! 너희는 모른다고!”

그는 끌려 나가면서도, 고래고래 고함을 쳤다.

“아직도 귓가에 병사들의 비명이 들린다! 어머니! 돌아가고 싶어요! 살려 주십시오! 도와주십시오! 살고 싶다! 살고 싶다! 살고 싶다-”

마흔아홉 번째 사례.

전선 관측 초소, 경비 무사;

그는 모포를 둘러쓰고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나는 보았소….”

한겨울에 강에 빠졌다가 건져진 사람 같았다.

“무엇을 보았습니까?”

창밖에서 들려오는 빗소리가 거슬리는지, 무사는 자신의 귀를 틀어막고 말했다.

“포위망 안쪽에 암흑을 빚어 놓은 괴물이 있었소. 키는 소년처럼 작았지만, 손톱은 날카로웠고, 이빨은 더욱 날카로웠소.”

이전에 비슷한 증언이 있었다.

조사원이 서류를 뒤적거리며 물었다.

“그게 그 암천존자라는 인물이었습니까?”

“그리고 건물 위에는 피를 흘리는 용들이 날아다니고 있었소.”

귀를 틀어막고 중얼거리는 무사는 그의 질문을 듣지도 못하는 것같았다.

"죽은 거인들이 땅을 울리며 진군하고, 벼락을 내뿜는 거대한 새가 여섯 쌍의 날개로 날았으며, 수백 개의 눈알이 달린 형상들이 땅을 기고 있었소. 죽은 자들이 자신의 넋을 기리는 노래를 하고, 내가 죽였던 이들이 돌아와 나의 종말을 이야기했소.”

조사원이 마른침을 삼키는 순간.

무사의 초점이 없는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것들은 나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종말을 예고했소.”

"......."

밖에서 벼락이 내리쳤다.

* * *

모여든 조사원들이 한데 둘러앉았다.

“…삼(三) 할 정도는 상태가 좋지 않았습니다.”

“오(五) 푼 정도는 심각합니다.”

초유의 사태였다.

모두의 시선이 침묵을 지키고 있는 조사 책임자에게 향했다.

조사 책임자.

호법원의 호법육부장이 자신의 이마를 긁으며,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그 피의 비를 보지 못했던 자가 있긴 하던가?”

“없습니다. 저희가 만났던 모두가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래, 하늘에서 피의 비가 내리는 것을 모두가 보았다고?

호법육부장이 한숨을 쉬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그건 그렇다 치고, 그들의 증언에서 겹치는 부분이 있긴 있던가?”

“애매합니다.”

“암천존자라는 이름이 자주 거론되긴 했지만.”

“외양의 묘사라고 해야 할까요. 모두가 본것이 달랐던 것처럼, 묘사한 외양이 달랐습니다.”

호법육부장이 보고서 사이에 끼어 있는 그림 자료들을 꺼내서 훑어보았다.

용모파기(容貌疤記)의 전문가들 이 증언에 따라 그려 놓은 그림이었다.

“…확실히, 전부 다르군.”

수백 개의 도깨비불을 거느린 괴물도 있었고, 팔이 여덟 개가 달린 괴물도 있었으며, 키가 큰 것도, 작은 것도, 아예 형체를 구별할 수 없는 시커먼 어둠으로 표현해 놓은 것도 있었다.

“…이건 용모파기가 아니라, 요괴나 괴물을 그린 상상화라 해도 무방하겠군.”

호법육부장이 다시 한번 이마를 긁적이다가, 아예 머리를 감싸 쥐고 탁자 뒤에 앉아있는 이들에게 물었다.

“의원들께서는 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검가에는 여러 가지 형태로 실전에 참전하는 무수한 병력이 있었고, 그들의 정신 건강을 위한 전문적인 인력이 있었다.

지금 호법육부장이 질문을 던진 의원들이, 그런 일을 하는 이들이었다.

“드물긴 하지만….”

말을 아끼던 의원 중 하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극도의 긴장 상태가 여러 날 계속되면, 집단적인 환각을 보거나, 환청에 시달리는 사례의 보고가 있긴 했었소.”

다른 의원도 고민을 거듭하다가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분명. 실존하는 사례들이오.”

또 다른 의원은 고개를 저어 반론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까지 구체적이면서, 많은 이들이 한번에 생생한 환각을 보는 사례는 없었소.”

“게다가 파견된지 얼마 되지 않은 이들까지도 봤다고 하지 않았소? 그들에 대한 설명은 어떻게 할 것이오?”

“하지만 그러면 설명이 되지 않 는…."

“설명이 되지 않는 사례는 새로 연구가 필요한 것이지, 기존의 사례에 끼워 맞추는 것이 아니오.”

그들이 입을 다물고 있던 것이,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할 말이 많아서였다는 것을 깨달은 호법육부장이 손을 내저었다.

“그만! 그만!”

의원들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호법육부장이 그런 그들 중 하나를 지목하여 물었다.

“그래서. 상태가 심각한 이들의 치료 방법은 어떻게 됩니까?”

지목당한 의원이 어깨를 으쓱였다.

“딱히 특별한 방법은 없소.”

옆의 의원이 말을 받았다.

“좋은 음식. 충분한 휴식. 평화로운 환경. 자극을 피하고 심신을 안정시키는 명상 따위요.”

“상태가 안 좋은 이들은 즉각 이동하여 안정적인 환경으로 격리를 할 필요가 있소.”

호법육부장이 한숨을 쉬었다.

“…알겠소. 상부에 보고하지.”

분명 자신은 이곳에서 있었던, 명령 불복종에 관한 조사를 하러 왔건만.

어째서인지.

팔자에도 없던, 영문을 알 수 없는 사건에 관한 조사를 하고 있었다.

'제기랄. 이 일을 도대체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 것인지.'

그가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는 창밖으로 시선을 향하며, 연초를 꺼내 물었다.

'...총책임자가 따로 있어서, 정말 다행이군.'

그런 그에게 의원 하나가 물었다.

“혹시 지휘부에 대한 조사는…?”

아무래도 연구를 위해 지휘부의 인원들의 면담까지도 하고싶은 모양이었다.

'어림도 없는 생각을....'

호법육부장이 쓰게 웃으며 답했다.

“지휘부 인원들은 신분이 다르기 때문에, 그들의 조사는 총책임자께서 따로 진행하고 계시오.”

* * *

최고운영회의가 전쟁부를 통해, 임명한 현장의 총책임자가 그 거대한 몸집을 움직여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의 엉덩이 밑에 깔린 의자의 다리가 벌어지며 비명을 지르는 것을 보며, 그와 마주앉은 노인이 말했다.

“염 장로. 의자가 부서질 것 같소만?”

"......."

검악파산(劍岳破山) 염곽추.

염 장로는 실시간으로 올라오고있는 서류들만 넘겨 볼 뿐.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대의 전쟁자문단 무사들이 보이지 않소만. 그들은 어디 갔소?”

염 장로가 짧게 대답했다.

“전원 휴가 중이오.”

노인이 어깨를 으쓱였다.

“세상 좋아졌군. 고작 암살단 하나 때려잡은 정도로, 휴가라니.”

나 때는 말이야, 라는 말이 나오기 전에 염 장로가 입을 열었다.

“종남(終南)의 문주.”

염 장로 앞에 앉아 있는 이는 낙양검가의 속파가 된 종남의 문주였다.

그는 혈사 때 실종된 사형제들을 대신해 문주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었다.

“당시 현장에서 있었던 명령 불복종을 인정하시겠다는 것이오?”

서류 위로 염 장로의 부리부리한 눈알이 위압감을 흘렸다.

상대가 종남의 문주이며, 같은 장로라는것은 신경도 쓰지않는 태도였다.

“…나는 모르는 일이오.”

종남의 문주가 품에서 담뱃대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 참수부대인지 하는 놈들 중에 발견된 자들이 있다며? 그들에게 물어보시면 알 것 아닌가?”

잠시 생각을 정리한 염 장로가 솔직하게 말했다.

“그들은 전부 똑같은 소리를 하고 있소.”

* * *

엄중하게 보안이 지켜지고 있는 임시 감옥.

다른 생존자들과 함께 발견된, 형산북류의 젊은 무사가 독방에서 벽을 보고 있었다.

그는 누가 지켜보는 것도 아니고,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지만.

곧게 무릎을 꿇고 앉은 자세를 절대 풀지 않았다.

그 모습은 일견 면벽(面壁)을 하는 고승과도 같았다.

세로로 길게 난 자상을 치료한 그의 얼굴 반에는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다.

“…계속 그렇게 똑같은 말만 할겁니까?”

쇠창살 밖의 조사원이 한숨섞인 질문을 던졌고, 형산북류의 젊은 무사가 똑같은 대답을 했다.

“우리는 인간으로 해서는 안 될 짓을 했소.”

그의 목소리는 형편없이 갈라져 있었다.

"그래서 천벌을 받은 것이오.”

그리고 다른 독방에 있는 생존자들도 그와 같은 말만을 반복하고 있을뿐이었다.

“우리는 속죄할 기회를 받은 것이오.”

* * *

“천벌이라니. 거, 우스운 말이군.”

종남의 문주가 연기를 뿜으며, 낄낄거렸다.

“고작 사람 좀 죽인 것으로 천벌을 받을 것 같으면, 우리는 벌써 지옥에 떨어져서 온몸이 불타고 있었어야지.”

염 장로를 바라보는 노인의 눈빛이 살기로 번들거렸다.

그것은 수십, 수백의 사람을 죽여 오며 자연스럽게 쌓인 살기였다.

“안 그렇소? 염 장로?”

종남의 문주와 함께 북부전쟁에 참전해, 무수한 적들을 베어 혁혁한 공을 세웠던 염 장로는 대답 대신 다른 질문을 던졌다.

“참수부대의 나머지 구성원들은 어떻게 된 것이오? 형산북류의 문주는?”

종남의 문주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시신도 발견되지 않았다며? 그럼 전부 탈주한 것이겠지. 책임을 져도 단단히 져야할 상황이었으니.”

그의 말처럼, 포위망의 내부에서 참수부대의 시신은 한 구도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두터운 포위망을 구성하던 어디에서도 그들이 빠져나간 흔적이나 증언을 찾을수 없었다.

들어간 흔적만이 있었을 뿐.

“그렇다면….”

염 장로는 담담하게 서류를 넘기며,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피의 비는? 종남의 장문도 보셨소?”

종남의 장문이 피식거렸다.

"나'도' 보았느냐고? 아니. 나는 그딴 건 못 봤소.”

노인이 연기를 흘리며, 염 장로에게 물었다.

“지휘부의 인원 중, 보았다고 한 이가 있긴 있던가?”

"......."

염 장로가 입을 다물었다.

이제까지 면담한 지휘부의 누구도 피의 비를 보았다고 한 이가 없었으니.

“그래. 그렇겠지. 그럴 수밖에 없지.”

종남의 문주가 자신의 예상대로라는 듯이 혼자 고개를 끄덕이더니, 슬쩍 염 장로를 바라보았다.

“염 장로.”

“듣고 있소. 말씀하시오.”

노인이 담뱃재를 탁탁 바닥에 털어 내고, 새 담뱃잎을 채워 넣으며 넌지시 말했다.

“염 장로, 그대가 내 전우기도 하니, 그 인연을 생각하여 말을 해주겠소.”

염 장로의 시선을 받으며, 노인이 담뱃대에 삼매진화로 불을 붙이며 말을 이었다.

“지휘부에 어떤 머리가 모자란 작자가 있어서, 하늘에서 혈우가 내린 광경을 보았다고 말할 것 같소?”

염 장로가 짧게 침음하자, 노인이 쓴웃음을 지었다.

“만약에 환각을 보거나 환청 따위를 듣는 광인(狂人)으로 낙인찍 히면, 본가의 정치판에서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시오?”

"......."

그 말에 염 장로는 그대로 서류를 덮었다.

어째서 지휘부의 증언이 밑의 다른 이들과 차이가 있었는지, 알게 된 순간이었다.

“그러니 그보다는….”

종남의 문주가 몸을 앞으로 기울여 물었다.

“그 암천존자라는 자와 대공자가 연관이 있다는데, 그게 사실이오?”

염 장로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대답했다.

“헛소문이오.”

그 대답에도 종남의 문주는 집요하게 물었다.

“어허. 이제까지 그 암천존자라는 자가 모습을 드러낸 장소와 대공자가 관심을 표했던 장소가 이토록 일치하는데, 계속 시치미만 뗄 것이오?”

노인이 연기를 뿜으며 목소리를 더욱 낮추었다.

“최고운영회의의 이번 사태에 대한 개입에도 그 배후에 대공자가 있다는 소문이 파다한데, 대공자와의 거래를 주선하는 그대가 모른다고?”

“모르오."

종남의 문주가 김이 빠졌다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미없군.”

노인이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지켜보면, 누구에게 공이 돌아가는지 알 수가 있으니. 면담은 여기까지 하는 것으로 하지.”

소요 사태 해결의 공을 받는 것이 대공자이니, 이번에도 대공자가 개입했다는 것이 드러나면.

암천존자와 대공자의 관계가 더욱 뚜렷해질 것이다.

“…그런데.”

허리에 다시 검을 차며, 천막을 나서던 노인이 뒤를 돌아보았다.

“염 장로, 만약에 말이오.”

또 무슨 소리를 하려는 것인가.

염 장로의 시선이 종남의 문주를 향했다.

“정말 그 암천존자라는 자가 대공자와 관련이 있는 자라면, 대공자에게는 큰 이득이겠지. 안 그렇소?”

염 장로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태도로 답했다.

“사술을 쓰는 자와 결탁했다고, 몰아가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않겠소?”

“다 알면서, 무슨 그런 소리를...."

종남의 문주이자, 낙양검가의 장로인 노인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 형산북류가 포함되었던, 참수부대를 흔적도 없이 궤멸시킨 존재가 대공자와 손을 잡았다면.”

아까는 그들이 탈주한 것이라고 하더니, 이제는 또 궤멸당했다고 한다.

염 장로의 따가운 시선을 무시하며, 노인이 흘린 연기가 천장을 자욱하게 뒤덮었다.

“이제 대공자를 상대하는 모두가, 그 암천존자라는 변수를 고려하고 또 걱정해야 하지 않겠소?”

염 장로가 무뚝뚝하게 답했다.

“관계가 없는 것을 사서 걱정하는 것은 그저 시간 낭비일 뿐이오.”

그 대답에 노인이 나직하게 웃음을 흘렸다.

“그래. 대답은 그렇게 하셔야겠지.”

노인이 천막의 입구를 걷자,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는 주둔지의 풍경이 드러났다.

그 주둔지는 폭우에서부터 이어지고 있는 비로인해 엉망이긴 했지만.

피의 비가 내렸던 흔적은 조금도 찾아볼수가 없었다.

모두가 보았다는 그 피의 비는 환영이었던것인가, 아니면.

그 순간만의 진실이었던 것일까.

"......."

염 장로는 노인이 걷어 놓고 가버린 천막의 입구를 통해, 그 풍경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주군과 암천존자라….'

잠시 이어지던 그의 상념을 방해한 것은, 죽립을 쓴 백발의 노부인이었다.

“방금 종남의 문주가 나가는 것을 보았기에, 찾아왔건만. 혹시 방해가 되었나요?”

천막 안으로 들어와 죽립을 벗어들자 얼굴을 드러낸 것은 사공자 측의 유 장로였다.

“아닙니다, 유 장로.”

염 장로가 연장자인 그녀에게 깍듯이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유 장로께서 남아서, 도와주신 덕분에, 일이 한결 빠르게 풀리고 있습니다.”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네요.”

그 말이 끝난 이후, 유 장로가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벗어 든 죽립을 만지작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아직 대공자님의 소식은 없나요?”

염 장로가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그가 짧게 덧붙였다.

“원각정에 그분의 철갑요새가 복귀했다는 소식이 마지막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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