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217화 (217/350)

제17편 혈우(血雨)

포위망 가장 깊은 곳.

지하 대피소.

살아남으려는 이들이 있었다.

빈민 노동자 수백 명이 거대하고 복잡한 지하 공간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지하대수로와 연결하던 공사가 진행 중이던 그 공간은, 삼공자 측의 참수부대를 피해 대비하기에 딱 적합했다.

“다른 이들도-.”

입을 열어 함께 통로를 지키는 이에게 말을 걸려던 협사가 숨을 삼켰다.

이 지하 통로들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너무 소리가 잘 울렸다.

그래서인지.

이곳에는 수백 명의 인원이 있었건만, 대화를 나누는 소리는 들을수도 없었다.

드문드문, 안쪽에서 기도를 올리는 이들의 중얼거리는 소리가 통로를 거쳐 가늘게 들려올 뿐.

[다른 이들도 잘 대피했겠지?]

그는 대신 전음을 택했고, 전음을 받은 동료 협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이오. 곳곳에 건설 중이던 지하 공간들이 있다는 것은 노동자들이 가장 잘 알고 있었으니]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전음을 이었다.

[이 수로들이 제대로 완공되어, 지하대수로와 연결만 되어 있었어도….]

그 말에 상대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랬다면, 우리 손으로 지하 통로를 무너뜨려야 했을 것이야. 저들이 침입 경로로 사용했을 테니까.]

그가 침을 꼴깍 삼키고 말했다.

[게다가 낙양의 지하대수로에 얽힌 그 이야기 못 들었나?]

[그 이야기라니, 무슨 소리요?]

등화관제 중이라 어둡기 짝이 없는 통로에 부는 바람이 오싹했다.

[이 낙양의 지하대수로에는 '온갖 것들'이 모여든다는 소문이 말이야.]

[...그런 소문을 들어 보기는 했 지만, 괜한 헛소문이 아니오?]

[어허 아닐세]

상대가 손사래를 쳤다.

[저번 달에 협사 셋이….]

그가 말을 늘어놓으려던 그때.

“거기, 비키시오!”

“의원! 의원은 없는가?!”

그들이 서 있던 통로로, 한 무리의 인원들이 누군가를 업은 채 달려 들어오고 있었다.

[낙양의 봄 동지들인데…!]

[저들은 보초를 서던 이들이 아닌가?!]

지상과 연결된 출입구에서 숨어, 번을 서던 협사들이었다.

“적들이 우리를 발견했소?!”

그는 동료를 밀어, 의원을 찾으라 보내며 물었다.

“아닐세! 그저 이자는 혼절한 것 뿐일세! 그런데 넘어지다가 머리를 부딪쳤어!”

“혼절? 무슨 일이 있기에-?!”

“우리도 무슨 일인지 모르오!”

모르다니.

그들이 가까이 다가오자, 통로를 지키던 이가 코를 틀어쥐었다.

“...읍!”

지독한 비린내.

그것은 코가 비틀어질 정도의 피 냄새였다.

“이, 이게 무슨…?”

“자네 등불이 있겠지! 불 좀 켜주게! 이러다 넘어지겠어!”

그가 허리춤을 더듬어 매달려 있던 등불을 꺼내어 불을 붙여 들고 그들과 합류했다.

“……?!”

흔들리는 등불의 빛 속에 그의 동공이 축소되었다.

“이, 이게 무슨?”

그가 등불을 들고 맞이한 이들은 누구랄 것 없이 모두가 온몸이 시뻘겠다.

그들은 피로 칠갑하고 있었다.

다가와서 등불을 건네받은 협사가 그에게 말했다.

“지금, 밖에….”

피투성이가 된 그의 시선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 속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혈우(血雨)가 내리고 있소.”

* * *

낙양검가.

삼공자 군사부(軍師部).

이제야 상황을 알게 된 자들이 있었다.

마차들이 길게 줄을 서서 대기하고 있는 삼공자 군사부의 입구.

“그게 무슨 소린가?! 최고운영회의가 개입한 상황에서, 참수부대를 조직해 들어갔다고?!”

날벼락 같은 소식이었다.

“그, 그렇습니다. 그 주축은 형산북류가 되어 포위망 내부로 진입한 것으로….”

“분명히 군사부에서 대기를 하라 일렀었지 않은가?!”

비명과 같은 상급 군사의 다그침에 흠뻑 젖은 군사부의 전령이 헐떡이며 고개를 조아렸다.

“분명히 그렇게 전달했습니다만….”

“지금 좌우(左右) 대군사들께서 직접 그곳을 방문하시어 지시를 전달하려던 참이었건만…!”

상급 군사가 발을 동동굴렀다.

"대체 이게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그의 머리를 스쳐 지나는 생각이 있었다.

“누구야?!”

그의 난데없는 일갈에 전령이 당황하여 고개를 들었다.

“아쉬울 것 없는 형산북류가 그저 공을 세우려고 먼저 나섰을리가 없잖나?! 그들에게 책임을 물어 지휘부를 선동한 자가 있을것이 틀림없다!”

과연, 상급 군사다운 판단력이었다.

“그것이….”

하지만 상대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그의 기대를 충족시키진 못했다.

“지휘부가 너무 혼란스러운 상황이라…. 처음에 책임을 외쳤던 이가 있었지만, 누군지는 모르겠고. 그 이후에는 누구랄 것 없이, 형산북류의 문주를 사태의 책임자로 몰아가서….”

“제기랄! 그 욕심만 가득한 망할놈의 늙은이들이…!”

* * *

낙양 시가지로 진입하는 가도.

아군에 혼란을 부추기고 탈출한 이가 있었다.

'...뒤는 어찌 되든, 내 알 바 아니지.'

점창파의 전 장문인이 자신의 이마에 엉겨붙은 머리카락을 치우며 생각했다.

'그런데 어째서 이곳에 본가의 병력이…? 설마 최고운영회의가 파견한 병력이 벌써?’

그는 자신들을 지나치는 병력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패잔병 꼴로 회군하고 있는 점창의 무사들에게는 관심도 두지 않고 묵묵히 빗속에서 행군을 할 뿐이었다.

그는 안력을 끌어 올려 이리저리 눈알을 굴렸지만, 이 비와 어둠 속에서 책임자로 보이는 이를 찾기가 쉽지가 않았다.

'...뭔진 몰라도 틀림없이, 연소현. 그 마귀 같은 놈과 최고운영회의의 안배일 것이다!’

* * *

“그 말이 사실인가?”

상급 군사와 전령의 뒤로 채비를 단단히 갖춘 군사부의 인원들에 둘러싸여, 좌우 대군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 오셨습니까!”

급히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는 상급 군사를 무시하고, 좌 대군사가 전령에게 물었다.

“최고운영회의가 일시적인 무력 사용 금지령을 내린것이 분명한가?”

“예, 지휘부에서 듣기로는 분명 그렇습니다.”

“최고운영회의가 개입을 할 것이라는 것도?”

“그것은 현장 지휘부의 군사(軍師)들이 명확하게 확인을 마친 바가 아니지만-.”

“그래서 사태의 책임을 추궁당한 형산북류와 공을 세우고 싶어하는 일부 중소문파의 인원들이, 최고운영회의가 개입하기전에 일을 해결하려 포위망 내부로 들어갔다?”

예, 정확하십니다.”

“최고운영회의에서 공식적인 발표가 있었나?”

“공식적인 발표는 아직 없었습니다만….”

고개를 숙이고 있던 상급 군사가 대신 답했다.

“방금 들어온 첩보에 의하면, 최고운영회의의 행정각이 매우 바빴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리고?”

“본가의 전쟁부에서 '대규모의 병력'을 비밀리에 내보냈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우 대군사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이미 최고운영회의가 병력을 움직여둔 것인가.”

“최고운영회의가 이 일을 마무리 지을 방법을 확보했다는 의미로군요.”

좌 대군사가 결론에 도달했다.

그는 낙양지사의 명령서가 존재하는 것을 몰랐지만.

나머지 조각들을 맞추자, 현재 상황에대해 거의 사실과 가까운 결론을 낼 수 있었다.

“…이거, 보기 좋게 당했습니다.”

우 대군사도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제갈 형제의 말이 옳네.”

우 대군사가 어색하게 두르고 있던 우의를 벗어 들며 말을 이었다.

“이건 누군가가 우리를 대상으로 판 함정이야.”

그 말에 상급 군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 함정 말씀입니까?”

좌 대군사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소. 함정이오. 최고운영회의가 이미 움직였지만, 개입을 하겠다는 공식 발표는 하지 않았지. 그런데 우리 측에서는 선행된 명령을 어기고 움직임을 보였고.”

우 대군사가 탄식처럼 말을 받았다.

“우리가 먼저 명령을 어겼으니, 이제 최고운영회의가 움직여 두었던 병력이 이 건에 '즉각' 개입할 명분이 생겨버린 것이오.”

그들은 미리 유 장로를 지휘부에 보내어, 경고와 함께 책임론을 불러일으킨, 연소현의 노림수를 거의 추측해 냈다.

“그리고 아직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수단으로, 일을 마무리 지어 버리겠지.”

좌 대군사도 우의를 벗어서 거칠게 바닥에 던졌다.

“누군지는 몰라도. 우리 측 지휘부의 생리를 훤히 꿰뚫고 있는 이가 짠 계략이오!”

그가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 하고 소리쳤다.

“처음부터 끝까지 놀아난 기분이군! 이 시점에서는 손댈 수 있는것도 없어! 완전히 당했어!”

우 대군사가 좌 대군사의 고함을 들으며, 전령에게 물었다.

“최고운영회의의 일시적 무력 사용 중단 명령은 누가 가져왔나?”

전령이 급히 고개를 숙였다.

“듣기로는 연초를 피우는 노령의 여인이라고. 장로라는 말을 들었다는 증언도 있었습니다만….”

그것만으로는 특정할 방법이 없었다.

“...이제, 믿을 것은.”

우 대군사의 말을 자신의 머리를 감싸 쥔 좌 대군사가 받았다.

“…어렵겠지만, 형산북류의 참수부대가 성공하길 빌 수밖에 없겠습니다.”

“그렇군. 그래야, 어떻게 수습이라도 할 수 있겠소. 하지만 제갈형제의 말대로, 어렵겠지….”

그들은 몸을 돌이켜 다시 계단으로 향했다.

지금 그들이 직접 현장으로 가봐야, 아무런 소용도 없을 것이 뻔했다.

오히려 혼란속에 몸을 던지는 것과 같았으니.

그것보다는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피해를 줄일 대책을 준비하는 쪽이 나았다.

“어렵다니요? 형산북류는, 과거 구대문파인 형산파의 맥을 이은 자들이 아닙니까?”

좌우 대군사의 비관적인 태도에 상급 군사가 기어코 입을 열었다.

“그들이 출혈을 감수하고 나섰다면, 꼭 성공해 내지 않을까요?”

“그러면 좋겠지. 하지만….”

발걸음을 멈춘 좌 대군사가 상급 군사를 돌아보았다.

그 표정이 매우 떫었다.

“이 정도 계략을 짠 인물이라면…."

우 대군사가 천장을 올려다보며 탄식했다.

“어느 누가 밀고 들어오든, 충분히 감당할 준비가 되었겠지.”

* * *

포위망 외곽 검문소.

삼공자 측 주둔지로 향하는 길목.

말안장에 앉아, 멍하니 허공을 올려다보는 이도 있었다.

그는 이공자 측에서 비웃음을 사가며, 자진해서 상황 파악을 위해 나섰던, 손 장로였다.

“이게 무슨…?”

그는 자신의 얼굴을 때리는 액체를 손으로 만져 보았다.

그 끈적끈적함과 비린내는 절대 평범한 빗물이 아니었다.

“피다!”

손 장로가 방금 지나쳤던, 포위망 외곽 검문소의 무사들이 소란을 떨었다.

“피가 비처럼 내리고 있어!”

그들이 서로 좁은 검문소의 지붕아래 들어가려는 것을 바라봤던 손 장로의 표정이 멍했다.

“… 피라고?”

그가 다시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본 순간, 하늘에 벼락이 내리쳤다.

벼락 빛이 사방을 밝힌 그 짧은 순간,

자신의 손에는 피가 아니라,

'투명한 빗물'이 흐르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

하지만 그 순간이 지나자, 자신의 손바닥은 다시 피투성이로 보였다.

“도대체….”

손바닥뿐만이 아니었다.

검문소의 화톳불에 비친 자신의 온몸이, 사방 천지가 하늘에서 내리는 혈우에 젖어 들고 있었다.

신앙이 없는 손 장로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원시천존이시여.”

자신은 그저 확인을 위해서 온 것이었건만.

대공자가 용봉지회 경기장 건설 부지의 소요 사태의 해결에 개입하고 있는 것인지, 확인하려 했던것 뿐이었건만.

이곳에는 자신이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 펼쳐지고 있었다.

"......."

그는 머릿속이 하얗게 빈 채, 멍한 얼굴로 피의 비를 쏟아 내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 * *

골목 구석, 작은 상점에서 점을 보던 점쟁이도.

뒷골목을 주유하던 어느 도사도.

낙양의 어둠 속에 깊이 뿌리내린 주술사들도.

인간 사회의 틈에 모습을 감추고 스며들었던 존재들도.

신기(神氣)가 조금이라도 있는 모두가 그 불길하기 짝이 없는 기운에, 동일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 * *

피의 비는 용봉지회 건설 부지에만 국지적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그것은 틀림없이, 하늘을 찌를듯이 치솟은 제암진천경의 마기가 일으킨 이상 현상이었다.

"......."

얕은 신음을 내며 바닥을 움켜쥐던 무사의 마지막 숨결이 흘러나왔다.

가늘게 경련하던 몸이 곧 움직임을 멎었다.

그리고 쏟아지는 피의 비를 맞고있는 시신은 한 구가 아니었다.

그의 움켜쥔 주먹을 지나서, 이리저리 꺾인 무사의 다리가 있었고.

그 다리를 지나서, 팔을 지나서, 몸통을 지나서, 머리를 지나서,

미완성의 거리에 너부러진 시신들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들의 몸에서 새어 나온 것인지, 하늘에서 내린 것인지 알수 없는 핏줄기가 거리의 바닥에 가득 흐르고 있었다.

그들의 검은 전부 피에 잠겨, 더 이상 보이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 수십 구에 달하는 시신들의 행렬과 점차 거칠어지고 있는 피의 흐름이 끝나는 지점에.

온몸을 부들부들 떠는 노인이 있었다.

“흐으어 어….”

그가 경련을 일으키면 일으킬수록, 더욱 그의 배를 꿰뚫은 손톱들이 깊이 박혀 들었다.

“크륵 끄르륵-.”

노인은 입에 피거품을 물고서도, 그 떨리는 양손을 들어 상대의 얼굴로 향했다.

그것은 자신을 목숨을 앗아가고 있는 상대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함인가.

아니면, 마지막으로 무엇이라도 남기고 싶었던 것인가.

그 피투성이의 손이 마침내 가면을 붙잡았지만.

“크르륵-.”

가면은 얼굴에 달라붙은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결국.

마지막 손짓의 의미도 알 수 없게 된 채.

노인의 양손이 가면에 길게 손자국만 남기고 바닥으로 축 흘러내렸다.

첨벙.

암천존자의 손톱에서 빠진 노인의 시신이 바닥에 아무렇게나 뒹굴었다.

이 노인.

'형산북류의 문주'가 암천존자가 처리해야 할 마지막이었다.

암천존자는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피를 맞으며, 그가 두 팔을 펼쳐 보였다.

마치, 자신이 만들어 낸 결과를, 그 마경(魔境)이라 할 만한 풍경을 만끽하기라도 하듯이.

참수부대, 궤멸(潰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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