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편 게헨나(Gehenna)
밤하늘에는 짙은 구름이 드리워 비를 뿌려 대니, 그나마 대지에 빛이라고는 간간이 떨어지는 벼락뿐이었다.
달은 그렇게 모습을 감춘 지 오래였고, 태양은 아직 얼굴을 내밀 생각조차 하지 않으니.
별들은 그 미력한 빛으로 감히 나설 자리가 없었다.
천지불인(天地不仁)이라.
우주(宇宙)는 어질지도 않으며, 인자함도 없으니.
약사여래의 현현, 지장보살이라 불렸던 한 여인이 말했듯,
인간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며.
마찬가지로, 그녀의 유일한 아들이 말했듯,
인간을 벌할 수 있는 것도 인간이었다.
그리하여 하늘을 대신하는 한 존재가 여기 우뚝 서 있었다.
그는 하늘이 무심히 버려놓은 이들을 구원하고, 하늘도 외면하는 죄인들을 처벌하니.
어두운 밤하늘 아래 존귀한 자(暗天尊者)라 불리는 그 이름이 아깝지 않도다.
* * *
일수가 서로 맞부딪치자, 떨어지던 빗물이 일제히 충격파에 흩어졌다.
'이런, 미친…!’
삼공자 진영, 임시 참수부대의 우익을 담당하던 참백무관의 관주가 이를 갈았다.
검을 쥔 손이 후들거렸다.
겨우 일수.
그 일수의 교환에 팔뼈가 금이간 것 같았다.
괴물(怪物).
사술사(邪術使).
괴이(怪異).
괴력난신(怪力亂神).
이매망량(驪魅粥蠣).
눈앞의 저주받을 존재를 칭할만 한 수많은 단어가 머릿속을 스쳐지났지만.
이거다 싶을 정도로 딱 맞아떨어지는 단어는 없었다.
그는 그렇다고 저 괴물을 다른 이들처럼 존자(尊者)라 높여 부르고 싶진 않았다.
'이대로 다음 수를 교환하는 것 은 필패(必敗)다…!’
패배를 직감한 그는 수하들에게 외쳤다.
“모두 덮쳐!”
주변을 에워싸고, 촘촘히 검의 벽을 형성하고 있던 무사들이 일제히 검을 내질렀다.
“합(合)!”
그들의 쩌렁쩌렁한 기합 소리처럼, 그 검진은 마치 하나의 생물처럼, 사방을 에워싸듯 동시에 검이 뻗어나왔다.
“……?!”
하지만 누구의 검도, 상대에게 닿지 못하고, 허공을 긁었을 뿐이었다.
전후좌우를 넘어 위와 아래까지 전부 점하여, 마치 검으로 탑을 쌓은 것 같은 형상의 꼭대기에 유유하게 서서.
암천존자가 조소했다.
“고작 이 정도로 너희가 이 낙양을 지배하는 검가의 무사라 하겠느냐?”
대답은 그의 뒤에서 들려왔다.
“닥쳐라!”
그리고 그 참백무관 관주의 목소리보다, 암천존자의 등 뒤를 노리는 그의 검이 더 빨랐다.
진신절기(眞身絶技).
위섬일단(寫殲一斷).
조금 전.
자신의 뒤를 점했던 암천존자를 베기 위해서 반사적으로 펼쳤던 그 일검이었다.
반사적으로 펼친 것만으로 빗줄기를 일시에 끊어냈던 그 절기가 이번엔 전신전령(全身全靈)으로 펼쳐진 순간이었다.
"......!"
참백무관의 관주는 기습을 가하기 전에 소리를 치는 멍청이가 아니었고.
그의 “닥쳐라!”라는 목소리는 검이 발사되듯 뻗어 나간 이후에야 기합처럼 튀어나왔지만.
어째서.
상대는 머리 뒤에 눈이라도 달린것처럼 그 혼신의 일격을 저리도 쉬이 피해낸단 말인가.
그와 시선이 마주친 두 줄기 귀화가 그의 검을 비웃듯 모양을 일그러뜨렸다.
“겨우 이 정도로 검가의 이름을 팔았다는 건가?”
그가 참백무관의 관주와 시선을 마주치며, 그를 비웃는 와중에도.
무사들의 검진은 끊임없이 움직이며 그를 가두려 연신 검들을 내질렀건만.
“우습구나, 우스워.”
마치 격류를 타고 오르는 연어처럼.
암천존자의 몸은 검으로 이루어진 산(山)의 가장 꼭대기에만 머물렀으며.
한바탕 춤사위를 벌이듯 우아하게 검의 끝들을 타는 그의 발끝은 마치 꽃잎이라도 디디듯 사뿐하기만 했다.
“닥쳐라! 닥치거라, 이 괴물!”
관주의 신형이 다시 한번 위로 치솟았다.
축차(逐次) 투입을 통한 파상공격을 위해 검진밖에서 대기하던 무사들의 어깨를 밟고 뛰었던 것이었다.
진신절기(眞身絶技).
강용철란(鋼蓉鐵欄).
일검으로 안 되면, 이검으로.
이검으로 안 되면, 십검, 백검으로 공격하면 된다.
쾌속의 환검(幻劍)이 흩날리는 벚꽃잎처럼 허공을 어지러이 수놓았다.
그 검의 일격 일격이 허공에서 떨어지던 빗방울들을 때려 산산이 부서뜨렸다.
“으아아아—!”
관주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기합성이 터져 나왔다.
빠르게.
더 빠르게!
내력이 한계 이상으로 들어간 그의 검이 비명을 지르며 백열하여, 수백의 잔상을 남겼다.
'어떻게?! 어떻게?!’
호흡이 바닥나고, 생의 근원이라는 진기까지 동원하고 있건만.
저 암천존자라는 괴물은 검진의 산을 등반하며, 그의 검을 전부 튕겨 내고 있었다.
장난이라도 치듯이.
그 날카로운 손톱들을 튕기며,
하나하나 전부.
허공을 수놓은 수백의 잔상이 모두 암천존자에 의해 막혔다.
하얗게 빛나던 잔상들이 부서져 내려, 폭우와 뒤섞여 거친 바람에 흩날렸다.
“크흑?!”
결국, 관주는 허무할 정도로 쉽게 암천존자가 내뻗은 일장에 가슴을 타격당하고 검진 밖으로 튕겨 나갔다.
“…네, 네놈!”
무사들이 받아 준 덕분에 바닥을 구르는 꼴사나운 모습을 면한 그가 외쳤다.
“우리 무관의 무공을 알고 있구나!”
처음엔 그저 암천존자라는 괴물이 인간을 아득히 상회하는 압도적인 육체 능력으로 대응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다음엔 무공의 극을 보는 이가 자신을 농락하는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더 근본적으로.
상대의 움직임은 자신의 모든 무공을 훤히 알고, 꿰뚫어 보고 있었다.
“어떻게?! 네놈이…?!”
암천존자는 관주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서, 일제히 공중으로 뛰어오른 조장들의 검을 비껴 흘려버렸다.
“...큭?!”
“…허억!”
이 무사들은 지금은 참수부대라는 한 묶음으로 묶여 있었지만.
원래 그들의 구체적인 소속은 각기 제각각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이 사용하는 무공또한 제각각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암천존자의 손톱은 정확하게, 그들의 일검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그들의 손목에 틀어박혔다.
마치.
그들 모두의 무공을 전부 처음부터 끝까지 알기라도 하듯이.
“이 내가 아는 것이, 겨우 참백무관의 무공뿐이겠나?”
암천존자의 웃음소리가 불길하게 울려 퍼졌다.
심령을 뒤흔들다시피 하는 그 웃 음소리가 폭우와 기합들 속에서 유난히도 선명하게 들려왔다.
참백무관의 관주가 비명처럼 소리쳤다.
“대체 네놈의 정체가 대체 무엇이냐?!”
* * *
낙양검가.
노인 하나가 빗줄기를 뚫고,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기이하게도, 그의 걸음은 흐르는 빗물 위를 디디는 것 같았고, 그의 걸음걸이는 거친 빗줄기 사이를 통과하는 것 같았다.
신선처럼 유유한 걸음걸이.
자연에 어우러지는 듯한 그 신법이, 한참 전에 벽을 넘었던 그의 경지를 짐작하게 했다.
노인이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곳은 유난히 주변을 압도할 정도로 거대한 전각이었다.
"......."
전각의 입구에 들어선 뒤 우의를 벗자, 가려져 있던 노인의 얼굴이 유등 빛에 드러났다.
그는 다름 아닌, 최고운영회의의 의장이었다.
“어이쿠, 오셨습니까요!”
우의를 거는 그의 손길을 거드는것은, 입구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당직 시동(侍童)이었다.
“되었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터이니, 너는 쉬고 있거라.”
“감히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요!”
평소처럼 인자한 노인의 말에 시동이 급히 고개를 저으며, 기어코 그의 우의를 받아 들었다.
“관장(館長)님께서 자리를 비우 신 사이, 여러 문의가 들어왔습니다요.”
“어차피 무공의 개량에 대한 문의였겠지?”
“예. 그렇습니다요. 그래서 평소처럼, 관장께서는 출장 중이라 자리에 안 계시니, 다른 무학자들에게 맡기라 일러 주었습니다요.”
어째서인지.
시동은 의장을 관장이라 불렀다.
그것은 최고운영회의의 의장의 정체를 알리가 없기 때문이었고.
의장의 표면적 신분이 낙양검가의 모든 무공을 보관, 전승, 연구하고, 개량하는, 무공학관의 관장이었기 때문이었다.
“…저건 또 왜 저렇게 되어 있느냐?”
최고운영회의의 의장이자, 무공 학관의 관장이 고아한 책상 한편에 무더기로 쌓여있는 무공서적들을 가리켰다.
“아이코! 저것은 엊그제 '원각정'에서 반납된 서책들입니다요. 다시 분류하는 데, 적잖이 시간이 걸리다 보니, 아직 무학자들의 일이 끝나지가 않았습니다요.”
그 말에 노인이 암천존자로 만났던 연소현의 얼굴을 떠올리며, 쓴 웃음을 지었다.
“…그렇구먼.”
그 연소현이 '또' 왕창 비급들을 가져갔다가, 또 왕창 반납했던 모양이었다.
원각정, 연소현의 처소에 굴러다니던 온갖 희귀한 비급들의 출처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직원들이 원각정에 관련된 수칙은 제대로 지키고 있겠지?”
“예, 물론입지요!”
그의 시동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원각정에서는 어떤 서적도 가져갈 수 있고, 누구도 거기에 대해서 언급해서는 안 된다!”
노인이 시동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또 다른 수칙은?”
시동이 노인의 손길이 기쁘다는 듯이, 웃으며 대답했다.
“원각정에서 추가로 들어온 서류들은 전부 관장님의 서재에 보관하여, 누구도 그 내용을 보지 않도록 한다!”
시동이 말을 덧붙였다.
“헤헷. 이번에 들어온 서류들은 제가 직접 서재에 엄중하게 가져다 놓았습니다요.”
“잘했구나.”
그 서류들은 연소현이 칩거를 하고 있을때부터 틈틈이 취미 삼아 개량하던 무공들에 관한 연구 결과였다.
그리고 그것이.
누구도 창안자를 알지 못한다는 '섬영찰나'의 창안자가 연소현이라는 것을, 노인이 알고 있었던 까닭이었다.
“앞으로도 그렇게만 하면 될 것이다.”
“옙! 맡겨만 주시지요!”
* * *
“죽여라! 저 괴물을, 저 무공 도둑놈을 여기서 반드시 죽여야 할것이야!”
무사들은 달려들고, 또 달려들었다.
암천존자라는 괴물을 죽이기 위해서.
그들은 끊임없이 달려들었다.
하지만.
“하하하하하-.”
시간이 더해 갈수록 암천존자의 쩌렁쩌렁한 웃음소리가 더욱 크게 사위를 진동시키고.
그들의 검은 더욱 허무하게, 공기와 빗물을 가를 뿐이었다.
빗속에서 수십 명의 무사가 허우적거리는 꼴이 우스울 정도였다.
연소현이 모르는 검가의 무공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연소현의 손과 눈을 조금이라도 스쳐 지나가지 않은 검가의 무공은 감히 없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검가의 검은 중원국 전체에서 손꼽을 정도였지만.
오히려 연소현의 앞에서는,
가장 초라하며, 무력한 검이었다.
“크흑-!”
체력과 내공이 바닥을 보이고, 통제하지도 못하는 거친 숨결이 무사들의 입에서 하얀 김이 되어 흘러나왔다.
“이게 너희의 전부더냐?”
바닥을 모르고 헛돌기만 하는 검진의 합격술에서 슬그머니 뒤로 빠지려던 무사의 눈이 암천존자의 귀화와 마주쳤다.
"......!"
그 시선을 들여다보며, 암천존자의 입매가 뒤틀렸다.
이들은 긍지도 부족하고.
공포를 이겨 낼 의지도 부족하며,
그저.
빈민들의 목을 베어다가 공을 세우려는 욕심만 그득한 자들이었다.
이공자가 심어 두었던.
검가전장의 입구에서 죽여야 했던, 그 무사들과는 달랐다.
“고작 이 정도가 끝이라면….”
뒤로 도망치려던 무사의 목을 시커먼 손톱이 툭하고 건드렸다.
그것은 그저 살짝 닿은 것처럼 보였지만.
그의 목이 몸에서 분리되며, 피가 울컥 치솟았다.
“이제 모두 죽어라.”
암천존자의 손톱 하나에 하나의 머리가 위로 튀어 올랐다.
그 손속에 자비는 없었다.
머리를 잃은 몸뚱이들이 피를 줄줄 쏟으며, 바닥에 널브러지기 시작했다.
“검가를 좀먹는 버러지들.”
암천존자가 살수를 쓰기 시작하자, 전황이 급변했다.
그 모습에 무사들은 죽을힘을 다해 자신이 아는 가장 뛰어난 무공을 사용했지만.
파훼되어 버린 그 검은.
검가의 진정한 주인을 못 알아보고 달려든 그들의 검은.
누구의 것이랄 것 없이, 손에서 떨어져 바닥에 시신들과 함께 나뒹굴었다.
“끄아아아—!”
또 하나의 단말마가 천둥소리에 묻혔다.
하지만 단말마조차 남기지 못하는 이들이 더 많았다.
“언제나 권력을 지닌 이들은 곧잘 빠져나가 버리고.”
암천존자의 살기는 악귀나찰과 같았고 그 무위를 펼치는 모습은 신장(神將)과도 같았으니.
“그 주구가 되었던 이들만이 이렇게 쉽게 버려지지.”
검진은 와해된 지 오래였다.
죽어 가는 무사들의 시신이 쌓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억울해하지 말거라. 시기의 차이만 있을 뿐….”
그의 시야에 저 멀리 거리 저편으로 도망치는 우익의 책임자, 참 백무관의 관주가 보였다.
“검가를 좀먹는 이들은 늦든, 빠르든.”
검조차 버리고 신법으로 도망치던 그가 그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자신의 목에 암천존자의 차가운 숨결이 닿았기 때문이었다.
“전부.”
짐승처럼 네발로 달려들어 그의 머리통을 물어 버린 암천존자가 목을 휘저어 허공에서 한 바퀴 그 몸을 돌려 버리자.
머리와 몸통이 그대로 분리되어 버렸다.
머리통을 뱉어 버리고, 암천존자가 귀화를 흘리며 선언하듯 말했다.
“너희들의 뒤를 따르게 될 터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