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215화 (215/350)

제15편 생득권(Birthright)

낙양검가 최고운영회의.

비상소집 회의 종료.

긴급 안건에 의한 최고위원들에 대한 비상소집은 종료되었다.

그러나 많은 최고위원들이 자리를 떠날 줄을 몰랐다.

“중앙감찰각이 검가전장의 깊은곳에 묻혀 있던 연씨 혈족들의 부정을 파헤칠까요?”

“전장장이 협력을 해 주었어야, 그 거대한 부정의 흐름을 잡아낼수 있겠지만….”

“대공자가 직접 검가전장을 방문했습니다. 전장장을 만나지도 않았을 것이라면, 그가 직접 방문을 했을 이유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가 전장장을 만났다면…."

“전장장이 비밀리에 전해지던 장부들을 중앙감찰각에 보여주었을 가능성이 충분하지요.”

남아 있던 최고위원들이 침음했다.

“…한바탕 피바람이 몰아치겠구려.”

밖으로부터 들어오는 공기에, 벌써 진한 피 냄새가 섞여 있는 것 같았다.

“우리 최고운영회의조차도 그 비밀 장부들에 어떤 인물들이 관여되어 있는지, 전부 알지를 못합니다.”

“벌써 관련이 있어 보이는 혈족들이 이공자 측의 회의에 몰려들었어요.”

이 가문은 연씨의 가문이고, 따라서 연씨 혈족들은 오래전부터 검가에서 요직들을 차지하고 있다.

당연하게도 검가 내에서 그들의 힘과 영향력은 거대했다.

“그들과 이공자 측이 힘을 합친다면….”

그것은 단지 검가의 후계 구도에대한 문제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검가 전체가 휘말려드는 대전쟁이될 수도 있었다.

“그러니 다행이지 않소?”

서류를 정리하던 의장이 말했다.

"대공자께서 시의적절하게 나서서, 삼공자 측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게 되었으니.”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없음에도 최고위원들이, 그 말에 절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그렇습니다.”

“용봉지회 건설 부지의 소요 사태가 해결된다면, 연씨 혈족의 구심점이 되어야할 이공자 측이 빠지게 될 테니까요.”

감탄하는 최고위원도 있었다.

“…역시 대공자라고 해야 할까요. 언제, 어떻게, 이런 준비를 전부해둔 것인지.”

“그 시간이 장장, 십 년이었소.”

그 감탄에 다른 최고위원이 긴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십 년 동안 강제로 침묵당했던, 그 대공자가 얼마나 칼을 갈았을지 생각해 보면, 나에게는 이번 일 또한 그리 놀랍지만도 않구려.”

허리까지 오는 긴 수염을 쓰다듬던 최고위원이 씁쓸한 웃음을 흘렸다.

“노부의 생각이 옳다면, 대공자의 행보는 이제 이것으로 시작에 불과할 것이오.”

지금보다도 더 큰 혼란.

더 큰 충돌.

"......."

다들 입을 다물었다.

“곧, 새벽이오.”

의장이 목소리에 약간의 공력을 담아, 분위기를 환기했다.

“다음 정기 회의가 시작하기 전까지, 다들 눈이라도 좀 붙여 두도록 하시오.”

의장이 덧붙였다.

“서반아 측의 상로 이용 계약 갱신에 대한 논의는 미뤄졌네.”

“그 말씀은…?”

“대공자님이 올린 더 중차대한 안건들이 생겼네. 다음 정기회의에는 그것들을 먼저 논의하게 될 걸세.”

의장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들 자리를 떠났다.

그 모습은 대공자가 올린 안건이라는 말에, 도망을 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

하나둘 장막 너머에서 꺼지는 불들을 보며, 의장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아니, 잠길 참이었다.

“…의장님.”

모두가 떠난 것은 아니었다.

여성 최고위원의 목소리에 의장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질문이라도?”

“예, 그것이….”

그녀는 말을 꺼내는 것을 유난히 조심스러워했다.

이제 아무것도 모르던 신입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여전히.

십 년간 가주의 부재 속에서 검가를 지탱해 온 그의 존재는, 그만큼 무거웠으니.

“자네도, 나도, 최고위원 중의 한명에 불과하네. 그러니 기탄없이 말해 보게.”

말해야 할 것은 말해야 했다.

여성 최고위원이 속으로 부담감 어린 한숨을 삼키고, 입을 열었다.

“…방금 내린 결정은 대공자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하다는 여론을 피할 수 없을 겁니다. 아무리 일을 해결한 것이 대공자라 해도, 삼공자 측에서 순순히 납득하고 물러나기에는 어렵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대공자가 세운 공에 대한 포상과 사태를 일으킨 삼공자 측에 대한 징계가 함께 든 결정이었다.

“'지금'은 그렇지.”

그녀의 말에 의장이 대답했다.

“하지만 곧 그들이 납득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드러날 걸세.”

“…의장께서 저희와 공유하지 않은 이야기가 더 있으신 모양이군요.”

“곧 알게 될 걸세.”

다음 정기회의에서 다루겠다고한 중차대한 안건도 그렇고, 갑자기 대공자의 해결안을 가져온 것도 그렇고.

그뿐만 아니라, 뭔가, 어딘가.

의장의 근본적인 부분이 달라진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말씀처럼 이번 결정에 대해서 다른 이들이 납득을 하게 되더라도. 그것을 차치하고서 방금, 의장님께서 비상소집 회의에서 보여 주신 모습은....“

그녀가 입술을 깨물었다가 말을 이었다.

“유난히 대공자에게 편파적이었습니다.”

한번 말이 나오자, 의외로 말이 쉽게 흘러나왔다.

“원래 이 검가를 물려받아야 했던 것이 대공자였다는 것은 저도 이제 알고 있습니다만. 어쨌든, 지금은 그 대공자가 검가의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죠.”

그 말에 의장의 눈썹이 꿈틀거렸 지만, 그녀는 볼 수 없었다.

“의장께서, 대공자에게 죄책감을 가지신 것은 알겠지만. 좀 더 검가를 이끌어 가는 최고운영회의에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 주셔야 하지 않을까요?”

그것은 중립 의무를 지켜야 할 최고운영회의의 의장에 대한 명백한 지탄이었다.

“…검가의 주인이라.”

그녀의 말을 되뇌던 의장이 대뜸 엉뚱한 이야기를 꺼냈다.

“요즘. 나는 틈틈이 시간 날 때마다 구라파의 역사서 한 권을 읽고 있다네. 그들의 종교에 관한 이야기이지.”

비록 재주가 부족하여, 번역본을 읽고 있지만…, 하고 작게 웃는 의장의 목소리가 비동(秘洞)에 나직하게 울려 퍼졌다.

“이것은 대진국(大秦國;로마제국)의 시절에 있었던 이야기일세. 지금으로부터 천 수백 년도 전에 저들의 구주(救主)가 그 땅에 있었다더군.”

영문을 알 수 없는 이야기가 쭉 이어졌지만, 여성 최고위원은 의장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서 그의 제자가 물었네. 카이사르(凯撒大帝)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아니면, 세금을 바치지 않아야 합니까?”

진퇴양난(進退兩難) 이라.

그것은 함정과도 같은 질문이었다.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다고 하든, 옳지 않다고 하든, 좋지 않은 결과가 있을 수밖에 없는 질문이었으니.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라 하면 내부의 반발이 있을 것이요, 세금을 바치지 말라 하면 외부의 박해가 더 커질 노릇이었다.

“그 질문에 대해 오히려 이렇게 반문하더군.”

이 화폐에 새겨진 초상과 문자가 누구의 것이냐?

카이사르의 것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렇다면 카이사르의 것을 카이사르에게 돌려주도록 하라.”

그의 담담하면서도 초연한 목소리가 비동에 메아리쳤다.

“나는 중립 의무를 위반한 것이 아닐세. 그저 카이사르에게 카이사르의 것을 돌려주려 할 뿐.”

* * *

포위망 내부, 깊은 지점.

"......."

밥 짓는 연기를 향해 급속도로 접근하는 이들은, 숨소리도 내지 않았고, 빗길에 찰팍거리는 발걸음소리조차 없었다.

그것은 검가의 무사들다운 범상찮은 무공 수준이었다.

“…언제까지고 이렇게 쌀밥을 먹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러게 말일세. 집에 있는 딸아이에게도, 이 쌀밥을 가져다줄 수 있다면….”

"나는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나는구먼….”

초소에서 번을 서야 할 이들은 쩝쩝거리며, 밥을 먹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틈을 타서, 접근한 무사들이 초소의 아래쪽에 자리 잡았다.

'경계도 제대로 서지 않고, 밥을 처먹느라 정신이 없어? 겨우 이딴놈들을 상대로 고전하고 있었단 말인가.'

아군과 적군.

양쪽의 멍청한 이들을 차갑게 비웃으며, 조장이 수신호와 함께 지시를 전달했다.

[적의 보초는 셋이다. 자네가 오른쪽, 내가 가운데, 그리고 자네가 왼쪽 놈을 맡도록.]

초소 아래쪽에 자리 잡은 무사들의 조장이 조원들에게 근접 전음을 날렸다.

[신호에 한 번에 처리한다.]

무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손에 든 무광 처리된 검에 빗물이 흘러내리며, 번개 빛이 반사됐다.

[지금]

무사들이 순식간에 벽을 타고 올라 암습을 가했다.

미리 지정했던 것처럼, 조장의 검은 가운데 인영을 꿰뚫었다.

벽을 타고 올라 검을 내지르기까지, 번개에 뒤이어 울려 퍼진 천둥 소리의 울림이 채 멎기도 전에 암습이 끝났다.

"……?!"

끝난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대들의 가슴속엔 일말의 연민조차 없는가?”

분명 가슴팍 깊숙이 검을 찔러 넣었건만.

꿰뚫린 인영들이 일제히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기괴한 미소를 지었다.

“그대들의 머릿속엔 일말의 후회조차 없는가?”

그들의 입이 주욱 귀 아래까지 찢어졌다.

동시에 검에 비할 바 없을 정도로 날카로운 손톱이 조원들의 가슴팍을 꿰뚫었다.

“커억!"

“큭…!”

비명은 짧았다.

긴 손톱이 마치 장검처럼 그들의 등판을 뚫고 나왔다.

무사들은 부릅뜬 눈으로 손을 허우적거리다가 입에서 피거품을 물고 늘어졌다.

“사, 사술…?!”

다른 무사들보다 뛰어난 실력으로 겨우 손톱을 튕겨 낸, 조장이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적은 셋인 줄 알았지만, 하나였고.

사람인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사술이라….”

연달아 내리치는 번개 빛에 상대의 비에 젖은 하얀 가면이 유난히 선명했다.

“흥미롭군.”

이미 이 지역은 제암진천경의 지독한 마기에 잠식당한 후였다.

그들이 보았던 보초들 또한 마기에 의한 환영이었으니.

“큭?!”

그 정도로 이미 골수까지 마기가 치밀어 오른 조장또한, 두어 번 검격을 날리고 조원들과 같은 최후를 맞이했다.

“이, 이런 사이한…, 끄르륵-.”

유언 대신 피거품 끓는 소리를 낸 조장의 가슴에서 손톱이 주욱하고 빠져나왔다.

“그렇군.”

암천존자가 나자빠진 무사들의 시체를 보며 조소했다.

“이 암천존자는 사술이나 쓰는 사이한 존재이고, 그대들은 무공을 쓰는 정명한 무인이란 말인가?”

한껏 비꼬는 말이었지만.

당연히 시신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 * *

“…제길!”

밥 짓는 연기가 올라오는 건물들의 문을 박차고 들어갔던 이들이, 크게 소리를 치며 밖으로 나왔다.

“텅 비었습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높은 건물의 꼭대기.

암천존자는 거리로 다시 뛰쳐나오는 무사들을 보며, 그 입가에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적은 많고, 침투 경로는 다양하며, 지켜야 할 이들은 많은데, 자신은 혼자뿐이다.

그렇다면.

'적들을 유인하면 될 뿐이지.'

연소현은 빈민들과 낙양의 봄 협사들을 적들의 접근 경로에서 철수시켰었다.

그들은 자신의 지시대로 밥짓는 연기를 피워놓고 후퇴했다.

그의 노림수대로, 공에 목마른 적들은 그 밥짓는 연기에 파리처럼 꼬여 들었다.

“제길, 함정이었나…?”

뒤늦게 합류한 우익의 지휘관, 참백무관의 관주가 이를 갈았다.

“전원 주의하라! 적의 함정이니, 기습에 주의하라!”

그의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한 무사의 비명 같은 외침이 울려 퍼졌다.

“정체불명의 적 발견!”

거리에 다시 모여 두리번거리던 무사 중 하나가 암천존자를 손으로 가리키며 외치자, 모두가 그 건물 위를 바라보았다.

“하얀 가면이다!”

“아, 암천존자?!”

사납게 몰아치는 빗속에서도.

거친 바람에 흔들리는 시야 속에서도, 저 멀리 옥상에서 그들을 내려다보는 존재의 모습은.

그 존재감은.

너무도 거대했다.

암천존자의 어깨에 걸려 있는 칠흑의 외투가 바람에 펄럭이며, 길게 드리워, 하늘을 가리는 것만 같았다.

“저자가 그 소문 속의 암천존자라고…?”

참백무관의 관주가 인상을 썼다.

어찌 낙양에서 그 이름을 한 번도 들어 보지 않은 자가 있을 수 있을까.

“아, 암천존자라니…?”

“하늘을 대신해서 천벌을 내린다는…?”

불안감을 한껏 실은 술렁임이 일순 퍼져 나가는 모습에, 참백무관의 관주가 멀리 암천존자를 향해 검을 치켜들었다.

“네놈이 무슨 권리로 낙양검가의 행사를 막는 것이더냐?!”

내공을 담은 쩌렁쩌렁한 외침이 빗소리를 뚫고 울려 퍼지려 할 때.

그 대답은 참백무관 관주의 바로 뒤에서 들려왔다.

“그런 네놈들은 무슨 염치로 그저 살아 보고자 하는 이들의 생존 권리를 짓밟으려는 것인가?”

등골을 타고 오한이 치달았다.

“……?!"

그 차가운 입김이 닿는 귓바퀴가 그대로 얼어붙는 것 같았다.

짙은 유황 냄새가 훅하고 밀려 들어 오며 후각을 마비시켰다.

“큽…!”

반사적으로 뒤로 휘두른 검이 빗줄기들을 일시에 끊어 냈다.

하지만 상대는 이미 훌쩍 뒤로 물러선 다음이었다.

'어떻게 그 짧은 순간에 내 뒤로 이동을...?!’

슬쩍 원래 암천존자가 서 있던, 건물의 꼭대기에서 자신이 있는 곳까지의 거리를 가늠해 보았다.

그것은 일순간에 이동하기에는 말도 되지 않는 거리였다.

'망할…!'

뭐에 홀려도, 단단히 홀린 모양이었다.

노인이 검을 다시 겨누며, 발작처럼 외쳤다.

“네놈이 아무리 신출귀몰한들. 이 낙양에서 검가의 적이 되고도,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으냐?!”

“내가 검가의 적이라고?”

그의 말이 뭔가 암천존자를 자극한 것일까.

그의 칠흑 같은 외투가 어둠에 녹아들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허공에서 꿈틀거렸다.

“검가의 이름으로 빈민들에게 허기 속에서 가혹한 노동을 강요하고, 고통의 몸부림을 그 검으로 찍어누르려 하며, 낙양을 쥐어짜 제 잇속만 챙기는 너희들….”

가면 아래서 으르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인간의 것으로 보이지 않는 날카로운 치열이 드러났다.

“그런 너희가 바로 낙양검가의 적이다.”

어머니가 키운 낙양.

아버지가 키운 가문.

암천존자, 연소현은 그 정당한 후계자로서 자신의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닥쳐라! 이 괴물!”

한 사람과 한 괴물이 검진(劍陳)안에서 격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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