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편 판결(判決)
얼마 전.
봉기 세력 지휘부.
“…그렇다면, 대공자의 말씀은. 저들이 곧 쳐들어올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까?”
“아마도.”
연소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부디 그러지 않길, 바라고 있소. 그 때문에 본가의 장로 한 명을 미리 저들에게 보내 두었소.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의미로.”
경고.
연소현이 사공자 측의 유 장로를 미리 파견한 것은 그런 의도였다.
일단은.
“하지만 그 경고가 오히려 역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것이군요.”
협사의 말에 연소현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저들의 오만이, 저들의 욕심이, 흘러넘친다면.”
그러면 삼공자 측에서는 크든 작든 반드시 병력을 움직이는 자가 있으리라.
“…그렇게 된다면, 저희도 함께 싸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대공자님. 비록 노동자들은 지쳤지만, 저희는 아직 체력이 충분합니다.”
협사들이 괜히 지치지 않은 척을 하며 나섰다.
하지만 연소현은 그들의 얼굴에서 감출 수 없는 짙은 피로를 알아챌 수 있었다.
“괜찮소.”
연소현이 고개를 저었다.
“그대들은 모두를 모아 최후방, 즉. 삼공자 측의 주둔지에서 가장 먼 곳으로 피하도록 하시오.”
포위망이 부지를 완전히 둘러싸고 있는 탓에, 빠져나갈 수는 없지만.
적어도 교전을 피할 수 있는 거리로 물러나라는 이야기였다.
“…대공자님.”
앞으로 나선 것은 폭약을 담당하던 협사였다.
“적어도 적들을 제대로 된 위치로 유인할 수 있다면, 폭약의 동시 다발적인 폭발을 통해 큰 피해를 줄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안 될 일이오.”
연소현이 즉시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적들의 침투 예상 지역에 미리 설치되어 있던 폭약도 모두 해체해야 하오.”
빈민 노동자 지도자가 연소현이 말하는 바를 알아듣고 수긍했다.
“…적들이 오히려 그것을 명분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렇소.”
“그것까지는 이해했습니다요. 하지만….”
지도자가 연소현을 우려하는 눈 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말씀을 들어보면, 대공자께선 얼마나 될지 모르는 무사들을 상대로 홀로 버티겠다고 하신것이 아닙니까요?”
그의 말에 연소현이 피식 웃었다.
“버틴다, 라….”
그가 들고 있던 가면을 얼굴에 가까이 댔다.
“내가 누군지 잊었나?”
하얀 가면은 마치 액체라도된 양, 기묘한 움직임을 보이며 얼굴 가죽에 들러붙었다.
"......!"
폭발하듯 치솟는 섬뜩한 기운에 좌중의 인물들이 일제히 뒤로 물러났다.
암천존자가 된 연소현을 중심으로 마치 한겨울이 된 것처럼 서리가 끼기 시작했다.
“내가 아니라 적들이 버텨야 할 것이다.”
그가 유황 냄새가 나는 입김을 흘리며 말했다.
“감히 자신들의 주제도 모르고, 욕망에 휘둘리는 자들은, 모두.”
암천존자가 선언했다.
“오늘 이곳에서 판결을 받게 될 것이다.”
* * *
“으, 으아아아아-!”
젊은 무사의 비명이 넓은 공간에 울려 퍼지고.
건물 밖에서는 벼락이 내리쳤다.
아직 외벽밖에 없는 건물의 안이 일순 밝아졌다.
높은 천장에 매달려 있는 조원들의 시신이 잠깐이지만, 허연 벼락의 빛에 너무도 선명하게 드러났다.
후드드드득一.
그들의 시신에서 흐르는 피가 점점 많아져, 이제는 줄줄 흐르다시피 떨어지고 있었다.
하얀 가면의 존재, 암천존자는 그 흐르는 피를 맞으며, 잠시 가면 아래에서 눈을 감았다.
"......."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 같던 갈증이.
결코, 채울 수 없을 듯 지독하게 느껴지던 허기가.
거짓말처럼 사그라지면서, 포만감이 차올랐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뿐.
북망산에서 노마 하나를 잡아먹은 이후.
오랜 굶주림 끝에 한번 '맛'을 본 그의 내장이, 마기가, 끓어오르듯 뇌리까지 치밀어 올랐다.
“전부 먹어 치워라!”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암천존자가 거칠게 고개를 내저어, 제암진천경의 유혹을 한차례 또 떨쳐냈다.
그 가공할 의지에 보복이라도 하듯, 엄청난 허기와 갈증이 다시 몰려왔다.
“유, 유죄라니….”
그의 시선이 목소리의 주인을 향했다.
젊은 무사.
이십 대 후반 정도 되어 보이는 젊은 무사는, 아마도 검을 쥔 모양을 보아하니, 형산의 무사인 것 같았다.
“이곳은 전장이오! 내가 죽이지 않으면, 상대가 나를 죽이는 곳이란 말이오!”
그는 암천존자를 향해, 검을 겨누며 외쳤다.
“유죄니, 무죄니. 도대체 그것을 누가 무슨 기준으로 정하는 것이오?!"
제법 당당하게 외쳤지만.
그의 검끝은 주체할 수 없이 떨리고 있었고, 그의 목소리 또한, 그러했다.
“그대는 자신의 말에 의문과 의혹을 품고 있구나.”
하얀 가면 아래 입이 달싹였다.
“그대가 벤 이들이, 과연 그대의 적이기만 하였던가?”
그 말에, 의료 막사에서 자신이 결국 베지 못했던 빈민 노동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대는 어쩔수 없는 일이라 했지만, 그대야말로 어쩔수 없는 그들의 처지를 이해해 보려 해 보았는가?”
그 말에, 자신이 적으로 여겨 왔던 이들의 얼굴이 무수히 떠올랐다.
퀭한 눈.
누구랄 것 없이 까맣게 탄 깡마른 얼굴.
피부에는 윤기 하나 없었고, 근육 하나 없는 몸에는 가죽이 뼈에 걸려 있는것 같은 모양새였다.
“검가의 무사여.”
암천존자가 물었다.
“과연 그들이 정녕 형산의, 검가의 검에 어울리는 적이었는가?”
암천존자의 말은 그의 심중을 그대로 꿰뚫었다.
“이 상황에 눈이 멀어 그대의 이성이 마비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던가?”
저벅, 저벅.
암천존자가 그를 향해 다가왔다.
“가까이 오지 마라!”
외침과는 달리, 검끝은 더욱 크게 흔들렸다.
“이제 깨달았을 터이니, 다시 한 번 묻겠다.”
암천존자는 딱 검이 닿을 위치에 서서 다시 물었다.
“그래서 그대는 유죄인가, 무죄인가.”
그는 더 이상 다가오지 않았다.
그저 뒷짐을 지고, 젊은 무사를 바라볼 뿐.
“나, 나는….”
그가 베었던 적들의 얼굴.
이제, 그 악귀 같은 얼굴이 스러지고, 제대로 된 그들의 얼굴이 보였다.
그것은 굶주림에 못 이긴 빈민들의 얼굴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적이 아니었고.
그들의 적은 자신이 아니었다.
그 빈민들의 적은 무사들이 아니었고, 관이 아니었으며, 검가도 아니었다.
그들이 싸우고자 했던 적은,
그들의 굶주림이었다.
자신이 떨어뜨린 검은, 자신의 두 손은, 그 피웅덩이에 잠겨 있었다.
“자신의 죄를 고백했군.”
암천존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좌우에 늘어서 있던 원혼들이 울부짖었다.
“저놈을 죽여 주시오!”
“우리의 원한을 갚아 주십시오!”
“나는 그저 배가 고팠던 것뿐인데!”
뼈밖에 남지 않은 원혼이 자신의 배를 갈라 내장을 꺼냈다.
그 원혼은 자신의 축 늘어진 내장을 연소현의 눈앞에 들어, 그것이 텅 비어 있음을 보였다.
“연자여!”
“암천존자여!”
“우리의 주린 배를 채울 수 있는것은, 원한을 갚아 주는 것뿐입니다!”
그것은 제암진천경의 연자가 된 대가.
그것은 연소현을 영혼에서부터 묶는 속박이었으며, 그 행동을 강제하는 제약이었다.
“심판을!”
“심판을! 심판을! 심판을!”
암천존자의 손에서 섬뜩한 소리와 함께, 길게 칠흑의 손톱이 튀어나왔다.
“…그대는 심판에 동의하는가?”
이제야 떳떳해진 무사가 고개를들고, 자신의 운명을 마주했다.
“…예."
암천존자의 손톱이 그의 얼굴로 향했다.
그 얼굴을 가르면, 그 안에 가득 들어찬 죄악이 터지듯이 튀어나올 것이다.
그 죄악은 다디달 것이다.
그 끝날 줄 모르는 갈증과 허기를 달래 줄 것이다.
하지만.
스윽-.
하고 암천존자의 예리한 손톱은 젊은 무사의 얼굴 피부를 길게 그었다.
그 손톱이 얼마나 예리했던지.
닿은 줄도 몰랐던 부위가 길게 갈라지며, 알싸한 통증이 치달리고 나서야, 젊은 무사는 자신이 아직 살아 있음을 깨달았다.
“…나는 그저 심판자일 뿐이라, 그대의 죄를 사할 자격이 없다. 허나.”
자신을 멍한 표정으로 올려다보는 젊은 무사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암천존자.
아니, 연소현이 말했다.
“그대 스스로가 속죄하는 것은 막을 수 없지.”
왼쪽 얼굴을 위아래로 가로지르는 상처에서 뜨거운 피를 흘리며 젊은 무사가 물었다.
“…어떻게 속죄하면 되겠습니까?”
암천존자는 뒤로 물러나더니, 어둠 속으로 스며들듯 사라졌다.
“그것을 고민하는 것부터가, 속죄의 시작이다.”
그 목소리는 잠시 남아서, 허공을 맴돌다 빗소리 속에서 흩어졌다.
"......."
이제 더 이상, 자신을 속박하던 존재는 없었지만.
형산의 젊은 무사는 무릎 꿇은 자리에서 오래도록 일어날 줄을 몰랐다.
* * *
지붕 위를 유령처럼 달리는 암천 자의 안광이 길게 늘어지며 푸른 불똥을 흩날렸다.
그런 그의 머릿속에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리석은 자로다]
그 목소리는 낯이 익었다.
[속죄라니]
목소리가 그를 질책했다.
[암천존자니 뭐니, 주변에서 떠받 들어주니, 자신이 무슨 대단한 존재라도 된 것 같은가?]
십칠 세의 연소현으로 돌아오기 이전, 갇혀 있던 그가 들었던 목소리였다.
연소현을 제암진천경이라는 천고의 마물과 계약하도록 했던, 그 목소리.
후에 들은 바에 의하면, 그것은 제암진천경이라는 마물이 낸 목소리가 아니라 했었다.
[그 굶주림과 갈증은 참으면 참을수록 더욱 커질 뿐이다]
정체불명의 목소리에 연소현이 차갑게 웃으며 머릿속으로 대꾸했다.
'한낱 몸의 반응에 못 이겨 움직일 것 같으면, 그것이 욕망에 휘둘리는 저들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어리석은 소리!]
머리를 타고 찌르르 고통이 치달을 정도로 커다란 호통 소리였다.
[그것을 억누르면, 억누를수록, 더욱 그 반작용이 커진다는 것을, 자네도 알고 있지 않은가?!]
“…당연히 알고 있소!”
연소현은 이를 악물고 달리며 대답했다.
'억지로 억누르면 억누를수록, 나중에 더 큰 충동으로 돌아오지. 이미 시험은 전부 해 봤다오. 그러니 내 삶에 대한 참견은 거부하지.’
[참견이라고?]
연소현이 양의신공을 극한까지 끌어 올리자, 목소리가 멀어졌다.
[그 얄팍한 양의심공 따위가 언제까지고 자네의 정신을 보호해 줄 것이라 기대하지 마라!]
'굳이 말해 주지 않아도 알고 있다고 하지 않았소?’
[이 천둥벌거숭이가…!]
양의심공의 공능은 점차 급격히 감소하고 있었다.
제암진천경의 침식은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연소현은 그동안 거듭해서 양의 심공을 개량해, 대응을 하고 있었다.
지금에 와서는 처음 양의심공을 창안했던 인물이 보아도, 그것이 양의심공인 것을 제대로 못 알아볼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외우주의 존재라는 제암진천경의 힘은 무한했다,
[악을 먹어 치우는 것이 아니라, 제암진천경과 싸우길 택했던 모든 연자는 그 영혼의 조각조차 남기지 못했다]
그 끊임없는 침식에 대항하는 것에, 점차 한계가 드러나고 있었다.
[자네 또한 이지를 잃고, 한낱 꼭두각시가 될 것-]
목소리는 이내 잦아들었고, 연소현의 신법도 멈췄다.
목적지에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걱정하지 마시오.”
연소현, 암천존자의 목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 목소리에게 답했다.
“지금 이곳에는, 골라서 먹어 치워도 끝이 없을 정도로….”
주변에서 가장 높은 지붕 위에선 그의 시선이 저 멀리 향했다.
“...먹어 치워야 할 악인들이 넘쳐 나니까.”
그곳에는 어둠 속에 녹아든 한 무리의 무사들이 빠른 속도로 진격하고 있는 모습이 있었다.
그들은 굴뚝에서 하얀 연기가 몇 줄기 솟아오르고 있는 지역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 * *
[정지!]
척후의 수신호에 우익을 담당한 노인이 전음을 날렸다.
낙양검가의 속파가 되기 이전, 감숙 참백무관(嶄柏武館)의 관주였던 노인은 지붕 위에 납작 엎드렸다.
[하얀 연기들의 정체는 확인되었나?]
척후의 보고가 돌아왔다.
[예, 관주님! 냄새로 확인했습니 . 예상대로, 밥을 짓는 연기입니다.]
[경계는?]
[육안으로 두 개 초소마다 두세명 정도 관측되었지만, 딱히 경계가 철저해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안공(眼功)을 전문적으로 연마한 이가 추가로 보고했다.
[경계를 서는 이들도 한창 밥을 먹느라, 정신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 보고에 주변에 있던 무사들의 입에 사나운 미소가 걸렸다.
[아까의 전투 이후, 식사가 배급된 모양입니다]
[지금입니다, 관주님]
[놈들은 흰쌀밥에 눈이 돌아갔을 겁니다.]
관주는 전령을 중앙을 담당하고있는 형산북류의 문주에게 보고하라 일렀다.
[전원 발검.]
주변에서 몸을 숨긴 수십 인의 무사들이 무광 처리된 검을 뽑아 들었다.
[구별할 필요도 없다. 아군을 제외하고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전부 베어 버려야 할 것이다.]
무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준비를 마친 것을 확인한 관주가 전음으로 외쳤다.
[가자! 저 버러지같은 놈들의 식사를 제삿밥으로 만들어 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