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213화 (213/350)

제13편 덫

삼공자 주둔지에서 떨어진 지역.

낙양 시내로 향하는 가도(街道).

가도가 아니라, 개울을 걷는 것같았다.

폭우와 어둠.

철수하는 점창파의 인원들은 한치 앞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이 방향이나마 잡을 수 있는것은, 멀리 빗속을 뚫고 보이는 낙양 시내의 화려한 불빛 덕분이었다.

“장문인! 또 짐말 하나가 발목이 부러졌습니다!”

“수레도 진창에 빠져, 축이 부러졌습니다!”

그 말이 이 야밤의 폭우 속에 철수를 명한 자신을 탓하는 것만 같았다.

“필수적인 짐만 나눠서 지고, 걸음을 늦추지 마라!”

점창 전 장문인의 외침에 보급 담당 무사가 답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짐이 너무 많습니다! 이 진창을 걸어야 하는 일꾼들이 버티질 못할 것-!”

“그러면 무사들이 함께 지면 되잖나?!”

빗속을 뚫고 내공을 담은 노인의 일갈이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너희는 손이 없나?! 아니면 팔이 없나?!”

거의 살기가 비치기 일보 직전의 기세에 다들 입을 다물고, 누구랄것 없이 짐을 나눠서 지기 시작했다.

"......."

무사들의 얼굴에 명백한 불만이 가득한 것을 확인하고도, 점창의 전 장문인은 못 본 척 고개를 돌렸다.

'망할….'

그라고 해서, 어디 이 폭우 속에서, 이 늦은 야밤에, 이런 짓거리를 하고 싶겠는가.

'제대로 아는 놈이 없다고. 연소현 그 마귀 같은 놈이, 어떤 놈인지, 무슨 짓을 할 수 있는 놈인지….'

분명, 그날도 이렇게 폭우가 쏟아지고 있던 밤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그때는 여름이었지.'

낙양검가의 가주.

검의 주인이라 불리는 이가 자신을 몰래 불렀었다.

“점창이 검가에 자리를 잡는 것은 끝나가지만. 그래도 아직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지?”

“아무래도…, 원래 굴러 들어온 돌이란 그런 법이 아니겠사옵니까?”

“그래서 내, 자네와 점창에게 기회를 주고자 불렀다네.”

강남 정벌은 성공적이었지만, 그곳은 원래,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는 장소였다.

“이번에 터진 일을 수습하는 일에 내가 또 직접 친정을 해야 할것 같네. 점창이 나와 함께해서 공을 세운다면, 어떻겠는가?”

가주와 함께 공을 세운다면 틀림없이, 검가의 기존 세력들이 점창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에 적잖은 도움이 되리라.

“…죄송하지만, 아직 점창의 무사들이 전장에 서기에는 모자란 것 같사옵니다.”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가주는 그에게 신신당부했다.

“내가 또 자리를 비운다는 것은 결코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되네.”

“물론입니다.”

하지만 자신은 거절했다.

왜냐하면….

어느 폭우가 쏟아지던 여름밤.

낙양검가 내 어떤 저택.

“그 모든 권력을 한 손에 쥔 가주가 심심하면 자리를 비우니, 이 거대한 가문이 제대로 돌아갈리가 있겠는가?!”

점창파보다도 훨씬 일찍 검가의 속파가 되었던 종남파의 문주가 큰소리를 쳤다.

“이 가문의 앞길은 탄탄대로인데, 의사 결정이 느리기 짝이없어! 성장에 탄력을 받아야 할 이런 중요한 시기에, 모든 결정권을 가진 가주가 이렇게 자주 자리를 비우는것이 문제란 걸세!”

종남의 문주는 마치 스스로가 이 모든 것을 이룬 것처럼, 떠들어 댔다.

“그…. 문주님. 말씀은 맞지만, 목소리가 너무 크십니다.”

자신이 식은땀을 흘리며, 목소리를 낮출 것을 권했지만.

“가주도 없는 이 가문에서 누가 이 대(大)종남파 문주의 입을 막을수 있단 말인가?!”

종남의 문주는 그렇게 큰소리를 치고도, 괜히 두려웠는지, 목소리를 낮춰 자신에게 물었다.

“그래. 자네도 이제 슬슬 결정해야지?”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괜히 의뭉을 떨었다.

“어허, '대계(大計)' 말일세. 대계. 이 낙양검가를 한층 더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위대한 계획.”

대계라.

말이 좋지, 그것은 반란이나 다름없는 짓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 가주가 부재한 틈을 타서 뒤에서 일을 꾸미는 것은.”

“어허. 큰일을 하는데 앞이 어디 있고, 뒤가 어디 있겠는가?”

“그건, 그렇지만….”

이미 그들에게 합류할 것이라고 마음은 결정해 둔 참이었다.

그저 시간을 좀 더 끌며, 몸값을 올리려던 것뿐.

'그게 아니었다면, 진즉에 가주의 비밀 친정에 합류했겠지.'

가주에게 이들이 꾸미는 일을 일러바치는 것은 논외의 선택이었다.

가주의 부재가 큰 비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최상층은 이미 다 알고 있는 모습만 보아도.

이 거대한 가문이 움직이는 것에는 완전한 비밀 따위가 없다는 것을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밀고자로 찍히면, 그땐 진짜 끝이 나는 거지.’

“허허. 내 자네의 심중은 짐작하고 있네.”

“…예?”

종남의 문주가 자신에게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대계 후에 제대로 된 자리를 확약받는 것을 원하는 것이겠지. 그래서 내가 동지들을 설득하여….”

'좋군…!’

이제 끌어낼 수 있는 것은 전부 끌어냈다.

이렇게까지 해 주는데 여기서 더 튕기면, 제거당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까지 저를 생각해 주시는데, 어쩔 수 없지요.”

“합류하는 것인가?”

그가 바짝 마른 입술에 침을 바르고, 수락의 말을 꺼내려던.

그 순간.

“반역자들을 모두 잡아들여라!” 가주의 친위대이며 호위대.

기관(機關)이 들이닥쳤다.

“저항하는 자들은 전부 즉결 처형이다!”

“장문인! 이제 곧 낙양 시내입니다!”

수하의 외침에 점창의 전 장문인이 정신을 차렸다.

“좋아! 계속 전진한다!”

그는 기진맥진한 수하들을 독려했다.

하지만.

아직도.

그날, 폭우 속에 진창 위를 쇠사슬에 묶여 끌려갔던 기억이.

너무도 선명했다.

대숙청.

한여름의 혈사(血史)가 시작되었던 그곳에, 자신이 있었다.

“척후조의 보고입니다!”

수하가 달려와 외쳤다.

“전방, 낙양 시내 방향에서 접근해 오는 대규모의 병력 발견!”

뒷덜미가 섬뜩했다.

“식별 결과, 낙양검가. 본가의 병력입니다!”

아직도 등에 남아 있는 그날의 흉터가 유난히 욱신거렸다.

* * *

포위망 내부.

요새화된 빈민 노동자 지역.

쏟아지는 폭우 속의 옥상에서 죽은 것처럼 엎드려 있는 무사들이 있었다.

참수부대의 정찰조였다.

[현 지점 확인 완료.]

[적의 움직임은 파악되지 않음.]

무광 처리된 우의를 뒤집어쓴 이들이 조심스레 기어서 후퇴했다.

[아무도 없다고…?]

임시 참수부대를 만든 장본인, 형산북류의 문주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예. 여러 차례 확인을 마쳤습니다]

[…우리의 위치를 착각한 것은 아닌가?]

형산북류의 문주가 얼굴에 바른 검은 위장이 유난히 어색해 보였다.

[아닙니다.]

임시 정찰대장이 방수 처리된 지도를 꺼내어 한 지점을 짚어서 가리켰다.

[지금 여기가 현재 우리가 위치한 곳입니다.]

제대로 된 빛 따위는 없었지만, 좁쌀만한 야명주만으로도 비범한 내공을 지닌 이들이 지도를 읽기엔 충분했다.

[…그렇다면, 이미 계획대로 완전히 적진 안까지 들어온 것인데.]

그런데 지금까지.

단 한 번의 교전도 없었고.

발견된 적도 없었다.

[게다가 기존에 파악하고 있던, 근처 주요 방어 거점들도 비어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 방어 거점이라는 것이, 적들이 자폭을 위해서 폭약을 설치해둔 건물들 아닌가?]

[예, 요새화한 건물들입니다. 하지만, 확인 결과. 폭약들도 전부 사라진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폭약이 없다고?]

[예. 없습니다]

"......."

고민은 짧았다.

[고민할 시간에 움직인다. 적진에서 모든 것이 파악될 때까지 가만히 있는 것은 하책이다.]

[옳으신 말씀입니다만…]

[얼마 전에 있었던 우리 측의 기습 작전 이후에, 적들이 외곽을 버리고 더욱 안쪽으로 모여들었을 가능성은?]

실전 감각은 적잖이 녹슬었지만, 쌓아왔던 경험까지 사라지진 않았다.

[...그 가능성이 가장 현실적인것 같습니다]

이 폭우에 하마터면 기습을 허용할 뻔했던 적들이다.

경계를 촘촘히 하기 위해서, 일시적으로 외곽 지역을 버렸을 가능성은 충분했다.

[그러니, 공작조들을 남겨놓고 우린 계속 더 깊숙한 곳으로 전진한다.]

형산북류 문주의 전음에 공작조를 책임지는 무사가 나섰다.

[공작조들의 임무는...?]

[적들이 설치했던 폭약이 없다며?]

문주의 입매가 뒤틀려, 미소 같은 것을 만들었다.

[그럼 우리가 폭약을 설치하고 터트려, 명분을 확보한다. 건물을 네다섯 채쯤 날려 버려라.]

얼굴을 검게 칠했기에 어둠 속에서 작은 야명주의 빛에 반사된 하얀 치열만이 드러났다.

[그것으로 우리는 보이는 적들을 누구랄 것 없이 모두 도살할 명분을 가지는 것이지.]

* * *

잠시 후.

적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방어 거점에서 공작조 하나가 자리를 잡고있었다.

[...그렇게 열심히 보호하려던 건물들을 우리 손으로 폭파하게 될 줄이야.]

폭약을 설치하던 이의 말에 조수 역할을 맡은 무사가 어깨를 으쓱였다.

[배운 재주를 실전에서 써먹게 됐잖냐. 그래서 난 오히려, 재미있는데.]

경계를 서던 무사가 히죽하고 웃으며 전음에 끼어들었다.

[겨우 이걸로 놈들을 마음껏 죽여 버릴 수 있다니. 대환영이지.]

[중소문파 출신이라고 무시당하던 것도 이젠 끝이다, 이 말이야.]

[진즉에 고작 관군들이 아니라, 우리를 중심으로 작전을 했으면 좋았을 것인데….]

[놈들의 머리를 열 개쯤 베어서, 허리춤에 걸고 가면, 훈장 하나쯤은 주겠지]

[난 열다섯.]

[그러면, 난 스물이다]

그들은 이미 일을 모두 끝낸 것처럼 기세가 등등했다.

하지만 그런 대화에 끼지 않는 이도 있었다.

"......."

형산북류의 젊은 무사는 건물 아래를 바라보며, 맡은 임무에만 충실할 뿐이었다.

[저자는 뭐가 저리 심각한가? 겨우 임시 조장도 조장이라고 무게 잡는건 아니겠지?]

뒤에서 무사들이 전음으로 수군거렸다.

[몰라. 형산의 무사라 하던데, 자기는 이미 잘나간다는 거겠지.]

[중소문파 출신의 우리 따위와는 전음도 섞지 않겠다. 이건가?]

형산의 젊은 무사는 자신들보다 수준이 떨어지는 이들의 전음을 모조리 엿들을 수 있었다.

"......."

과거였다면, 주제도 모르는 것들을 전부 묵사발 내 주었을 터였다.

'이 싸움은 옳은 싸움인가...?’

적과 아군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던 이야기.

죽은 막내 관군 녀석과 야전 침상에서 자신을 올려다보던 어린 적군의 모습.

'…이래도 되는 것인가.’

깎지 못한 턱수염이 지저분한 그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림자만이 드리워 있었다.

[그럼 바로 터트리면 되는 건가?]

[멍청아. 나중에 본대가 작전을 마치고 철수할 때 터트리라는 것 못 들었냐?!]

작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이의 물음에 다들 면박을 주었다.

[생각을 좀 해라. 지금 터트리면, 적들이 벌 떼처럼 몰려올 것 아니냐?]

[아니, 그러면 명분이 없는 거 아닌가…?]

[아오..!]

밖을 경계하던 무사가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쳤다.

[나중에 터트려도 뭔 상관이냐. 어차피 지금이든 나중이든! 전부 끼워 맞춰서 보고서가 올라갈 것인데!]

[에휴. 머리가 모자라면, 지시 설명 때 졸지나 말든가. 넌 어디 가서 내 동기라고 하지 마라]

"......."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다른 사람들 전부 있는 전음에서 동기를 너무 크게 면박 준 것일까.

괜히 미안해진 무사가 전음을 날려 보았다.

[야. 삐졌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야. 내가 말이 좀 심했다. 나중에 내가 벤 수급 몇 개 줄게]

그래도 대답이 없었다.

[야! 미안하다니-]

전음이 끊겼다.

"......?"

형산북류의 젊은 무사가 이상함을 느끼고, 검집을 당겨 자루를 쥐었다.

[조장이 조원들에게 전달한다. 전원 현 상황 보고하도록.]

그가 잠시 기다렸지만, 돌아오는 보고는 없었다.

'형산의 임시 조장이라고 흉을 보더니, 장난질이라도 치는 것인가…?’

평시라면 몰라도, 실제 작전 중에 적진 한가운데서, 직속상관에게 장난질을 친다고?

당장 즉결 처분을 당할 만한 짓이다.

아무리 글러 먹었더라도, 검가의 무사들이다.

그렇게까지 정신머리가 없는 자들은 아닐 터다.

'뭔가 벌어지고 있다…!’

그는 자신이 맡은 옥상 관측 지점을 이탈하여, 계단의 아래로 향했다.

끼이익-.

그가 디딘 나무 층계가 내는 소리가 빗소리에 묻혔다.

게다가 경신(輕身) 공부를 활용하여, 딛는 발걸음은 더욱 조용할수밖에 없었다.

끼이익-.

하지만 발끝을 통해 전달되는 그 작은 진동과 소음이 어째서 이리도 거슬리는 것인지.

폭약을 설치하던 공간의 문 앞에 도달한 그가, 조심스럽게 안으로 기운을 흘려 넣었다.

'안에 아무런 기척이 없다…!’

즉시 이탈하여 다른 조나, 본대에 보고해야 하는가.

'…본대가 지금쯤 어디 있을지 알고 보고를 하러 간다는 건가.'

선택지는 없었다.

그가 이미 뽑아 들었던 검을 옆구리에 끼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툭, 투둑, 투두둑.

조금 열린 틈새로, 안쪽에서 물같은 것이 연달아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완공되지 않은 탓에 비가 새는 것일까.

"......."

흠뻑 젖은 자신의 손에서 흐르는 물에는 빗물보다 땀이 더욱 많으리라.

할 수 있는 한 가장 조심스럽게 열던 문이, 작게 쿵하고 무언가에 부딪혔다.

"......!"

급히 문을 열던 손을 멈추려 했지만, 문에 부딪힌 무언가가 굴러가, 문이 자연스럽게 열렸다.

“흡…!”

흰자위만을 드러낸 눈과 시선이 마주치고, 그가 숨을 삼켰다.

열리던 문에 부딪혔던 것은, 분명 폭약을 설치하던 조원의 잘린 머리였다.

그 잘린 머리로부터 흘러나온 피가, 진득하게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자신은 그 머리와 눈이 마주쳤던 것이다.

“이제 이 건물의 마지막 피고인이 왔군.”

온몸에 소름이 달렸다.

그가 사월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한기에 온몸을 덜덜 떨며, 시선을 정면으로 향했다.

“묻겠다.”

그것은 쇠가 끓어 넘치는 것 같은 목소리이며, 수만의 원혼이 동시에 외치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그대는 유죄인가 아니면, 무죄인가?”

폭약 더미 위에 앉은 시꺼먼 형상의 존재가 하얀 가면 아래서 비틀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참고로 이들은 모두 유죄였다네.”

그가 긴 손톱을 들어 가리키는 방향에는 목이 잘린 조원들의 시신이 천장에서부터 매달려 흔들리고 있었다.

투둑, 투투둑.

툭. 툭.

자신이 빗물이 샌다고 생각했던 그 소리는, 그 시신들에서 떨어지고 있는 핏방울들이 바닥을 때리는 소리였다.

“으, 으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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