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212화 (212/350)

제12편 희생양(犧牲羊)

형산파는 낙양검가의 속파가 되  전, 그 결정을 놓고 둘로 쪼개졌다.

그 결과.

자신들을 형산북류(衡山北流)라 칭한 이들은 낙양검가의 속파가 되었고.

형산남류(衡山南流)는 호남을 중심으로 흩어져 각자도생의 길을 걷게 되었다.

중원국의 오악(五岳) 중 남악(南岳), 형산.

과거, 그 형산의 대문파로, 구대 문파 중 일익이었던 대(大)형산파의 시대는.

그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 * *

용봉지회 경기장 건설 부지.

삼공자 진영.

의원 막사.

낙양검가-형산북류의 젊은 무사가 한 의원과 대치 중이었다.

그의 혀가 어느새 긴장으로 말라붙은 입술을 핥았고, 그의 손이 허리춤의 검 손잡이를 쥐었다가 떼기를 반복했다.

"......."

원래라면 간부급 인사가 의료 막사를 통제하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 삼공자 측 진영에선 간부급을 포함한 모든 최상급 인사가 지휘 막사에 모여있는 상태였다.

“나를 벨 각오가 없다면, 물러나시오! 즉시 환자를 치료해야 하오!”

의원의 호통에 형산의 젊은 무사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

그의 손이 슬그머니, 검 손잡이에서 멀어진다.

'…감히 의예원의 의원을 벨 수는 없다.’

그 모습에 모두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때 형산의 젊은 무사 곁으로, 초췌한 인상의 무사 하나가 무거운 걸음으로 다가와 말했다.

“…방금, 자네 조의 막내 놈이 죽었다.”

“…아.”

어깨를 맞대고 싸웠던 전우가 또 하나 세상을 떠난 순간이었다.

아직 십 대 후반에 불과하던, 관군 소속의 어린 병사의 얼굴이 떠올랐다.

큰 전공을 세워 어머니께 소를 한 마리 사 드리고 싶다던 녀석의 말이 생각났다.

젊은 무사의 눈앞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

쏟아지는 폭우와 의원 막사 내의 정신없는 소음을 뚫고, 검이 뽑히는 청명한 소리가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

모두의 시선에 경악이 깃들기도 전에, 형산북류의 젊은 무사가 검을 들며 말했다.

“그대들이 신념 때문에 전우들의 치료를 우선하지 못하겠다는 것은 알겠소. 하지만….”

그의 온몸에서 진득한 살기가 넘실거렸다.

“전우들을 치료해야 할 의원들의 시간을 빼앗고 있는 포로들을 베는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 외침에 의료 막사 안에서부터 비명들이 터져 나왔다.

* * *

동 시각, 삼공자 진영.

지휘 막사.

“도대체 본가의 최고운영회의가 이곳에 개입을 할 것이라는 이유가 뭐요?!”

“계속 늦장이나 부리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 아닌가?!”

“최고운영회의는 무슨 생각을 하는 게지? 그들이 어설프게 개입하면 우리가 책임을 전가하기 위해서, 일을 전부 망쳐 놓을 것이라는 점을 모르지는 않을 텐데…?”

“지금이라도 당장 좌우 대군사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하지 않겠소?!”

“망할. 이미 물이 엎질러졌는데, 좌우 대군사를 왜 찾고 자빠진 것인지….”

“늦장이라고?! 고작해야 이제 며칠인데. 늦장이랄 것이 뭐가 있소?!”

“본가로 사람을 보내, 상황을 좀 더 정확하게 파악해 봐야…!”

사공자 측의 유 장로가 던져 놓고 간 불씨에 지휘 막사 내부는 혼란의 도가니가 되어 있었다.

'아니야. 지금은 그딴 것들을 신경 쓸 때가 아니야.’

겨우 그 혼란 속에서 빠져나온 점창의 전 장문인이었다.

'그 마귀 같은 연소현 놈이 끼어든 것이라면, 아차하고 휩쓸리기 전에 빠져나가야만 한다…!'

상황은 제대로 모른다.

하지만, 점창을 팔아넘기고 권력을 유지한 그의 생존력이 지금 명백히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판단은 빨랐다.

그의 입가에 진득한 미소가 어렸다.

“도대체 이 일이 누구의 책임이란 말인가?!”

좌중의 뒤에 숨은 그의 입에서 내공까지 담은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 일을 이렇게까지 망쳐놓은 자가 누구냔 말이오! 마땅히 이 사태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 아닌가!”

그 외침에 지휘 막사를 가득 채우고 있던 삼공자 측 인물들의 눈이 희번덕였다.

'그렇군…!’

'누군지 모르지만, 활로(活路)를 열었다…!’

삼공자 진영의 풍경은 사실 이 혼란의 도가니가 평소의 모습이나 다름없었다.

과거의 무림맹이 그러했듯.

이곳 또한 수라장인 것이다.

그런 수라장에서 살아남아 온 권력자들의 눈치는 그들의 검보다도 빨랐으니.

“초동 조치에 실패한 경비 책임자가 문제 아니오?!”

“아니지! 초동 조치는 성공했소! 그 정체불명의 무림인들이 끼어든 것이 문제지! 그들의 정체를 아직도 파악하지 못한 정보 담당 책임자가…!”

“무지렁이 노동자들의 임금을 체불한 부서에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 아닌가?!”

난장판이 벌어지는 틈을 타서, 입구 근처로 이동한 점창의 전 장문인이 최측근에게 전음을 날렸다.

[우리 애들 전부 짐 싸라고 해라. 우리는 여기서 당장 빠져나간다!]

최측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 지금 당장 말입니까? 이 폭우가 내리는 야밤에요? 혹시 이유라도….]

[시간 낭비할 상황이 아니다!]

최측근이 꽁지에 불이 붙은 것처럼 후다닥 입구로 달려 나가는 것을 일별한 그가 시선을 돌렸다.

“그런 식으로 치면, 식사 배급이 더 문제였지!”

“맞소! 아무리 임금이 체불되었어도, 식사만 제대로 나갔다면 그 놈들이 봉기까지 하지는 않았을 것이오!”

“그 말이 옳다!”

“밥을 굶기는데, 제대로 일을 할수도 없었을 것 아닌가?!”

“그 무지렁이들의 식사 배급을 담당했던 곳은 어디였소?!”

“그건 형산파의 담당이 아니었나?!”

점점 의견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식량 관련 총책임자는, 형산북류의 문주(門主)였다.

“아, 아니! 다들 갑자기 무슨 소리요?!”

노동자들의 식량 예산을 착복했던 그가 뒷걸음질을 치고, 다른 이들이 그를 잡아먹을 듯 다가가며 외쳤다.

"문주!"

“일문의 큰어른답게, 제대로 책임지는 모습을 보이시오!”

“형산의 자긍심은 어디에 내팽개친 것이오!”

그 광경을 잠시 지켜보던 점창의 전 장문인이 노골적인 비웃음을 지었다.

'역시, 이럴 땐 책임 논란이 최고지.’

점창의 전 장문인이 낄낄거리는 웃음소리를 남겨 둔 채, 지휘 막사에서 나갔다.

이 상황에서는 누구도 자신과 점창이 진영에서 사라진 것을 알지 못하리라.

그가 남긴 비웃음 소리는 희생양을 '만들어' 추궁하는 이들의 목소리에 묻혀 사라졌다.

* * *

의료 막사.

“이, 이익…!”

들어 올린 검이 부들부들 떨려오고 있었다.

전우를 가족처럼 아끼고, 적은 원수처럼 여겨야 한다.

과거 대형산파 시절부터 내려온 가르침이었지만.

야전 침상에서 피가 새어 나오는 복부를 붙잡고, 자신을 불안한 표정으로 올려다보는 포로는 너무나 어렸다.

마치, 그가 방금 잃었던 조의 막내처럼.

“형산의 젊은 무사여….”

어느새 다가온 유 장로의 손이 부드럽게 그의 어깨를 짚었다.

“...긍지를 아는 무인이라면, 무력해진 상대를 도살하는 짓은 하지않을 걸세. 그들은 더 이상 자네의 적이 아니야.”

"......."

그녀의 말에 형산북류의 젊은 무사가 결국 자신의 검을 내렸다.

“잘 선택했네.”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오던 그의 살기가 갈무리된 것을 느낀 유 장로가 다독이듯 말을 이었다.

“세상사는 복잡하고, 그 안에는 적과 아군만 있는 것이 아닐세. 그대가 마음을 넓게 먹으면, 그만큼 많은 것들을-.”

“되었습니다.”

젊은 무사가 그녀의 손을 쳐 냈다.

“…적과 아군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까?”

그가 몸을 돌려, 무거운 걸음으로 의료 막사에서 걸어 나가며 말했다.

“적들이 그저 적이 아니라면. 그럼. 저의 전우들은, 왜? 무엇을 위해서 죽은 겁니까? 누가 죽인 겁니까?”

그는 답변을 기다리지 않았다.

검을 든 채, 폭우 속으로 걸어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유 장로가 안타까움을 드러내며 탄식하듯 말했다.

“…그칠 줄 모르는 인간의 탐욕으로 인해, 없었어도 될 희생들이 너무나 많구나.”

밤은 더욱 깊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폭우는 그칠 줄을 모르고, 더욱 거칠게 퍼붓고 있었다.

"......."

의원 막사에서 나온 젊은 무사는 검을 늘어뜨린 채 폭우가 쏟아지는 하늘을 멍하니 올려보았다.

“자네.”

그가 초점이 흐린 눈을 들어 상대를 바라보았다.

“전우들을 잃었나?”

상대는 중무장을 마친 중년 무사였다.

그의 물음에 형산북류의 젊은 무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중년 무사는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나는 지금 자네 같은 이들을 찾고 있었네.”

“…무슨 말씀입니까?”

“곧 최고운영회의가 개입할 것이라고 하더군.”

“…이제 이 싸움이 끝났단 말씀입니까?”

중년 무사가 어깨를 으쓱였다.

“적어도 우리의 전투는 끝이지.”

"......."

폭우를 그대로 뒤집어쓰고 있는 젊은 무사의 얼굴이 더욱 허망해졌다.

“그래서일세. 내가 자네같은 인물들을 모으고 있던 것은.”

어둠과 폭우 속에서도 중년 무사의 드러낸 이가 선명하게 보였다.

“놈들에게 마지막으로. 제대로 복수를 하고 싶지 않나?”

잠시 고민하던 젊은 무사가 고개를 저었다.

“…끝이라면, 이제 되었습니다.”

아무리 무사의 운명이 죽이고, 죽는 것에 있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당분간이라도 더 이상 피를 보고 싶은 심정이 아니었다.

“그래? 아쉽군.”

중년 무사가 혀를 찼다.

“사질! 거기 사질인가?!”

그때 젊은 무사의 사숙이 폭우 속에서 허겁지겁 달려왔다.

“…사숙님?”

지휘 천막에서 자신을 끌어냈던 사숙의 모습에 젊은 무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숙은 완전무장을 마친 상태였다.

“역시, 자네가 맞았군!”

“무슨…?”

그의 사숙이 말했다.

“문주께서, 우리 문파의 예비 전력 전체를 소집하셨다!”

"......!"

옆에서 그 대화를 듣고 있던, 중년 무사가 히죽하고 웃었다.

“역시, 자넨 우리와 함께할 운명이었군.”

번개 빛에 순간적으로 드러난 그의 웃음이 불길했다.

* * *

“정렬! 정렬하라!”

“예비 무장을 챙기지 않은 자들은, 왼편으로 나와서 지급받도록!”

지난 며칠.

수많은 정찰조가 작전 지역의 강행 정찰을 감행했고, 오늘 실패로 끝났던 작전에는 더 많은 인원이 동원되었었다.

그들 전체가 제외되었다.

머릿수를 채우던 관군들까지 전부 빠졌다.

책임을 떠넘긴 문파들에 속한 이들도 전원 빠졌다.

그럼에도, 속속들이 모여드는 무사들의 수는, 이미 수십이 넘어가고 있었다.

삼공자 측이 왜 그 난장판이면서도, 강력한 세력인지 보여 주는 일례 였다.

그들 중에는 복수를 원하는 이들도 있었고.

공을 세우길 바라는 자들도 있었고.

형산의 젊은 무사와 같이, 명령을 받아 동원된 이들도 있었다.

"......."

지금도 계속해서 늘어가는 무사들을 단상에서 내려다보면서도, 형산북류의 문주는 심기가 매우 불편해 보였다.

'...빌어먹을 놈들!’

지휘 막사에서 자신을 몰아붙이던 자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속에서 천불이 치솟아, 단상에 드리운 천막을 확 베어 버리고, 폭우를 몸으로 맞고 싶을 정도였다.

'자신들 또한, 누구랄 것 없이, 전부가 제각기 맡은 영역에서 예산을 빼먹었으면서…!’

“그래도 이 정도면, 해볼 만하겠구려.”

“충분하지 않겠소?”

“결국, 한 무더기의 상거지들에 무림인 몇몇이 끼어 있는 것에 불과한 놈들이오. 충분하고말고.”

단상에는 다른 인물들도 있었다.

자신의 옆에서 떠들어대는 이들을 향해, 형산북류의 문주가 두 손을 모아 감사를 표했다.

“…다들 고맙소. 우리 형산뿐이 었다면, 감히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것이오.”

그의 말에 그와 함께 단상에 서있던 이들이 손을 저어 보였다.

“하하. 우리 또한 형산이 없었다면,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겁니다.”

“평소에 흠모하던 형산의 문주님과 함께할 수 있다니. 그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럼요 그럼요. 우리는 이제 늙었지만 그래도 무사입니다. 무사된 자들이, 상황이 좋지 않다 하여, 물러서서 팔짱만 끼고 있을 수는 없지요.”

“우리 모두, 같은 검가의 형제들 아닙니까?”

듣기에는 그럴싸한 말들이지만, 그저 입에 발린 말들이다.

형산북류의 문주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같은 검가라고?’

오히려, 괜히 으스대는 모습이 불쾌하기만 했다.

'이때다 싶어서, 무리해서라도 공을 세우려 끼어든 잡배들 주제에….'

평소라면 대문파 형산의 맥을 이은 형산북류의 문주인 자신과 어깨를 함께하기에는 한참 부족한 이들이었다.

그들은 과거 한때 무림맹에 소속되어 있었던 '중소문파' 출신의 수장들이 었다.

“허허. 이 늙은이는 여러분의 도움을 끝까지 잊지 않을 것입니다.”

표리부동이라.

생각과는 달리, 그의 입에서는 감사의 인사가 다시 한번 나온다.

'이런 상황에서는 하나라도 아쉽긴 하니까.’

“그나저나, 역시 형산의 문주는 다르시군요.”

중소문파 출신의 문주 하나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틈을 노려 적들의 지휘부를 소탕해 버린다는 발상을 하실 줄은….”

“최고운영회의의 명령이 아직 제대로 내려오지 않은 그 사이를 노리시다니!”

“역시 대단하십니다.”

그 말에 형산북류의 문주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별것 아닙니다.”

최고운영회의는 유 장로를 통해, 일시적인 무력 사용에 제한을 걸었을 뿐.

아직 제대로 된 명령은 내려오지 않았다.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그땐 손을 쓸 방법이 없었다.

'틈을 노리려면 지금뿐이지…!’

임시로 결성한 참수부대(斬首部隊)의 운용.

그들은 최고운영회의가 개입하기전에, 적들의 지휘부를 일시에 제거해 버릴 계획이었다.

무리한 계획인 것은 알고있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을 타파하기 위한 유일한 방책이었다.

'그렇게 되면, 나는 이번 사건의 책임을 지는 희생양이 아니라, 사태 해결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

적들이 건물들을 더 폭파할수는 있지만, 오히려 그것은 그에게 명분이 되어 줄 것이다.

'놈들이 먼저 폭파를 감행했기에

* * *

포위망 내, 완공 직전의 첨탑.

삼공자 진영의 불빛이 폭우 속에 멀리 보이는 첨탑의 꼭대기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거칠 것 없는 세찬 바람이 그의 몸을 때리고, 폭우가 함께 몰아쳤지만, 그의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알아서 사지(死地)로 기어드는구나.”

그의 어깨에 걸려 있는 흑잠사 외투가 어둠에 녹아들어 거칠게 펄럭였다.

“욕망에 몸을 맡긴 어리석은 자들.”

한 줄기 낙뢰가 첨탑을 때리려했지만, 마기에 의해 공간이 어그러지며 빗나갔다.

그 낙뢰에 하얀 가면이 더욱 새하얗게 빛났다.

“세상의 섭리가 불완전하여, 쌓은 업을 사후에 심판받지는 않겠지만."

벼락이 밝혔던 주변이 다시 어둠 속에 잠겼다.

“살아생전에도 그 죄를 물을 존재가 없으리라 여기는가.”

그 어둠 속에서 하얀 가면에 걸린 두 줄기 귀화(鬼火)는 오히려 더욱 선명하게 흩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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