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편 응답(應答)과 보답(報答)
용봉지회 경기장 건설 부지.
삼공자 측 진영.
낙양검가 속파 중 하나인 형산의 무사가 의원 막사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는 품에 보자기 하나를 소중하게 안고 있었다.
그 보자기 안에는 보급계로부터 얻어 낸 군것질거리들이 들어 있었다.
크고 작은 부상을 당한 전우들을 위해 힘들게 구한 것들이었다.
“드디어 의예원의 지원이…!”
쏟아지는 폭우를 그대로 맞으면서도, 그의 피로에 찌든 얼굴은 밝을 수밖에 없었다.
'사숙께 차후 근신 명령을 받긴했지만, 그래도 보람이 있었다…!’
늦어지는 의료 지원을 따지기 위해 지휘 막사까지 쳐들어갔던 그였으니까.
“의원들이 도착했다고 들었소!”
“…그건 그렇소만.”
의원 막사의 앞을 지키던 무사들의 반응은 어째서인지 떨떠름했다.
“무슨…?"
이상함을 느낀 그가 즉시, 의원 막사로 뛰어들었다.
“이쪽! 이쪽 혈관을 잡으라니까!”
“검상이 너무 깊어! 여기 손이 부족하오!”
“약 선녀시여…!”
몇 개의 대형 천막이 연결된 의원 막사 내부는 전쟁터가 따로 없었다.
“환부에 물이 들어가면 안 된다고! 야전 침상 준비가 왜 이렇게 느린가?!”
원래 있던 의료 인력들에 합쳐, 새로 도착한 낙양검가 의예원의 인원들까지도 전부 달려들고 있었지만.
부상자는 너무나 많고, 의원이라는 고급 인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지, 지금 뭘 하는 것이오?!”
형산파 무사가 품고 왔던 보자기까지 내팽개치고, 의원 한 명에게 달려들었다.
“누, 뉘시오?!”
환자를 치료하다가 갑자기 멱살이 잡힌 의원이 당황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의원의 눈에 비친 무사의 얼굴은 피로에 찌들고 비에 흠뻑 젖은 가운데서도, 살기가 넘쳐흘렀다.
“도대체 적들을 먼저 치료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오?!”
그랬다.
그가 멱살을 잡은 의원은 포로로 잡아 왔던 적들을 먼저 치료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주변에 그런 의원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 * *
요새화된 빈민 노동자 지역.
봉기 세력 지휘부.
“우린 살았어!”
“살았다고! 살았어!”
낙양지사의 영구 노역 명령은 그들에게 있어서, 마치 사면(赦免)을 받은 것과 다름없다는 태도였다.
“고생 많았네. 자네들 모두 그동안 고생 많았어…!”
“이제 돌아가서 가족들을 볼 수있겠군….”
“아미타불, 아미타불. 다행이군. 다행이야….”
봉기 세력의 지휘부는 환호성을 올리고, 서로 부둥켜안고, 함께 기쁨을 공유했다.
"......."
그들의 반응에 오히려 연소현 쪽이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들이 모두의 목숨을 구할 수있는 유일한 방편을 거부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사실상 그들에게 선택권은 없다.
하지만 의외로 그 반응이 너무 즉각적이었다.
'짧고 강하게 이들을 설득할 준비까지 했었는데…. 일이 쉽게 풀린 것은 좋다만.'
“대공자님, 만세입니다!”
“대공자 만세!”
“만세!”
하나가 만세를 소리치자, 누구랄것 없이 모두가 소리쳤다.
“…만세라니. 것참.”
누가 들을까 겁이 나는 표현이었 다.
연소현은 날뛰는 사람들을 피해서, 쓴웃음을 지으며 빈민 노동자의 지도자들에게 향했다.
그는 구석에 무릎을 꿇고 앉아 천장을 올려다보며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다들 제대로 이해한 것 맞소? 영구 노역형은 사실상 노예가 되는것과 다름없는 것이오.”
그것이 역모죄를 저지른 모두의 목숨을 구하는, 연소현이 달성할 수 있는 현실적인 한계였다.
“대공자님. 저희는 모두 제대로 이해한 것이 맞습니다요.”
그가 연소현에게 미소를 지으며, 기도를 마무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대답했다.
...그저 풀려나는 것이 아니란 말이오. 목숨을 구하긴 했지만, 모두가 앞으로 평생을 내 밑에서 노역을 해야 할 것인데?”
저들은 아직 모르지만, 시간은 제한되어 있었다.
그리고 연소현은 그 제한된 시간 내에 이들을 반드시 설득해야만 했다.
게다가 설득해야 할 사항도 한둘이 아니었다.
그래서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서 각오를 하고, 암천존자로서의 정체까지 드러냈던 것이 아니던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쉬이 받아들여도 되는 것이오? 단 한 번의 고민도 없이?”
이토록 쉽게 자신의 인생을 타인에게 맡겨도 좋단 말인가.
그 질문에 지도자 쪽이 말문이 막힌 표정을 지었다.
"......."
그가 연소현의 표정을 살폈다.
가면이 뜯어 버린 얼굴 가죽 곳곳은 지금도 급속히 아물어가고 있었지만, 떨떠름해 보이는 표정을 읽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과연….”
그는 곧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인이 감히 말씀드리자면, 대공자께서는 본인의 영향력을 너무 가볍게 여기시고 있는 것 같습니다요.”
“내 영향력 말이오…?”
자신은 근래에 급속히 권력을 늘려 가고 있었지만, 아직 그의 영향력은 결코 만족스럽다고는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연소현이 가진 권력으로 일을 해결할 수 없으리라 했던 것은 오히려 저들 쪽이 아니던가.
“아까까지는 내 힘으론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없을 것이라더니?”
“소인은 그런 영향력을 말씀드린 것이 아닙니다요.”
그 말에 지도자의 얼굴에 걸려있던 미소가 짙어졌다.
“성인(聖人)은 자신의 덕이 가진 무게를 모른다더니, 대공자께서 바로 그런 분이셨군요.”
“성인이라니….”
연소현은 아연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어머니, 약소유도 아니고.
자신이 그런 말을 들을 것이라고는 상상치도 못했던 연소현이었다.
“그것은 실로 과한 표현이오.”
단호하게 고개를 저어 보이는 연소현의 주변으로는 어느새 지휘부의 인원들이 전부 모여 있었다.
“과한 표현이라….”
빈민 노동자 지도자는 그런 연소현에게 그저 미소를 지어 보였고, 낙양의 봄 협사 중 하나가 연소현에게 말했다.
“과연, 그럴까요?”
성인이라니.
연소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것은 구명의 은혜를 입었기에 나온 거창한 표현이라고 여기겠소. 그보다는....“
그가 주변에 모여든 이들에게 말했다.
“낙양지사의 명령서가 있다고 해서, 모든 상황이 끝난 것은 아니오. 오히려 힘든 부분은 이제부터 시작일 수 있소.”
다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렇겠지요.”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지도자가 연소현에게 말했다.
“조금 전, 대공자께서는 낙양검가의 최고운영회의 또한 낙양지사와 같은 결정을 '내릴 것'이라고 말씀하셨었지요.”
머리가 잘 돌아가는 이들이 그 말을 받았다.
"그 말씀은 아직 검가의 최고운영회의가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렇소.”
연소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낙양지사의 명령서가 우리에게 있지만, 낙양은 사실상 검가의 것.”
그 사실을 모르는 자가 낙양에 있던가.
“검가는 그리고 최고운영회의는 무력으로 봉기를 일으킨 이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 수는 없소.”
무장봉기를 일으킨 이들을 검가가 먼저 풀어 주다니.
아무리 낙양지사의 명령서가 있다고 해도 그것까지는 힘들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낙양에 고통받는 빈민 노동자는 무수하다.
선례가 잘못 남으면, 무슨 일이 어떻게 연쇄적으로 벌어질지 누구도 장담할 수가 없었다.
“그 말씀은….”
지도자가 말을 이었다.
“순서상, 저희가 '먼저' 완전히 항복하고 질서에 따르는 움직임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군요.”
“정확하오.”
연소현이 설명을 덧붙였다.
“그렇게 해야 검가의 최고운영회의가 낙양지사의 명령서를 공개하고, 그에 따라 같은 결정을 내릴것이오.”
모든 일에는 순리라는 것이 있다.
의장은 연소현의 편이었지만, 마냥 모든 일을 연소현의 편의대로 처리해 줄 수는 없다.
연소현 또한 그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런 행위는 적들에게 강한 명분만을 제공할 뿐.
곧 더 큰 문제를 불러올 것이니.
“어려운 것은 알고 있소.”
연소현이 좌중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여러분이 먼저 모든 무장을 해제하고, 지역 곳곳에 설치된 폭약을 전부 철수시켜야 하오.”
“그동안 저희와 지금까지 대치하고 있던 삼공자 측은…?”
“그들은 최고운영회의의 결정이 내려져야만 이곳에서 완전히 철수할 것이오.”
적들이 검을 겨누고 있는데, 자신들이 먼저 모든 방어 수단을 버려야 한다는 말이었다.
좌중 곳곳에서 침음이 흘러나왔다.
“그뿐만이 아니오.”
연소현은 내친김에 어려운 요구를 모두 늘어놓기로 했다.
“최고운영회의가 파견한 감독관들이 봉기를 일으켰던 모든 이들의 신상을 파악하고, 나의 통제가 확실하다는 것을 확인받을 때까지. 누구도 이곳을 빠져나갈 수 없소.”
"......."
침묵이 내려앉았다.
방금까지 느껴지지 않던 거친 폭우의 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
연소현이 그들을 보며 말했다.
“내가 지금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모든 일이 시행되었을때. 반드시 최고운영회의는 약속을 지킬 것이며….”
빗소리를 잠재우듯 그의 어조가 강해졌다.
“나, 검가의 대공자이자 암천존자. 연소현 또한,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으리라는 것이오.”
말을 마친 연소현은 뒤로 물러섰다.
여유가 그리 많지는 않지만, 이들에게 토론이라도 할 시간을 주기 위함이었다.
이제 이 문제는 전적으로, 그들이 저항했던 권력층에 속하는 연소현의 장담을 믿을 수 있는가 없는가에 대한 문제였다.
'고민이 많이 되겠지.'
연소현은 그들의 토론을 지켜보고, 그 후에 그들을 설득하기 위한 추가적인 제안을 할 생각이었다.
"......."
"......."
하지만 그들은 토론을 하지 않았다.
그저 연소현을 바라봤을 뿐.
"......?"
연소현의 눈썹이 꿈틀거린 그때, 지도자가 대표로 말했다.
“저희는 대공자님께서 제시하신 모든 조건을 받아들이겠습니다.”
"......."
또 이전과 같은 즉각적인 반응이었다.
“…내 말만 믿었다가, 검가가 약속과 다른 움직임을 보이면. 채 저항도 못 해 보고 전부 도살당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들 있는 것이오?"
그럴 바에는 끝까지 저항이라도 하다가 죽는 편이 나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연소현의 말에 다들 미소를 지었다.
“역시….”
협사 하나가 쓴웃음을 지었다.
“대공자께서는 자신의 영향력을 과소평가하고 계시는군요.”
다른 협사가 입을 열었다.
“대공자님. 이곳에 있는 저희 중, 단 한 번도 자애원에 신세를 지지 않았던 이가 없습니다.”
과거, 연소현이 낙양의 봄에 참여하는 것에 우려를 표했었던 협사도 나서서 말했다.
“감히 대공자님의 그 진의를 의심했다 하더라도, 누구도 과거로부터 베풀어 오신 은혜가 없었다고하는 이는 없습니다.”
다른 협사 하나는 품에서 약 선녀가 새겨진 목공예 목걸이를 꺼내보였다.
“또한, 모두가 약 선녀님만을 믿는 것은 아니지만….”
이곳에 선녀 신앙의 역사가 얕다고 하여, 그 대자대비(大慈大悲)함을 부정하거나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없습니다.”
지도자가 담담히 선녀 교단의 가르침을 읊었다.
“생명은 그 자체로 고귀하니. 그 무게에는 세속적 경중이 없다.”
그가 미소를 지으며, 연소현을 바라보았다.
“대공자님. 저희가 지금까지 존엄을 지키기 위해서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약 선녀님의 가르침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
그것은 회귀 전, 기록으로밖에 그들을 접하지 못했었던 연소현으로서는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 * *
“케, 켁…! 이것 좀 놓아주…!”
멱살이 잡혀 숨이 막혀 오는 의원을 도운 것은, 사공자 측의 유 장로였다.
“그 손을 놔라, 젊은 무사.”
명령에 익숙한 말투.
한 치 흔들림도 없는 눈빛
부상자들의 피로 물든 양손.
일견하기에도 그 위엄이 느껴져, 신분이 범상치 않아 보이는 유 장로였다.
“…설명해 주십시오. 적들을 먼저 치료하다니. 도대체 지금 이게 무슨 일입니까?”
형산파의 무사가 그녀에게 질문하며 의원의 멱살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콜록…!"
하지만 대답은 유 장로가 아니라, 바닥에 주저앉아 자신의 목을 감싸 쥔 의원에게서 나왔다.
“…나는, 우리는 의원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이오.”
형산파 무사의 입에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아군보다 적을 먼저 치료하는 것이 의원의 일이라고 하는 건가?!”
“더 급한 환자를 구명하는 것뿐이오!”
저릿한 살기에 혀가 굳어 오는것을 느끼면서도, 의원은 형산파 무사의 시선에서 눈을 돌리지 않았다.
“이…, 이런…!”
다른 의원들과 지원 인력 또한 이 상황을 인지하고는 있었지만, 누구도 참견하지 않았다.
그들의 우선순위는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환자에 있었으니.
"미친 자들이…!”
그가 칼자루를 붙잡는 것이 불안하게 흔들리는 유등 아래에서도 선명하게 보였다.
“의원의 본분은 생명을 구하는 것이다. 생명은 그 자체로 고귀하니. 그 무게에는 세속적 경중이 없다.”
의원이 기도를 읊듯이 중얼거리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니, 베려면 베시오.”
비록 내공은 없을지언정, 의원의 기백은 한치도 젊은 무사에게 밀리지 않았다.
“나는 검가 의예원의 소속이며, 내게 가르침을 베풀어 주신 스승들께서는 과거 '약 선녀'께 직접 의술을 전수받은 분들이오.”
젊은 무사의 시선이 의원의 목에 걸려있는 염주를 향했다.
선녀 신앙을 상징하는 염주였다.
“나는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며, 그 가르침을 후대로 전하기로 맹세했소.”
“…그런."
젊은 무사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뒤에서는 나이 든 선배 의원들이 장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
그 광경을 보며, 유 장로가 속으로 감탄했다.
'의예원에는 과거부터 선녀 신앙을 가진 자들이 많다고 듣긴 했었는데, 언제 그 세가 이렇게 커졌단 말인가?’
* * *
지도자가 말했다.
“약 선녀님의 아드님이신 대공자께서, 하늘을 대신하여 악을 응징하는 암천존자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은....“
그의 시선이 연소현이 한 손에 들고 있던 가면으로 향했다.
“어쩌면 그것은 필연처럼 느껴진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요.”
이어서 협사 하나가 가슴을 두드 리고 말했다.
“그런 대공자께서 직접 이곳에 오시다니요.”
“그것도 감히 저희 같은 무지렁이들은 상상하지도 못했던 해결책까지 준비해 주시다니….”
지도자가 말했다.
“저희는 그저 하늘에 간절히 올린 기도가 응답을 받았다고밖에. 더 어떻게 표현을 하겠습니까요?”
하나가 먼저 연소현에게 무릎을 꿇었다.
그 모습은 어찌 보면 경배하듯이 경건하기까지 했다.
그러자 나머지 이들이 모두 무릎을 꿇어 보였다.
“낙양지사도 밝혔듯이, 저희 목숨은 이제 대공자님의 것입니다.”
“그러니 모든 결정은 대공자님께서 내리신 대로 따를 것입니다.”
연소현은 할 말을 찾지 못했다.
"......."
과거.
어머니의 세상을 향한 헌신이 곳곳에 씨앗으로 뿌려졌고.
조금이나마 그 뜻을 이어가려던 어린 연소현의 노력이 더해져, 결실을 맺고 있었다.
그 결실은 꽃이 되어, 연소현이 알지도 못한 사이, 이 거친 폭우속에서 활짝 피어나 있었다.
'소현아.'
가슴이 먹먹해진 그에게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사람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람뿐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