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210화 (210/350)

제10편 만들어 가는 운명(運命)

낙양 중앙관청.

“…망할."

낙양검가에 황하 상류의 수문 개방을 허가받기 위해 나섰던 관원이 인상을 찌푸렸다.

"대기 중인 마차가 하나도 없으리라고는:“

폭우 때문에 모든 부서가 비상 운영 중이었고, 그래서인지 입구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어야 할 마차들이 하나도 보이질 않았다.

“제기랄. 이 날씨에 말이라도 달려야 하는가….”

진창에 말 발목이 부러지고, 이어서 자신의 목이 부러지는 모습이 머릿속에 절로 떠올랐다.

그때 낙양검가의 문양이 새겨진 마차 한 대가 달려 들어와 중앙관청의 현관에 섰다.

“......?"

문이 벌컥 열리더니, 비단옷을 입은 낙양검가의 고위직 문사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자네. 중앙관청에서 일하는 관원인가?!”

빗소리와 천둥소리에 그가 아예 소리를 지르듯 물었다.

“예, 맞습니다만…!”

관원이 고개를 끄덕이기 무섭게, 낙양검가에서 파견된 문사가 외쳤다.

“즉시, 이 시각부로 수문을 개방하라 전하게! 이는 낙양검가 최고 운영회의의 결정일세!”

그 말에 관원이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어찌 자신이 찾아가기도 전에, 낙양검가가 먼저 찾아온 것인가?

* * *

낙양검가 이공자 측 진영.

“검가전장에서 고립되어 있던 동맹 가주들이 전부 각 가문으로 복귀했습니다.”

중앙감찰각도 현재 수사 중인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권세 가문의 가주들을 무기한 잡아 둘수는 없었으리라.

전령이 남긴 말에 다들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것으로 일방적으로 두드려 맞기만 하는 일은 피했군.”

“우리 낙양 계파의 가문들도 두 손 두 발 걷고 달려들고 있으니, 대공자-.”

"......."

연소현을 대공자라 칭하는 것을 듣기 싫어하는 구양 태상부인의 시선에 그가 급히 말을 고쳤다.

“-연소현 그놈의 개들을 진압하는 것 정도는 시간문제일 것이오.”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생각하면, 그런 말이 쉽게 나오시오?”

"......."

나름 희소식이었지만, 이공자 측 장로들은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연소현이 첫 외출을 나섰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일이 제대로 풀려 나가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본디 일이란 것은, 계획과 다르게 곧잘 상상치도 못했던 암초를 맞닥뜨리기 마련이지만.

이 대공자라는 인물은 고작 암초가 아니라, 대해에 떠다니는 빙하와 같은 존재였다.

“연씨 혈족들과의 회담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소?”

“몇몇 인물들은 이미 협력을 약속했소이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가주의 부재 이후 검가전장을 통해 부정 축재를 일삼던 연씨 혈족들은 쉽게 이쪽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관련이 없던 이들은 좀 더 상황을 지켜보고 싶은 모양이오. 괜히 먼저 나서는 것을 꺼리는 기색이더군.”

“무리한 조건을 요구하는 이들도 많더이다.”

“이 기회에 뜯어먹을 수 있는 건 전부 뜯어먹으려는 것이지.”

“…들개 같은 놈들.”

대화를 듣고 있던, 하후 장로가 지침을 정했다.

“괜히 고깝다고, 정치적 자원을 아끼려 들지 마시오.”

그가 자신의 안대를 만지작거리며, 주변에 시선을 던졌다.

“협상은 하되, 반드시 그들의 협력은 얻어 내야만 하오.”

“물론이오.”

“암, 그래야지.”

다들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그나저나, 사업 지원단의 지원 일부는 어째서 일 처리가 이리도 늦는 것이오?”

사업 지원단이 검가전장을 통해 지원했던 자금을 회수하는 것으로, 대공자의 사업에 압박을 가하는 노림수.

지원일부와 소통을 담당하고 있던 장로가 불편한 듯, 헛기침을 해보였다.

“그들은 사업 지원단 내부에서 다른 부서의 손가락질을 받아 가면서까지 이례적으로 빠른 일처리를 하고있소.”

그 속도에는 대공자 측의 인물들도 놀란 바가 있었다.

“지금 검가전장이 중앙감찰각의 조사를 받는 중이니, 시간이 조금 더 걸리긴 하겠지만. 결국에 자금은 전부 회수를 할 것이오.”

낙양 계파의 장로들이 불편하든 아니든 활발히 대화를 나누고 있는 반면에, 강남 계파의 장로들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

이번 대공자와의 일전을 주도하고 있는 것이 낙양 계파인 만큼, 그들은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으니.

“강남 계파 여러분.”

하지만 이 상황에서 그런 꼴을 지켜보고만 있을 구양 태상부인이 아니었다.

“여러분 중에는 할 이야기가 있는 분이 없는 것인가요?”

"......."

시녀들에게 손톱을 손질받으며 회의를 참관하고 있던 그녀가 던진 말에, 강남 계파의 장로들이 서로 눈치를 살폈다.

“…한 가지가 있습니다.”

“기탄없이 말해 보세요, 손 장로.”

결국에 입을 연 것은, 이전에 대공자-사공자를 담당했었던 손 장로였다.

“검가전장에서 우마차를 타고 떠난 후, 대공자가 마지막으로 목격된 곳은 용봉지회 경기장 건설 부지 근처라고 들었습니다.”

“본 태상부인 또한 그렇게 들었었지요.”

구양 태상부인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었다.

“그것이 무슨…?”

손 장로가 대답하기 전에 다시 한번 생각의 정리를 마쳤다.

“연소현 그자는 지금까지 우리의 예측 범위 내에서 움직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아직 그놈이 우리 손아귀 밖으로 벗어난 것은 아니지요.”

손 장로의 말에 심기가 불편해진 구양 태상부인의 입매가 뒤틀렸다.

“현 상황을 비관하려 꺼낸 말이 아닙니다. 그리고 후에 면피용으로 깔아 놓으려 하는 말도 아닙니다.”

“그러면…?”

그녀의 손톱을 손질해 주던 시녀들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하지만 손 장로는 그녀의 에일듯한 시선을 받으면서도 꿋꿋이 자신의 할 말을 꺼냈다.

“현재, 우리가 총력을 쏟아부을 수 있는 것은 삼공자 측이 전선을 비우고 있기 때문이지요.”

낙양 계파의 장로들이 그의 말에 대번에 혀를 찼다.

“뭐, 그래서. 이번엔 연소현 그놈이 삼공자 측 전체가 매달려 있는 일을 해결해 버리기라도 한다고?”

“거, 말 같지도 않은 말을:“

노골적으로 비웃는 이도 있었다.

“전에 몇 번 호되게 당하시더니, 손 장로께서 연소현 그놈을 신격화라도 하는 것 같군.”

“삼공자 측이 자신들 밥그릇을 뺏기는 것을 그저 쳐다보고만 있기라도 할 것이란 말이오?”

"......."

손 장로는 입을 다물었고, 강남 계파의 장로들이 그런 그에게 따가운 눈빛을 보냈다.

'아니, 뭔 이야기를 하나 했더니….'

'가만히 있는 게 오히려 도움이 되었겠구먼.’

괜한 이야기를 왜 해서 굳이 빈축을 사느냐는 눈빛이었다.

"......."

하지만 손 장로는 깍지를 낀 채, 눈을 감고 그런 동료들의 시선도 무시했다.

“다들 조용.”

하지만 의외로 손 장로의 말에 심기가 불편해졌던, 구양 태상부인이 손을 들어 보여 좌중을 조용히 시켰다.

“본 태상부인 또한. 그것은 손 장로의 괜한 우려라고는 생각하지만…."

그녀의 시선이 하후 장로를 향했다.

하후 장로가 고개를 끄덕이곤, 좌중을 향해 입을 열었다.

“만사에 불여튼튼, 유비무환이라하니.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확인을 해 보는 정도는 해 두는 것이 좋겠소.”

그 말에 낙양 계파의 장로들이 못마땅한 표정을 짓긴 했지만, 반대하는 이는 없었다.

대공자 측과 비교하면 모든 자원이 압도적으로 넉넉한 그들이기 때문에 그 정도는 낭비랄 것도 없었다.

“말을 꺼낸 것이 그쪽이니, 그쪽에서 직접 삼공자 측에 확인을 해보는 것이 어떻겠소?”

우리는 바쁘니, 그런 일은 너희가 하란 말이었다.

“내가 가보겠소.”

낙양 계파 장로의 말에 손 장로가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 연소현 그자의 현재 위치가 정말로 용봉지회 경기장 건설 부지로 확인되면….”

“알겠소.”

하후 장로가 흔쾌히 손 장로의 우려를 받아들였다.

“확인되는 즉시, 그놈의 노림수가 삼공자 측을 전선에 복귀시키려는 것으로 확정하고 대응을 시작할 것이니.”

손 장로는 조금 마음을 놓았다는 표정으로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으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괜한짓 같다만….”

회의실에 남은 이들이 나누는 대화가 뒤에서 들려왔다.

“그래도 연소현 그자가 미리 대응을 준비해 두었을 가능성이 아예 없는것은 아니지 않소?”

“그것은 누구도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몰랐던 민중 봉기를 그자가 예측했다는 이야기요?”

“무슨 예언자도 아니고….”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그들 중, 누구도.

설마 대공자가 이미 일을 끝내 두었으리라고 상상할 수 있는 이는 감히 없었다.

* * *

몇 시진 전.

낙양검가 인근 야산.

의장이 탄식하듯 말했다.

“…지금에 와서 최고운영회의가 먼저 소요 사태의 해결 방안에 간섭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섣불리 평화로운 중재를 위해서 나서면 결론은 좋지 않을 것이 뻔했다.

“최고운영회의가 먼저 개입하면, 삼공자 측은 오히려 어깃장을 놓으려 들 것입니다.”

그리고 방해를 통해 일이 틀어지면.

애초에 그들이 소요 사태의 원인을 제공했던 것은 묻히고, 모든 피해에 대한 책임을 최고운영회의에 돌릴 수 있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애초에 삼공자 측에 해결을 맡기기로 할 수밖에 없는 문제였지요….”

“알고 있다.”

암천존자가 가면 아래에서 그 날카로운 치열을 드러내며,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이것을 준비했지.”

그가 품에서 서류 하나를 꺼내어, 의장에게 넘겼다.

“…이것은, 낙양지사의?”

엄중히 봉인된 서류에 찍힌 그 인장을 의장이 못 알아볼 수는 없었다.

봉인을 뜯고, 서류를 확인한 의장의 얼굴이 일순 밝아졌다.

"이럴 수가…!”

그의 목소리가 떨려 왔다.

“이제 개입이 가능하겠지?”

의장은 서류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대답했다.

“이것이 있다면 가능합니다…!”

방금까지 무기력함에 시달리던 늙은 무사는 더 이상 없었다.

“가능합니다. 암, 가능하고말고요. 이것이라면 충분히 가능하고도 남습니다!”

찢어지거나, 쓰러지지 않기 위한 낙양검가의 계속되는 성장.

“최고운영회의가 아니라, 이렇게 '낙양지사가 먼저' 나서면, 이어서 개입할 명분이 충분할뿐더러. 삼공자 측이 방해할 겨를도 거의 주지않고, 전부 해결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장으로 인해 터져 나오는 부작용들은 언제나 의장의 속을 불편하게 해 왔다.

가주 부재 이후 쌓여 온 그 부작용들이 이제 그의 영혼까지도 좀먹고 있던 시점이었다.

“이처럼 일이 깔끔하게 풀릴 수 있는 것이 대체 얼마 만인지….”

감격, 환희, 그리고 안도.

단지.

말뿐만 아니라, 행동으로.

대공자는 늙은 무사가 혼자가 아님을 느끼게 해 주었다.

그렇게 복잡한 감정의 소용돌이속에 있는 의장을 암천존자는 방해하지 않고, 조용히 떨어져서 바라보기만 했다.

“…그런데.”

감정에 젖어 있던 의장이 이상함을 느끼는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 무사안일주의의 낙양지사에게 '이 서류'를 준비시키려면, 대체 어떤 거래를 해야….”

보통의 사람이라면, 격하게 치솟은 감정으로 이성적인 사고가 제대로 흘러가지 않았겠지만.

“아니, 그 전에. 낙양지사가 받아들일 만한 규모의 거래를 하려면, 언제부터 준비를 했어야…?”

그는 최고운영회의의 의장.

천하제일가인 낙양검가의 현 수장이었다.

“하지만 그런 준비를 하려면, 무슨 일이 펼쳐질지 알고 있어야 할 것인데…?”

커다란 혼란을 느끼는 의장의 시선이 암천존자를 향했다.

“게다가 만약 이전부터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를 알고 있었다고 해도, 일이 흘러가는 과정 속에서 수많은 변수가 있었을 터인데….”

자신은 익히 이전부터 대공자 연소현이라는 자의 능력을 알고 있었다.

아니,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도대체 어떻게 하신 겁니까?”

암천존자는 구름이 거칠게 일렁이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알고 있는 것은 활용하고, 활용할 수 있는 것은 통제하며,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이끌어 가면 된다.”

"......."

할 말을 찾지 못하는 의장을 향해, 불가해한 존재의 시선이 향했다.

“곧 내릴 비는 아마도 높은 확률로 폭우가 될 것이다.”

암천존자는, 대공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담담하게 말했다.

“황하 상류의 수문을 개방할 준비를 해 두는 것이 좋겠어.”

그가 덧붙였다.

“명령을 내려야 할 낙양지사가 부재중일 터이니. 자네들, 최고운영회의가 대신하여 중앙관청에 명을 내려야 할 것이다.”

* * *

현재.

요새화된 빈민 노동자 지역.

봉기 세력 지휘부.

“확실히.”

대공자 연소현이 말했다.

“대공자 연소현의 권력으로는 부족한 일이지. 하지만….”

연소현이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제대로 된 권력(權力)의 힘이란, 때때로 더욱 힘 있는 이들을 '알아 듣도록 타일러 움직이게 하는 것(勸力)'에서 나오기도 한다오.”

그가 품에서 문서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을 때, 이런 결과가 나오는 법이지.”

가장 가까이에 있던 낙양검가 무사 출신의 협사가 그 문서를 정중히 받아 들었다.

봉인은 이미 뜯겨 있었지만, 여전히 매달려 있어, 낙양지사의 인장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가 다른 협사들을 대신해서 문서의 내용을 읽었다.

“…그 신민이 감히 황제 폐하의 통치를 거부하고, 창칼로 봉기를 일으킨 것은, 곧 황제 폐하에 대한 반역이니. 그것이 역모죄(逆謀罪)라….”

끔찍한 내용.

“…따라서 지엄한 제국의 법에 따라 그 죄를 연좌(連坐)하게 하여, 역적 전원의 삼족(三族)을 참해야 한다.”

좌중의 표정에 그림자가 짙게 내려 앉았다.

새삼스럽게 자신들이 한 일이 어떤 일인지 생생히 느껴지는 문장이 었다.

“…하지만.”

하지만이라는 말이 나오자, 읽고있던 이의 표정은 밝아지기 시작했다.

“관리란 무릇 먼저 백성의 빈곤과 굶주림을 헤아려야 하고, 긍휼하게 여겨야 한다. 이는 황제 폐하를 대신하여 백성을 굽어살피는 관리에게 요구되는 바이기에….”

모두의 표정이 따라 밝아지기 시작했다.

“그 책임을 통감한 본 낙양지사는 관직을 내려놓으며, 마지막으로 가진바 권한을 통해, 감히 그들의 죄를 경감(輕減)하여 다시 한번 기회를 주고자 한다.”

읽고 있던 협사의 목소리에 물기가 어렸다.

“…따라서 죄인들을 영구적인 노역형에 처하기로 결정하며, 그 처지를 가엽게 여겨 죄인들을 계도하기 위해서 나선 낙양검가의 대공자 연소현에게 앞으로 그들의 지도와 책임을 맡긴다.”

연소현이 짧게 덧붙였다.

“참고로, 낙양검가의 최고운영회의 또한. 같은 결정을 내릴 것이오.”

그 순간 폭우를 뚫고 거센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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