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207화 (207/350)

제7편 흰 쌀밥

용봉지회 경기장 건설 부지.

삼공자 측 진영.

밖에서 커다란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최고운영회의의 결정이라고?”

점창의 전 장문인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적대 행위를 일시적으로 금하는 최고운영회의의 결정이 내려올 것이라….'

그가 유 장로를 슬쩍 바라보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전령으로 사공자 측의 장로가 선택되었다고?’

그는 마교 몰락 이후, 시대의 격변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문파까지 바치고 검가의 장로가 되었을 정도의 인물이다.

돌아가는 상황을 대충 눈치챈 그가 유 장로를 바라보았다.

“설마…."

그의 시선이 떨려 왔다.

“대공자가 최고운영회의를 등에 업고 이곳에 개입을 시작한 것이오?"

유 장로는 또 다음 담배를 피우며, 선선히 그의 질문에 답했다.

“맞습니다.”

"......."

노인의 입에 물려 있던 연초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숨이 턱 하고 막히는 것 같았다.

대공자를 마귀라 부르던 그는, 날뛰는 연소현을 피해, 이곳으로 자청해서 왔었다.

'이런, 미친….'

그런데 그 대공자가 자신이 있는 이곳까지 손을 뻗치고 있다니.

날벼락 같은 소식이 아닌가.

“그렇다면 대공자는 대체 이곳에서 무엇을 노리는-.”

점창의 전 장문인이 말을 하려할 때, 그들이 서 있는 입구 근처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정지! 일반 무사는 지휘부에 접근할 수 없는-.”

“비켜!”

무사 하나가 입구를 지키던 무사들을 밀어젖히고, 안으로 뛰어들었다.

“추가적인 의료 지원이 필요합니다!”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흠뻑젖은 그의 갑주에서 빗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도대체 보고를 올린지가 언젠데 아직도 지원이 없는 것입니까?!”

무사의 외침에 좌중의 시선이 쏠렸다.

대화를 중단한 점창의 전 장문인과 유 장로의 시선 또한 그에게로 향했다.

"......."

그녀가 이 막사에 들어오고 처음으로, 막사 내부가 조용해졌다.

“본가의 의예원(醫藝院)이든 약선문이든, 요청이 갔으면 어디든 지금쯤이면 추가적인 지원이 도착을 해야 했을것이 아닙니까!”

바닥에 떨어진 그 빗물이 붉은기가 도는것은, 지휘 막사 내를 훤히 밝히고 있는 유등의 빛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무사 본인 또한 부상을 입은것이 분명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전우들이 죽어 가고 있단 말입니다!”

그의 호소에 지휘 막사 내의 최고위층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무안함의 표현이 아니었다.

“…저놈. 어떤 속파 소속인가?”

묘하게 표정을 찌푸린 그들의 시선은 무사가 소속된 속파의 책임자를 찾고 있었다.

“대체 지휘부는 무슨 생각으로…!”

그때 빠른 걸음으로 그 무사에게 다가간 이가 그의 팔을 거칠게 잡아끌었다.

“사, 사숙?!”

사숙이라 불린 이가 그를 끌고 지휘 막사 밖으로 향했다.

“대체 이게 무슨 짓이냐…?! 이런 중요한 자리에서, 그딴 말을 함부로 뱉다니…!”

“그, 그게 아니라. 사숙. 지금 밖에는 죽어 가는:”

“닥쳐라, 이놈…! 이렇게 비가 쏟아붓는 상황에 지원이 원하는 대로 곧장 올 수가 있겠느냐…?!”

“하, 하지만….”

그들이 입구 근처에서 있던 유 장로 곁을 지나갔다.

“하지만이고 자시고…! 그리고 지금은 모든 작전이 중단된 상황이 아니더냐…?! 애초에 예비조인 네가 어째서 부상을 입고있는 것이야…?!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이냐…?!”

“폭심지에 두고 온 전우들을 찾으러 간다는 이들을 모집한다기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뭐?!”

“그런데 오히려 기습에 걸려….”

그들이 지휘 막사 밖으로 나갔기에, 더 이상의 대화는 들을 수 없었다.

“쯧쯧."

점창의 전 장문인이 혀를 찼다.

물론, 그가 젊은 무사들의 전우애와 부상자들을 향한 안타까움에 혀를 차는 것은 아니었다.

"형산파 놈들. 둘로 쪼개지고 나니, 제자들의 예절 교육도 제대로 못하는 꼬락서니하고는….”

역겨운 놈.

"......."

그저 아무 말도 안 하는 것이 유 장로가 가진 인내심의 한계 지점이었다.

묵묵히 들고있던 죽립을 쓰는 그녀의 모습에, 점창의 전 장문인이 물었다.

“아니, 지금 어딜 가시려고-?”

그런 그를 무시하고 그녀가 좌중을 향해 외쳤다.

“최고운영회의에서 당분간 적대 행위를 금지하는 명령이 도착할 것이오!”

최고운영회의란 말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녀가 태연하게 손을 들어 점창의 전 장문인을 가리켰다.

“자세한 사항은 다들 장문인께 들으시오!”

그녀는 그렇게 좌중을 흔들고는 훌쩍 몸을 돌려 밖으로 향했다.

“어, 어어?! 이보시오, 유 장로! 어딜 가시는거요? 내, 아직 그대에게 질문할 것이 많이 남았…?!”

자신을 향해 물밀 듯 밀려 들어오는 이들 사이에서 점창의 전 장문인이 외쳤다.

“전령 임무는 끝냈으니.”

그런 그를 향해 유 장로가 무뚝뚝한 얼굴로 말했다.

“나도 약간이지만 의술을 익힌 몸이니, 이곳보다는 밖에서 더 도움이 될 것 같군요.”

바람처럼 지휘 막사를 빠져나간 그녀의 뒤로, 연초의 연기만이 길게 남았다.

“유 장로! 유 장로!”

밖으로 나선 그녀를 맞이한 것은 부상자들의 신음과 전우를 잃은 이들의 절규였다.

"......."

비참한 광경.

하지만 그녀는 저들을 울부짖게하는 이들을 책하는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그녀의 시선이 저 멀리 번개가 칠 때마다 모습을 드러내 보이는 포위망의 가장 안쪽을 향했다.

'...진짜 참혹한 곳은 저기겠지.'

죽립도 소용이 없이, 순식간에 젖어서 꺼져버린 연초를 뱉어 버리고, 그녀는 몸을 돌려 부상자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 *

요새화된 빈민 노동자 지역.

안쪽 거리.

상대가 아무리 최정예의 무사들로만 꾸려진 검대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전문적으로 무력을 집행하는 집단을 상대한다는 것은 어떤 일인가.

그것도 제대로 먹질 못해 들고일어났던 빈민 노동자들의 수준으로.

연소현은 지금 그 결과를 직접 목격하고 있었다.

"......."

초라한 행색의 중년 여인이 솥을 열었다.

갓 지은 하얀 쌀밥에서 김이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결코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그저 침만 꼴딱꼴딱 삼키는 모습이, 얼른 한 숟갈이라도 퍼먹기라도 하련만.

어째서인지 그녀는 주걱으로 그 밥을 퍼서 바가지 그릇에 듬뿍 담을 뿐이었다.

입구에서 비껴선 연소현에게 눈 인사를 건네고 지나친 그녀가 바로 옆의 전각으로 들어섰다.

연소현은 조용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아이고, 아이고!”

“영감! 눈 좀 떠 보시오, 영감!”

경기장 진입 전 대기실로 쓰일 예정이었던 그 넓은 공간이, 수많은 이들의 통곡으로 가득했다.

그 허공이 가족과 친구를 잃은 이들이 토하는 단장의 고통으로 가득하다면, 그 바닥은 시신들로 꽉 들이차있었다.

밖에서 번개가 번쩍일 때마다, 시신들을 덮고있는 멍석들이 하얗게 물들었다.

비에 흠뻑 젖은 연소현의 얼굴은 유난히 창백하게 빛났다.

"......."

순간적으로 드러나는 멍석의 수가 수백이 넘어 보였다.

“아아, 여보-!”

시신들을 덮어 놓은 멍석이, 그 바닥이 붉게 변하고 있는 것을 보면, 멍석 아래에 있는 시신의 상태가 어떠할지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여기 있습니다.”

중년 여인이 밥을 가득 담아 온 바가지 그릇을 건네받은 깡마른 노인이 연신 감사를 표했다.

“고맙소! 너무나 고맙소!”

그리고 그 노인은 그 그릇을 자신이 지키고 있던 멍석의 머리맡에 두었다.

“자아, 먹어라!”

시신을 향해 절을 하는 노인의 눈에서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저승에서라도 양껏 먹어라, 이놈아!”

울부짖는 노인의 목소리가 쩍쩍 갈라졌다.

“네가 그리도 먹고 싶어 했던 흰 쌀밥이다! 배가 터질 때까지 먹거라!”

밥을 날라 주었던 중년 여인이 옆에서 합장했다.

"…부디 성불하시길.”

그랬다.

그것은 공양을 위한 밥이었기에, 중년 여인도, 노인도 감히 입을 대지 않았던 것이었다.

"......."

연소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신마다 쌀밥이 듬뿍 쌓인 밥그릇이 공양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합장을 마친 중년 여인이 연소현의 옆으로 다가왔다.

“…이렇게라도 떠나는 길에 대공자께서 함께해 주시니, 모두 위안을 얻었을 겁니다.”

그녀가 대뜸 연소현을 대공자라고 불렀지만, 그는 놀라지 않았다.

“…미안하오.”

연소현의 말에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녀가 연소현을 바라보고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너무도 처연했다.

“이렇게 산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참석해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 순간 밖에 다시 번개가 쳤다.

그리고 연소현은 제암진천경이 보여주던 환영에서 깨어났다.

"......."

바닥에는 가지런히 늘어서서 모셔져 있던 수백 구의 시신들 대신, 거대한 구덩이가 있었다.

연달아 치는 번개에, 바닥에 뚫린 그 큰 구덩이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시신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적어도 바닥의 깊이를 짐작할 수는 없었지만,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도 이미 백을 넘었다.

'...집단 매장인가.'

완공되지 않은 천장에서 새어 든 비가 구덩이에 흘러내렸다.

따스한 기온에 부패하기 시작한 시신들의 냄새에 코가 떨어져 나갈것 같았다.

'...제대로 시신들을 수습할 여력도 없겠지.’

연소현은 한쪽 무릎을 꿇고, 옆에 놓여 있던 중년 여인의 부릅뜬 눈을 감겨 주었다.

환영 속에서 쌀밥을 날라 왔던 그녀의 시신이었다.

"......."

내세(來世)는 없다.

무의미한 것을 알면서도, 구덩이를 향해 합장을 올린 연소현이 다시 전각 밖으로 나섰다.

미친 듯이 쏟아지는 비를 맞는것이 오히려 속이 조금이나마 편했다.

“...흐흐."

울음인지 웃음인지 모를 소리에 연소현의 고개가 그쪽을 향했다.

"......."

우걱우걱.

빈민 노동자 하나가 벽에 기대앉아, 바가지 그릇을 껴안고, 그 안에 담긴 쌀밥을 퍼먹고 있었다.

바람이 너무 강해서 처마가 의미가 없었기에, 그의 바가지 그릇은 이미 반이 빗물이었다.

게다가 바가지를 쥔 손은 손가락을 몇 개인가 잃었는지, 묶어 두었는데 그 더러운 천이 물밥에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맨손으로 퍼서 쌀밥을 입에 욱여넣는 중이었다.

“ 흐흐...."

움직이는 손과 별개로 허공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는 초점이 없었다.

그의 옆에는 조잡하게 만들어진 창이 구르고 있었다.

“…그 손 이리 내 보게.”

연소현이 바가지를 쥔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의원이라고 생각했는지 뭔지, 의외로 그는 순순히 연소현에게 손을 맡겼다.

“…이렇게 해 두면, 손이 썩어서 전부 잘라 내야 하는 일은 없을 걸세.”

제대로 응급처치를 해 준 연소현에게 허공을 헤매던 빈민 노동자의 시선이 향했다.

“의원 나리.”

그가 손을 들어 옆을 가리켰다.

그 손에는 연소현이 상처의 처치를 마친 후, 자신의 무명옷을 찢어 묶어 준 천이 새로 감겨 있었다.

“이 친구도 좀 봐줄 수 있습니까?”

그의 옆에 창을 쥐고 기대 있는 이는 이미 목숨이 끊어진 뒤였다.

“…내 지금 더 급한 환자가 많아, 서두르는 중이니. 곧 다시 돌아와 봐주겠네.”

그가 넙죽 고개를 숙여 보였다.

“감사합니다요, 의원 나리.”

그러곤 연소현을 향해 밥그릇을 내밀었다.

“제가 가진 것이 없어서 그런데, 혹시 시장하시다면 이거라도….”

“괜찮네. 나는 배가 부르니, 배가 고픈 자네부터 많이 먹게.”

연소현이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를 떠나는 연소현의 뒤로 빈민 노동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암 그럼요. 배가 부른 것이 최고이지요. 이토록 잔뜩 쌀밥을 먹어 본 것이 언제였는지….”

그에게 슬쩍 고개를 숙여 보인 연소현이 주변을 돌아보았다.

"......."

"......."

주변 거리의 처마 밑에는 창을 끼고앉은 이들이, 누구랄 것 없이 바가지를 껴안고 앉아 밥을 먹는 중이었다.

'아까 그 폭발 전후로 있었던 전투 후에, 배식을 한 것인가….’

봉기를 일으킨 빈민 노동자들의 지도부가 내린 결정이리라.

사기 진작을 위해서 내린 결정이 었겠지만, 그 효과는 그리 크지 않아 보였다.

"......."

완공 직전의 건물들 안쪽까지 빽빽하게 들어앉아 맨손으로 밥을 퍼먹는 병사들의 눈빛은 이미 죽어있었다.

'이미 체력이 한계까지 달했다.'

“나리.”

근처에 앉아 있던 이가 빈 바가지를 들고 다가왔다.

“우리를 도와주시던 무림인분들과 일행이십니까?”

정신이 나간 빈민 노동자를 도와주는 것을 본 것일까.

그의 태도가 사뭇 정중했다.

“그분들은 전부, 저쪽 거리의 지휘부에 모여 회의 중이십니다.”

그 무림인들이란, 낙양의 봄 일원들을 가리키는 것이리라.

“…고맙네.”

“별말씀을요 저희가 감사할 따름이지요. 무림인 나리들께서 없었다면, 채 하루도 버티지 못했을 겁니다.”

연소현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며 감사를 표한 후, 노동자 빈민이 자신의 뒤편을 가리켰다.

“배식은 이 뒤에서 하고 있습니다. 식사라도 하심이…."

정신이 나간 자도, 정신을 간신히 붙들고 있는 자도, 밥 이야기를 빼먹지 않는다.

“…괜찮네.”

잠시 치솟았던 감정을 억누른 연소현이 말을 이었다.

“자네나 든든하게 먹어 두게.”

빈민 노동자가 검게 탄 삐쩍 마른 얼굴로 쓰게 웃어 보였다.

“이렇게 쌀밥을 배부를 만큼 먹고 싸우다가 죽을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진 않지요.”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서려던 연소현의 발걸음이 문득 멈춰 섰다.

“…나리?”

연소현이 돌아보자, 그가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런 그를 향해 연소현이 말했다.

“자네들은 ----걸세.”

비바람이 순간 거세지고 벼락까지 내리쳐서, 연소현의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예? 뭐라고요?”

연소현이 입을 열어 다시 한번 말했다.

"......!"

연소현의 말을 들은 빈민 노동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니, 보중하게.”

인사를 남긴 연소현은 지휘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빈 그릇을 들고 있던 빈민 노동자는, 소년의 모습이 빗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어째서인지 눈을 뗄 수 없었다.

그가 입을 열어, 소년이 했던 말을 되뇌었다.

“…이제 더 이상 우리 중 누구도 헛되이 죽게 하지 않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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