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편 섬영(閃影)과 찰나(刹那)
암천존자라는 존재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몇 달 전, 겨울이었다.
금주(金蛛)라는 출신 불명, 성명 불상의 인물이 이끌던 흑골파가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흑골파는 각종 충돌을 빚으며 급속한 세력 확장에 주력했지만, 이 공자의 검가동패를 지니고 있었기에 견제를 받지 않았었다.
그대로 성장을 거듭해 나간다면, 결국 '육인회(六人會)'에 들게 되리라는 예측이 있을 정도였다.
육인회.
낙양 암흑가의 여섯 기둥이 모여 만든 일종의 협의 기구.
그런 흑골파가 제대로 된 정보도없는 존재에게 쓸려 나가듯, 청소되어 버렸다.
금주라는 인물의 평이 어쨌든, 검가동패를 가졌던 인물이었다.
따라서 낙양검가의 정보부처는 자체적으로 조사에 조사를 거듭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었다.
흑골파가 멸문했던 마지막 전투에 여러 집단이 있었던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 정보를 추적하는 일은 신기루를 좇는 것과 같았다.
'각양각색의 복장을 갖춘 정체불명의 무림인들이 목격되었다는 진술이 있습니다.’
'직전에 현월각이라는 정보 조직과 마찰이 있었던 것은 이미 확인되었지만, 그 외에도 너무 많은 충돌을 만들고 있었기에….’
'현월각이라는 조직이 어느 정도의 무력을 보유하고 있긴 하지만, 결국에 정보 조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 조직이 막강한 세력을 자랑하던 흑골파를 제거하는 건 불가능….'
그런 현월각이 흑골파 최후의 전투에 있었던 것으로 의심된다는 보고도 있었다.
하지만.
거기서부터가 진정한 악몽의 시작이었다.
'어째서인지 제대로 된 흔적이 남아 있질 않습니다.'
'모두의 진술이 엇갈립니다.’
'집단으로 환각을 겪은 것 같은 진술만이….'
'암흑가 측 생존자 중엔 정신이 멀쩡한 이가 없습니다.'
'갑자기 주변이 빠져나갈 수 없는 미로가 되었다는 둥, 금주라는 인물이 사실 기이한 술법을 사용하는 마녀(魔女)였다든가….'
무엇 하나 신용하기 힘든, 신뢰도가 낮은 목격담과 제대로 된 기억이라고는 남아 있지 않은 생존자들의 진술.
결국에 그 건은 최고운영회의까지 올라왔다.
'감찰부주에게 전담 조사반을 조직하여, 모든 것을 철저하게 조사할 것을 명한다.'
그렇게 감찰부주가 꾸린 조사반까지 나섰다.
그들은 그저 조사가 아니라, 수사를 하듯 모든 것을 샅샅이 뒤졌다.
그러나.
그들조차 마찬가지의 결과에도 달했다.
이 사건과 관련된 모든 것이 상리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것은 마치 고대의 설화나 전설속 이야기를 추적하는 것 같았다.
말하는 이마다 다르고,
기억하는 것마다 다르다.
모든 것이 뒤틀리고 어긋나는 이야기 속에 공통되는 사항 하나만이 남아 있었을 뿐.
이름 혹은 명칭.
'암천존자.'
그리고 그 존재가 죄악의 골짜기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는 소식이 들렸을 때.
최고운영회의는 처음부터 암천존자라는 존재에 대해서 집중 조사를 할 것을 명했다.
'한시적으로 무제한 자원 동원을 허한다.'
하지만 의장은 어째서인지, 이전과 같은 결말을 예상했다.
그리고 그 예상은 한 치도 빗나가지 않았다.
'…송구합니다. 추가로 보고드릴 만큼 확인되었다고 할 만한 사항이 없습니다.'
암천존자라 명명된 그것은.
의장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불가사의한 존재들과 그 궤를 같이하는 '무언가'가 분명했다.
인간의 역사.
그 뒤편에 존재해 온, 이면(裏面)의 역사.
존재하지만 잡을 수 없는.
신기루에 불과하지만, 분명 실존하는.
그것은.
귀신(鬼神).
주술사(呪術師).
도사(道士).
선인(仙人).
산신(山神).
요괴(妖怪).
이매망량(犍魅粥鯛).
이름이나 명칭조차 없거나, 알려지지 않은 존재들.
그것은 결코, 뒷모습을 보이지 않는 달의 이면과 같은 것.
암천존자란 존재는 월궁(月宮)이라 불리는 도시, 낙양에 드러난 달의 뒷면이었다.
'...그랬군.'
의장은 어째서, 암천존자라는 존재에 대해 제대로 된 용모파기 하나 건지지 못했었는지.
'과연, 그런 것인가.'
이제야 이해하고 있었다.
* * *
'대공자…!’
깨닫는 순간, 의장은 속으로 탄식 했다.
무엇 하나 그의 기억 속 대공자의 모습과 암천존자라는 존재의 신체 구조상 다른 점이 없었건만.
어째서 몰랐던 것인가.
'모를 수밖에 없었다.’
암천존자를 둘러싸고 있는, 암천존자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운 때문이었다.
'마기(魔氣)…!’
역사상 단 한 번도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진 적이 없는 기운.
그조차 무념무상이 깨어지고 있는 그 상황이 아니었다면, 깨닫지 못했으리라.
무념무상의 힘으로 마기에 의한 현실 왜곡에 저항하며, 동시에 무념무상이 무너져 가며 논리적 판단이 가능해진 그 짧은 순간.
그 찰나의 순간에서만이, 자신의 기억과 판단으로 암천존자의 제대로 된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다.
아득한 세월 동안 수많은 정종무공을 훔쳐익힌 무언가가 대공자 연소현의 모습을 흉내내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저, 이 늙은이를 농락하는 중일 수도 있지.'
그의 사고가 흘러가는 그 짧은 순간에도 물 흐르듯이 공방이 이어지고 있었다.
상대는 자신이 검에서 손을 떼는 순간을 노리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상대의 정체를 확인할 비장의 수단이 있었다.
암천존자에게서 폭발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연격(連擊)의 한 수를 받아치는 순간.
그 강력한 공격을 흘려 낸 검이 의장의 오른손에서 벗어나 버린다.
하지만 폭풍처럼 몸을 한 바퀴 돌린 의장의 왼손에 검이 역수로 잡혀, 상대의 이어진 수를 다시 한번 흘려 냈다.
그 수를 흘려 내기 무섭게, 암천 존자의 반대 손끝에서 칼날보다도 날카로운 기운이 치솟았다.
그 기운이 의장의 눈을 찌르듯이 다가오는 그 순간.
'지금…!'
그의 시야에,
그의 감각에 만물(萬物)이 느려진다.
그의 사고가 가속된다.
“흡!”
첫 일검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던 무호흡의 순간을 깨고, 단 한 모금의 호흡을 삼킨다.
그가 구절을 되뇌었다.
'가장 늦음(鈍)은 가장 빠름(快)과 같아, 그 이치가 극(極)에 달하면, 화(和)하여 합(合)을 이루니….'
호흡과 함께 들어온 한줄기 자연의 기가 비어 가던 단전에 활기를 불어 넣고, 단숨에 사지말단까지 감각을 일깨웠다.
'그 일검 앞에, 천격(千擊)과 만검(萬劍) 이 무상(無常)하다.'
눈앞까지 시퍼런 기운이 다가오는 와중에도, 눈을 깜빡이지조차 않는다.
구결을 외우고, 그에 따라 내력을 운용하는 모습은 인간이 아니라, 한 자루의 검과 같았다.
신검합일(身劍合一)의 경지.
실로 가공할 집중력.
'내 검은 영원의 궤를 끊는 찰나의 그림자가 되리니.'
그 순간 찰나가 영원을 이루고, 분명 늦게 시작된 그의 일검이, 상대의 일격을 튕겨 낸다.
'이 찰나에 모든 것을…!’
그리고 그 순간.
그의 검은 이미 상대의 머리를 꿰뚫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검가비검, 섬영찰나(閃影刹那).
그 여섯 번째 초식.
사왕포식(邪王捕食).
좌수역검, 후발선제, 일격필살.
궁극의 반격기.
구결 전부가 전승된 것이 아니기에 완전하지 않아, 난이도를 따지기 불가능한 태상가주의 독문 검법을 제외하고.
낙양검가 역사상 가장 난해한 검술이 늙은 무사, 과거 검존이라 불렸던 인물의 손에서 펼쳐진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일검이 암천존자의 가면을 꿰뚫어 버리기 직전의 순간.
"......!"
그의 섬영찰나에 의해서 튕겨 나갔던 암천존자의 손이 흔들리는 것 같더니, 그와 똑같은 검술을 펼쳐냈다.
검가비검, 섬영찰나. 개(改).
번외 초식.
무검무형(無劍無形).
가면을 꿰뚫기 직전의 검보다, 한 번 튕겨 나갔던 상대의 손이 훨씬 더 빠르다는, 인과가 역전되는것 같은 결과.
마치 시간을 거슬러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 같은 궁극의 반격기가 의장의 검을 비껴 냈다.
검술이라는 형태조차 남아 있지 않았지만, 그것은 틀림없는 섬영찰나.
"......."
자신의 검이 그렇게 빗나가는 것을 확인한 의장은 눈을 감았다.
더 이상 저항할 의사가 없었다.
낡은 청강장검이 울음소리를 내며, 허공에서 회전했다.
의장이 아예 검을 손에서 놓아 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니, 그렇기에.
그의 검을 튕겨 낸 상대의 손이 그에게 도달하는 일은 없었다.
"......."
손을 거둔 상대가 나직하게 쇳물이 끓어 넘치는 소리로 웃음을 흘렸다.
“그 이름과 명성에 어울리는, 제법 즐거운 일전이었다.”
그때야 의장이 손에서 놓았던 낡은 청강장검이 회전하며 바닥에 떨어져 꽂혔다.
* * *
중원국의 수도, 황도(皇都).
황도 중심 거리의 모처(某處).
황금빛 가면을 쓴 인물이 창을 통해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낙양검가의 이공자, 연자청이었다.
까드득-.
뒷짐을 진 채, 쥐었다 펴지기를 반복하는 왼손의 갑주가 화려한 실내에 불편한 소음을 자아내고 있었다.
“주군.”
그의 수하가 뒤에서 고했다.
“황도십육가문의 가주들이 주군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 * *
검증은 끝났다.
'이자는 대공자가 확실하다.'
상대는 섬영찰나를 알아보고, 의도를 확인해 주기라도 하듯, 보란듯이 섬영찰나를 구사했다.
심지어 섬영찰나를 구사하는 것을 확인하고 눈을 감아 버린 자신에 대한 공격을 멈추었다.
'게다가 그 난해한 검가비검 섬영찰나를 맨손으로 펼쳐 내기까지 하다니….'
그런 기예는 그가 알기로는, 중원 천지에서 섬영찰나를 만들어 낸 대공자, 본인이나 검의 주인이라 불렸던 태상가주밖에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대공자는 어떻게, 무슨 이유로, 암천존자라 불리는 존재가 된 것인가.
그리고 그가 암천존자가 된 것과 칩거를 끝낸 것이 어떤 관련이 있는가.
의장은 속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것은 지금 고민해야 할 문제가 아니다.'
지금 생각해야 할 것은….
'어째서 대공자는 내 앞에 저 모습으로 나타났는가.'
"......."
의장은 그것을 알지 못한 탓에, 암천존자 - 연소현에게 직접 그것을 물을 수 없었다.
“세상에는, 여러 인물이 있지.”
그런 그의 의문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암천존자의 목소리가 이어 졌다.
“법과 규칙을 무시하는 자, 그것을 제멋대로 고치려 드는 자, 그것을 속이는 자, 그리고….”
암천존자의 시선이 의장을 향했다.
“절대로 법과 규칙을 어기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수호하는 신념을 지닌 자.”
그것은 의장의 의문을 일시에 해소해 주는 답이기도 했다.
'과연….'
그때야 의장이 쓴웃음을 지으며, 암천존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누군가가 법과 규칙을 무시하거나, 입맛대로 고치거나, 속인다고 하여, 이 자리에 있는 이 늙은이까지 그것을 외면한다면….”
십 년간.
천하제일가의 가장 높은 자리에서 우직하게, 낙양검가를 지켜 온 늙은 무사가 말했다.
“법과 규칙이 보호해야 할 약자들마저, 살아남기 위해서 그것을 버리게 되겠지요.”
“그리고 모든 것이 혼란 속으로 빠져들게 되겠지.”
실제로 연소현의 기억 속 역사에서, 의장이 사라진 이후, 낙양검가가 그렇게 되었었으니.
'그리고 그렇기에….'
이것이 결코 타협을 모르는 의장과 연소현이 만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다.
'본가 최고운영회의의 일원은 결코 그 정체를 밝히는 것도, 발각되는 것도, 알려지는 것도 안 된다.'
그렇기에 연소현은, 인간 대공자가 아니라 귀신이나 마귀와 같은 암천존자로 그를 만났다.
그리고 의장은.
'나는 절대로 암천존자가 대공자가 맞는지 묻지 않아야 한다.'
이미 연소현이 의장의 정체를 짐작하고 있던 것을 눈치채고도, 그 동안 한 번도 서로 언급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것은 타협하지 않는 자의 마지막 선이었으며, 동시에 책임감으로 버텨 온 이를 위한 대공자의 배려이기도 했다.
그렇게.
낙양검가의 최고 권력자와 최고 권력자가 되어야 했던 이의 기묘한 만남이 성립되었다.
“인상적이군.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않는다는 것인가.”
“그런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의장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째서인지 허리춤에 찬 빈 검집이 홀가분했다.
“사람이란 서 있으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다고 하지요.”
곧 한바탕 비가 쏟아지려는지, 바람이 거세지고, 구름이 파도치고 있었다.
“…득롱망촉(得隴望蜀)이라고 하지요. 저 또한 한낱 인간이라, 타협하는 순간, 그다음 타협에 눈이 갈것이 두려울 뿐입니다.”
“하지만 살아가면서 누구나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이 세상과 타협하는 방법이지.”
암천존자가 그를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대가 지금까지 보여 주었던 모든 헌신이 있었기에, 낙양에, 이 가문에, 아직 사람다운 사람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것은 경의의 표현이었다.
아직 낙양검가를 지탱하는 많은 이들이 제 자리를 지킬 수 있는 것은 노인이 타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대가 버텨준 덕분에 이제라도 세상을 바꾸자하는 이들이 움직일수 있게 된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누구도 알아주지 않던.
아니, 알아줄 수 없었던, 싸움을 계속해온, 무사의 오랜 싸움에 대한 감사였다.
"......."
하늘은 아직 비를 뿌리지 않고 있었건만.
위를 올려다보는 늙은 무사의 뺨에는 때 이른 빗방울이 흐르고 있었다.
드디어 누구도 그 끝을 모르던 고독한 싸움에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었다.
그 뜨거운 빗방울을 모른 척해주려는 듯, 구름 속에 달이 더욱 깊이 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