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204화 (204/350)

제4편 만남 혹은 조우(遭遇)

몇 시진 전.

낙양검가, 최고운영회의.

“이것으로 지급한 의제는 모두 결정이 되었습니다.”

총무위원의 말에, 의장은 백금줄이 달린 회중시계를 꺼내어 바라보았다.

“오늘도 회의가 길었군.”

최고위원들끼리도 정체를 알아서는 안 되기에, 최고운영회의의 진행 장소는 비동(秘洞)인 경우가 많았다.

시계라도 보지 않는 이상, 시간을 알기가 힘든 것이다.

의장은 손을 들어 피로한 눈가를 누르며 말했다.

“오늘은 일단 이 정도로 마치는 것이 좋겠소.”

노인의 말에 장막 너머 곳곳에서 안도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책임감을 잘 아는 자들이라, 지쳤다는 표현을 하지 않았다 뿐이지, 누구랄 것 없이 체력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벽을 넘어선 지 오래된 의장 자신부터가 지칠 정도로 매일같이 회의가 연속되는데, 내공이 없는 최고위원들의 상태는 말해 무엇 하겠는가.

'하지만 어쩔 수 없지.’

낙양검가는 거대하다.

그 영향력은 낙양을 지배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하남을 넘어, 황도를 아우르는 화북 지역 전체를.

그리고 중원국 곳곳에 퍼져 있는 방계 가문들과 봉신 가문들, 사업소들까지 이른다.

그 영향력은 거리와 장소에 따라 크기의 차이만 있을 뿐.

중원국에 낙양검가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은 없었다.

“아, 그 전에 권고드릴 사항이 있습니다.”

그리고 낙양검가의 최고운영회의는 그 모든 최종 결정을 내리는 기관이었다.

“모두, 다음 회의에 예정되어 있는 서반아(西班牙) 측과의 일괄적 상로 이용 계약 갱신과 관련된 배경 지식에 대해서 미리 파악을 해 두고 오시길.”

총무위원의 말에 다들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수면 시간이 대폭 줄어들 것이 뻔했으니.

“다음 회의의 시작 예정은 정확히 네 시진 후입니다.”

총무위원이 짧게 덧붙였다.

“물론, 비상 안건이 발생하면 즉시 개회가 될 겁니다. 이상입니다.”

다들 인사말을 던지며 무섭게 일어나서 후다닥 짐을 챙겨 떠나려는 기색이 느껴졌다.

“잠시.”

모두의 기척이 멈췄다.

의장이 방금 들어온 쪽지를 읽으며 말했다.

"대공자님의 우마차가 현재 본가로 향하고 계신다는군.”

"......!"

그 말에 곳곳에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공자가 본가에 들어온다는 이야기는 폭풍이 다가오고 있다는 말과 같았으니.

"......."

의장의 기감(氣感에 모두의 솜털이 곤두서고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모두 잠기운이 싹 달아났으리라.

다른 안건들과는 다르게 대공자와 관련된 안건은 하나하나가 민감하기 짝이 없었으니.

오늘만 하더라도, 회의 전체의 거의 절반이 대공자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총무위원이 입을 열었다.

“이대로 대기하면서, 미리 다른 안건들이라도 처리해 두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

최고위원들의 숨통이 턱 하고 막히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의장은 쓴웃음을 지었다.

“잠깐이라도 다들 마음 편하게 쉴 수 있도록, 일단 회의는 마치도록 하지.”

그가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언제든 소집될 것이 뻔하니, 각자 자신의 비상 연락 체계를 다시 한번 점검해 두게.”

* * *

인적 없는 야산野山).

의장은 자택으로 향하지 않았다.

어차피 돌아가 봐야 빈집이다.

부인은 사별했고, 아이들은 독립하여 분가한 지 오래였으니.

평소처럼 잡생각을 끊어 내기 위해서 야산의 산책로를 거닐고 있었건만.

오늘따라 한 발 한 발 본가의 중대사들이 따라붙는 것 같았다.

원인은 대공자였다.

'...대공자께서 원각정의 행정동을 가동하고 계신다고 했지.'

그것이 그가 모든 접촉을 끊고 야산을 거닐기 전, 연소현에 대해 받은 마지막 정보였다.

'그분께서 이후에 원각정으로 돌아가 그저 휴식이나 취하실리가 없지.'

북망산의 방문으로 시작된 대공자의 행보는 숨이 막힐 정도였다고 표현해도 부족할 수준이었으니.

'과연, 앞으로 일이 어찌 되어 갈 것인가….'

벌레가 우는 소리도, 부엉이가 우는 소리도.

오늘따라 유난히 답답하기만 했다.

아무리 낙양검가의 막강한 힘의 정점에 이른 최고운영회의의 의장이라 해도, 세상사는 복잡하고 다난하다.

황도로 향한 이공자는 황도십육가문의 가주들을 끌어들이게 될 것이다.

원정 무사 수행 중인 삼공자가 곧 본가로 돌아올 것이다.

연씨 혈족들은 검가가 그 옛날처럼 연씨 가문으로 돌아가길 원하고 있었다.

그뿐이겠는가.

그 연씨 혈족 중 일부가 주축이 되어 심상찮은 기류를 드러내고 있다는 이공녀의 주변.

이, 삼공자와 비등하거나 그 이상의 군주상을 개화하고 있다는 사 공자.

호시탐탐 내각제 전환을 노리는 장로원.

그리고 어려서부터 기상천외한 능력을 보였던 그 대공자 연소현이 칩거를 끝내고 본격적인 행보를 시작한 것까지.

다른 대소사를 다 제쳐 두고 낙양검가의 후계자 구도만 놓고 보아도, 상황이 이렇게까지 복잡할 수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앞날에 대한 예측은 소용이 없다.

잘해 봐야, 눈먼 자가 맨손으로 바닥을 더듬어 길을 찾는 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었다.

'…앉은자리에서 천 리 밖을 내다보신다는 대공자라면 모를까.'

머리 위를 지나는 나뭇가지들 사이로 엿보이는 구불구불한 구름처럼.

머릿속이 복잡하기만 했다.

'이래서는, 더 이상 산책의 의미가 없구나.’

뒷짐을 진 노인이 허공을 향해, 탄식에 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대공자가 본가로 돌아온 이상, 금방이라도 긴급한 정보들이 쏟아지고, 보나마나 곧 비상 회의가 열릴 것이 뻔했다.

'...회의 장소에 미리 가서, 사안들의 정리라도 해 두어야겠군.'

그래야 젊은 최고위원들의 발상과 생각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저주받을 날 이후로.'

가주가 쓰러지고, 그 측근들이 탐욕의 날을 드러냈던 그날.

'...모든 것을 검가에 바치기로 했건만.’

그저 하루가 다르게 늙어가는 육신이 야속했다.

현역 무사들에 가까울 정도로 철저한 자기 관리를 해도, 시간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몸이 더 늙어 쓸모없어지기 전까지, 본가의 후계가 정리되기만을 기원하는 것뿐인가….'

근 십 년을 짊어지고 살아왔던 책임의 무게가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노인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깊은 죄책감과 막중한 책임감으로 뭉친 그의 정신은 육신이 잠시도 멈춰 서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래, 돌아가자.'

그렇다.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길이 보이질 않았다.

"......!"

방금까지 내공이 깃든 육신에 의해 훤히 들여다보이던 밤길이, 어째서인지 어둡기만 했다.

그저 어두운 것이 아니라, 칠흑과도 같을 정도의 어둠이었다.

구불구불하던 구름마저, 하늘에 드리운 어둠 속에 몸을 숨겨 버렸다.

너무나 익숙하여, 눈을 감고도 다닐 수 있었던 산책로의 모습이 한없이 낯설었다.

산책로 저편이 마치 자신을 향해 입을 쩍 하고 벌리고 있는 무저갱의 입구처럼 느껴졌다.

"------."

게다가 조금 전부터 귓가에 들려오는 이 불길한 휘파람 소리는 무엇이란 말인가.

후각을 뒤틀 듯 알싸하게 찔러오는 유황 냄새는 또 무엇인가.

"......."

거칠어지는 호흡이 기이하다 했더니, 숨을 내쉴 때마다 한겨울과 같이 입김이 흩어지고 있었다.

한서불침(寒暑不侵)의 육신이 오한을 느끼고 있었다.

'...진법. 아니, 사법(邪法)인가?'

노인은 평생을 쌓아 온 깊고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고, 남들이 평생 마주치기 힘든 불가사의한 경험도 몇 번이나 겪어 보았다.

“게 뉘시오?”

그는 침착하게 내공을 끌어 올려, 상단전을 보호하며 물었다.

경험상, 앞뒤 가리지 않고, 일단 경공부터 써서 빠져나가려고 하는등의 시도는 쓸데없이 불가사의한 존재를 도발할 뿐이었다.

"......."

하지만 그렇게 침착함을 유지하던 노인조차도, 자신의 질문에 반응하듯 휘파람 소리가 딱하고 그 치는 그 순간은.

목덜미가 오싹해질 수밖에 없었 다.

야산이 죽은 것처럼,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아무런 소리도 없었다.

심지어 바람이 부는 소리조차도.

“뉘신지는 모르지만 저는 그저 지나가던-.”

그가 불안함을 이겨 내기 위해서 입을 다시 한번 열었던 그 순간.

“그대가 누구인지는 잘 알고 있다.”

마치 쇳물이 끓어 넘치는 것 같은 목소리.

하지만 귓가를 긁어 대는 수천명의 속삭임과 같은 그것을, 과연 목소리라 칭할 수 있을지.

“의장"

그 호칭에 이번에야말로,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모습을 보여라.”

낮은 호통 소리와 함께 의장은 즉각, 옆구리에 차고 있던 낡은 장검을 뽑아 들었다.

상대를 자극하지 않아야 한다는 어느 도사의 가르침은 이제 필요 없었다.

최고운영회의의 일원이 정체를 발각당하는 일은 용납되지 않는다.

자신이 짊어진 역할을 마치기 위해서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자신은 의장의 자리를 지켜야만 했다.

“정체를 밝히라지 않느냐?!”

그의 바닥을 알 수 없는 내공이 담긴 일갈이 주변의 지대를 뒤흔들었다.

그런 그를 조소하기라도 하듯이, 상대가 특유의 금속음으로 답했다.

“나를 모르겠다 하겠는가-.”

'지금...!'

검광이 어둠을 가로질렀다.

그 일검은 숲을 가르고, 땅을 가르고, 야산을 가르고, 그 너머의 하늘에 드리운 어둠의 장막을 가르는것 같았다.

완벽이라 해도, 조금도 부족하지않은 일검이었다.

정체불명의 상대는 어떤 수법을 사용한 듯, 목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와 위치를 특정할 수 없게 했지만, 음(音)과 관련해 비상한 능력을 지닌 노인은 이미 그 역추적에 성공했었다.

단지, 상대를 속이기 위해서 엉뚱한 방향을 바라보고, 말을 걸고 있었을 뿐.

순간 떠올리고 실행한 함정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기치와 그것을 아득히 상회하는 수준의 검술이었다.

상대가 평범한 고수였다면, 누구든 그 일검에 두 토막이 났으리라.

“역시.”

평범한 고수였다면.

의장의 검은, 거짓말처럼 상대의 손아귀에 사로잡혀 있었다.

"......!"

상대는 바늘처럼 날카롭고, 상어의 턱처럼 촘촘한 이빨을 드러내며 감탄했다.

“과연, 과거에 검가의 일절(一絶)이라 불렸던 자. 검존(劍尊)이라 불렸던 그 명성이 결코 헛것이 아니었어.”

과거, 낙양검가의 일절(一絶).

후에 검의 주인(劍主)이라 불리게 된 태상가주가 등장하기 전까지, 검가의 제일검(第一劍)이었던 인물.

상대는 자신의 현 신분뿐만이 아니라, 과거까지도 전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의장의 눈빛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무념무상(無念無想).

사이함과 사특함이 감히 침범할수 없다.

전투에 들어간 그 순간, 과거 검존이라 불렸던 그는 이미 극한까지 정신의 무장을 마친 뒤였으니.

“흡!”

귀신이나 요괴에게 인간을 상대하기 위한 검식(劍式)이나, 초식(招式) 따위는 소용이 없다.

노인의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청명한 기합 소리와 함께, 그의 낡은 청강장검이 공기를 찢을 듯 진동했다.

“...호오?”

검명(劍鳴)의 한계를 넘어선 응용에 상대는 손에서 검을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

의장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검을 회수하며, 이형환위의 수법으로 일순간에 거리를 확보했다.

"......."

의장의 기이할 정도로 투명한 시선이 이제야 완전히 드러난 상대의 모습을 확인했다.

밤하늘에 걸린 달처럼 하얀 가면의 광택이 불길하게 반질거렸다.

눈구멍 없는 가면 위로 치솟은 시퍼런 도깨비불 두 가닥이 너울거리며 불똥을 흩날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도 특징적인데, 어찌 정보에 해박한 의장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겠는가.

“…암천존자(暗天尊者).”

상대가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사방이 웃음소리에 동조하듯 뒤 흔들렸다.

“그렇다.”

풍문 속의 존재.

소문 속에서만 그 존재를 확인할수 있던 암천존자의 모습에 의장의 깊은 눈이 매섭게 좁아졌다.

일설에 의하면, 무심한 하늘과 땅을 대신해서 악인을 처벌하는 존재라고 하던가.

“…천벌의 지상 대행자가 찾아온 것인가.”

의장이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과연 이 늙은이의 죄는 한없이 깊어, 감히 그 깊이를 잴 수가 없지. 허나….”

그의 손아귀가 틀어잡은 검이 사납게 울부짖었다.

“나는 아직 이 땅 위에서 다해야할 사명이 남았다!”

불굴(不屈).

사방 천지가 천고의 마물이라 일컬어지는 제암진천경의 마기에 침식되는 와중에도 그 의지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으니.

"----!"

눈을 한 번 깜빡이는 그 짧은 순간.

수십 번의 검격이 허공을 수놓았고, 그들의 사이에서 권, 각, 장이 수십 번 부딪쳤다.

주변의 토지가 형편없이 찢어지고, 숲이 뒤엎어졌다.

무림인들이라면 그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개안을 하고 깨달음을 얻을 만큼의 격전이었으나.

과거 검존이라 불리었던 노인의 검세에는 지울 수 없는 세월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다.

'아아. 나이여. 세월이여.’

과거였다면 열 번은 더 검을 휘두르고 찔렀을 터인데.

'야속하고 얄궂은 운명이여.’

과거였다면 열 번은 더 때리고 막았을 터인데.

어찌하여 하필 이 중요한 시기에 사신(死神)이 자신을 찾는단 말인가.

그의 무념무상이 무너져간다.

그러나 동시에.

검격이 거듭되고, 또 거듭될수록.

호흡조차 멈추고, 검을 휘두르는 노인의 눈에는 의아함이 서렸다.

'도대체 어째서…?’

상대는 분명, 손속에 사정을 두고 있었다.

자신은 몇 번이나 피할 수 없는 허점을 드러냈고, 상대는 그 순간 얼마든지 그를 공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게다가 이 무공들은….'

암천존자라 불리는 존재가 펼치고 있는 것은 하나같이 정종무공이었다.

그리고 그 무공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낙양검가에 보관중인 무공들이었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상대가 그 모든 무공에 달통한 것처럼 보였다는 것.

자신의 무공을 읽는 눈이 틀릴리가 없었다.

'아…!'

그 순간, 의장은 깨달았다.

'어떻게 이 내가, 이런 것을 놓칠수가 있지…?’

상대의 신장.

상대의 덩치.

상대의 손.

틀림없이 그가 기억하는 누군가와 그 특징이 일치했다.

심지어 바닥을 알 수 없는, 무공에 대한 지식까지도.

분명히 눈앞의 인물은….

'대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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