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편 폭우(暴雨)
흔히 편의상 용봉지회 경기장 건설 부지라고 부르지만, 실제로는 경기장 밑 관련 편의 시설들로 구성된 복합 단지라고 하는 것이 정확했다.
낙양검가는 포화 상태인 낙양 내부를 대신해 외곽 지역에, 단지를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그 건설 계획의 책임은 거친 정쟁의 끝에 삼공자 측이 맡게 되었다.
그리고 현재, 그곳에는 봉기를 일으킨 수천에 달하는 빈민 노동자들이 고립된 상태였다.
* * *
깊은 밤.
낙양 외곽.
용봉지회 경기장 건설 부지,
외곽 경계 검문소.
마른 땅을 적셔 줄 봄비처럼 느껴졌던 비가 이제는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검문소의 경비를 서고있는 삼공자 측 무사들은 우의를 갖추어 입고 있었지만, 퍼부어대는 비에는 소용이 없었다.
'이대로 계속 쏟아진다면 때아닌 물난리가 날 수도 있겠어.'
잠시 물난리를 걱정하던, 사공자 측의 유 장로가 헛웃음을 지었다.
지금 자신이 있는곳은 폭발하기 직전의 화약고나 다름없는 곳이었으니.
물난리 따위를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그 대공자의 명이 아니었다면, 이런 위험한 곳까지 올 생각도 하지 않았겠지….'
검문소 앞에서 자신의 측근과 검문소 조장 무사가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안 됩니다!”
“…렇지만, 어찌 되었든 이렇게 진입 허가를 받아 왔으니…!”
“…래서, 현재 모든 외부인의 출입이 금지된…!”
하지만 서로 소리치는 목소리조차도 빗소리에 묻혀, 그녀가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
조금 떨어진 위치에서 그 옥신각신하는 광경을 지켜보던, 유 장로가 습관처럼 연초를 품속에서 꺼내려다 포기했다.
“…빌어먹을 비.”
그녀는 흠뻑 젖어 도리질을 치는 자신의 말을 쓰다듬어 진정시켰다.
"......."
주변에서 넘쳐 나는 살기에 말이 유난히 예민했다.
이곳은 고작해야 외곽의 경계 지역에 불과했건만.
삼공자 측 무사들의 몸가짐은 한껏 긴장되어 있었고, 그 눈빛은 살기에 물들어 번들거렸기 때문이었다.
검을 끼고 주변을 왔다 갔다 하는 그 모습이 마치, 비에 젖은 채 피와 살을 찾아 어슬렁거리는 야수들을 보는 것 같았다.
"한낱 노동자들의 봉기가 이렇게 오래가게 될 줄이야.'
그리고 그 삼공자 측이 전력을 쏟아붓는 와중에도 해결이 지지부진할 줄이야.
현재 상황은 본가에서 듣던것 이상으로 심각한 것이 분명했다.
대공자의 예상대로였다.
“유 장로님!”
한참을 옥신각신하던 측근이 바닥에 침을 뱉어 보인 후, 그녀와 일행들의 무리로 되돌아왔다.
“무슨 일이 있어도 통과는 안 된답니다! 제 생각으로는 지금 현재 어떤 작전같은 것이 진행 중인 상황인 것 같습니다!”
비가 쏟아붓는 야밤은 기습을 시도해 보기 좋다.
그녀의 머릿속에 과거 월국(越國)의 유격병단이 우림(雨林) 속을 누비고 다니던 광경이 떠올랐다.
“…기에, 당장에는 진입이 어렵지만…!”
그녀의 측근이 거세지는 비바람에 죽립을 내리누르며 외쳤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아마-!”
그의 외침은 끝을 맺지 못했다.
섬광.
그리고 갑작스러운 폭음.
"-----!!"
벼락을 떠올리게하는 번쩍임과 천둥을 방불케 하는 폭발음에 모두가 반사적으로 자세를 낮추었다.
순간적으로 바람의 방향이 바뀔 정도의 폭발이었다.
이어지는 작은 폭발음에 말들이 정신없이 날뛰었다.
말이 앞발을 치켜드는 통에, 승마에 익숙하지 않은 그녀의 수하 하나가 낙마하는 모습이 보였다.
“…제기랄!”
과거의 경험을 되살려 겨우 자신의 말을 다스리는데 성공한 유 장로의 시선이 저 멀리 떨어진 폭심지를 향했다.
"......!"
멀리서 거의 완공에 다다랐던 고층 전각 하나가 화염에 휩싸여 그대로 주저앉는 모습이 보였다.
쏟아붓는 폭우와 칠흑 같은 어둠속에서도 그 광경이 선명했다.
곧 붕괴음과 함께 진동이 닥쳐왔다.
“…대체 무슨 일…!
그 혼란의 와중에서 유 장로의 시선이 날카롭게 주변을 훑었다.
“…곳은 작전 지역인데…?!”
검문소의 인원들도 전부 폭발이 있었던 곳을 바라보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정신이 드나?!”
“괘, 괜찮습니다…!”
말에서 떨어진 자신의 수하는 일단 의식을 잃지는 않은 것으로 보였다.
짧은 순간.
결정을 내렸다.
그녀의 입이 열렸다.
“혼란을 틈타 검문소를 통과한다!”
그녀의 외침에 수하들의 시선이 쏠렸다.
그녀가 어둠과 폭우속에서 이를 드러내며 외쳤다.
“지금 당장!”
그녀는 돌아보지도 않고, 먼저 말을 달렸다.
수하들이 기겁하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 * *
잠시 후.
용봉지회 경기장 건설 부지.
삼공자 측 진영.
멀리 어둠과 폭우 사이로 거의 완공 단계에 다다른 건설 부지가 내려다보였다.
언덕 공터에 자리 잡은 삼공자 측의 막사들이 거친 비바람에 춤을 추듯 휘청거리고 있었다.
[이제 추격은 없습니다.]
수하 무사의 전음을 들은 유 장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영 내의 어디를 바라보든, 삼공자 측의 무사들과 병사들이 비바람 속에서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으으으… ”
폭발에 의한 화상에 열상에, 붕괴 속에서 잔해에 짓눌려 뼈가 부러지거나 신체 부위를 잃은 이들.
“뭐 하나?! 이건 야전 의원에서 감당할 수 없다! 당장 후방으로 이송시켜!”
“후방도 꽉 찼습니다! 더 이상은 감당할 수가 없다고요!”
부상자들을 부축하거나 들것에 실어 나르는 이들.
“인원 파악부터 하라고!”
“대체 우린 몇 명이나 두고 온 거야?!”
폭발로 인해 작전이 중단되고 후 퇴하여 밀려 들어오는 이들로, 진영은 혼란의 도가니를 이루고 있었다.
"......."
말을 탄 유 장로의 일행들이 그런 혼란 속의 진영을 통과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낙양검가의 깃발을 단 기수들을 막고 검문을 하려는 이는 없었다.
“지휘 막사는 저쪽인 것 같습니다!”
수하 하나가 손을 들어 가장 크고 화려한 막사를 가리키는 모습을 보고, 유 장로가 말에서 내려섰다.
"전원 이곳에서 대기하도록!”
수하들을 뒤에 남기고, 유 장로가 죽립을 내리누르며 거침없이 지휘 막사로 나아갔다.
“의원! 의원은 없는가?!”
의원을 찾으며 부상병을 나르던 이들이 진창이 된 바닥에 미끄러져 그녀의 앞에 나자빠졌다.
“으어….”
피투성이가 된 병사가 자신을 향해 손을 뻗는 모습이 유 장로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으어어, 어, 엄….”
화상을 입은 입가가 뻐금거렸다.
“엄마…."
그 말을 마지막으로 병사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야! 인마! 정신 차려!”
“이 새끼야! 눈 좀 떠 보라니까!”
전우들이 시신을 흔들며 외치는 소리를 뒤로한 채, 유 장로가 지휘 막사로 들어섰다.
“잠시. 신분을 증명해-.”
입구를 막았던 무사들이 그녀가 내민 낙양검가의 장로패를 보고 물 러났다.
"...어쩌란 말이오?! 놈들이 지금 완공되어가는 건물들을 인질로 잡고 있잖소!”
“그래도 더 밀어붙였어야…!”
“이번 폭발을 보지 못한 것이오?! 경기장이 날아가 버리면, 당신이 책임질 거야?!”
'과연, 그 폭발은 그런 의미였던것인가.’
그녀가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막사의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들려오던 고성들은 그녀가 안으로 슬쩍 들어온 이후에도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어렵게 협조를 얻어 데려온 관군들만 계속 죽어 나가고 있지 않소?!”
“그게 어디 우리 탓이오? 빈민 노동자들 따위가 구사하는 전술에 휘둘리기만 하는 군사부의 문제가 아니오?!”
“당신 머리로는 저 폭발이 빈민 노동자들이 구사할 만한 일로 보이나?!”
“보고를 종합해보면 내공을 가진 자들까지도 있는 것이 분명하오!”
“그러니 애초부터 말하지 않았소?! 놈들의 뒤에 모종의 협력 세력이 있는 것이 확실하다니까!”
그야말로 중구난방이었다.
정작 관군의 지휘관은 끼어들 생각도 하지 못하고, 구석에서 괜히 전술 지도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면 처음부터 그대들, 형산파의 무사들이 앞장을 섰으면 되었을 일이 아니오?!”
“그러는 종남이야말로, 뒷짐만지고 있었으면서, 지금에 와서야 목소리만 높이는 것인가?!”
최상층의 인원들이 서로를 탓하며, 책임을 전가하고, 나서기는 싫어하는 모습.
장로원의 풍경에 익숙한 유 장로에겐 딱히 놀라운 풍경은 아니었다.
이공자 진영의 지휘부를 머리 둘 달린 쌍두사라 비유한다면, 삼공자 진영은 무수한 머리가 달린 거인과 같았다.
'이름값도 못하는 놈들.'
외부에서는 '신(新) 무림맹'이라 부를 정도로, 삼공자의 세력은 그 이름이 쟁쟁했지만, 한꺼풀만 까놓고 보면, 실상은 이따위였다.
“자네, 불 좀 빌리지.”
유 장로가 선 자리에서 줄담배를 피우던 무사에게 불을 얻어 자신의 연초에 불을 붙였다.
“후우-.”
길게 뿜는 연기 사이로, 화려한 무복을 입은 노인들이 당장에 멱살을 잡을 듯이 말다툼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헛소리하지 마라, 이 늙은이야! 우리는 지난 강행 정찰에서 무사 두 명을 잃었다고!”
“실력이 모자라서 죽은 것이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과거 무림맹의 일원이었던 문파들이 주축이라, 멀리 떨어진 사패천을 등에 업은 이공자 측만큼이나 강력한 세력이었다.
"웃긴 모습이 아니오?”
유 장로의 옆으로 다가온 중무장한 노인이 있었다.
“주군께서 원정으로 자리를 비우고 계시니, 꼴이 이 모양인 게지.”
그가 부재중인 삼공자를 언급하며, 손에 들린 연초의 재를 바닥에 털었다.
“볼 때마다 한 편의 극을 보는것 같지 않소? 요즘 그래서, 내가 따로 극장을 찾아가질 않는다오.”
그가 킬킬거렸다.
“아마, 좌우 대군사의 권고가 있기 전까지는 한동안 저 모양 저 꼴일 것이요.”
유 장로가 그를 슬쩍 바라보고는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점창의 장문인, 오랜만입니다.”
그 노인은 다름 아니라, 아미파의 총무사태와 만남을 주선한 뒤, 본가 내에서 모습을 감추었던 점창파의 전(前) 장문인이었다.
“근래에 장로원에 출석을 하지 않으시더니, 과연 이곳에 계셨군요.”
그녀의 말에 점창의 전 장문인이 익살맞은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태생이 무인이라서.”
점창을 낙양검가에 통째로 넘기고 장로가 된 그의 말에 유 장로가 대답 없이 피식하고 뒤틀린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보고도, 점창의 전 장문인은 능글맞은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사공자님의 계파인 그대가 이곳에는 무슨 일이오?”
그의 표정과는 달리, 그 눈빛은 살점을 베어 내듯 날카로웠다.
“후우-."
그러든 말든, 연초의 마지막 모금을 뿜어 보인 유 장로가 담담한 표정으로 답했다.
“원래, 진행 예정인 군사 작전이 있다면, 멈춰 달라고 할 예정이었는데….”
그녀가 연초를 비치되어 있던 재떨이에 비벼 껐다.
“이젠 그럴 필요가 없겠군요.”
이미 시작됐던 작전이 실패로 끝났으니, 잠시 동안이라도 새 작전은 없으리라.
“아니, 대체 그대가 무슨 권한으로….
그 말을 듣고 처음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렸던 점창의 전 장문인이었다.
“혹시, 대공자가 그런 요청을 해달라고 그대를 보냈소?”
하지만 그런 노골적인 비웃음에도 유 장로의 안색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
그저 이때까지 못 피운 연초를 전부 태울 생각인 양, 새 연초를 꺼내 물고 불을 빌려 붙였을 뿐.
그런 그녀의 모습에 웃음을 흘리던 점창의 전 장문인의 입가에서 점차 미소가 거두어져 갔다.
“…설마?”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분간 적대적 군사 행위를 중단하라는 최고 운영 회의의 결정이 곧 내려올 겁니다.”
전 장문인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도대체 어째서…?”
삼공차 측에게 대응을 완전히 일임한다던 최고 운영 회의의 결정이 내려진 지 아직 이틀도 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 * *
삼공자 측의 포위망 근처.
폐허가 된 채 방치된 거대한 창고의 지하 공간.
낙양의 봄, 비밀 집회.
“방금 폭발은 역시….”
가면을 쓴 중년인이 침울한 어조로 한숨 섞인 어조로 중얼거렸다.
낡을 대로 낡은 지하실의 천장에서는 비가 줄줄 새고 있었다.
“지사들이 봉기를 일으킨 이들을도와 식량 저장고에 이어서, 점령했던 것이….”
평소였다면, 열악한 환경에 습관처럼 투덜거렸을 이들조차, 아무도 입을 열고 있지 않았다.
그저 얼굴을 감추기 위해서 쓴 가면 아래서 한숨만을 쉴 뿐.
“분명 유류고와 화약고였지요.”
야간작업과 정비를 위한 유류고와 암반 발파용 화약이 보관되던 화약고가 그 거대한 폭발의 출처였던 것이 분명했다.
“…자폭 공격까지 감행해야 했을정도로,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갔던 것인가.”
“그렇게라도 건물들을 인질로 잡고 있다는 것을 주지시키지 않으면, 위험한 순간이었겠지요.”
중년인이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이젠 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가는군.”
“애초에….”
냉정한 목소리의 여인이 가면 너머에서 말했다.
“돌이킬 방법은 없었습니다.”
“그건…."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것은 이미 처음에 굶주린 노동자들이 식량고를 우발적으로 습격했을 때부터.
그런 그들을 돕기 위해서, 낙양의 봄에서 끼어들었을 때부터 예견되어 있던 순서였다.
"그러고 보니.”
중년인이 뒤를 돌아보고는 덩치 가 좋은 남자에게 물었다.
“검가의 대공자는 원래라면 지금쯤 도착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낙양검가의 대공자라는 말에, 몇 몇이 헛기침을 하며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들은 권력자들을 증오했기에 낙양의 봄에 합류한 인원들이었다.
"......."
하지만 그런 이들조차도 지금 같은 상황에서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내는 이는 없었다.
다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던 것이다.
“말씀대로 지금쯤이면 도착하셨어야 하는데….”
가면을 쓴 덩치, 청호위가 연소현을 마중 나갔던 수란을 떠올리며, 뒷머리를 긁었다.
“아마도, 갑작스러운 폭우 때문에 늦으시는 것이 아닌지-.”
“아앗! 죄송합니다!”
그때, 뚫린 천장으로부터 가면을 쓴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수란이 었다.
“지각을 해 버렸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혼자였다.
“어? 대공자께선….”
그녀가 가면 뒤에서 말했다.
“대공자께선 어차피 지금 집회가 정족수를 채우지 못하니, 먼저 이곳에 들러 봐야 소용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 그래서?”
그녀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서 먼저 포위망을 걷어 버리겠다고, 안으로 들어가 버리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