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편 부저추신(釜底抽薪)
검가전장, 후원.
“큰오라버니! 그래서요, 그래서요 혜아가 말이에요…!”
“언니는 부끄럽게, 계속 왜 자꾸 내 이야기만 꺼내는 거야!”
꺄르륵, 하고 두 소녀가 웃음을 터트린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연소현의 입가에도 미소가 걸렸다.
그녀들이 늘어놓는 이야기는 일상에서 있었던 사소한 것들뿐이지만,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그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지겨울 틈은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산새들의 지저귐을 듣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그래서 글쎄. 암말이 새끼를 낳고 있는데, 혜아가 말이죠-.”
“그만하라니까…!”
사공녀 연다혜가 언니 연다은의 옆구리를 쿡 하고 찌르자, 연다은이 숨이 넘어갈 듯 꺄륵거리며 뒤로 넘어갔다.
연다혜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언니의 옆구리를 마구 간지럽혔다.
“에잇!”
연다은도 질세라 동생의 약점인 팔뚝을 간지럽혀 역습을 가했다.
쉴 새 없이 엎치락뒤치락하는 모습이 마치 새끼 고양이 두 마리를 보는 것 같았다.
'...역시 닮았구나.'
연소현은 두 사람이 구김 하나없이 웃는 모습이 그녀들의 어머니, 하씨 부인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소현아.'
그녀의 목소리가 떠오르자, 가슴 한구석이 욱신거려 왔다.
'어른들의 일은, 어른들에게 맡기렴. 남편이 부재중이니, 나라도 나서야지.'
'하지만….'
어린 연소현의 걱정 어린 말에 그녀는 소매를 걷어 알통을 만들어 보이며, 미소 지었었다.
'네 어머니인 소유 언니만큼은 아니지만, 이 나도 호락호락하지는 않으니까 말이야.'
그리고 그것이 어린 연소현이 들었던, 그녀의 마지막 말이었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소나기가 퍼부은 다음 하늘에 걸려 있던 무지개 아래, 벌써 부패를 시작했던 하 부인의 창백한 시신.
그 냄새.
언제나처럼 마지막 순간까지 입에 걸려 있던 그 미소는 유난히 힘겨워 보였다.
그 소리.
'이런 시기에 물놀이를 즐기시다니….'
'최상류 쪽에 폭우가 있었다더군. 갑자기 불어난 물에 저 작은 나룻배가 버틸리가 없지.’
'아니, 그런데. 호위 하나 없이, 홀로 나룻배를 타고 물놀이를 즐기셨다고…?’
'쉿. 조용히 하게.'
사고로 조작된 암살.
[...여라]
저주받은 것과 다름없는 기억력으로, 무엇하나 잊을수도 없는 그날의 악몽.
[전부 죽여라.]
'도대체 나더러 어쩌란 말인 것이야?!’
어렸던 자신이 하늘을 바라보며 울부짖었던 절규.
운명에 대한 원망.
그 절망.
그 무력감.
그 자기혐오.
그 공포.
그 분노.
그의 심장에서 울컥하고, 마물의 기운이 흘러넘친다.
으드득-.
연소현 이빨이 갈렸다.
“…오라버니?”
연다은과 연다혜가 그를 돌아본 순간, 작지만 날카로운 돌풍이 불어 닥쳤다.
“꺅…!”
연소현이 잠시 극한까지 끌어 올렸던, 양의심법으로 인해 형성된 바람이었다.
먼지바람에 두 자매가 눈을 감았다 뜨자, 그곳에는 자리에서 일어난 연소현의 뒷모습이 있었다.
"......."
묵묵히 저편을 바라보며 서 있는 큰오라비의 등이 어째서인지, 갑자기 멀어 보였다.
그녀들이 그런 그에게 말을 걸려던 때, 연소현의 입이 먼저 열렸다.
“이공자 놈의 수하들이 움직인 모양이구나.”
"......."
그 말에 두 소녀가 자리에서 급히 일어나, 연소현이 바라보는 방향으로 시선을 향했다.
“사공녀님.”
먼저 도착한 것은 낙양검가 정보 부처의 요원이었다.
연소현을 향해 예를 표해보인 요원은 사업 지원단장의 정보비서인 사공녀에게 쪽지를 전달했다.
“아, 감사해요.”
"별말씀을.”
사공녀 연다혜가 연소현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 쪽지를 펼쳐보는 사이, 정보부처의 요원이 연소현을 흘금거렸다.
요즘 모든 소문의 중심에있는 연소현을 직접 보게 된 순간을 놓치기 싫었던 것이리라.
'...이 사람이 대공자 연소현인가.’
요원은 최선을 다해서 은밀하게 연소현을 살폈다.
'그런데 어째, 들었던 것보다는 평범한-.'
그 순간 자신을 살피는 시선을 느낀 연소현과 그의 눈이 마주쳤다.
"......!"
무저갱과 같은 눈알.
바닥없는 낭떠러지에서 추락하는 기분이 이러할까.
내장이 철렁거리는 감각에 요원은 자신의 혼백이 달아나는 것 같았다.
아니, 혼백이 사로잡히는 것 같은-.
“…기요. 저기요. 요원님?”
“에, 예?!”
그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마, 말씀하십시오. 고, 공녀님.”
요원을 향해, 삼공녀 연다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직 무슨 볼일이 더 남아 있으신가요?”
평소에 정보부처의 요원들은 쪽지를 넘기자마자, 떠나 버리기 바빴기에 건넨 말이었다.
“아, 아닙니다!”
그는 삼공녀를 향해 손을 내저으며 연소현을 슬쩍 바라보았다.
"......."
그사이에 대공자는 이미 관심을 잃었다는 듯이 저 멀리로 시선을 돌린 후였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
마치 무언가에게 쫓기기라도 하듯, 홀리기라도 한 듯이 헐레벌떡 모습을 감추는 요원의 뒷모습을 연다은이 이상하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오라버니….”
쪽지를 모두 읽은 연다혜가 마른침을 삼키며 연소현을 부르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공자 놈의 수하들이 연씨 혈족을 끌어들이려 하고 있겠지?”
"......!"
마치 쪽지를 읽기라도 한 듯이, 그 내용을 예측한 연소현의 말에 연다혜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자들이 결국에 연씨 혈족들까지 끌어들이려고 한다고요?!”
연다은이 그 내용에 펄쩍 뛰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황망함이 머리끝까지 치솟은 그녀가 뭐라고 더 말을 꺼내려 할때, 연소현이 바라보던 저편에서 남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대공자님.”
삼, 사공녀의 호위무사들과 함께, 멀리 떨어져 있던 홍독지주가 멀대같은 청년과 함께 나타난 것이었다.
“형님…!”
연하응이 연소현을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며, 성큼성큼 다가오다가 연소현과 눈을 마주치고는 멈칫거렸다.
"......?"
홍독지주가 연하응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봤다.
“형님.”
연하응이 떨려 오는 다리에 힘을 주며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리도 심기가 사나우신 겁니까…?”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두거라.”
그 말에 모두가 연소현을 바라보았지만, 연소현은 이미 모두에게서 몸을 돌린 뒤였다.
“어디 가져온 소식이나 말해 보아라. 연씨 혈족과 관련된 정보겠지?”
"예, 물론 그렇습니다.”
연하응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다가와 말했다.
“이번엔 이공자 측이 아예 감출 생각도 없더군요. 현재 본가 내에서 고위직에 있는 모든 혈족에게 서신을 보냈습니다.”
그가 품에서 서신을 꺼내어 흔들어 보였다.
심지어 연소현과 친분이 두터운 것으로 알려진 연하응에게까지 서신이 도착한 것이다.
그의 말처럼 이공자 측이 무슨 수를 쓸 것인지 감출 생각이 없는것이 확실해 보였다.
“감출 필요가 없는 수이니까.”
연소현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이 가문은 연씨의 가문이고, 그렇기에 연씨 혈족들이 요직의 절반 가까이 차지하고 있으니까요….”
연다은의 말에 연다혜가 말을 덧붙였다.
“그렇기에 연씨 혈족이 적으로 삼는 자는, 이 가문의 절반을 감당해야 하는 것과 같지요.”
천하제일가라 불리는 낙양검가의 절반을 상대하는 것.
그것은 사실상, 사망 선고나 마찬가지 였다.
“…형님 말씀처럼 감출 필요도 없고, 애초에 감출 방법이 없는 수이기도 합니다.”
“연씨 혈족은 하나의 조직이 아니니까.”
당장에 이 자리에 모인 이들만해도, 홍독지주를 제외하고 모두 연씨였지만, 연소현의 아군이 아니던가.
“요직에 있는 연씨 혈족들은 대부분이 각자의 이해관계를 갖추고있는 개인들이지.”
“그런 이들에게 어설픈 수단으로 비밀리에 접촉해 봐야, 어디선가 무조건 이야기가 새어 나가기 마련일 테니, 아예 대놓고 서신을 보냈던 것이겠지요.”
“그런데 오라버니….”
연다혜가 조심스럽게 질문을 꺼냈다.
“이공자 측이 연씨 혈족들에게 접촉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알겠는데, 도대체 어떻게 그들을 한데 모아 큰오라버니를 적대하게끔 할 생각인 것일까요?”
그 질문에 모두의 시선이 연소현의 뒷모습에 모여들었다.
“물론, 그들 전부를 모으길 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가능하지도 않고.”
치밀어 올랐던 마기와 살기를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억누르는 것에 성공한 연소현이 그들을 돌아보았다.
“연씨 혈족 중 반의반이라도 모으면 성공이겠지. 막 칩거를 끝낸 나 하나 정도 밀어 버리는 것은 일도 아닐 테니까.”
“그 반의반은 어떻게…?”
연소현이 쓴웃음을 지었다.
“정치적 자원을 많이 소모하겠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왜냐하면….”
그가 손을 들어 후원과 연결된 전각의 뒷문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백발 백안의 중년 여인이 있었다.
“중앙감찰각주….”
“독고야연.”
낙양검가 내 권력자들의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
부패하고 횡령하고 착복하는 이들의 악몽.
“이제, 제 검은 대공자님의 것입니다.”
그녀가 연소현에게 검을 바쳤다.
"......!"
좌중이 경악을 금치 못하는 와중에, 연소현이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그녀의 검을 검집째로 받았다.
“받겠다.”
그녀가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연소현에게 고개 숙여 고했다.
“…주군께 첫 번째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그녀의 말투는 평소처럼 담담했지만, 그 아래 깔린 분노와 충격을 모두가 느낄 수 있었다.
“검가전장의 전장장 전용 장부 서고를 수색 중, 대규모의 비정상적인 금전 흐름이 존재함을 파악했습니다.”
“한두 건이 아니었겠지.”
그녀에게 묻는 연소현의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었다.
“…지금까지 대충 파악된 것만해도 수십여 건입니다.”
* * *
낙양검가의 어느 호화로운 저택.
“연소현, 그놈이 검가전장을 털었다라….”
비단옷을 입은 이가 두꺼운 책상을 규칙적으로 두드렸다.
그에게 보고한 측근이 주인의 과격한 표현에 고개를 조아렸다.
“주군. 아직 전장장이 대공자에게 비밀 장부를 넘겨 주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확인할 방법도 없습니다.”
다른 측근 또한 조심스레 말을 거들었다.
“게다가 과거의 일이 담겨있는 비밀 장부의 실존 여부조차 확실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 또한 전장장이 대공자에게 비밀 장부를 넘겨 주었다는 말과 마찬가지로, 이 공자 측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입니다.”
실제로도 이공자 측은 연소현과 전장장이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소문으로만 떠돌던 비밀 장부가 존재하는지, 전장장이 그 장부를 넘겨주었는지 등을 알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상관이겠는가.
“이건 틀림없이 연씨 혈족의 힘을 끌어들이려는 얄팍한 수작입니다.”
“이공자 측과 접선할 준비를 하라 일러라.”
그 저택의 주인 이외에도 많은 연씨 혈족들이 이공자 측이 서신에 남겼던, 접선지로 향할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 * *
검가전장, 후원.
“그, 그렇다면 어떻게 하죠?!”
삼공녀 연다은이 발을 동동 굴렀다.
“…그자들은 자신들의 비위(非違)가 드러나는 것을 결단코 저지하려 들 거예요.”
연소현이 중앙감찰각과 함께 검가전장에 방문했다는것을 이용한 이공자 측의 순발력은 놀라웠다.
“걱정하지 말거라.”
연소현이 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빙긋 미소 지어보였다.
“어차피 연씨 혈족들은 근본부터 각자가 이해관계가 다르니, 이공자 측이 빠져버리면, 제대로 된 연합을 구축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부저추신(釜底抽薪).
펄펄 끓는 가마솥 밑의 장작을 빼낸다는 뜻.
물이 끓는 것을 그치게 하려면, 불의 근원을 없애야 한다는 말이었다.
“이공자 측이 빠진다고요?”
이공자 측이 연씨 혈족들을 모아놓고, 왜 그들이 빠진단 말인가.
"아…!”
그나마 연소현의 행보에 대해 좀더 알고 있던 연하응이 자신의 손바닥을 마주쳤다.
그와 시선이 마주친 연소현이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동생들을 향해 물었다.
“이공자 놈은 애초에 어떻게 내게 전력을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이더냐?”
그의 말에 동생들이 답했다.
“그야 물론, 삼공자 측이 현재 전선에서 빠진 상태라….”
“삼공자 측이 지금 용봉지회 경 장 건설 부지의 대규모 소요 사태 대응에 전력을 모두 쏟아부은 참이라서….”
두 사람이 앗! 하고 서로를 바라보고는 연소현에게 외쳤다.
“그렇다면 큰오라버니께서는 삼공자 측을 다시 이공자와의 전선에 복귀시킬 생각이신 것인가요?!”
“대체 어떻게…?!”
그때 연소현의 시녀장, 정아가 다가와서 그에게 말했다.
“주인님. 우마차가 정비를 완료하고 준비를 마쳤습니다.”
과연 저 멀리 정문 쪽에서, 두 마리의 영물들이 씩씩하게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간단하다.”
연소현이 그녀들을 향해서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내가 그 소요 사태를 해결해 버리면 되지 않겠느냐?”
연소현이 '낙양의 봄' 소속의 두 사람, 수란과 청호위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원래라면 어젯밤 죄악계곡의 화재에 저희가 도움을 드렸어야 마땅했는데….”
연소현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현재 낙양의 봄에 소속된 대부분의 지사(志士)분들이 '용봉지회 경기장 건설 부지' 쪽에 발이 묶여 있음을 짐작하고 있었소. ”
우연한 기회에 그들에게 미리 초대까지 받아두었으니,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이제, 예정되어 있던 낙양의 봄 비밀 집회에 참석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