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200화 (200/350)

제25편 사흘

낙양검가, 이공자 진영.

“…가주들이 검가전장에서 발이 묶였다고?”

보랏빛으로 예쁘게 칠하고 가꾼 손톱이 무색하게, 그 손에는 한껏 힘줄이 돋아 부들거리고 있었다.

“이게 대체 어찌 된 노릇인가요?! 그사이에 청씨 가문과 공씨 가문이 우리의 동맹 가문들을 공격하고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공자의 어머니.

낙양검가의 구양 태상부인의 노기가득한 외침에, 회의석에 앉은 장로들이 그녀의 눈을 피했다.

“도대체 그놈의 공씨 가문은 무슨 연유로 가문 전체가 움직이는 것인가요?!”

그녀의 짜랑짜랑한 목소리가 넓은 회의실이 좁다하고 울려 퍼졌다.

“아직 확인 중이지만….”

낙양 계파의 장로 하나가 시선을 피한 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들려오는 말에 의하면, 과거로부터 공씨 가문의 노마, 공량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다고….”

다른 장로가 눈치를 살피면서 슬쩍 거들었다.

“그리고 은퇴한 것으로 알려졌던것과 다르게, 현 가주가 여전히 노마 공량일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른 황도십육가문과는 다르게 가문전체가 움직이는 것으로-.”

“게다가!”

구양 태상부인의 목소리가 장로의 목소리를 끊어버렸다.

평소였다면, 말이 끊긴 장로가 무안함에 몇 번 헛기침이라도 했으련만.

지금은 그저 다른 이들처럼 구양 태상부인의 시선을 피하기 바빴다.

“원래 우리와 이번 기회에 손을 잡고 움직이기로 했던, 본가 내의 세력들이 왜 이리 침묵만을 지키고 있는 것이란 말입니까?!”

“그것이….”

주변 장로들의 시선이 집중되자, 대내 협력 업무를 담당하던 장로가 한숨을 쉬며 답했다.

“검가전장이 중앙감찰각에 급습당한 후, 본가 내의 소문이 심상치가 않습니다.”

“…소문이라고요?”

회의실이 서리가 내릴 것처럼 싸늘해졌다.

“지금. 겨우 소문 때문에 대낙양검가의 조직들이 겁을 먹었다고 하신겁니까?”

그녀의 눈이 타들어 가는 석탄처럼 시뻘겋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 그것이. 소문이 그저 일반적인 소문이 아닙니다.”

다른 장로들도 서둘러 입을 모았다.

“소문에 따르면, 그 내원총관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첫 목표가 검가전장의 부패 척결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감찰부주의 묵인하에 중앙감찰각이 먼저 선수를 친 것이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일의 선후(先後)가 바뀐 해석이었지만, 애초에 소문을 '만들어' 뿌린 이들의 목적이 그것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본가 내에 대대적인 단속과 수사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퍼지고 있으니….”

“그래서 다들 자기 집안을 단속하느라, 몸을 사리고 있는 중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 * *

낙양검가, 집사부.

낙양검가 내의 온갖 장소에서 일하는 아랫것들이 갖은 이유로 모여드는 집사부는 밤이 깊어가는 시각에도 드나드는 이들로 분주했다.

“자네들. 들었는가?”

아랫것들 사이에서도 자신들이 일하는 곳의 중요도에 따라, 나름 자신들끼리 나누는 급이 있었다.

“또 무슨 일이 있었나?”

“검가전장에 대한 이야기라면 들었네만.”

일하는 곳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따라서, 접하는 소문또한, 빠르고 정확했다.

“후후. 자네들은 소식이 늦구먼그래.”

따라서 아랫것들은, 자신들이 들었던 소문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먼저 언급하는 것을 통해, 우월감을 드러내곤 했다.

어차피 소문은 소문일 뿐이라서, 그저 소문을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는 엄격한 내규에 처벌받지도 않으니.

“어허. 알겠네, 알겠어.”

주변에 모여든 이들이 보채자, 말을 꺼냈던 이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소문을 풀어놓았다.

“저번, 내원 책값 사건에 이어서, 이번에 검가전장이 크게 일을 치르고 있다는 것 정도는 다들 알고 있겠지.”

“아, 거. 뜸 들이지 말고 후딱 말을 해 보게!”

주변이 대번에 아우성이다.

그 아우성을 충분히 즐긴 이가 본론을 꺼내 놓았다.

“어흠. 그래서, 이번 기회에 최고 운영 회의의 높은 분들께서 가문 내의 모든 사법기관을 동원해, 본가 전체의 조직들에 대해 대대적인 내부 검열을 시작할지도 모른다고 들었다네.”

“내, 내부 검열이라고?!”

“그것도 본가 전체를?!”

몇몇 근무 장소가 빨래방이나 환경미화 따위에 지나지않는 이들을 제외하고, 나머지 이들이 펄쩍 뛰었다.

“지금, 자네. 최고 운영 회의라고 했나?!”

“그 발언에 책임을 질 수 있는 것인가?”

소문을 떠들던 이가 그 말에 대번에 인상을 찌푸렸다.

“책임은 무슨…. 애초에, 내가 소문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내가 소문이 아니라 정확한 정보를 알고 있을 것 같으면, 정보부처의 요원으로 일하고 있겠지.”

“그건, 그렇지….”

맞는 말이었기에, 다들 수긍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게 그저 소문이라도,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닐세!”

몇몇 중요한 이들을 섬기는 아랫것들은 이미 꼬리에 불이 붙은 것처럼 달려 나가는 중이었다.

자신들이 섬기는 이들에게 어떻게든 이 소문을 빠르게 전달해야 했으니.

“이제 교육을 시작…?”

잠시 후, 정기 교육을 위해 교육장에 들어선 집사부의 집사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다들 어디 간 건가?”

교육장에 남아 있는 이들은 채 반이 되질 않았다.

* * *

정기 교육 담당 책임자에게 보고를 들은 집사부장이 역정을 냈다.

“뭐라고?!”

평소에도 까탈스럽고, 철저하며, 심지어 완벽주의적인 성향을 지닌것으로 유명한 집사부장의 고함에 상대가 정신없이 머리를 조아렸다.

“무단으로 정기 교육에 빠진 정신나간 것들의 명단은 전부 기록해 놓았겠지?!”

“예, 예. 물론입니다, 집사부장님.”

“그놈들은 추후에라도 전부 잡아다가, 곤장을 쳐야 할 것이야! 감히 이 집사부의 정기 교육을 뭘로보고, 무단으로 결석한단 말이더냐?!”

“여,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최선을 다해서 비위를 맞추려는 노력도 무색하게 교육 담당 책임자에게 불호령이 떨어졌다.

“그런데 아직도 여기서서, 뭘 하고 있는 것이야?! 여기가 네놈의 집무실이더냐?!”

입에서 불을 뿜는 것 같았다.

여기서 한 단계 더 불이 붙으면, 벼루가 날아올 것이 뻔했다.

“아닙니다! 다, 당장 소인이 직접 상황을 파악해 오겠습니다요!”

그가 도망치듯 자리를 떠나자, 집사부장의 성미를 알고 있는 집사부의 하녀들이 얼른 달려와 집무실의 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고, 바깥의 소음이 차단되자마자, 집무실에 방문 중이던 이가 실실거리며 웃음을 감추질 못했다.

“소문을 퍼트려, 아랫것들이 보고하러 가게 만드신 장본인께서, 이리도 역정을 내시다니요.”

그 청년은 다름 아닌, 발 달린 소문, 연하응이었다.

“그것은 그것이고, 이건 이게 아니겠소이까.”

집사부장이 냉랭한 표정으로 코웃음을 치고, 자리에 다시 앉았다.

“그나저나, 이것 또한 연고문께서 지도해주신 덕분이올시다.”

집사부장의 말에 연하응이 찻잔을 내려놓고 손을 내저었다.

“에이. 저 따위가 무슨 도움이 되었다고 그런 말씀을.”

“덕분에 단지 검가의 내부 정보를 모으기만 하는것이 아니라.”

그의 겸양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집사부장이 제 할 말을 이었다.

“소문을 이용한 공작까지도 벌일수 있게 되었으니….”

연하응이 쓴웃음을 지었다.

“…덕분에 일이 세 배는 늘어난것 같지만 말입니다.”

과거, 세쌍둥이 시녀들에 의해서 끌려갔던 그가 만나게 된 이가 바로 눈앞의 집사부장이었다.

당시 낙양검가 내부에 정보망을 만들고있던 그를 만나 지금까지도 협력을 이어오던 것이었다.

가장 밑에서부터 정보를 끌어모으는 것을 목표로 하던 집사부장의 비밀 정보 조직이, 연하응의 조력에 힘입어 소문을 통한 정보 공작까지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요즘에 아주 몸이 남아나질 않습니다.”

연하응이 혀를 내두르자 집사부장이 단숨에 식은 차를 들이마시고는 코웃음을 쳤다.

“일이 바빠 힘드시다고요?”

“왜 그러시는…?”

집사부장의 날카로운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연하응이 겁먹은 표정으로 흠칫거렸다.

“연 고문. 이제쯤 됐으면, 그렇게 속에 없는 소리를 늘어놓는 것은 그만두시는 것이 어떻겠소이까?”

그의 말에, 인격을 '연기'하고 있던 연하응의 표정이 거짓말처럼 변했다.

“…그렇습니까?”

연하응의 자세가 곧게 펴지자,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인상이 변했다.

낙양검가의 유명한 역사(力士)들만큼이나 신장이 큰 그가 곧은 자세를 취하는 것만으로도 집사부장을 내려다보게 되었다.

“개인적인 대화는 몇 번 나누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

경박하게 느껴지기만 하던 목소리조차 가라앉았다.

연하응은 허물을 벗듯 원래 성격을 드러냈다.

“대공자님 외에는 누구도 눈치챈 적이 없는 제 연기를 간파하시다니, 대단하십니다.”

뱀이 허물을 벗으면, 뱀이 나와야 하건만.

연하응이 허물을 벗자, 거기서 나온 것은 유각풍문 연하응이 아니라, 개봉연가의 정당한 후계자였던 연하응이 었다.

“제 수양이 아직 부족한가 봅니다.”

“그동안 이 일을 같이 해왔는데, 그 정도는 눈치를 채야지요."

그런 모습을 보고도, 집사부장은 놀라기는커녕, 오히려 나직하게 코웃음을 쳤다.

“주군께서 한낱 한량에 지나지 않는 자를 이리 가까이 두실 리가 없으니, 당연히 뻔한 것이 아니겠소이까.”

집사부장의 말에 연하응도 턱을 치켜들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과연. 그 이름 높은 집사부장. 진작 장로가 되셨어야할 분은 다르시군요.”

장로가 될 수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몸을 낮추고, 현재 자리에서 머물러 있던 이.

그리고 자신을 쫓아낸 가문을 되찾기 위해서 속으로 칼을 갈아오던 이의 시선이 공중에서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충돌했다.

"......."

"......."

그 일촉즉발의 긴장감을 부순 것은 두 사람의 입에서 새어 나온 웃음소리 였다.

“과연, 과연.”

곧 집무실이 웃음소리로 가득해졌다.

“이제야 집사부장님과 진솔하게 대화를 주고 받을 수 있게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습니다.”

연하응의 말에 집사부장이 미소를 띤 채로 답했다.

“주군 근처에 제대로 심중을 숨길 수 있는 이가 없어, 적적했는데. 앞으로 더욱 좋은 인연을 만들어 갈수 있겠소.”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지요.”

두 사람이 입가에 띤 음흉한 미소가 기가 막히게 닮아 있었다.

근본이 닮은 두 사람이 화합을 이루는 순간이었다.

“그럼 본인은 소문을 좀 더 강화하기 위해서, 한 발이라도 더 움직여 야겠습니다.”

연하응이 자리에서 털고 일어나자, 집사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은 철저하면 철저할수록 좋은 것이지요.”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왜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게 말이오.”

외모도, 성장 배경도, 출신도, 무엇 하나 제대로 일치하는 것이 없는 두 사람이었지만, 어째서인지 기가막힐 정도로 죽이 잘 맞았다.

“흐흐흐.”

“흐흐흐.”

* * *

이공자 진영.

“이렇게 되면, 연소현 그놈을 박살내기 위한 계획이 전부 어그러지지 않습니까?!”

구양 대부인이 회의용 탁자를 내리치자, 그 두꺼운 탁자가 그대로 두 토막이 나 버렸다.

“도대체가 장로라는 자들이 제대로 하는 일이 뭐가 있는 것이오?!”

좌중이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

누구도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는 가운데, 지금까지 팔짱을 끼고, 한발 물러서 있던 하후 장로가 나섰다.

“태상부인.”

“뭔가요?”

구양 태상부인의 이글거리는 시선이 그를 향했다.

그는 하나밖에 남지 않은 눈으로, 담담히 구양 태상부인을 쳐다보았다.

“고작 이틀째입니다.”

“…뭐가 이틀째란 것인가요?”

하후 장로가 탁자가 박살 나며,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보고서를 주워 들었다.

“대공자가 첫 공식 외출을 한 지, 이틀째란 말입니다.”

그가 벽에 걸린 시계를 슬쩍 바라보고, 말을 덧붙였다.

“이제 자정이 넘었으니, 사흘째가된 것이지요.”

"......."

“이제 겨우 사흘째입니다.”

그 말에 구양 태상부인이 입을 다물었다.

그랬다.

그들의 대응이 모자란 것이 아니었다.

이공자는 이상 징후가 보이자마자, 직접 황도로 향했고, 그들은 이틀 동안 할 수 있는 것들을 착실히 동원해 나가고 있었다.

단지.

그들의 상대가, 그 대공자가 마치 예언자라도 된 것처럼 그들의 수를 틀어막아 대고 있는것이 문제였을 뿐.

“…어쩔 수 없군요.”

구양 태상부인이 역정을 내느라, 흘러내린 머리칼을 뒤로 넘기며 말했다.

“본가 내의 연씨 혈족들과 거래를 해야겠습니다.”

그 말에 좌중이 술렁였다.

“…태상부인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심이.”

“괜히 산의 여우를 잡으려다가 호랑이를 끌어들이게 되는 격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무슨 요구를 할지…. 치러야 할 정치적 대가가 상당할 겁니다.”

하후 장로조차 침묵을 지켰다.

"......."

그런 좌중의 반응에 구양 태상부인이 냉랭한 어조로 말했다.

“연소현 그놈을 여기서 잡으려면, 더 강한 수를 동원할 수밖에 없습니 다. 이대로는 계속 놈에게 끌려다닐 뿐이에요.”

그녀가 좌중을 둘러보며 물었다.

“아니면 그대들에게 대안이라도 있나요?”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연씨 혈족들과 접촉해서, 비밀리에 자리를 만들도록 하세요.”

그녀의 보랏빛 입술이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지금 시점에서 그자들 또한, 우리만큼이나 연소현 그놈을 절벽 아래로 밀어 버리고 싶을 테니까.”

제암진천경 - 9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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