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편 순간과 현재(現在)
“대공자께서 현재 본가 내의 검가전장 본사를 방문 중이라고 하십니다.”
집사장의 말에 채비를 모두 갖추고 있었던, 삼공녀와 사공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즉시 검가전장으로 향하겠어요.”
하지만 그녀들을 전송(餞送)해야 할 집사장은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쌍둥이 공녀가 자신을 바라보자, 집사장은 면목이 없다는 듯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현재, 감찰부의 붉은 정복을 입은 이들이 검가전장에 접근 중이라고 합니다.”
두 사람의 눈이 커졌다.
“감찰부가…?”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낙양검가 정보부처의 전령이 저택으로 달려 들어왔다.
“중앙감찰각이 강제 돌입 중. 선두에, ...대공자.”
정보 쪽지를 읽는 사공녀에게 집사장이 어렵게 말을 꺼냈다.
“…벌써 유혈 사태가 시작된 모양이군요.”
* * *
검가전장, 본사 정문.
검가전장의 본사는 낙양검가에서도 가장 많은 외부인이 드나드는 장소 중 하나였다.
그렇기에 그 정문의 정원은 천하제일가의 힘과 영향력을 과시할 목적으로 꾸며지고 관리되어, 풍류를 논하는 이들의 사이에서 끊임없이 오르내리는 장소였다.
"......."
그 정문 정원은 현재, 원래의 모습을 떠올리기 힘든 형상이 되어있었다.
정원 곳곳이 거인이 헤집어 놓은 것처럼 갈아엎어졌고, 사방으로 튀었던 피가 유등 빛에 번들거렸다.
"......."
숨을 들이마시자, 짙은 피비린내와 시신에서 흘러나온 오물의 냄새가 비강(鼻腔)을 찔렀다.
“…으읍!”
"......."
삼공녀와 사공녀가 구역질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끼며, 동시에 입가를 가렸다.
정원에는 누구랄 것 없이 머리가 부서져 나뒹구는 시신들이 있었다.
그들의 피에 젖은 의복을 보았을때, 낙양검가의 무사들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들의 시신은 어떤 예우도 없이, 거리에 버려진 쓰레기 더미처럼, 사방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그녀들 또한 낙양검가의 일원이기에, 피와 죽음이 낯설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무사가 아무런 예우도 없이, 아무런 명예도 없이, 죽어 나자빠진 채로 방치되는 모습은 낯설기 그지없었다.
이것은 비무도, 결투의 결과도 아니었다.
그녀들의 머릿속에 집사장의 목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지금 두 분께서는 지금까지 겪지 못하셨던 규모의 전쟁터에 발을 디디시려는 겁니다.'
이곳은 전쟁터였다.
출발 전에 보았었던 쪽지의 내용또한 생각이 났다.
'강제 돌입 중. 선두에 대공자.'
그 쪽지의 내용을 보충이라도 하듯, 그녀들의 호위를 맡고 있던 무사들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전부 일수(一手)에 당했군.”
“…남아 있는 족적을 보아하니, 큰 흔적들은 전부 죽은 무사들이 남긴 것 같다.”
“...그렇다면 대공자는 그 전부를 피하고, 일격에 하나씩 머리를 터트려 버린 것인가.”
“…소문이 마냥 과장은 아닌가. 대공자의 경지가 심상찮은 것 같군.”
필시 이 참혹한 광경은 자신들의 큰오라비의 손에 만들어진 것이리라.
먼 기억 속에 자상했던 그의 모습이 순간 아른거렸다.
현재 자신들의 큰오라비는 어떤 사람일까.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
"......."
두 공녀는 시신들을 차마 직시하기 어려웠다.
“보고드립니다.”
안쪽에 미리 들어가 상황을 파악하고 돌아온 호위무사들이 삼사공녀의 호위제장에게 보고했다.
“지금 시점에서 강제 진압은 끝났지만, 여전히 산발적인 저항이 남아있고, 중앙감찰각 측은 용의자들의 체포와 압수수색에 집중 중인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대공자님은 현재 별관 쪽에 계신 것으로 추정되며….”
“중앙감찰각이든, 검가전장이든, 매우 예민한 상태라 적대적이지는 않지만, 우리를 반기지는 않는 상황으로….”
그들의 보고는 공녀들 또한 들을 수 있었다.
“공녀님들. 상황은 들으셨겠지요.”
고개를 끄덕이는 삼공녀와 사공녀를 향해 그녀들의 호위제장이 물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꼭 들어가셔야겠습니까?”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본사 전각 안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제, 제발...! 뭐든 말하겠으니, 목숨만은 살려 주시오!”
손목이 떨어져 나간 채, 울부짖는 검가전장의 일원이 포박당한 채 질질 끌려 나오고 있었다.
“어이쿠!”
그는 인정사정없이 잡아끄는 이들에 의해 발이 꼬이며 쓰러졌다.
그러자 간신히 지혈되었던 잘린 손목에서 핏줄기가 펑펑 솟아올랐다.
“으아아…, 으아아아악!”
그는 자신의 손목을 보며 비명을 질러댔다.
똥오줌을 지린 것인지, 고약한 악취가 공기중에 더해지며 그의 바지 자락이 젖어 들고, 바닥에 누런 웅덩이가 생긴다.
“시끄럽다!”
그를 압송하던 붉은 정복을 입은 이가 냅다 그의 얼굴을 걷어찼다.
그 가차 없는 발길질에 용의자가 뒤로 나자빠지며, 이빨들이 뒤섞인 선혈이 후두둑하고 튀었다.
“잘했다. 이제 좀 조용하군.”
기절한 용의자의 혈을 짚어 대충 지혈을 마친 이들이 그를 짐짝 끌듯 끌어, 삼사공녀 일행을 지나쳤다.
"......."
"......."
호위제장과 시선이 스쳤지만, 그들은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았고, 호위제장과 무사들 또한 그저 길을 비켜섰을 뿐, 눈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삼공녀와 사공녀는 이런 상황에 인사나 받자고, 굳이 앞으로 나서지 않았다.
“안쪽의 상황은 더욱 심각할 겁니다.”
호위제장의 말에 두 쌍둥이 공녀가 시선을 마주했다.
그들이 다졌던 각오도 각오이지만, 여기서 지금 큰오라비를 만나지 못하면, 어째서인지 크게 후회 하게 될 것 같았다.
“…들어갈 거예요.”
그들은 손을 꼭 붙잡은 채, 호위제장에게 말했다.
호위제장은 속으로 한숨을 삼키고, 호위무사들에게 명했다.
“지금부터 진입한다. 절대 사각을 허용하지 않도록.”
* * *
복도의 벽을 따라, 누군가의 피로 찍힌 손자국이 길게 그어져 있었다.
"......."
어딘가 저 멀리서 복도를 메아리쳐 들려오는 호통 소리와 비명 소리가 있었다.
“좌우는 보지 마십시오.”
호위제장의 말에 따르듯, 호위무사들이 그녀들의 좌우 시야를 좀 더 확실하게 막아섰다.
바닥에 뒹굴고 있던 시신들의 부릅뜬 눈이 그들에 의해 가려졌다.
“그저 발밑만 보고 걸음을 옮기시면 됩니다.”
호위무사 하나가 복도에 뒹굴던 주인 잃은 팔을 슬쩍 발로 밀어내는 모습이 보였다.
"......."
삼공녀와 사공녀는 치맛자락을 살짝들고 바닥의 틈을 통해 사방으로 번진 피를 피해,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런 보람도 없이, 긴 치맛자락은 어디선가 이미 바닥의 피를 흡수해, 한결 묵직해져 있었다.
“좋다. 이래도 네년이 바른대로 고하지 않을 수 있을지 보자.”
진득한 살기가 담은 목소리들이 긴 복도에 반사되며 들려오고.
“끄아아아악!”
처절한 비명들이 귓가에 끈적거리며 달라붙는 것 같았다.
"어억?!"
피 냄새는 이제 너무 지독해져서, 후각이 마비되다시피 한 상황에서도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다.
“그마안! 그마아아안!”
끊임없는 비명에 귀를 틀어막고,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복도에 주저앉아 버리고 싶어지던 순간.
척후가 달려왔다.
“대공자님이 전방에 계십니다.”
그녀들이 마음의 준비를 할 사이도 없었다.
복도의 모서리를 돌자마자, 호위무사들이 갈라지며, 정면에 대공자의 모습이 보였으니.
흑잠사로 짠 외투가 피를 머금고 유등의 붉은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마른 피가 엉겨 붙은 손과 얼굴 아래까지 튄 시뻘건 선혈이 흑잠사 외투 아래의 무명 백의를 물들이고 있었다.
"......."
그녀들의 시선이 그의 시선과 마주쳤다.
그리고 그녀들은 생각했다.
저기 서 있는 이는, 지독하게도 낯선 인물이라고.
하지만 그러면서도, 명가의 일원으로서 몸에 배어든 예의가 그녀들을 반사적으로 움직이게 했다.
“큰오라버니….”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녀들을 바라보는 연소현의 표정은....
복잡했고, 종잡을 수가 없었다.
"......."
불안한 것도 같았고, 어딘가 반가워 보이기도 했으며, 입가는 미소를 지으려다가 일그러졌고, 눈빛은 곧아지다가도 떨렸으며, 미간은 난색을 표하며 찌푸리는 것인지, 애잔함을 느끼며 찡그려진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오라버니…?”
삼공녀 연다은의 목소리에 그가 퍼뜩 정신을 차린 것 같았다.
“…그래.”
그의 목소리는 떨렸고, 마치 수 십 년 만에 목소리를 낸 것처럼 잠겨 들어 있었다.
"…오랜만이구나.”
그리고 그 순간, 그녀들은 오히려 불안으로 두방망이질 치던 마음이 놓이는 것을 느꼈다.
그 목소리는.
그 눈빛은.
읽을 수 없던 그 표정은, 자신들이 느끼는 것과 같은 불안이었으며, 반가움과 그리움이 뒤섞여 자아낸 자연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녀들은 자신들 또한, 눈앞의 큰오라비와 같은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말로, 오랜만이야….”
그랬기에 그가 그 옛날처럼 자신들의 아명을 불렀을 때.
“은아야, 혜아야:"
그녀들은 미소를 환히 지을 수 있었다.
“네, 오라버니.”
한 치의 거짓 없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온 자연스러운 미소였다.
“아…."
그리고 그랬기에 그녀들은 두 팔을 펼치며 다가오다가, 엉겨붙은 마른 피 때문에 당황한 큰오라비에게 오히려 먼저 다가갈 수 있었다.
"나를..."
가까이 다가가자 그가 쥔 주먹이 가늘게 떨려 오는 모습이 너무도 선명하게 보여 가슴팍이 저리는 것만 같았다.
큰오라비는 예전보다 훨씬 키도 크고 덩치도 커졌지만, 어째서인지.
그 옛날 그 모습 그대로의 작은 아이인 것만 같았다.
그 모습을 보자 불현듯 떠올랐다.
그녀들과 개울가에서 물장구를 치며 함께 웃고 떠들었던, 기억 속의 큰오라버니.
자신들을 무릎에 앉히고 옛날이야기들을 들려주던 큰오라버니.
언제나 자신들을 반갑게 맞아 주었던 큰오라버니.
자신들은 큰오라비와 접점이 없는것이 아니었다.
사소했기에, 일상속에 녹아들어 버린 기억들이었기에.
자신들이 이제까지 잊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 오라비를 원망하지는 않는 것이냐?”
그랬기에 그녀들은 그가 숨긴 두 손을 거리낌 없이 붙잡아 줄 수 있었다.
쌍둥이 자매는 각자 연소현의 손 하나씩을 잡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원망 따윈 하지 않아요.”
연다은은 자신의 말에 큰오라비의 손이 크게 떨려 오는 것을 느꼈다.
큰오라비의 손은 크고 따스했다.
그러자 눈에 눈물방울을 매단 연다혜가 쌍둥이 언니를 괜히 흘겨보았다.
“…거짓말하고 있네. 맨날 큰오라버니를 탓하면서 구시렁거렸으면서.”
“야…!”
그 말에 마찬가지로 눈물방울을 매달고 있던 연다은이 얼굴을 붉히며 외쳤다.
“멍청아! 지금 그런 소리를 왜 하는 거야?!”
“반가우면 반갑다고 하면 되지, 쓸데없이 거짓말까지 하는 게 꼴사나워서 그렇지.”
그녀들은 자신들이 맞잡고 있던 큰오라비의 손이 크게 요동치자 깜짝 놀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하하하하하....”
그가 너무도 즐겁다는 듯이, 유쾌하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그 모습에 자신들도 모르게, 그녀들 또한 깔깔거리며 큰 소리로 따라 웃고 말았다.
분위기를 눈치채기라도 한 듯 어느덧 조용해졌던 복도에 남매들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 * *
검가전장의 어느 후원.
삼사공녀의 호위무사들이 멀찍이서 사방을 삼엄하게 통제하고 있는 가운데, 남매들의 모습이 있었다.
“큰오라버니께서 그리하실 예정이시라면…."
“저희도 큰오라버니를 돕고 싶어요.”
소녀들의 맹랑한 말에 연소현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
무어라 이야기를 해야 할까.
위험하다고, 너희를 보호하는 것은 자신의 역할이라고, 말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녀들이 위험 속으로 뛰어드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허락을 해 주어야 하는 것인가.
이 아이들은 사공자 연비처럼, 그 태생에서부터 피와 살육에 익숙한것도 아니었다.
그녀들을 사공자처럼 부릴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그녀들의 외가인 하씨 가문의 세력이 낙양검가 내에서 그녀들을 안전히 보호할 수 있을 정도로 큰 것도 아니었다.
그 뛰어난 신산의 지략도 이런 상황에서는 소용이 없었다.
'아버지라면 이런 상황에 어떻게 말씀하셨을까….’
두 소녀가 여전히 자신의 손을 꼬옥 붙잡고 온기를 전달해 주고 있는것을 느끼며 그가 입을 열었다.
“…후회하지 않겠느냐?”
그녀들은 조금의 망설임도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도 여기 오지 않았다면….”
사공녀 연다혜가 자신의 언니를 바라보며 말했다.
삼공녀 연다은이 그런 동생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큰오라버니를 만나지 못했다면, 오히려 후회했을 거예요.”
그녀들이 연소현을 바라보고 동시에 말했다.
“저희는 후회하지 않아요.”
연소현은 잠시 눈을 감고 마음을 정했다.
“그래….”
그가 아버지였다면, 했을 대답을 입에 담았다.
“어디, 마음껏 너희가 하고 싶은대로 해 보거라.”
그가 눈을 뜨고 미소를 지었다.
그 앞에 뻔히 위험이 도사리더라도.
어떤 강력한 권력자가 그녀들을 노릴지라도.
“이 오라비가 누구도 너희를 건드릴 수 없게 할 것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