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198화 (198/350)

제23편 고독(孤獨)

별관, 전장장 서재.

“전장장님.”

비서가 서책을 들여다보던 노인에게 물었다.

“작은 방 하나를 따로 준비해서, 증거가 될 수 있는 사본들만 보여 주었으면 되었지 않을까요?”

그녀가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굳이 역대 전장장님들의 모든 장부들이 남아있는 서고에까지 출입할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은….”

흰 수염의 노인, 전장장은 읽던 서책을 덮고 빙긋 미소 지었다.

“말했잖은가. 대공자님의 신뢰를 얻어야 한다고. 나는 거리낄 것이 없으니, 기회가 있을 때 모두 열어 보인 것이야.”

이런 특수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보는 눈이 많아 외부인을 최고 보안 구역에 들이는 것 자체가 불가 능했으니.

“시간상, 인원상, 중앙감찰각은 현재 사건들에 대한 자료를 파악하는 것만으로도 벅차겠지만….”

비서가 마른침을 삼켰다.

“만일, 설마 그게 가능할 것 같지는 않지만. 만에 하나라도 말입니다.”

말을 잇는 비서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들이 검가전장의 과거 자금 흐름을 추적이라도 한다면….”

전장장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답했다.

“그렇게 된다면, 전장장들만이 알고있던 사실들을 발견하겠지.”

그조차 알고도 묵인해올 수밖에 없었던, 검가전장의 가장 어둡고 깊은곳에 묻혀 있던 초대형 비리들을.

* * *

검가전장 본사,

전장장 전용 장부 서고.

최고 보안 구역.

전장장에 의해서 출입 권한을 얻은 중앙감찰각주 독고야연은 인원 두 명을 선정해 최고 보안 구역에 투입했다.

제한된 인원과 제한된 시간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

그녀의 최심복이라 할 수 있는 화복이 떫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들여다보던 장부 사본을 펼쳐 들기만 한 채, 그 시선은 옆에 있는 이에게 향하고 있었다.

“저기, 신입아.”

"......."

신입은 대답이 없었다.

그저 쌓아 둔 사본 서류들을 휘리릭 넘겨 보는 것에 바쁠 뿐.

“어이, 신입…!”

화복이 조금 더 큰 소리로 부르자, 그때야 신입이라 불린 이가 대답했다.

“예, 선배님. 무슨 일이십니까?”

그러면서도 신입은 커다란 안경을 추스르며, 서류들을 넘겨 가며 보기 바빴다.

어딜 봐도 대충 종이 사이에 뭐가 끼어 있는 것이 있나 훑어보는 정도로 보이는 행동이었다.

“아무리 봐도, 신기하네.”

화복은 그런 신입의 모습을 보며 황당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렇게 대충 넘겨 보는데, 내용을 전부 다 기억한다고?”

“별것 아닌 잔재주입니다.”

얼마 전, 독고야연에 의해서 특채로 선발되어 중앙감찰각에 합류한 신입이었다.

내원에 대한 기밀 보고서 작성을 통해 상부의 눈에 띄었다고 들었다.

“거, 신기하네….”

화복으로서는 실제로 보면서도 신입이 가진 비상한 기억 능력이란 것을 반신반의할 수밖에 없었다.

'듣기로는 전시(殿試)에서 수석을 먹었다더니. 그 정도하려면 저런 괴이쩍을 정도의 기억력이 있어야 하는건가…?’

그가 의심쩍은 눈으로 바라보든 말든, 전장장이 준비해 둔 서류를 모두 외워 버린 청년, 강호가 마지막 문서철을 덮었다.

"끝났습니다.”

“어, 어.”

화복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래, 수고 많았다.”

“선배님….”

강호가 한숨을 쉬며, 그를 돌아 보았다.

“저야 내용을 외우면 그뿐이지만, 그걸로 넘어가실 생각입니까? 각주님께서 화복 선배님을 저와 함께 투입하신 데에는 이유가 다 있으실 텐데요?”

그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든 화복이었다.

“엇?! 그렇지! 나도 얼른 봐야겠다.”

그가 정신없이 서류를 파고드는 모습을 확인한 강호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좋아, 이제….'

검가전장의 최고 보안 구역.

역대 전장장들만이 출입 가능했던 서고까지 들어와서, 그냥 보여주는 것만 확인하고 나가는 것은 멍청이나 할 짓이었다.

“으음. 이게 이렇게 연결되는 거였군

현재의 사건을 파악하느라 완전히 증거 서류에 빠져든 화복을 뒤로하고, 강호가 눈에 들어오는 모든 서류철과 장부 따위를 전부 읽어가기 시작했다.

"......."

일반적으로는 겨우 주어진 증거 자료의 사본을 확인하고, 사실관계를 맞춰가기도 빠듯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강호는 문맥을 파악하지 않고, 내용을 판단하지 않는다면, 시간 내에 중요해 보이는 모든 자료를 열람하고 외우는 것이 충분히 가능한 인물이었다.

그것이 강호가 가진 순간 기억 능력이니까.

'대공자님의 은혜로, 무사히 내원에 대한 기밀 보고서를 쓸 수 있었고, 중앙감찰각에 발탁되어 출세까지 할 수 있었다.’

과거, 내원에서의 사건을 통해 연소현과 만났던 그는 이미 충직한 대공자의 수하가 되었으니.

'이걸로 대공자님의 기대에 조금이라도 부응해 드릴 수 있겠지.'

그렇게 그를 통해서 과거로부터 이어진 검가전장의 자금 흐름 전반이 연소현에게 전달될 것이다.

그 안의 거대한 부정부패들까지도.

* * *

별관, 전장장 서재.

“그런데 자네는 이런 점은 생각해 보았나?”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지…?”

전장장이 의자를 돌려 앉아 다리를 꼬았다.

“어째서 대공자님께선 직접 장부 서고에 들어가지 않으시고, 중앙감 찰각주가 그 역할을 하게 두셨는지 말일세.”

“그건….”

비서를 위해서 전장장이 조금 더 실마리를 주었다.

“대공자께서 직접 장부 서고에 들어가셨다면, 그 비상한 두뇌로 비정상적인 자금 흐름 전반을 모두 파악하실 수 있으셨겠지.”

“아…!”

드디어 상황을 파악하고 큰 소리로 감탄을 하려던 비서가 급히 자신의 입을 막았다.

“중앙감찰각에 이 짧은 시간 동안, 그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인재가 있다는 것을 대공자께서 알고 계신다는 말이군요!”

그리고 이어서 깨달았다.

“그렇다면 대공자께서 중앙감찰 각주를 시험하시고 계신다는 말씀입니까?”

* * *

검가전장 본사.

중앙감찰각이 징발한 임시 수사 지휘실.

중앙감찰각주 독고야연이 그녀답지 않게, 실내를 서성이고 있었다.

'강호....'

강호는 꿈에도 몰랐지만, 그녀는 그를 중앙감찰각의 일원으로 맞아들이기 전에, 이미 그에 대한 뒷조사를 모두 끝냈다.

그녀의 직속상관인 감찰부주만이 알고있던, 강호의 순간 기억 능력에 대한 것부터.

심지어 그의 조부와 연소현의 관계까지도 파악했다.

물론, 강호가 연소현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없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 또한 그녀가 상정하고 있는 내의 상황이었으니.

'그러면서도 나는 강호를 전장장 전용 장부 서고에 투입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과 인원이 부족한 상황에서 강호같은 특이 능력을 보유한 인재를 투입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으니.

단지 연소현과의 관계가 의심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혁혁한 공을 세웠고 앞으로도 세울 수 있는 인재를 중앙감찰각에 발탁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이러한 상황을, 그 대공자라면 전부 알고 있겠지.’

그렇기에 대공자는 그녀의 중앙 감찰각이 전장장 장부 서고에 들어가게 둔 것이리라.

'강호를 다그쳐 파악한 정보들을 얻어 내는 것은 간단하지만.'

그 이후가 문제였다.

강호의 입에서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굵직한 비리들에 대한 정보들이 줄줄이 흘러나올 것이 뻔했다.

가주가 부재한지 십 년.

주인 잃은 창고에서, 낙양검가의 부패한 권력자들이 그동안 무슨 짓을 해왔을지 눈에 선했으니.

그리고 그 해묵은 부정부패들의 무게는 그녀와 중앙감찰각이 결코 단독으로는 감히 감당할 수가 없을 것이다.

'결국에 부외자인 대공자께 내 스스로 정보를 공유하며, 도움을 요청해야 하나…?’

수사를 하지 않고, 묻어 버린다는 선택은 그녀의 머릿속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사갈과 같은 이들로 들끓는 낙양검가의 최상부에서, 그녀가 따로 손을 잡아도 될 법한 이도 마땅히 없었다.

'...애초에 이것은 중앙감찰각이 제 발로 세력에 합류하게 하기 위한 대공자의 노림수였던 것인가.'

맨 처음, 익명으로 투서가 도착했을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사실상 그녀에게 선택지는 없었다.

그녀의 행동 양식, 가치관을 제 손바닥보듯 뻔히 들여다보고있을 연소현.

실로, 그가 짜놓았을 만한 판이 아닌가.

'...대공자는 중앙감찰각이 이 기회에 정치적 중립을 완전히 버리고, 자신의 세력이 되는 것을 바라는가.'

자신도 모르게 쥔 주먹이 분노로 부르르 떨렸다.

'결국에, 대공자도 다른 후계자 놈들과 똑같은....'

그때 서성거리던 그녀의 발걸음이 멈췄다.

'후계자…?’

* * *

“이제쯤, 그녀도 눈치챘겠지.”

전장장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이건 대공자님을 본가의 예비된 소가주로 여기느냐, 아니면 그저 후계자 중 하나로 여기느냐의 질문일세.”

“그렇군요…!”

비서가 감탄했다.

“대공자님을 소가주로 여긴다면, 당연히 파악한 자금 흐름을 보고해야 합니다! 그리고 대공자님의 협력을 구하는…. 아니!”

비서가 흥분하여 격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협력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대공자께 협조를 해야만 하는 것이 되겠지요.”

“그렇지.”

전장장이 흐뭇하게 웃었다.

“그렇기에 조금 전 전장장께서도 대공자님의 신뢰를 얻어야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로군요!”

전장장은 이미 대공자 연소현을 예비된 소가주로 여기고 있었기에, 그는 연소현의 신뢰를 얻는다는 방식을 택했다.

“중앙감찰각주에게도 마찬가지의 선택이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대공자는 독고야연의 선택지를 없앤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녀에게 선택권을 준 것이었다.

대공자를 예비된 소가주로 여기고, 그의 신뢰를 얻기위한 선택을 할 것이냐.

아니면, 그를 그저 한 명의 후계자로 여기고, 파악된 자금 흐름을 묻어 버리거나.

혹은 다른 협력자를 구하는 등의 선택을 해, 낙양검가에 넘쳐나는 또 한 명의 정치적 인물이 될 것이냐.

“그녀가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궁금하구나.”

“으음, 아마도….”

비서가 뭔가, 자신은 알겠다는듯이 말을 꺼냈다.

“짧은 생각일 뿐이지만. 그 성향상 차라리 고립을 선택했던 중앙감찰각주이니 만큼, 잘못된 선택을 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비서의 말을 들은 전장장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길, 나 또한 바란다네.”

그의 시선이 창밖을 향했다.

비서는 사색을 방해하지 않고자 조용히 물러났다.

'고립이라….'

독고야연과 마찬가지로, 자신 또한 고립되어 있었다.

이 시대에, 이 낙양검가에서, 옳은 길을 택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지금 현재, 누구보다도 고립되어 있는 이를 떠올렸다.

'대공자님.’

누구에게도 온전히 이해받지 못하고.

누구도 제대로 그의 생각을 따라 올 수 없다.

십 년의 칩거가 어떤 뜻에서 이루어졌던 것인지, 또 그것을 깬다는 것은 또 어떤 의미인지.

짐작하기조차 어려웠다.

그저.

'그분을 지지해줄 이들이 많아졌으면 좋겠구나.'

라고 생각할 뿐.

* * *

“큰오라버니….”

“오랜만에 뵙습니다.”

삼공녀 연다은과 사공녀 연다혜.

소녀들을 바라보는 연소현의 시선이 가늘게 떨려 왔다.

[자네의 첫째 여동생은 가문의 이름을 조금이라도 다시 빛내기 위해 마두(魔頭)들을 처단하러 다니다가 전대(前代)의 마인(魔人)을 만나 사지가 찢겨 죽었다네.]

연다은이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었다

[자네의 둘쨰 여동새은 자신의 쌍둥이 언니를 그렇게 잃은 뒤, 실성하여 거리를 에매다가 거칠게 비 내리던 어느 날 얼어 죽고 말았군.]

연다혜 또한 쌍둥이 언니의 손을 잡고 옆에 서 있었다.

"오라버니...?"

연소현은 그녀들의 맑은 눈망울에서 한 점의 그늘도 찾을 수 없었다.

호수에 잔잔한 파도가 치듯, 오랜만에 만난 혈육의 모습에 떨림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그 호수를 햇살에 반사된 보석처럼 눈부시게 빛나게 할 뿐

그녀들의 눈동자가 그녀들의 한점 때 묻지 않은 영혼을 비추는 것만 같았다.

“…그래.”

숨 쉬는 것처럼 자신의 육신을 제어하는 연소현이었지만, 그는 지금 이 순간, 자신이 어떤 목소리를 내고 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오랜만이구나”

자신의 목소리는 목이 메듯 잠겨 있을 것인가.

아니면, 반가움과 그리움에 떨려오고 있을 것인가.

“정말로, 오랜만이야….”

이 아이들은 살아 있었다.

당연한 듯이 자신의 눈앞에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그 옛날 그의 기억 속에만 남아있던 그 모습처럼.

아이들의 고운 두 뺨은 아직 젖살이 빠지지도 않은 채, 복숭앗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앙증맞은 코도, 가지런한 눈썹도, 모두 그 자리에 있었다.

그는 자신의 심장이 반가움에 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은아야, 혜아야:"

연소현은 그녀들의 아명(兒名)을 입에 담으며, 자신도 모르게 그녀들 쪽으로 한 발 다가섰다.

오랜만에 듣게 된 아명이 반가웠던 것일까.

“네, 오라버니.”

긴장했던 아이들의 입가에 자연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화창한 봄날의 따스한 태양 빛처럼 화사한 미소였다.

연소현은 그녀들을 향해 다가가며 자신의 양손을 펼쳤다.

“아….”

그는 보았다.

자신의 양 손바닥에 마른 피가 엉겨 붙어 있는 것을.

대충 닦아 냈었기에, 그대로 손에 남아 있던 무사들의 피였다.

그는 급히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내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 다른이의 생명을 대가로 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어머니.

그를 위해서 제 목숨을 깎아, 운명을 뒤틀었던 어머니.

'...단지 지금은 이 못난 아비에게 아비 노릇을 할 기회를 다오.'

아버지.

모자란 그를 위해서, 마지막까지도 무수한 안배들을 남겨주셨던 아버지.

자신은 그 모두를 잃었다.

자신과 가까웠던 모든 이가 목숨을 잃는 결말을 맞이했다.

자신이 베풀었던, 행했던 모든 것들은 시간이 흐르며 왜곡되기만 했다.

감정이 흔들려, 잊고 있던 것을 깨달았다.

제암진천경에 의해 돌아온 이후, 그는 한 번도 자신이 먼저 동생들을, 누나들을 찾지 않았다.

연비도, 연서린도 그들이 그를 찾 았을 뿐.

정치적인 상황?

자신이 마음만 먹었다면, 그런 것이 문제였겠는가.

자신은 두려웠던 것이다.

변해 버린 자신을 보여 주는 것이.

마기가 흐르는 육신을 가지고, 사람을 잡아먹고, 양의심공이 없이는 사람의 감정조차 유지하지 못하는 자신이.

그리고 그의 발악에 가까운 저항에도 상관없이, 가까웠던 모두를 잃었던 과거가.

두려웠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쌍둥이 자매들에게 물었다.

“나를..."

그가 쥔 주먹이 가늘게 떨려 왔다.

“이 오라비를 원망하지는 않는 것이냐?”

십 년 동안 너희를 외면하고, 모두를 외면하고, 세상을 등졌던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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