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편 고립(孤立)
낙양검가.
검가전장, 본사.
화북의 경제에 지배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검가전장의 수장인 전장장.
본사에서 복도를 통해 이어진 별관 하나가 모두 전장장을 위한 공간이니, 전장장의 지위가 어느 정도인지 보여 주는 일례라 하겠다.
“......."
하지만 그 연결 복도에서 걸음을 옮기는 연소현은 그런 화려함과 웅장함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그에게는 별관이 홀로 동떨어져 고립된 형상처럼 보였다.
“이쪽입니다.”
전장장의 비서가 열어 준 문을 통해 들어서자, 품격 있는 접객실의 풍경이 펼쳐졌다.
"대공자님.”
먼저 와 있던 홍독지주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에게 인사했다.
“행정동은 어떻던가?”
그의 말에 홍독지주가 고개를 숙여 답했다.
“훌륭합니다. 인원들도, 시설도, 어디 하나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가 고개를 끄덕여 주고 옆을 바라보았다.
“…대공자님.”
중앙감찰각주, 독고야연이었다.
“본각(本閣)의 수사에 대해 자세히 보고를 드릴 수는 없지만, 모든것이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래.”
“…단지. 증거들이 이미 많이 파기되어, 많은 부분을 진술들로 보강해야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군.”
기다리고 있던 연소현이 도착하자, 비서는 그들을 더욱 안쪽에 위치한 별관의 후원으로 안내했다.
연소현을 뒤따르며, 홍독지주가 흘긋 중앙감찰각주를 바라보았다.
'그 유명한 백발백안의 귀신. 대공자님과는 어떤 관계일지….'
조금 전 접객실에서 만나 인사만을 나눈 뒤, 그들은 단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었다.
홍독지주가 시선을 다시 앞으로 돌린 후, 이번에는 중앙감찰각주 독고야연이 그녀를 슬쩍 바라보았다.
'홍(洪)씨 성을 쓴다는 것과 당문 출신이라는 것, 그리고 사공자의 최측근이라는 것 이외에는 밝혀진 것이 없는 여인.'
그런 그녀가 자신을 대공자의 행정동 책임자, 사무장이라 소개했었다.
독고야연은 시선을 돌려, 먼저 걸어가는 연소현을 바라보았다.
'...대공자는 이제 사공자의 세력을 흡수하기 시작한 것인가.'
하지만 그녀들의 머릿속에서 서로에 대한 것은 금방 밀려났다.
'검가전장의 전장장.’
'과연 어떻게 나올지….'
독고야연에게 전장장은 현재 수사 대상의 수장이었고, 홍독지주에게 전장장은 낙양검가의 최고 권력자 중 하나였다.
상대는 검가전장의 전장장이라는 이름 하나만으로, 황도에서도 후한 대접을 받을 최고위 인사였으니.
'적대적이지만 않았으면 좋겠는데. 문제가 생겨도, 대공자께서 다 생각이 있으시겠지…?’
'…최악의 경우엔 부전장장에 이어서 전장장까지도 상대해야 할 각오를 해야겠어.'
하지만 그녀들의 우려와 예상들은 검가전장의 전장장을 만나는 순간 무너져 내렸다.
"검가의 전장을 책임지고 있는 허(栩) 모가 본가의 대공자님을 뵙습니다.”
꼿꼿하고 바른 자세에 허연 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의 모습은, 정중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무엇보다 먼저, 대공자님께서 이곳까지 직접 오시도록 수고를 끼친 점을 사과드리겠습니다.”
검가전장의 전장장이라는 위치는 낙양검가 내에서도 중진에 해당하기에, 검가건축의 총수와 마찬가지로 대공자에게 평대를 하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그는 연소현을 처음 만났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도.
단 한 번도, 정중함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런 노인을 바라보는 연소현의 눈에 미안함과 안쓰러움이 스쳐 지나갔다.
“…고생이 많소, 전장장.”
연소현의 말에 노인이 더욱 깊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고생이라니요. 창고지기로서 그 맡은 바 책무조차 제대로 다 하지도 못하고 있는 자가 어찌하여 고단함을 논하겠습니까.”
그 검가전장의 전장장이 자신을 한낱 창고지기라 표현했다.
“......."
그 모습에 두 중년 여인의 시선이 연소현과 전장장 사이를 빠르게 오갔다.
'이 두 사람은 원래부터 친분이 있는 사이였던 것인가?’
'...과연. 저번에 대뜸, 검가전장으로부터 거액의 투자금이 들어왔을 때부터 이상하기는 했지만.'
그런 생각과는 달리, 그녀들은 숨소리조차 낮추고, 몸가짐을 조심했다.
이 자리는 낙양검가의 대공자와 검가전장의 전장장이 만나는 자리였으니.
“전장장. 그런 말 하지 마시오 그대가 아니었다면, 오늘의 수사 또한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니.”
“......!"
연소현의 말에 두 여인은 깜짝 놀란 기색을 가까스로 감추었다.
“별것 아니었습니다.”
“별것 아니라니. 훌륭한 판단과 결단이었소.”
전장장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저는 그저 내원총관의 사례를 참조하여 그 흉내를 내어 본 것에 불과합니다.”
'그랬군...!'
그때야 상황을 이해한 독고야연이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원총관은 대공자가 내원을 뒤집어 놓았던 것을 역으로 이용해서, 내원의 부패한 일원들을 쳐 내는 데 활용했었다.'
검가전장의 전장장은 그것을 보고, 연소현과 함께 이번 판을 꾸민 것이었다.
“중앙감찰각주.”
장막 뒤에 가려져 있던 고리들을 풀어내며,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급히 대답했다.
“...예, 대공자님.”
연소현이 그녀를 돌아보며 말했다.
“지금 자네가 어디에 머리를 들이밀고 있는지, 이제 알겠는가?”
그것은 과거, 연소현이 그녀에게 내렸던 가르침이었으며, 그 이후로 그녀가 마음속에 늘 품고 있던 행동 강령이기도 했다.
“…예, 대공자님.”
그녀가 자신이 파악하고 있던 사항과 새로 풀어낸 상황을 합쳐, 담담히 입에 담았다.
“감찰부주께서 중앙감찰각의 움직임을 눈감아 주셨던 것은, 전장장님께서 대공자님과 판을 열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하다.”
그녀는 몰랐지만, 부전장장이 감찰부가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을 것이라 여기고 있었던 것 또한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감찰부주가 부전장장을 속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눈가의 주름을 살짝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감찰부주께서는 정치적 중립을 무너뜨렸다는 명분으로 공격당할 중앙감찰각과 거리를 두기 위해서, 수사 허가가 아니라, 묵인을 선택하신 것이었습니다.”
곧 수사의 여파가 중앙감찰각을 뒤흔들 것이다.
중앙감찰각에 원한이 있던 이들, 중앙감찰각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이들 전체가 달려들 터였다.
“후회하는가?”
연소현의 질문에 그녀가 즉각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미 각오한 바입니다.”
그녀도, 그녀의 수하들도, 전부 각오는 마쳤다.
“중앙감찰각을 건드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본가 전체에 보여 줄 것입니다.”
그런 그녀를 향해 연소현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역시 훌륭하군.”
무어라 답해야 할까.
“......."
독고야연은 그저 고개를 숙여 보였다.
“하지만 그 여파는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야.”
“…무슨 말씀이신지?”
연소현이 미소와 함께 답했다.
“내원총관. 그 늙은이가 이번 기회를 그냥 넘길 리가 없지.”
“......!"
“내원총관은 검가전장의 썩은 살을 도려내기 위한 기회를 놓칠리가 없을 것이야.”
독고야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게다가 저번 대공자님과의 사건 이후, 위축된 자신의 입지를 다시 확보할 필요도 있으니.”
연소현이 어깨를 으쓱였다.
“자신이 건재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그 노괴는 마치 광견(狂犬)처럼 달려들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중앙감찰각이 문제가 아니었다.
검가전장은 검가의 재산을 담당하는 곳이고, 모든 권력자는 각자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검가전장과 관련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검가전장의 어두운 부분또한 포함하는 말이었으니.
“…본가가 또 한바탕 뒤집히겠군요.”
연소현이 빙긋 웃었다.
“그래서 감찰부주가 중앙감찰각을 통해 먼저 선수를 치면서도, 동시에 묵인이라는 형태로 자신이 한 발 물러설 공간을 만들어 둔 것이지.”
“...그랬군요.”
독고야연이 눈을 감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나는 많이 부족하구나.'
그녀는 무표정한 표정 아래서,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독고야연.”
연소현이 그런 그녀의 속을 짐작이라도 하듯, 부드러운 어조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대의 능력은 이미 충분하다. 그대는 아직 더 많은 정보를 취급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닐 뿐이야.”
“게다가….”
가만히 그 대화를 지켜보던 전장장이 입을 열었다.
“이 검가가 제대로 돌아가기 위해서, 모든 이들이 정치 감각의 달인이 될 필요는 없소. 오히려 모두에게 그런 것을 요구하는 현재의 본가가 잘못된 것이지.”
노인이 손을 들어 자신을 가리켰다.
“이 노부만 하더라도, 정치적인것과는 거리가 멀다오. 부족한 편이지. 하지만 자신의 자리에서 그 역할에 최선을 다하기만 한다면….”
노인이 연소현을 바라보았다.
“언젠가 오늘처럼, 그 뜻을 알아주는 지도자가 나타나, 문제 해결을 도와주는 것이지.”
“......."
연소현은 그의 시선을 피해 괜히 저편을 바라보았다.
“중앙감찰각주.”
그런 연소현의 모습을 미소와 함께 바라본 전장장이 독고야연에게 말했다.
“내 비서를 따라가시오.”
전장장의 말에 뒤에서 죽은 듯이 대기하고 있던 비서가 고개를 숙여 보였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독고야연이 무슨 일인지 묻기 전에 전장장이 먼저 말을 해 주었다.
“부전장장 계파가 전장 내부의 증거 서류들을 대부분 파기했지만, 노부가 미리 손을 써, 그 사본들을 확보해 두었다오.”
노인은 자신을 정치 감각이 뒤떨어지는 자라고 표현했지만, 독고야연이 보기엔, 전혀 그렇게 생각되지 않았다.
'역시….'
그는 단순한 조직도 아니고, 수많은 이권이 직접 관련된 검가전장을 이날까지 홀로 지탱해 온 거인이었다.
“…전장장님의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전장장은 그녀에게 조금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단지. 그 사본들에 대해서 한가지 당부하고 싶은 것이-.”
이런 상황에 익숙한 독고야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십시오. 사본들이 외부로 유출되거나, 법적 증거물로 사용될 일은 없을 것입니다.”
사본의 가치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전체 그림을 훤히 들여다 보게되는 정도로도 충분했다.
“…고맙소.”
조직의 수장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외부의 공격이 있는 상황에서 수하들을 손수 쳐내는 모양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 일은 부패에 연루되지 않은 이들까지도 영향을 받게 하고, 수장을 향한 신뢰가 하락하기 마련이기 때문이었다.
“그럼.”
독고야연이 비서를 따라 물러난 이후, 연소현이 홍독지주를 불렀다.
“사무장.”
“…아, 예! 대공자님.”
이번 일에서 배운 것들을 되새기고 있던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답했다.
“여기 있습니다.”
그녀는 준비해 온 전표 다발을 품에서 꺼내, 전장장에게 정중히 건넸다.
“대공자님, 이것은…?”
“당장 수사가 들어갔지만, 한 번에 검가전장의 내부 정리가 끝날리는 없지 않소?”
그 내원총관이 군림하는 내원조차, 내부 정리에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니 여러 계파가 난립하고 있는 검가전장에서 전장장이 원래 위치를 되찾고 조직의 정비를 마치는 것에는 그 이상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당장에 부전장장부터가 이번 수사에서 벗어나 있지 않던가.
“사업 지원단이 검가전장을 통해 투자했던 자금을 회수할 때, 사용해 주시오.”
전장장의 눈빛이 번뜩였다.
“…이번 기회에 아예 사업들을 본가의 그늘에서 벗어나게끔 할 생각이시군요.”
“그렇소. 그런데….”
연소현이 짐짓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사업 지원단과 관계없이, 그대가 투자해 준 금액은 아직 준비하지 못했소.”
전장장 직권으로 검가전장이 연소현에게 투자했던 금액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건 걱정하지 마시지요.”
전장장이 웃음을 지었다.
“아직 이 노부에게 그 정도 힘은 남아 있습니다.”
연소현이 코를 스윽 문지르고 말했다.
“그 대신이라기엔 뭣하지만…. 조만간, 거대한 투자건수가 있을 것이오.”
“투자 건수…, 말입니까?”
연소현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걸렸다.
“그렇소. 전장 내부의 정리에는 도움이 되지 않겠지만, 단박에 그대의 위치를 되찾아 줄 만큼, 대단한 건수지.”
* * *
별관에서 벗어나던 홍독지주가 연소현을 불렀다.
대공자님.”
“음?"
그녀가 물어도 되는 부분인지, 긴가민가하면서도 성격상 결국 질문을 꺼냈다.
“혹시, 전장장님과는 어떤 방법으로 과거로부터 신뢰 관계를 구축 해오셨던 것입니까?”
“......?"
연소현이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보자, 그녀가 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닙니다. 개인적인 부분이실 터이니, 말씀해 주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연소현이 그런 그녀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와 나에게는 과거로부터 구축된 신뢰 관계 같은 것이 없다.”
“…예?”
* * *
대공자와 홍독지주가 멀어져 모습을 감춘 뒤에, 전장장에게 질문 했던 비서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대, 대공자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으셨다고요?”
“그렇네.”
전장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전장장에 임명된 것은, 최고 운영 회의가 설립된 이후였네. 그전까지 나는, 자네도 알다시피 외부 지점에 있었지.”
“......."
멍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비서를 향해, 전장장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서 대공자님을 직접 뵌 것은, 저번이 처음이었다네.”
저번이란, 그가 내원의 징벌적 배상금과 관련된 일로 원각정을 방문했을 때를 가리켰다.
“…그런데 어찌 대공자님을 그렇게 쉽게 신뢰하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까?”
“신뢰라.”
한참을 멍하게 있다가, 질문한 비서에게 전장장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대공자님과 내가 서로 신뢰를 형성해야 하는 것이 아닐세.”
그가 낙양검가의 중책을 맡은 일원으로서 품고 있던 마음가짐을 입에 담았다.
“내가 대공자님의 신뢰를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지.”
그는 깊은 생각에 잠긴 비서의 어깨를 두드려 준 후, 돌아서서 걸음을 옮겼다.
'물론, 그뿐만은 아니지만.'
노인은 자신의 가장 가까운 수하에게도 감히 말해 줄 수 없는 이유 한 가지를 속에 품고 있었다.
'아마도 다음 본가의 전장장은 자네가 될 걸세.’
그것은 과거에 그가 책임지고 있던 지점에 방문한, 태상가주가 남긴 말이었다.
'만일 내게 무슨 일이 벌어진다면….'
노인은 태상가주의 목소리를 되새기며,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본가에는 소현이 녀석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게나.'
* * *
검가전장의 본사 전각에 다시 발을 디딘 연소현은 얼굴에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이거, 참….'
복도에서 그를 마주한 두 명의 소녀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미소가 유독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은 기분 탓이 아니었다.
“큰오라버니….”
“오랜만에 뵙습니다.”
삼공녀 연다은과 사공녀 연다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