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편 존재 의의(意義)
과거, 낙양검가가 점차 세력을 확대하며, 천하제일가로서 자리를 잡아 갈 때.
범죄 수사 전문 기관의 필요성을 느껴 설립한 조직이 있었으니, 이를 호법원(護法院)이라 칭했다.
* * *
오늘 오전.
낙양검가, 호법원.
호법육부장(護法六部長) 집무실.
'...대공자가 결국 일을 냈구먼.’
육부장이 지난밤 들려오던 소문에 대한 호법원의 정보 보고서를 확인하며 하루의 업무를 시작하는 중이었다.
'북망산을 제집처럼 드나들고, 죄악계곡에서는 무공까지 펼쳐?’
그는 혀를 내둘렀다.
'…대단하구먼.,
그는 속칭 '내원 책값 사건' 때, 수사를 맡았던 인물 중 하나로, 연소현과 면식이 있었던 자였다.
“그 대공자가 오늘은 또 무슨 사고를 치려나….”
강 건너 불구경이라더니, 육부장의 행태가 딱 그러했다.
'어차피 대공자와 이공자가 뭔짓을 하든 호법원과는 상관이 없으니까.'
그렇게 중얼거리며, 어젯밤까지 처리중이던 사건의 수사 기록을 꺼내 들던 참이었다.
“부장님!”
문이 벌컥 열렸다.
육부장 휘하의 호법사자가 서류를 한 아름 안고 들어왔다.
“그, 그게 다 무엇이냐?”
수하의 대답에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것들 전부가 새벽에 익명으로 우리 부서에 투서된, 자료들입니다!”
“뭐야?!”
수하가 밝은 표정으로 외쳤다.
“제가 대충이나마 뒤적거리며 검증을 해 봤는데, 신뢰도가 충분한 것으로 보입니다! 당장에 수사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건수도 몇 개나 있어 보입니다!”
'대, 대박이다!’
내부 고발일까.
아니면, 경쟁 부서의 작업일까.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지…!’
이 정도 양에 신뢰도까지 어느정도 확보되었다면, 그건 보물 더미가 거저 굴러 들어온 것과 마찬가지였으니.
'부처님! 감사합니다!’
하지만 육부장의 함박웃음은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이게 무슨 일이지?”
호법원의 모든 부가 자신과 정확히 동일한 투서를 받은 것이 확인되었기 때문이었다.
호법원이 발칵 뒤집혔다.
* * *
현재.
호법원, 제일(第一) 회의실.
'으음.’
속으로 침음을 삼키며, 호법육부장이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었다.
'...우리는 검가의 어둠을 밝히는 검(劍)이다.'
그는 호법원 신조(信條)의 일부를 속으로 중얼거렸다.
입 밖으로 꺼내어 중얼거린 것이 아니었지만, 몇 시간 동안 웅변을 토한 것처럼 목이 칼칼했다.
연초를 너무 많이 피운 탓이었다.
'우리는 검가의 불의를 베고 정의를 구현하는 검이다.'
그는 연초 연기 사이로, 회의실의 상석을 바라보았다.
“따라서 이번 안건 같은 경우에도….”
회의의 진행을 맡고 있던 이부장(二部長)이 기침을 몇 번 하더니, 식힌 차를 한 모금 들이켜 지친 목을 달랬다.
점심 무렵부터 시작된 회의가 아직도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번 안건 같은 경우에도, 호법원의 정치 중립을 훼손한다는 판단아래, 수사는 없고, 안건은 계류(繫留)하도록 하겠습니다.”
“......."
호법육부장은 회의의 결정에 따라, 자신의 앞에 놓여 있던 수사 안건 하나를 바닥에 내렸다.
바닥에는 이미 수사 안건 서류로 탑이 쌓여, 허리를 굽힐 필요도 없었다.
전부 이번 회의에서 수사하지 않기로 결정 내린 안건들이었다.
“나머지 또한 마찬가지다.”
호법원의 수장, 호법원주(護法院主)가 남아 있는 몇 개의 서류를 두드렸다.
“우리 호법원은 정치적 중립성을 훼손하는 어떤 수사도 하지 않을것이다.”
호법육부장을 제외한 모든 부장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길었던 회의의 끝이 보이는 순간이었으니.
호법이부장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삼키며 말했다.
“…이것으로 오늘 오전에 들어온 익명의 투서에 관련된 수사는 없는것으로 결정이 났습니다. 이 결정에 따라 투서들은 전부 회수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녀의 시선이 좌중을 훑었다.
“혹시나 공을 노리고, 미리 수사를 시작한 부가 있다면, 즉시 수사를 중단하도록 해 주시길.”
몇몇 부장이 인상을 찌푸렸지만, 이내 수긍했다.
이렇게 묻히는 안건이 어디 한둘이던가.
“…그냥 이렇게 묻어 버려도 되는 것일까요?”
재떨이에 연초의 재를 털던 육부장은 좌중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된 것을 느끼고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아….”
자신도 모르게 속마음이 입으로 나온 모양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기왕에 이렇게 된 거, 그는 하고 싶었던 말을 떠들어 보기로 했다.
“사실, 이 검가 내부의 사건을 조사하는데, 정치적이지 않은 건수가 몇 개나 있겠습니까?”
한번 입이 열리자, 그다음은 수문 열린 둑처럼 말이 쏟아져 나왔다.
“이런 식으로 전부 쳐 내다 보면, 본가 내의 불온한 무리들이 더욱 날뛰게 될 것이고, 그건 결국 호법원의 위상과도 직결되는 문제가 되어 버릴 겁니다.”
“육부장.”
“예, 이부장님. 듣고 있습니다.”
“자네는 부장을 단 지가 언젠데, 아직도 정무적 감각이 그것밖에 안되나?”
“......."
이부장이 울컥하는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육부장에게 한심하다는 시선을 보내며 말을 이었다.
“이런 방식으로 하루아침에 갑자기 정보들이 쏟아져 들어온 걸 보면 모르겠나?”
그의 옆자리에서 가만히 입을 다 물고 있던 오부장이 딱 한 마디를 뱉었다.
“대공자.”
그 말에 육부장의 눈이 커졌다.
“…대공자, 말입니까?”
이부장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호법원을 휘둘러 이공자에게 타격을 주기 위한 계책이다.”
"......?!”
“각각을 보면, 상관이 없어 보이지만, 파고들어 가다 보면, 틀림없이 모든 사건이 어느 지점에서 이공자 측과 관련되어 있는 건수들이다.”
“......."
육부장은 좌우를 돌아보았다.
조금 전에 미리 수사를 시작한것 같은 기색을 드러냈던 부장들 또한, 한 점 놀람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저들은 전부 알고도 수사를 하려 했었던 것인가?’
그가 속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 없지.’
그들은 수사를 하는 척하면서, 자신에게 유리하게 건수들을 이용해 보려 했을 것이다.
그것이 회의에서 금지당해, 아쉬움을 잠시 표했던 것뿐이고.
“육부장, 그대 말대로. 우리가 정치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수사를 덮어 버린다면, 제대로 수사를 할 수 있는 건이 없겠지.”
이부장이 육부장을 보며 비웃음 비슷한 것을 지었다.
“하지만 어떤 수사는, 다른 수사보다 훨씬 정치적인 수사도 있는 법이다.”
묵묵히 생각에 잠겨 있던 호법원주가 책상을 두드렸다.
“회의는 여기서 끝이다. 각자 통상 업무로 돌아가도록.”
육부장을 제외한 부장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생들 하셨습니다.”
기지개를 켜는 이도 있었고, 다른 부장과 잡담을 나누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공통점이 있다면, 그들은 회의실 밖으로 나가면서, 아직도 자리를 지키고 있던 육부장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는 점이었다.
“열심히 정무 감각을 키우지 않으면, 부장직 유지하기가 쉽지가 않을 것이야.”
“뭐, 우리도 처음엔 다 그랬어 부장 초년(初年) 차가 다 그렇지.”
“다 그렇게, 몸으로 구르면서 배우는 걸세.”
충고의 형식을 띠고는 있었지만, 도움이 되기는커녕, 얄밉기 짝이 없기만 한 말들이었다.
“......."
인상을 쓰고 앉아 있던 육부장이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육부장.”
그런 그에게 말을 건 것은, 호법원주와 근접 전음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던 일부장이었다.
“잠시 나가서, 나와 대화 좀 하지.”
* * *
호법원의 어느 작은 후원(後園).
호법원주와 마찬가지로 장로원의 일원인, 일부장이 육부장에게 말했다.
“처음엔 헤맬 수밖에 없는 부분들이 있지. 아직 경험이 부족한 것 뿐이니, 조급해하지 말게.”
그가 육부장에게 빌린 연초를 입에서 떼고, 길게 연기를 뿜었다.
밤공기에 연기가 스며들듯이 자취를 감추었다.
“자네의 타고난 감각은 내가 인정한다네. 경험이 좀 쌓이면, 금방 다른 부장들을 넘어서는 능력을 보여 줄 것이야.”
“…선배."
평소였다면, 장로 위(位)까지 오른 선배의 말에 기분이 누그러들었을 육부장이었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제가 애송이도 아니고. 그것 때문에 이러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일부장을 바라보았다.
“아까 그 건들. 대공자가 익명으로 투서한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분명 중대한 사건들입니다. 심지어 '검가전장'의 고위직이 연루된 것으로 보이는 사건도 있습니다. 그런 건수들을 그냥 묻어 버려도 되겠습니까?”
“......."
일부장의 주름진 안면이 꿈틀거렸다.
“그래서, 저 진창에 다 같이 처박혀 뒹굴자고?”
“......."
일부장이 피우고 있던 연초를 바닥에 떨어트리고는 발로 밟아껐다.
“…자네의 가족을 생각하게.”
연초가 발에 짓뭉개지는 모습을 보며, 육부장이 침음을 흘렸다.
함부로 후계자 정쟁에 끼어드는 이들이, 발에 밟힌 연초처럼 짓이겨져 나가는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
멀어지는 선배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육부장이 시선을 밤하늘에 향했다.
“…그래. 가족을 생각해야지.”
* * *
그 시각.
낙양검가 경비단의 경비대원들이 영문도 모른 채, 행인들의 접근을 차단하고 있는 한 골목에 위치한 창고.
붉은 정복(正服)을 입은 이 하나가 창고의 지하로 내려와 보고했다.
“각주님. 삼(三)조의 배치가 끝났습니다.”
각주라 불린 중년 여인은 주변의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붉은 정복을 입고 있었다.
“이제, 모든 조의 배치가 끝난것인가?”
화장기 하나 없는 강퍅한 인상의 여인의 물음에 조장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예, 각주님.”
망설임은 없었다.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작전을 개시하도록.”
“충(忠)!”
대답은 짧았고, 행동은 즉각적이었다.
작전이 개시되자, 그녀의 수하들이 재빠르고 정확하게 움직였다.
창고 밖으로 나온 중년 여인의 백발이 바람에 휘날렸다.
“…각주님.”
중앙감찰각주, 독고야연.
그녀 특유의 백안이 자신을 부른 수하에게 향했다.
"뭐냐, 화복.”
항상 능글거리던 그답지 않게, 화복은 입맛을 다시며 조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이거, 괜찮을까요?”
온갖 질문이 함축적으로 담긴 물음에 그녀가 서늘한 코웃음을 쳤다.
“네 주제를 넘는 고민을 하기 이전에, 명령부터 수행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명을 받들겠습니다.”
화복은 잠시 머뭇거리며, 뭐라 말을 하려다가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골목을 뛰어나갔다.
그녀가 충직한 수하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들어 거리의 저편을 향했다.
그녀의 수하들이 각 방향에서 거대한 전각에 빠르게 접근하고 있었다.
'검가전장.'
입맛이 씁쓸했지만, 언제나처럼 그녀의 표정에 자신의 감정이 드러나는 일은 없었다.
"어이쿠, 이게 누구신가.”
“......!"
기척도 없이 들려온 목소리에 홀로 서 있던 그녀가 반사적으로 검 손잡이를 쥐었다.
“그 이름 높으신 백발백안의 귀신이 아니시던가?”
슬쩍, 골목의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소년은 그녀가 아는 인물이었다.
“대공자…!”
그는 중앙감찰각을 움직이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대공자 연소현은 그녀의 주변에 아무도 없는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는 슬며시 다가왔다.
“이야. 역시, 중앙감찰각은 움직이기로 했나 보군.”
그가 능청을 떨었다.
“좀 위험하지 않나? 호법원도 움직이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들었다만.”
독고야연은 시선만으로 대공자를 불태워 버릴 것같이 노려봤지만, 그는 언제나 그렇듯,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대의 상관인 감찰부주(監察部主)는 허가를 내주지 않았을 텐데 말이지.”
어느새 그녀의 옆에 다가온 그가 뒷짐을 지고, 멀리 그녀의 수하들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중앙감찰각의 정치적 중립성이 훼손될 것이야. 그대는 그래도 괜찮은가?”
그녀가 씹어 먹듯이 답했다.
“…범죄 증거를 눈앞에 두고 움직이지 않는 것이, 중앙감찰각의 정치적 중립성을 훼손하는 것이지요.”
그녀의 자긍심과 신념이 담긴 대답.
“그거 좋은 답변이군!”
그 답변에 연소현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훌륭해. 아주 훌륭해.”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연소현의 모습에 화가 치솟은 그녀가, 분노를 다스리며 말했다.
“…아직 쥐고 있는 증거가 있다면, 지금 넘기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녀의 말에 연소현이 어깨를 으쓱였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걸? 나는 그저 지나가다가 반가운 얼굴이 있어 말을 걸어 본 것뿐이야.”
순간 벌컥 화를 내려던 그녀가 참아냈다.
연소현이 그 익명으로 투서된 서류들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 문제가 훨씬 복잡해진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혹시 추가적으로 투서가 이루어질 것 같다는 정보를 들은 적이 없으십니까?”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지.”
그가 그녀를 돌아보며 환히 미소 지었다.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알겠나?”
으드득, 그녀의 이빨이 갈리는 소리가 났다.
“그럼 도대체 여긴 왜 온 겁니까?”
“음? 내가 중앙감찰각을 찾아온 것이 아니야.”
연소현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냐는 듯이 그녀를 바라봤다.
“중앙감찰각이 내가 방문하려던 검가전장에 들이닥친 것이지.”
그러고는 특유의 휘적휘적한 걸음으로 검가전장으로 향하는 연소현이었다.
“그럼 이만. 나는 선약이 있어서.”
도대체 그가 그리고 있는 그림은 무엇인가.
그의 뒷모습을 노려보는 독고야연의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