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편 선택(選擇)해라
낙양검가, 검가건축.
총수(攜帥) 집무실.
낙양검가의 장로라면, 웬만한 중소 가문의 가주와 동석하더라도, 상석(上席)에 앉을 만한 지위다.
“......."
하지만 그런 장로들이 무려 셋이나 모여 있음에도, 거만을 떨기는 커녕, 정중하고 공손하게 앉아 있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은 진풍경이라 할 만했다.
“흐음.”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이 들어와 있는 집무실의 주인이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공자 측이 내게 이런 요구를 한다고?”
낙양검가건축 사업체의 최고 경영인-검가건축의 총수가 인상을 썼다.
“어처구니가 없군.”
노동의 흉터가 가득한 커다란 손이 이공자 측의 제안서를 구겨 버렸다.
“총수…!”
“요구라니요, 어찌 표현을 그리 하시는 것이오?”
누가 봐도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무례한 행위였다.
하지만 오히려 이공자 측의 장로들은 절절매며 총수의 비위를 맞추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것은 요구가 아니라, 저희 측의 제안에 불과하오. 그것도 매우 호의적인 제안이 아니오?”
낙양검가에는 이미 너무 강력한 자리에 있기에 장로가 될 수 없는 이들이 있었고, 검가건축의 총수가 바로 그런 이들 중 하나였으니.
“그쪽에서 제시한 대가가 대단히 크긴 하지.”
낙양, 그리고 낙양을 넘어 하남성을 지나 중원국 전역에서 가장 이름높은 건축 사업체의 수장이 보기에도, 이공자 측이 제시한 제안의 대가는 분명히 훌륭했다.
“그, 그렇지 않소?”
그의 말에 이공자 측의 장로들이 반색했다.
“그에 반해 우리 측은, 총수의 작은 호의를 바라는 것뿐-.”
“작은 호의라고?”
검가건축의 총수가 그의 말을 끊었다.
“당분간 대공자 측의 의뢰를 우리 검가건축에서 전부 거절해 달라는 것이 작은 호의라고?”
그의 말에 이공자 측 장로들이 손사래를 쳤다.
“아직 의뢰가 실제로 들어온 것도 아니지 않소?”
검가건축의 총수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하지만 죄악계곡을 용봉지회 개회 이전에 재건축해 내려면, 대공자 측은 결국 우리 검가건축에 의뢰를 할 수밖에 없지.”
이공자 측 장로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웃어 보였다.
“그건 옳으신 말씀이지만.”
“하하. 그들이 그런 자금이 있을리가 없지 않소.”
만에 하나.
연소현 측이 만일 지금 받고 있는 자금 압박을 이겨 내더라도, 의뢰비가 비싸기로 유명한 검가건축을 고용하는 것은 불가능했으니.
“그렇다 한들, 애초에.”
검가건축의 총수가 흉터가 가득한 손을 들어 자신을 가리켰다.
“이 나를...."
그러고는 바닥을 가리켰다.
“그리고 이 검가건축을, 더러운 흙탕물 싸움에 불과한 후계자 정쟁에 끌어들이려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단 말이다.”
그는 구겨진 제안서를 장로들이 보는 앞에서 바닥에 던졌다.
“이 대화는 여기서 끝이다.”
축객 령이었다.
“이런, 이런….”
장로들이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안을 거절당하고, 쫓겨나는 것과 마찬가지인 그들이었지만, 의외로 그들의 낯빛에 난처한 기색은 없었다.
“우리 측은 제안의 대가와 별도로, 대가로 명시되어 있던 사업권들을 전부 검가건축에 의뢰해 이미 접수를 마쳤다오.”
“큰 건수들을 알아서 가져다주 , 좋아서 어쩔 줄 모르더군.”
“지금쯤 밑에서는 총수에게 올릴 결재 서류를 작성하고 있을 것이오.”
그 말에 총수의 송충이처럼 굵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
말문이 막힌 총수를 보며 이공자측 장로들이 이죽거렸다.
“축하받을 만하신 일이오. 그 큰 사업권들을 그저 가만히 앉아 있다가 전부 얻게 되시다니.”
“대신 그 대형 의뢰들로 인해, 낙양 근처의 검가건축의 인력은 모두 동원되어야 할 터이니.”
“이렇게 된 이상, 대공자가 의뢰를 하든 말았든, 검가건축이 죄악계곡 사업에 손을 댈 여력은 없겠지.”
그들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진해졌다.
“정치적 중립을 그 입에 담아 놓고, 설마 우리측 의뢰를 총수 선에서 거절하실리는 없으시겠지요?”
“......."
막대한 자금과 정치적 자원, 그리고 실질적인 이권을 수두룩하게 쥐고있는 이공자 측이기에 할 수 있는 막장에 가까운 전술이었다.
그들은 집무실의 문고리를 잡고 말했다.
“우리 측이 총수에게 제안을 한것은 어디까지나, 밑바닥에서부터 성공 신화를 만들어낸 그대를 존중하기 때문이라오.”
"만에 하나를 막기 위해, 총수의 확답을 들으려는 것도 있긴 하지.”
그들이 꾸벅하고 고개를 숙여 보였다.
“다음엔 확답을 주실 만큼 더 훌륭한 제안을 들고 찾아뵙겠소.”
“다시 한번 대형 사업들의 수주를 경쟁 하나없이 따낸것을 축하드리오.”
그들은 문을 닫지도 않고 그대로 열어 놓은 채, 뒤돌아 떠났다.
“그럼.”
총수의 따가운 시선을 등 뒤로 받으며,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여유 작작한 걸음으로.
“......."
밖에 대기하고 있던 비서가 급히 달려와 조심스럽게 집무실의 문을 닫으려 했다.
검가건축의 총수가 말했다.
“내가 명을 거둘 때까지, 그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게 해라.”
“예, 총수님.”
인기척이 전부 사라지자, 총수가 입을 열었다.
“…이걸로, 모두 그대가 말했던 대로 되었군.”
그가 자신의 집무실에 바로 연결된 내실(內室)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대공자.”
내실의 최고급 문짝이 소리도 없이 열리더니, 연소현이 얼굴을 내밀었다.
“이야. 역시 그 이름 높은 검가 건축의 총수 정도 되니, 집무실에 딸린 내실도 어마어마하구려.”
소년은 딴청을 부리며 감탄을 표했고, 검가건축의 총수는 그런 대공자 연소현의 의뭉스러운 태도에 불쾌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착각하지 마시오.”
그가 자리에서 자신의 거대한 덩치를 일으켰다.
과거 건축 현장에서 잃었던 한쪽 다리를 대신하는 의족(義足)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대공자. 그대가 이 대화를 들을 수 있게 해 준 것은, 어디까지나 검가건축이 후계자 정쟁에서 중립을 지키겠다는 뜻을 명확히 보여주기 위한 것.”
그가 이공자 측 장로들의 진땀을 흘리게했던 기백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듯이 말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책임을 방기해 왔던, 그대와 손을 잡기 위해서가 아니오.”
과거로부터 연소현의 능력을 익히 알고 있던 그가 경고했다.
“이 검가건축을 진흙탕속으로 밀어 넣을 계략을 꾸미고 있다는 속셈이 조금이라도 드러나면-.”
“알고 있소. 그러면 그대는 차라리 판을 전부 엎어 버릴 선택을 하겠지.”
연소현이 그의 말을 끊으며, 태연한 기색으로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니 좀 앉으시오, 총수. 그대를 올려다보려니, 목이 아프군.”
너스레를 떠는 연소현의 모습에 이를 부득하고 가는 총수에겐 그의 말에 따라 순순히 앉을 생각 따윈 없었다.
“그대들, 후계자들은, 이 검가가 지금 어떻게 지탱이 되고 있는지 알아야만 하오.”
내공 한 점 없는 그였지만, 그 기백이 넓은 집무실을 내리누르는 듯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각자 후계자를 추종하는 계파들과 자신의 이익밖에 모르는 종자들이 이 검가를 망치고 있지!”
노기(怒氣) 가득한 쩌렁쩌렁한 외침이 집무실에 울려 퍼졌다.
“우리 같은 이들이 바로, 내부에서부터 무너지려는 검가를 지탱하는 마지막 기둥이란 말이오!”
우두머리를 잃은 지 십 년이 넘었다.
뒤틀리고 썩어 온 낙양검가가 유지되고 있는 것은 틀림없이, 그와 같은 이들이 아직 버티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 검가는, 이 검가건축은, 나의 고향이고, 우리의 고향이오!”
스스로 차를 따라 향을 즐기는 연소현을 노려보며, 그가 손을 들어 창밖을 가리켰다.
“우리가, 이 검가의 사업체들이 본가를 일구었고, 우리가 이 낙양을 만들었소!”
“옳은 말씀이지. 본 대공자는 충분히 그대들의 노고를 인정하오.”
연소현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하지만 그 낙양을 쌓아 올린 그 재료들은? 그 기반은?”
연소현의 시선은 담담했지만, 그의 거대한 덩치가 자신도 모르게 움찔거렸다.
“지금의 낙양은, 이 낙양검가는 빈민들에게서 쥐어짜 낸 피와 땀으로 쌓아 올렸지.”
“......."
연소현을 내려다보던 그가 자신의 자리에 털썩 앉았다.
“...빈민들이 늘어남에 따라, 본가의 사업체들은 어마어마한 이익을 거두었지. 그것을 부정하지는 않겠소.”
연소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 또한 그 안에 그대들의 피땀이 함께 뒤섞여 있음을 부정하는것은 아니오.”
그가 찻잔을 내려놓고 말을 이었다.
“그렇기에, 내가 그대에게도, 검가건축에게도, 아무런 의뢰도, 요구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니오?”
연소현은 죄악계곡이나 호두마을에 관련된 어떤 의뢰도 요청도 부탁도 하지 않았다.
“…그건 그저 자금이 부족한 것이 아니오?”
“그 말도 옳소.”
조금 누그러진 총수의 기색에 연소현이 웃음을 터트렸다.
“내 이리저리 자금을 끌어모으고는 있지만, 검가건축에 의뢰를 넣을 정도로 여유있는 자금은 확보하지 못했다오.”
사실이었다.
당가가 우회하여 투자한 자금을 포함해도, 원래 계획을 추진하는 정도에 불과할 뿐.
검가건축에 지역 전체의 재건축 의뢰를 넣기엔 부족한 금액이었으니.
“…용봉지회 전에 사업을 완료하지 않아도 좋은 것이오?”
그의 물음에 연소현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 전에 사업은 끝나고, 죄악계곡은 재단장을 마칠 것이라오.”
“검가건축에 의뢰하지 않고?”
“의뢰하지 않을 것이오.”
도대체 어떻게?
그는 어차피 물어도 듣지 못할 방법을 묻는 대신, 다음 질문으로 옮겨갔다.
“…애초에 의뢰를 하지 않을 참 이었기에, 내게 이공자 측 제의를 받아들이라 한 것이었소?”
“그렇지. 처음부터 내가 그대에게 그렇게 말하지 않았소? 한 번쯤 튕기고 그다음 제안은 받아들이라고.”
“분명 그랬지. 하지만 그래서는 검가건축의 중립이 흔들리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오.”
연소현이 미소를 지으며 그의 말을 끊었다.
“내가 의뢰를 검가건축에 넣는다면 모를까, 애초에 넣지 않을 테니. 그렇다면 그 거래에 대해서는 당사자들만이 알 뿐이지.”
“…우리 측이 이공자에게 거래로 받을 대가로 내 개인적인 사욕만 채우지 않으면 약점이 잡힐 일도 없겠군.”
“그대는 절대 사리사욕을 채울 인물이 아니니, 약점이 잡힐 일도 없을 것이오.”
연소현이 그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분명, 신뢰가 담겨 있었다.
“그러니 '더 늦기 전어', 이공자 측의 다음번 제안은 받아들이도록 하시오.”
연소현이 창밖을 향해 눈을 돌렸다.
“…그렇게 된다면, 얻어 낸 사업권으로 그대의 입지는 더욱 탄탄해질 것이오.”
검가건축의 총수가 턱을 쓰다듬었다.
“또한, 우리 검가건축의 실적이 커지는 만큼, 소속 인원들 또한 외부의 유혹에 더 쉽게 저항할 수 있게 되긴 하겠어....“
총수가 꺼림칙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얼굴을 들었다.
“그런데 대공자. 더 늦기 전에, 라니…?”
연소현이 그 질문에 대답을 하는 일은 없었다.
“그대는 잘해 주고 있소.”
연소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앞으로도 지금까지처럼 해 주기만 하면 될 것이오.”
“......."
총수는 자리에서 일어난 대공자를 보며 속으로 신음했다.
'도대체 이 대공자는 무슨 속셈을 품고 있는 것인가…?’
더 늦기 전에, 라는 말도 그랬지만, 돌이켜 보면, 이전의 모든 대화에서 대공자는 눈앞의 전쟁에 대해선 아무런 걱정도 근심도 없어 보였다.
'이 상황에 총수인 나를 챙겨 준다고? 전쟁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사람처럼?’
대공자는 자신에게서 호의를 얻으려는 것인가.
호의를 받은 자신이 대공자를 위해 알아서 움직여 주기를 바라는, 그런 유치한 생각은 아니리라.
'설마….'
그렇다면.
'대공자는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다는 것인가…?!'
“아. 그러고 보니, 총수.”
연소현이 잊고 있었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용봉지회 경기장 부지 쪽의 소요에는 그대와 검가건축에서 대응하고 있소?”
그의 질문에 머릿속이 복잡한 총수가 고개를 저었다.
“부지 개발은 우리 검가건축이 담당하고 있지만, 그 대처는 의뢰주인 삼공자 측이 책임지고 있소. 최고 운영 회의의 결정이기도 하지. 우리 측 인원들은 완전히 물러섰다오.”
“그렇군. 계속 그렇게 거리를 두는 편이 좋을 것이오.”
이제는 자신과 상관도 없는 일까지 신경을 쓰는 대공자에게 그가 떨떠름한 시선을 보냈지만, 연소현은 신경도 쓰지 않고 남은 차를 훌쩍 마셔 버렸다.
“차는 잘 마셨소이다.”
그러고는 아무런 미련도 없이, 몸을 돌려 창가로 향했다.
들어왔을 때처럼, 시선을 피해 창밖으로 움직일 생각인 듯했다.
그 한 점 아쉬움 없어 보이는 모습은, 마지막까지 질척거리던 이공자 측과는 너무나 큰 대조를 이루었다.
“...대공자.”
창을 열려던 연소현이 뒤를 돌아보자, 그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
자신이 어째서 대공자를 불렀는지, 스스로도 잠시 혼란스러운 것 같았다.
“…경비하던 인원들에게 잠시 휴식을 명할 터이니, 돌아가시는 길은 좀 더 편할 것이오.”
“그거 반가운 이야기로군.”
연소현이 창을 열었다.
해는 이미 저물었고, 밤의 낙양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그의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대공자의 다음 수는 본가의 사법기관과 관련된 것이겠지?”
총수는 호법원과 감찰부 등, 낙양검가 내의 사법기관이 오전부터 시끄러웠던 것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그대는 선택을 마쳤지.”
연소현이 마지막으로 그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들에게도 선택권을 줬을 뿐이라오.”
그는 훌쩍 몸을 던져, 창밖으로 사라졌다.
“......."
그가 떠난 자리를 잠시 바라보던 총수가 연소현이 남긴 말을 되뇌었다.
“…선택권이라.”
창으로 불어 들어오는 바람이 유난히 싸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