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192화 (192/350)

제17편 일인군단(一人軍團)

행정동의 총책임자로 임명된 홍독지주에게 안내하던 이가 흐뭇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어떻습니까? 시설이 대단히 훌륭하지 않습니까?”

홍독지주를 위해 마련된 개인 숙직실에 그가 감탄하면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 없는 것이 없습니다! 검가답게 가구들도 전부 최고급품뿐이 고요! 이 정도면 아주 여기 살아도 되겠군요!”

“…아, 예.”

그는 홍독지주가 받는 대우와 대접에 부러움을 느끼며 한 말이었지만, 어째 그녀는 그 말이 저주처럼 들렸다.

'이 호화로운 숙직 시설은, 설마…!’

그녀가 두려움이 떠오르는 표정을 감추며 생각했다.

'처음부터 나를 퇴근시킬 생각이 없다는 대공자님의 뜻은 아니겠지…?’

그때 급히 그녀를 찾는 소리가 있었다.

“사무장(事務長)님!”

아직 새 직위에 익숙하지 않았던 그녀가 뒤늦게 숙직실에서 나와 대답했다.

“나는 여기 있다. 무슨 일인가?”

헉헉거리며 달려온 전령이 그녀에게 쪽지를 내밀었다.

“급전입니다!”

* * *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고?’

연소현의 말을 속으로 되뇌며, 공요가 헛웃음을 지었다.

단순히 자신감을 드러내는 표현이라고 이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눈앞의 소년이 또 어떤 수를 보여줄지, 기대감을 감추기 어려웠다.

“대공자 또한 보고를 들었겠지만. 오늘 오전에 낙양의 가문들을 돌며, 수확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었소.”

이공자에게 원한을 가진 가문들.

척을 진 가문들.

그렇기에 연소현에게 협력을 하고 싶다는 가문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예. 지금도 은밀히 접촉을 해오는 이들이 있습니다.”

“십시일반(十匙一飯)이라고, 그들 또한 만나 보는게 도움이 되지 않 겠소?”

한 명의 우군(友軍)이 아쉬운 순간이었기에 한 말이었다.

“글쎄요. 공 서원장께서도 이미 예측하셨겠지만….”

연소현은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 그들을 만나 봤자, 수면 아래로, 즉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방식으로 협력을 할 것입니다. 그것도 온갖 생색은 다 내면서요.”

유력 가문이 분해되고, 피와 살이 튀고 있다.

이런 상황에 머리를 들고 당당히 전면적 협력을 한다는 것은, 사실 전쟁터에 종군하겠다는 이야기와 같았으니.

“…아무래도, 그건 그렇겠지.”

연소현의 말대로 이미 그 정도는 예측하고 있던 공요였다.

“그자들은 그렇게 소극적으로 임한 후에, 혹여나 전세가 유리해져, 자신들의 안전이 보장된다면. 그때가 되어서야 날뛸 것이 뻔하긴 하오.”

“맞습니다.”

연소현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입을 적신 후에 말을 이었다.

“그래 놓고는 후에 논공행상 때는, 껍질까지 벗겨 먹으려 들겠지요.”

그 고까운 모습들을 머릿속에 그린 것처럼 떠올린 공요는 탐탁잖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있겠소?”

“있지요.”

연소현이 찻잔 너머로 미소를 지었다.

“우리가 그들의 도움을 하나도 받지 않고, 이 전쟁에서 승기를 잡으면 됩니다.”

공요의 허연 눈썹이 꿈틀거리는 것을 보며 연소현이 의자에 편히 뒤로 등을 기댔다.

“그렇게 되면 애초에 이공자와 척을 지고 있던 저들은 우리에게 납작 엎드리겠지요.”

그들은 뒤늦게라도 승기를 잡은 연소현의 진영에 편승하기 위해서, 간이며 쓸개며 전부 내어 놓고 아양을 떠는 것 이외에는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사라진다.

연소현이 이를 드러내며 활짝 미소 지어 보였다.

“저들은 오히려 막대한 '겁쟁이 벌금'을 치르고 나서야, 우리 진영에 발을 디딜 수 있게 될 겁니다.”

“허허, 대공자의 말씀은 그저 듣기만 해도 속이 다 시원해지지만….”

그 말에 공요가 연신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었다.

“애초에 이 논의는 작은 힘이라도 모아 대항할 병력을 늘리기 위함이 아니었소?”

그가 마른침을 삼키며 연소현에게 물었다.

“설마, 대공자께서는 지금 우리의 전력만으로 승산이 있다고 보시는 것이오?”

“그건…."

연소현이 입을 열던 그때, 집무실의 문을 정중하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대공자님.”

홍독지주였다.

“말씀 나누시는 중에 죄송합니다만, 급전이 도착했습니다.”

심상찮은 내용인 듯, 그녀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공요에게 양해를 구한 연소현이 앉은 채 손짓하자, 그녀가 다가와 공손하게 쪽지를 넘겼다.

“사업 지원단의 지원일부가 죄악 계곡 사업에 대한 지원금 지급 중단을 선언했군.”

“예. 그리고….”

연소현이 딱히 감출 생각이 없이 말을 꺼내 놓자, 공요가 있기에 말을 아끼던 홍독지주가 입을 열었다.

“그에 이어서, 사업 지원단이 검가전장을 통해 우리 측에 투자했었던, 지원금의 전액 회수 요청을 넣었다고 합니다.”

지원금 회수 요청.

지금까지 투자한 금액을 전부 다시 뱉어 놓게 만들겠다는 뜻.

“이놈들….”

공요의 처진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행정력에 공백을 만드는 것에 이어서, 이제는 금전적인 압박을 가하겠다는 것인가…?”

연소현 세력의 기반이 될 사업을 아예 말려 죽이겠다는 이공자 측의 의지가 명백히 드러나고 있었다.

“…호두 마을에 투자 예정이던 금액을 어떻게 전부 회수한다고 해도, 본가가 요구하려는 금액의 반의반도 되지 않습니다.”

홍독지주가 애써 표정을 감추며 담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게다가 대공자께서 기지를 발휘하시어, 본가가 손을 대지 못하게 만든 호두 마을의 사업까지도 함께 정지되게 되어 버리는군요.”

담담한 표정이었지만, 그 아래에 깔린 그녀의 분노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우리 공씨 가문이 힘을 써 보긴 하겠다만. 검가 내의 일에는 크게 영향을 미치긴 힘들 걸세.”

공요가 혀를 찼다.

“게다가 이공자 측이 그것만 노리고 움직이지는 않았을 것 같군.”

홍독지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검가전장이 지원일부의 요청에 따라 지원금 회수를 결정하면, 낙양 내외의 모든 전장이 우리와 거래를 끊을 겁니다.”

검가전장의 결정은 낙양검가의 결정이고, 그 결정에 따르지 않을 전장은 이 근방에서는 찾을 수가 없었다.

“으음."

“음….”

근심 가득한 생각에 잠겨 굳어버린 두 사람과는 달리 연소현은 태연자약했다.

“일령."

그가 손짓하자, 대기하고 있던 일령이 작은 금속 상자를 가져와 홍독지주에게 넘겨주었다.

그 금속 상자는 견고했고, 묵직한 자물쇠까지 걸려 있었다.

“이것은…?”

연소현이 그녀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씨 가문의 상단을 처분한 금액이다."

연소현에게 받아 든 열쇠로 상자를 열어 본 홍독지주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이, 이 액수는…?!”

그녀가 금속 상자에 가득한 전표들을 확인하고 연소현에게 외쳤다.

"그들에게서 매각 금액을 전부 일시금으로 받으셨던 겁니까?!”

본디 이런 거대한 금액이 오갈때, 일시금으로 전표가 오가는 일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아무리 현금을 두둑하게 쌓아 두는 가문이라도, 당장에 동원할 수 있는 금액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제값을 제대로 받지는 못했지만. 이런 일이 있을 것 같았거든.”

찻주전자를 기울여 차를 따라 주는 일령에게 눈짓으로 감사를 표한 연소현이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

“애초에 이씨 상단을 쪼개서 판것은, 사패천이 구매 측 가문을 압박하는 것을 막기 위함도 있었지만, 거래 당일에 대금을 전부 받기 위함도 있었다.”

'다들 전표들은 두둑하게 챙겨 오셨겠지요?’

연소현이 처음 거래 자리에서 꺼냈던 말은 농담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자리에 모였던 이들의 가문은, 한입에 그 거대한 이씨 상단을 먹어 치울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상단이 연소현에 의해 적절하게 분할되었기에, 거래 대금을 일시금으로 받는것까지, 모든 절차를 끝낼 수 있었다.

“그런…?!”

홍독지주의 비명에 가까운 감탄사를 들으며, 연소현은 흡족한 표정으로 차향에 만족을 표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게다가 이씨 가문이 자신들의 본가에 쌓아 두었던 재산의 처분도 이루어지고 있으니, 곧 그 금액도 받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청씨 가문의 가주, 청 대인으로부터 넘겨받은 보따리는 지금쯤 자애원의 본산으로 가서, 각종 수단을 통해 세탁되고 있을 터였다.

“모두 합하면 이 정도 금액이 될 것이다.”

연소현이 쪽지에 적어서 넘긴 액수를 확인한 홍독지주의 표정이 하얗게 굳었다.

“그러니 투자금을 모두 뱉어 내야 하는 일이 실제로 발생하더라도, 당분간은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야.”

“이 액수라면…!”

홍독지주가 급히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사업 지원단에서 한 번에 그동안의 투자금을 전부 갚으라고 해도 충분히 갚을 수 있겠습니다!”

그녀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외쳤다.

“이렇게 되면 오히려 본가를 죄악계곡의 사업에서 완전히 떼어 놓을 수 있게 될 겁니다!”

그것은 호두 마을처럼, 죄악계곡 또한 낙양검가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난다는 것을 의미했다.

“흠.”

연소현이 입맛을 다시며 혼잣말을 했다.

“만약 이씨 상단을 한 덩어리로 매각할 수 있었다면, 훨씬 더 큰 금액을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인데….”

분할된 이씨 상단의 총합(總合)은, 하나의 이씨 상단보다 훨씬 가치가 떨어졌으니.

그렇지 않았다면, 온전한 이씨 상단을 매각한 금액만으로, 죄악계곡과 호두 마을 양쪽에 장기적으로 투자해야 할 모든 금액을 뽑고도 남았을 터였다.

“좀 아쉽긴 하군.”

하지만 그 아쉬움은 공요와 홍독지주에게는 와닿지도 않았다.

그들은 연소현이 보여 주는 일련의 모습에 혀를 내두르기도 바빴으니까.

“허허. 대단하시구려, 대공자. 듣기만 하다, 이렇게 직접 그 수완을 발휘하는것을 보니, 할 말을 찾질 못하겠소.”

''별말씀을요 ”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 공요에게 연소현이 표정하나 바뀌지 않고, 겸양을 떨었다.

“놀랍습니다…!”

주판을 꺼내 들어 금액들의 계산을 대충 끼워 맞춰 본 홍독지주가 외쳤다.

“정말 액수가 거의 맞아떨어집니다!”

연소현이 어깨를 으쓱였다.

“계산해 보고 딱 맞게 넘겨준 것이니까.”

“......!"

이 상황에서도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자투리 금액은 남겨 둔 연소현이었다.

“이걸로…!”

홍독지주가 상기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투자금 지급 중단과 회수로 한번에 사업이 침몰하는 일은 이미 막은 것과 다름없습니다!”

이공자 측이 사업 지원단의 사업 일부를 움직이고, 검가전장을 의도대로 움직이게 하는 일은, 그들의 기준에서도 상당한 정치적 자원을 소모했을 것이다.

하지만 연소현의 대비에 자금 압박으로 사업이 날아갈 일은 사라졌다.

그 정치적 자원은 의미 없이, 이미 '절반쯤 허공으로 증발해 버린 것과 같았다.

홍독지주가 주판을 튀겨 가며 중얼거렸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 금액으로는 사업을 지킬 수는 있지만, 계속 진행해 나가기는 불가능한….”

사업 진척의 불가.

그것이 나머지 절반이었다.

“아, 대공자님. 죄송합니다!”

무의식중에 아쉬움을 표하던 그녀가 급히 고개를 숙여 사죄하고 입을 다물었다.

절반의 승리라도, 이것은 순수하게 연소현의 힘으로 얻어 낸 승리였으니.

그녀가 아쉬운 소리를 해도 좋을 자리가 절대 아니었다.

“당장 사업 진행이 어렵다고?”

연소현이 그녀를 탓하는 대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대공자님…?”

* * *

죄악의 골짜기.

대공자-사공자 합동 사업 본부.

사공자 연비의 집무실.

다선랑과 함께 도착했던, 사천의 투자단을 이끌던 수장.

당고규가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허허, 본가의 소가주께 이미 언질을 받기는 했지만….”

지난밤. 사천당가의 소가주, 당은랑과 대공자 연소현의 대화가 있었다.

사천에서 온 투자단으로 위장한 그들은 사실, 대공자의 도움을 받아 낙양으로 진출하려는 사천당가의 대리인이었다.

“언질도 받으셨고, 증표의 확인도 마치셨다면, 대화가 빠르겠군요.”

사공자 연비가 미소를 지으며, 당가의 현인이라 불리는 당고규에게 말했다.

“큰형님께 당가가 약속한 사천당가의 자금을 즉시 지급해 주시지요.”

당은랑이 연소현에게 넘겨주었던 작은 은제 장신구-증표를 확인한 당고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이 시점에서 넘길 자금이 아니었지만…, 아무렴 어떻겠습니까. 저야 뭐, 명받은 대로 할 뿐이지요.”

그가 뒤를 향해 손을 들어 보이자,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가 밖으로 나갔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보안 절차상 자금은 여러 곳에 분산되어 은닉되어 있었다.

“곧 금화와 전표가 비밀리에 운송되어 올 겁니다.”

그 말에 사공자가 아주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뒤에 묵묵히 서 있던, 곽 노인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며 근접 전음을 전했다.

[주군. 이걸로 죄악계곡과 호두마을, 양쪽의 사업이 모두 금전적인 문제 없이 진행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공자 측이 사업 지원단을 동원해 펼친 강력한 역습에, 한바탕 식은땀을 흘렸던 그녀였다.

사공자로부터 연소현의 계획을 미리 전해 듣고도, 막상 그 역습이 들어오자, 내심 불안함이 치솟았던 것이다.

그런 그녀를 향해 사공자 연비가 돌아서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말이 없이도, 전음이 없이도, 곽 노인은 그 의미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예, 주군. 이 늙은이도 이제는 충분히 깨닫고도 남습니다.]

연소현이라는 존재 하나가 이공자 측과의 극단적인 세력 차이를 극복해 내고 있다는 것을.

그는 일인군단이나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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