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편 역습과 대비(對備)
연소현이 이씨 가문의 영와상단을 분할 매각하기 직전.
낙양의 봄 소속이자 빈민가의 해결사 청호위와 수란이 연소현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대공자님께서 오늘 저희를 크게 개안시켜 주셨습니다.”
청호위가 명가의 일원이었던 인물답게, 마음을 담아 정중히 예를 차려 말했다.
“저희 낙양의 봄에는 대공자님의 도움이 꼭 필요해요.”
수란은 자신의 두 주먹을 꼬옥 쥐어 보였다.
“오늘 밤, 집회 시간이 되면 모시러 올게요!”
“그때까지 부디 보중(保重)하시길.”
방에서 나가는 두 사람에게 문을 열어 준 시녀, 일령이 연소현에게 다가와 보고했다.
“주인님. 홍독지주께서 주인님을 뵙길 청하고 있사옵니다.”
“들라 하라.”
사공자의 최측근 중 일인인 홍독지주가 방에 들어와 예를 표했다.
이전부터 사공자와 함께 날밤을 지새우며 행정 작업에 몰두했었던 그녀는, 조금 전까지도 서류 처리에 시달린 듯했다.
“대공자님을 뵙사옵니다.”
그녀는 낙양검가의 사공자 집무실에 감금되어 있다시피 했던터라, 심지어 화재 현장에도 찾아오지 못했을 정도로 바빴었다.
“행정 업무를 책임지느라 고생이 많군.”
“아닙니다.”
대답과는 달리 그녀가 지고 있는 피로와 중압감을 연소현은 잘 알고 있었다.
얼굴을 덮은 화장이 날이 갈수록 더욱더 두꺼워지고만 있으니, 그녀의 피로와 중압감이 어느 정도인지는 못 알아보려 해도 못 알아볼 수가 없었다.
“방금 들어온 정보에 대한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그녀가 헛기침을 하여, 피로에 의해 만성적으로 잠겨가는 목을 풀었다.
“검가 사업 지원단의 지원일부가 기어코 죄악계곡의 사업 계획에 대해서 전면 재검토 단계로 돌입했다고 합니다.”
재검토 필요성을 논의하던 지원 일부가 이제 재검토에 들어갔다.
누가 봐도 이상할 정도로 빠른 속도의 진행이었다.
그것은 대공자의 사업에 대해 강력한 제동을 걸겠다는 속셈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움직임이었다.
연소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면 재검토의 다음 단계는 사업 지원의 백지화겠지.”
“…예. 저도 그렇게 추측하고 있습니다.”
사업 지원단의 막대한 물적 인적 지원이 없이는, 죄악계곡의 사업같은 거대한 규모의 사업은 크게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관료등을 통한 많은 방해 공작이 있었고, 연소현이 그것을 정치적인 술수로 풀어 왔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도 사업이 꾸준히 진행될 수 있었던것은 사업 지원단의 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홍독지주가 뻐근하게 당겨 오는 목덜미를 주무르며 한숨을 쉬었다.
“지금까지라도 사업 지원단의 덕을 본 것에 감지덕지해야 하는 것일까요?”
대공자-사공자 측의 빈약한 자금 사정과 인적 자원을 보강해 주던것이 바로 사업 지원단이었으니.
그 사업 지원단이 이공자의 줄을 타기로 마음먹었으니, 이제 사업계획이 표류(漂流)될 것이 예고된 것과 마찬가지인 상황.
“이제 이공자 녀석들이 의도하는대로 진행에 난항을 겪을 수밖에 없겠습니다.”
홍독지주가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당장 행정력이 부실해지는 것이 큰 문제겠습니다. 안그래도 현장 본부와 행정 인원을 나눠 쓰고 있는 것도 한계인데.”
사공자가 죄악계곡 사업 현장에가 있는 이상, 사공자 집무실의 총책임자는 그녀였다.
“특히, 저희 진영에는 관과 문제를 풀어 갈 수 있는 인재가 부족하다 보니….”
거의 울먹이기 직전의 중년 여인.
“이제부터 당장 어떻게 일을 처리해 나가야 할지 앞이 막막하여, 이 정보를 듣자마자 대공자님을 찾아뵐 수밖에 없었습니다….”
공황 상태에 들어가기 직전인 그녀의 모습에 연소현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예?”
연소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은 일단 여기서 좀 쉬고 있거라. 나는 이씨 가문의 상단을 팔아 치우고 올 터이니.”
* * *
이공자 측이 유력 가문의 가주들을 만나고 있었을 무렵.
“음냐….”
창으로 들어오는 석양빛을 받으며, 까무룩 잠들어 있는 홍독지주의 어깨를 연소현이 두드렸다.
“이제 거의 도착했으니, 일어나거라.”
“아아, 조금만 더-.”
라고 잠결에 중얼거리던 그녀가 눈을 번쩍 떴다.
“죄, 죄송합니다. 대공자님. 제가 그만…!”
“괜찮다.”
연소현이 그녀에게 웃어 보이고는 창밖의 풍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 여기는 검가의 내부가 아닙니까?”
“그렇다.”
그를 따라 빠르게 변하는 창밖 풍경으로 시선을 돌린 홍독지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거리는 분명 원각정으로 향하는….”
그때 마부석의 창문이 열리며 고삐를 쥐고 있던 하녀가 보고했다.
“곧 원각정 앞 거리에 도착하옵니다.”
"......!"
그녀의 보고가 끝나기 무섭게, 홍독지주는 흘린 침을 닦고, 순식간에 휴대용 화장품을 꺼내 화장을 고쳤다.
연달아 실전을 치르며 조종에 부쩍 능숙해진 하녀의 속도 조절로, 우마차는 제동 장치를 사용할 필요도 없이 부드럽게 원각정 앞 거리에 정차했다.
“…여긴?”
연소현을 따라 철갑요새에서 내려선 홍독지주가 펼쳐진 풍경에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자 자! 어서 안쪽으로 옮겨!”
“그쪽에 모서리를 조심하라고!”
그것은 수많은 하인들이 그동안 비어 있던 건물들에 가구 따위를 옮겨 들이고 있는 광경이었다.
“여, 여기는 그동안 계속 비어있던 건물들이지 않습니까?”
그녀의 말대로, 원각정 앞 거리에는 긴급명령 당시, 필요도 없어 보이던 건물들이 증축, 개축, 혹은 건설되었고, 이후 계속 비어만 있었다.
“지금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까?”
그녀의 질문에 연소현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대가 행정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고 보고했지 않던가? 그렇기에 행정동을 채우는 것이지.”
홍독지주는 원각정 앞 거리의 빈건물들의 용도가 추후 행정동으로 사용될 것이라는 점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것이 지금이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왜냐하면, 애초에….
“애초에 행정동에 가구만 채워 봤자, 소용이 없지 않습니까? 당장 행정 업무를 볼 수 있는 인력이 있어야-.”
“대공자님!”
그녀의 말을 끊은 것은 행정동 내에서 급히 뛰어나오는 인물들의 외침이었다.
그들은 누구랄 것 없이 정갈한 의복을 입고 있었는데, 바쁘게 움직이는 하인들과 함께 가구라도 날랐는지, 소매를 걷어붙인 채였고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검가의 대공자님을 뵙습니다!”
“직접 오신다는 연락을 받고 서둘러 다 함께 마무리 작업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지금 책임자께서 나오실 겁니다!”
대체 무슨 상황인지, 이들은 누군지, 홍독지주가 묻기도 전에, 일단의 비단옷을 입은 무리와 함께 한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대가 바로 그 대공자이시구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커다란 덩치의 노인이 연소현을 발견하고는 반색했다.
입은 옷차림을 보나, 주변인들의 행동을 보나, 지체 높은 집안의 어르신이 분명했다.
그를 향해 연소현이 쓴웃음을 지었다.
“공씨 대서원의 서원장 업무도 바쁘실 텐데, 공요 어르신께서 직접 오셨습니까?”
공씨 가문의 가주 공량의 동생이자, 낙양 공씨 대서원의 서원장, 공요가 껄껄하고 웃어 보였다.
“가문이 하나 되어 돕는 대공자를 이 늙은이도 한 번은 직접 뵈어야 할 것이 아니오?”
오전부터 가주이자 형님인 공량의 부탁으로 여러 가문들을 방문했었던 그였다.
“대공자의 요청에 응하기 위한 이들을 인솔할 겸, 내 직접 온 것이지.”
형님인 공량이 극찬하던 연소현을 직접 만나고 싶어 하던 노인이 기어코 요청을 핑계로 몸소 원각정앞까지 찾아온 것이다.
연소현이 지금도 계속 행정동 밖으로 나와 주변으로 모이고있는 이들을 보고는 공요에게 깊이 인사를 올렸다.
“들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인원이군요. 어르신의 후의에 감사드립니다.”
그의 말에 공요가 손사래를 쳤다.
“이 늙은이가 따로 힘을 쓴 것이 아니오. 전부 이 제국이 썩어, 이런 인재들을 중히 쓰지 않았던 탓이지.”
그가 주변의 이들을 가리켰다.
“이들은 전부 공씨 대서원 출신으로, 가진 바 능력은 출중하나, 집안의 이름이 부족하다 하여, 관직에 진출하지 못하거나, 혹은 미관말직에 머물렀던 이들이오.”
과연 그의 말처럼 모여든 이들의 눈빛은 젊고 늙음을 가리지 않고 총명하였으며, 또한 올곧았다.
“그리고….”
공요가 슬쩍 연소현에게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출신이 받쳐 주어 높은 관직에 올랐지만, 공담웅, 그 망할 녀석처럼 부패한 상부와 충돌을 일으키고 그만둔 이들도 있소.”
“그렇군요.”
공담웅은 황호사협 중 일인으로 공씨 가문의 차기 후계자이기도 했다.
지금쯤 죄악계곡에서 치안 유지에 진땀을 빼고 있을 곰 같은 덩치의 사내를 떠올리며 연소현이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럼 이분들이….”
상황을 어느 정도 눈치채고, 조심스럽게 이야기에 끼어든 홍독지주의 말에 연소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이 이제 본 대공자의 행정동을 맡아 줄 인재들이다.”
공요가 한마디 거들었다.
“관직에 있던 이들뿐만 아니라, 유명한 상단에서 경력을 쌓은 이들도 있고, 우리 공씨 가문에서 충심을 다해 일하던 이들도 있으니, 즉 각 실무에 부담없이 투입하실 수 있을 것이오.”
그의 말에 홍독지주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비어 있던 행정동과 지원일부가 움직이기 무섭게 소집된 인재들. 대공자께서는 처음부터 이런 일이 발생할 것을 예견하고, 미리 손을 써 두신 것이구나…!’
연소현이 집합을 완료한 인원들에게 외쳤다.
“본 대공자는 그대들을 환영하오!"
그는 거침없이 군주로서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좌중을 압도하는 중후한 내공을 담은 그 목소리가 모두의 귓가에 선명하게 꽂혔다.
“그대들을 위하여 한바탕 환영회 자리라도 마련하여, 친목부터 다지고 싶지만….”
연소현의 얼굴에 장난기 어린 미소가 걸렸다.
“그대들의 얼굴을 보아하니, 당장이라도 몸을 움직이고 싶어 근질근질한 모양이로군.”
“맞습니다!”
“옳소!”
좌중에서 호응과 함께 미소가 번졌다.
“이제 세상이 무시하던 그대들의 능력을 보일 차례가 왔소.”
그들은 누구보다도 세상의 인정을 받고 싶은 이들이었다.
“이제 낙양을 바꾸고, 나아가 중원국을 개혁할 시간이 왔소.”
그들은 누구보다도 세상을 바꾸고 싶어 하는 이들이었다.
해가 가고 날이 갈수록 중원국은 깊이 부패하고 썩어 왔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 이 넓은 대륙에 어찌 뜻이있고 능력있는 인재들이 없겠는가.
오히려 그렇게 썩었기에, 혈연과 인맥을 중심으로 기득권을 형성해 온 권력층에게 외면받으면서도 자신을 갈고닦아 온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개혁파의 거두(巨頭) 중 하나인 공요가 사람을 모은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모여들었다.
“이 낙양을, 그리고 이 제국을 망치고 있는 자들이 우리의 목을 조여오고 있소.”
이씨 가문을 비롯하여 이공자의 세력에 포함된 가문들은 부패한 기득권의 대명사와 같았으니.
대표적인 개혁파인 공씨 가문과 청씨 가문이 전적으로 뒤를 받쳐 주는 가운데, 그들의 선두에 선 연소현은 현재 급작스럽게 떠오른 초신성과 다름이 없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연소현이 높이 주먹을 들어 보였다.
“지금 어설픈 환영회를 즐기는대신, 후에 승전의 축배를 들며 처음으로 술잔을 나누게 될 것이오!”
연소현의 말에 우레와 같은 함성과 함께 박수가 쏟아졌다.
환호성 속에서 그들 하나하나에게 눈을 맞추며, 손을 흔들어 보인 연소현이 마지막으로 홍독지주에게 말했다.
“홍독지주. 이 행정동의 총책임자는 바로 그대다.”
“......!"
“지금까지 보여준 그대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사공자의 최측근인 자신을 행정동 총책임자로 임명하다니.
그야말로 파격적인 인사였다.
“비 녀석과는 미리 결정을 지어둔 사안이니, 한동안 그쪽 집무실의 행정 인력까지 합류시켜 통합하는 데 주력해, 업무 공백을 최소화하도록.”
“대공자님…!”
홍독지주의 얼굴에 큰 충격과 깊은 감동이 교차했다.
그녀가 자리에 무릎을 꿇어 보이며 말했다.
“앞으로 제가 대공자님을 실망하게 해 드릴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부담을 가지지는 않도록 하여라.”
연소현이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지금까지 하던 것만큼만 해 주어도 충분하고도 남는다.”
그의 말에 홍독지주가 상기된 얼굴에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지금까지 하던 것처럼 계속하면 제가 과로로 쓰러질 것입니다.”
그녀의 말에 연소현이 웃음을 터트렸다.
* * *
잠시 후, 행정동의 집무실.
“어르신 덕분에 사업 지원단이 빠져나간 자리에 발생할 행정력의 공백은 채웠습니다.”
연소현의 말에 차를 마시던 공요가 손을 내저었다.
“별것 아니었소. 그보다는 대공자….”
노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공자 측의 반격은 이제 시작에 불과할 것이오.”
우려가 깃든 말과는 다르게 그 눈 속 깊은 곳에 있는 기대감을 보며, 연소현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저 또한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