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190화 (190/350)

제15편 격화(激化)

낙양검가, 이공자 진영.

석양빛이 드는 방.

거울이 하나 있었다.

아직 중원국의 자체적인 기술로는 제작하지 못하고 있는 유리 거울이었다.

구라파의 장인들에 의해 은으로 정교하게 세공된 장식을 두른 그 유리 거울을 한 노인이 무표정한 얼굴로 들여다보고 있었다.

"......."

그는 자신의 눈알이 있던 자리를 더듬었다.

유리 거울이 그 퀭하게 빈 시커먼 구멍을 비추었다.

약선문의 의원은 반드시 의안을 착용할 것을 권했었다.

눈알이 없이 비어 버린 공간은 시간이 지나면 무너져내려, 한쪽 얼굴이 흘러내리는 것처럼 보이게 될 것이라는 경고와 함께였다.

“…이씨 가문의 상단이 매각되었다고?”

나이를 무색하게 하던 우렁찬 목소리는 어디 가고, 가래끓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예, 장로님.”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그의 최측근이 심상찮은 분위기에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깊이 숙였다.

“지역에 따라 수십개로 분할하여 매각되었다고 합니다. 현재 명단을 파악 중에 있습-.”

장로가 말을 끊었다.

“필요 없다. 굳이 그들이 대공자에게서 분할된 영와상단을 사들였다는 의미는 명백하다. 그 가문들은 이 전쟁에 끼어들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한 것과 마찬가지다.”

노인이 수정을 깎아 만든 의안을 들어 빈 눈구멍에 밀어 넣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는 잠재적 동맹이 될 수 있는 가문들을 놓친것과 마찬가지이기도 하지.”

보고를 듣는 순간, 마치 연소현과 가문들의 거래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상황을 읽어 낸 장로였다.

"......."

평소처럼 장로의 능력에 감탄을 표하려던 노인의 최측근이 입을 다물었다.

지금은 그런 이야기를 해 봐야 역효과만 나올 시점이었다.

“우리와 손을 잡은 유력 가문들의 가주들이 찾아와 있다고?”

“…예. 일단 접객실에 모셔 두었습니다.”

“이씨 가문이 풍비박산이 나는데, 우리는 무엇을 했느냐고 난리들을 치고 있겠지.”

"......."

정확한 말이었기에, 최측근은 머리를 더욱 조아릴 뿐이었다.

장로는 거울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장씨 가문처럼 도망치지 않고 찾아들 온 것을 장하게 여기기라도 해야 하는 것인가…?”

이씨 가문의 멸문지화.

미처 자신들이 손을 쓸 사이도 없었다.

정보를 파악한 시점에서는 이미 늦었다.

대공자가 이씨 가문에 가한 불의의 일격은, 그만큼 신속하고 강력하며, 무자비했다.

“청씨 가문과 공씨 가문이라….”

거울을 보던 장로의 입에서 부드득 소리가 났다.

잇몸에서 피가 흘러, 입안에 비릿한 혈향이 감돌았다.

자신은 이씨 가문의 상단 매각에 대한 보고를 듣자마자, 둘러싼 사정들을 꿰뚫어 보았다.

지금 접객실에 모여서 난리를 치고 있을 유력 가문의 가주들의 머릿속이 빤히 들여다보였다.

하지만 그러면 뭐 하는가.

“연소현…!”

그 대공자의 생각은 읽을 수 없었다.

대공자의 행동은 예측할 수 없었다.

장로의 머릿속에 주군의 발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철컥, 그리고 또각.

주군의 왼손 갑주가 쥐었다가 펴지며 까드득거리는 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하후 장로.]

눈에서 피를 흘리던 자신에게 주군이 남긴 말이 떠올랐다.

주군의 쉬어 버린 목소리에 담긴 살기가 지금도 생생했다.

[한 번 더 기회를 주겠다.]

다음 실패는 곧 자신의 폐기 처분을 뜻한다는 말이었다.

"......."

거울에 비친 자신의 남은 눈동자가 시뻘겋게 충혈되어 떨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의안은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초점도 없이, 그저 고정되어 있을 뿐이었다.

빈 눈구멍을 차지하고 있는 의안이 유독 차갑게 느껴졌다.

“으아아아…!”

하후 장로가 괴성과 함께 내리친 주먹에 유리 거울이 단박에 박살나 흩어졌다.

내공을 끌어 올리지 않았기에, 그의 주먹은 피투성이가 되었다.

“후우. 후우.”

그는 통증이 아니라, 분노로 떨려 오는 손을 들어 비단 안대를 둘렀다.

의안을 가리는 비단 안대에 그의 손에서 흘러나온 피가 묻었다.

얼굴에도 흘러내린 피가 묻었다.

바닥을 덮은 양탄자에 새빨간 선혈이 투두둑 떨어졌다.

'...그 대공자 놈을 막아 내지 못하면, 내게 뒤는 없다.'

그는 품에서 궐련을 꺼내 입에 물고, 삼매진화로 불을 붙여 길게 연기를 흡입했다.

궐련의 탁한 연기와 함께 자신의 혈향이 한가득 허파를 채웠다.

그가 입을 열었다.

“…가주 놈들에게로 가자.”

그들에게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물러설 곳이 없다는 것을 가르쳐줘야 할 시간이었다.

* * *

“대공자 놈의 세력이 처음에 들었던 것과 다르지 않나?!”

왕씨 가문의 가주가 목소리를 높였다.

장씨 가문의 가주 일가와 최측근들이 도주한 것을 확인하고, 서둘러 이공자 측을 방문한 그였다.

“황도십육가문이 움직일 일은 절대 없다더니, 공씨 가문이 피바람을 일으키고 있지 않은가?!”

"......."

그의 호통에 그들을 상대하던 이 공자측의 인물들이 고개를 돌리거나, 눈을 피했다.

웬만한 이들이라면, 코웃음과 함께 무시했을 그들이었지만, 눈앞의 이들은 누구하나 이름값이 모자랄 일이 없는 낙양 유력 가문의 가주들이었으니.

“애초에 헛소리였던 것이야? 우리를 속인 것인가? 아니면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하고 떠들었던 것이란 말인가?!”

왕씨 가문의 가주가 두꺼운 회의용 탁자를 두드렸다.

“다들 입이 있다면 말을 해 보란 말이다!”

그의 호통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좌우에 앉아 있던 가주들이 누구랄 것 없이 이공자 측을 책하는 외침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당장 대책을 내놓아야 할 것이 아닌가?!”

“언제는 잘난 척 떠들어 대더니 도대체 어떻게 할 것인가?!”

“이씨 가문이 멸문당하는 동안 도대체 그대들은 뭘 하고 있었단 말인가?!”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나 외치는 가주.

침을 튀기며 삿대질을 하는 가주.

욕설까지도 입에 담는 가주.

한순간 역사에서 지워져 버린 이 씨 가문.

그 이씨 가문의 멸문을 보며 가주들이 느꼈던 공포와 무력감이 원망과 질책으로 뒤바뀌어 쏟아지고 있었다.

내분(內紛).

연소현이 의도한 대로였다.

그때 문이 열리며, 집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본가의 하후 장로께서 들어오십니다.”

책임자의 등장이었다.

왕씨 가주를 비롯한 모두가 사냥감을 노리는 시선으로 열린 문을 바라보았다.

“드디어 제대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대가 등장하셨군!”

“하후 장로! 왜 이리 늦으셨소?! 지금 사태의 심각성을…!”

입구를 향해 외치던 가주 하나의 표정이 그만 핼쑥해졌다.

“심각성을....”

굶주린 야생 개떼처럼 달려들어 하후 장로를 물어뜯으려던 가주들의 입이 닫혔다.

“다들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소.”

피가 뚝뚝 흐르는 손에 궐련을 든 하후 장로가 잔뜩 쉰 목소리로 그들에게 말했다.

그의 하나 남은 눈은 퀭했고, 낯빛은 시체처럼 굳어 있었다.

그 눈에는 광기마저 느껴졌다.

더 이상 그들이 기억하던, 호탕하고 대범한 하후 장로의 모습은 거기에 없었다.

"......."

갑작스레 광인(狂人)을 마주쳤을때와 같은 불안감에 입을 다물었던 가주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침묵은 길지 않았다.

“…낙양검가 또한 낙양인데, 먼 길이라 할 것이 무엇 있겠소?”

겨우 인상과 분위기 따위에 휘둘릴 가주들이 아니었으니.

왕씨 가주가 하후 장로를 바라보며 오히려 이죽거렸다.

“그 낯빛을 보아하니, 하후 장로께서 기가 막힌 대책을 준비하느라 꽤나 고심을 하신 모양이시군.”

다른 가주가 그를 거들어 하후 장로를 압박했다.

“그래, 어디 그 기가 막힌 대책이라는 것을 한번 들어봅시다.”

“설마 아직 대책이라고는 준비하지도 않으신 것은 아니겠지요?”

“설마요. 벌써 잘못된 정보로 큰 실수를 저지른 분께서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 계획이 있으시겠지요.”

뱀 같이 혓바닥을 놀리는 그들을 향해, 하후 장로가 가래끓는 목소리로 답했다.

“따로 그대들을 위한 계획은 없소.”

“......!"

가주들의 얼굴이 대번에 구겨졌고, 그런 그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하후 장로가 말을 이었다.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소. 원래 계획대로, 연소현 그놈의 사업을 재기(再起)할 수 없을 만큼 박살내면 모든 것이 끝나니까.”

그가 피가 흐르는 손을 들어 궐련 연기를 뿜었다.

“그놈이 지금처럼 발악을 하는것은 어떻게든 자신이 최초로 만들기 시작한 기반을 지키기 위해서이지.”

하후 장로가 허공을 떠도는 연기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 기반이 무너지는 순간, 그놈은 예전처럼 혈혈단신이 되어, 지략을 짜내고 인맥을 부리는 것밖에 못하는 신세로 돌아갈 것이오.”

그것은 대공자 연소현의 현 상황을 정확하게 짚어 내는 분석이었다.

첫 공식 외출에서 이어지는 일련의 행보는, 연소현이 자신의 세력을 확보하고 확장하기 위함이었으니.

그 모든 근간이 되는 자금의 흐름, 즉 사업적 기반을 잃게 되면, 현재의 확장 행보에 크게 제동이 걸리게 되는 것이다.

"…좋은 말씀이긴 하지만, 우리가 이곳에 모인 것은 그런 분석 따위를 듣기 위함이 아니오.”

“적어도 청씨 가문과 공씨 가문을 막을 대책을 마련해 주셔야 할 것이 아니오?”

하후 장로가 시선을 내려, 가주들을 내려다보았다.

“대책?”

그 눈에는 감정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당신들이 바로 우리의 대책이오.”

그가 이를 드러내며 흉흉한 미소를 지었다.

“청씨 가문과 공씨 가문을 물어 뜯으시오. 살점 하나라도. 죽을 때까지. 물러섬 없이.”

이씨 가문이 집중된 기습으로 한 순간에 몰락하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그들 가문들은 낙양의 유력 가문들이다.

그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달려든다면야, 제아무리 청씨 가문과 공씨 가문이라도 큰 타격을 입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공자 측의 일방적인 강요.

“무슨 그딴 소리를?!”

그 과정에서 가문들은 어마어마한 피해를 볼 것이 뻔했다.

분노한 가주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가만히 듣자 하니, 오만하기가 짝이 없군!”

“귀한 동맹인 우리를 한낱 화살받이처럼 대하는 것인가?!”

“…귀한 동맹?”

그 말에 하후 장로에게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사패천이 있었기에 우리에게 기생했고, 나의 주군께 빌붙어 자신들의 세력을 불려 온 자들 주제에.”

그의 노골적인 비웃음에 모욕을 느낀 가주들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이딴 식으로 나온다면, 우리 왕씨 가문은 이 동맹을 떠나겠다!”

왕씨 가주를 필두로 다른 가문의 가주들도 너나 할것 없이 동맹 파기를 외쳤다.

하지만 가주들의 말을 들으면서도, 하후 장로는 그저 궐련을 태울 뿐,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하후 장로! 당신의 이따위 엉터리 방침을 '위'에서도 알고 계신 것이오?!”

그 말에 하후 장로가 피식하고 웃었다.

"'위'라…."

그가 손가락을 튀겨 길어진 재를 바닥에 떨었다.

“그렇지 않아도, '위'에 계신 분께서 여러분께 직접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셨소.”

"......?"

가주들이 뭐라 입을 열기도 전에, 입구에 서 있던 집사가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본가의 구양 태상부인께서 납시오!"

그 외침에 모든 가주들이 일어선채로 황급히 몸가짐을 바로 했다.

“귀한 분들이 오셨군요.”

요염하지만 독기가 묻어나는 여인의 목소리와 함께 수십의 시녀들과 집사들이 들어와 벽을 둘러 자리 했다.

이공자의 어머니, 구양 태상부인이 우아한 걸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하후 장로.”

“예, 태상부인.”

그녀가 좌중을 둘러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런 귀한 동맹 분들께, 제대로 된 대책도 없이 돌아가서 싸우라고 하시다니요. 적어도 명확한 지침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송구합니다.”

하지만 그 말을 하는 하후 장로의 표정에는 하나도 죄송한 기색이 없었다.

연극이나 마찬가지인 행위였다.

그녀가 좌중의 가주들과 시선을 마주했다.

“여러분을 위한 특단의 지침을 본 태상부인이 직접 알려 드리지요.”

떨떠름한 표정의 왕씨 가주가 대표로 예를 차렸다.

“…경청하겠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구양 태상부인이 막 생각났다는듯, 손뼉을 쳤다.

“먼저, 소개해 드릴 분들이 계신 것을 잊고 있었군요.”

그녀가 손을 까닥거리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무사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양손에 하나씩 머리를 들고 있었다.

"......?!"

베어 낸 지 얼마 되지 않은 참인지, 아직도 그 잘린 목에서는 피가 뚝뚝 흘렀다.

그들이 그 머리들을 회의용 탁자 위에 놓았다.

그들의 손길은 푸줏간 주인이 돼지머리를 도마위에 올리듯 무심했다.

“후후.”

구양 태상부인이 부채를 들어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

“잘들 보시지요. 낯이 익은 얼굴들이지요. 다들 인사라도 건네심이 어떠신가요?”

그것은 장씨 가문 가주 일가의 머리들이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낙양에서 떠났다고 들었던 그들.

"......."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그 머리들은 고통에 차서 비명을 지르는 사망 당시 표정 그대로였다.

가주들은 상상치도 못했던 재회에 몸서리를 쳤다.

“본 태상부인이 여러분께 내려드리는 대책이자 지침을 이제 다들 짐작하셨겠지요?”

그녀가 좌중을 향해 식충식물이 제 꽃을 피우듯 활짝 미소 지어 보이며 말했다.

“패주(敗走)는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도주는 용서치 않겠습니다.”

그 순간 가주들을 깨달았다.

애초에 자신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는 것을.

대공자를 물어뜯지 않으면, 자신들을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이었다.

장씨처럼 목숨이 끝나든, 이씨처럼 가문이 끝나든.

그들이 살아남으려면 대공자를 패퇴시켜야 했다.

자신의 주름진 얼굴에 일어난 경련을 손으로 눌러 가리며, 왕씨 가주가 입을 열었다.

“…태상부인의 지침은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입술이 바짝 마르고, 목이 메어오는 것을 느끼면서도 말을 이었다.

“그저 저희만을 전선에 던져두실 요량은 아니시겠지요?”

그의 말에 구양 태상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요.”

그녀의 옆에 서 있던 하후 장로가 입을 열었다.

“우리 측은 벌써 반격을 시작했소.”

* * *

낙양의 어느 대로.

두 마리의 영물이 이끄는 강철의 우마차가 대로를 거침없이 달리고 있었다.

우마차가 향하는 방향의 저 멀리.

낙양의 도심을 내려다보듯 언덕에 자리 잡은 낙양검가의 본가가 있었다.

"......."

우마차의 창밖으로 석양을 받아 붉게 타오르는 것 같은 이중 성채의 성벽을 바라보며, 대공자 연소현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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