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암진천경-189화 (189/350)

제14편 혈육(血肉)들

낙양검가.

삼, 사공녀 저택.

“이씨 가문을 멸문시켰다고요…?”

삼공녀, 연다은의 손에서 옷이 떨어졌다.

“…큰오라버니가?”

큰오라비를 만나러 간다는 생각에 들떠, 신나게 외출복을 고르고 있던 그녀였다.

“전부 죽여 없애신 것은 아니지만은.”

저택의 집사장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더 이상 이 낙양에 이씨 가문은 없습니다.”

"......."

삼공녀의 얼굴이 굳어 갔다.

“언니! 방금 보고에 따르면…!”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사공녀 연다혜가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는 낙양검가의 정보부처로부터 받은 약식 보고서가 들려 있었다.

“…표정을 보니, 이미 들었나 보네.”

삼공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략적으로는.”

그녀는 사공녀에게서 약식 보고서를 건네받아 읽어 가기 시작했다.

단 한 장뿐인 약식 보고서였지만, 보고서의 아래로 내려갈수록 그녀의 시선은 느려졌다.

“…이씨 가문의 가주는 실종. 대공자에 의해서 제거됐을 가능성 있음."

삼공녀 연다은이 입술을 깨물었다.

“이씨 가문의 현직 관료들 실종의 배후에는 공씨 가문이 있음. 그들은 공공연하게 관료들을 납치 구금 중인 것으로 파악됨.”

그 보고서는 겨우 종이 한 장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무거운 내용을 담고 있었다.

“공씨 가문의 목표가 충격과 공포의 확산일 경우, 추후 고문당한 관료들의 시체가 낙양 곳곳에서 발견될 것으로 추측.”

그녀가 약식 보고서의 마지막 줄을 읽었다.

“이 분쟁은 앞으로 더욱 격화될 것으로 예측됨….”

사공녀 연다혜가 천천히 다가와 삼공녀 연다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언니…."

이 거대한 가문은 그 규모만큼이나, 수많은 이들의 검은 욕망이 거칠게 뒤엉키고 있었다.

그 어둠은 깊어, 그저 남매가 상봉하는 것조차 쉬이 허락하지 않았다.

'하필 이런 시기에 사업 지원단장께서 자리를 비우시다니.’

그녀들의 죽은 어머니를 섬기고, 이제 그녀들을 섬기는 저택의 집사장이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아가씨들. 제가 이 만남을 극구 말리던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자식이나 마찬가지인 두 사람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지금 두 분께서는 지금까지 겪지 못하셨던 규모의 전쟁터에 발을 디디시려는 겁니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고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하(夏) 태상부인께서 돌아가신 이후, 검가에서 하씨들의 세력은 보잘것 없어졌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이 늙은이를 시작으로 저택 내외의 많은 이들이 두 분을 주인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그 말에 삼공녀와 사공녀가 이를 악다물었다.

자신들이 현재 소속된 검가 사업 지원단의 지원일부가 이공자의 뒤에 줄을 설 때까지만 해도.

그저 가문 내에서 줄곧 보아 왔던 정쟁의 연장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

겨우 반나절 만에 전대 왕조부터 세를 불려 왔던 낙양의 유력 가문이 멸문했다.

그리고 이것이 시작이라고 했다.

“아가씨들께서 대공자님께 혈육의 정을 기대하는 것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만. 두 분께서 대공자님을 만나는 것을 이공자측이 '오해'하게 될 가능성도 충분히 있습니다.”

늙은 집사장은 두 사람을 위해, 끝까지 제 할 말을 마쳤다.

“아가씨들께서는 두 분을 따르는 모두를 책임지고 계신 분들이라는것 또한, 잊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그의 말은 끝났지만, 삼공녀도, 사공녀도 입을 열지 않았다.

소녀들의 취향을 충분히 반영하여 꾸며진 화사한 방과 어울리지 않게 무거운 분위기가 그들을 내리 눌렀다.

“…집사장. 잠시 저희에게 시간을 주세요.”

“물론입니다.”

그는 복도로 나와 문을 닫았다.

집사장은 오가는 이 없는 복도에서, 조용히 시선을 내리깐 채, 정중히 한결같은 태도로 그 자리를 지켰다.

시간이 한결 느릿하게 지난 후.

문이 열렸다.

“언니."

사공녀 연다혜가 쌍둥이 언니의 손을 꼭 쥐고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집사장.”

“예, 아가씨

삼공녀 연다은이 집사장을 향해 말을 이었다.

“그대의 조언은 큰 도움이 되었어요.”

“우리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사공녀가 말을 받았다.

“우리는 큰오라버니를 만날 겁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혈육의 정을 느끼기 위해서만이 아니에요.”

“우리는 대공자 연소현을 만나는 겁니다.”

그 말에 집사장의 눈이 커졌다.

“그 말씀은…?”

그녀들은 자신들이 심사숙고해 내린 결정의 근거를 입에 담았다.

“우리는 현재 이 가문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요. 이 가문은 현재 명백히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어요.”

천하제일가라는 이름은 그저, 낙양검가의 부와 권력만을 드러내 보일 뿐.

뒤틀리고 썩어 빠진 이 가문은 날이 갈수록 그 정도가 심해지고 있었다.

“이공자나 삼공자가 소가주가 되면, 이 가문은 지금보다도 더욱 끔찍한 모습이 될 겁니다.”

“어쩌면 그 두 사람이라면, 그 과정에서 가문 전체를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내전으로 밀어 넣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로 인해서 이 가문이 몰락해 버릴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여러 가지를 핑계삼아, 계속해서 한 발, 또 한 발, 물러나기만 했어요.”

그녀들이 확고한 의지를 담아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더 이상, 이 가문이 바뀌기만을 가만히 기다리고 있지 않을 겁니다.”

“이제 우리가 이 가문을 바꾸기 위해서, 움직일 겁니다.”

그들이 낙양검가 내에서 가지는 힘과 영향력은 미약했지만, 그 의지만큼은 확고했다.

“그러기 위해, 큰오라버니- 대공자 연소현을 만날 거예요.”

“대공자 연소현을 만나, 그의 의지와 목표를 확인할 겁니다.”

“그리고 그가 우리가 원하는 것과 같은 검가를 원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와 손을 잡아 힘을 보탤 겁니다.”

집사장은 눈부신 것을 보는 듯한 시선으로 쌍둥이 자매들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곳에 있던 마냥 소녀같기만 하던 십사(十四) 세의 아이들은 이제 없었다.

“큰오라버니는 그 오랜 세월을 보낸 이후에도 지금 스스로 일어서서 맞서 싸우고 있어요.”

연소현이 칩거를 깨고, 이공자와 부딪칠정도로 강하게 움직인 것이 결국 그녀들에게까지도 큰 영향을 끼친 것이다.

“이제 우리도 움직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뜻이에요.”

허물을 벗고 나비가 되듯, 이 순간 이 두 사람은 다시 태어난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들을 향해 집사장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주인님들의 명을 받듭니다.”

존중과 존경을 담아.

그가 삼공녀와 사공녀를 부르던 명칭이 아가씨에서 주인님으로 바뀌었다.

그녀들은 이제 자신의 책임을 알고, 그 무게를 알고, 나아갈 곳을 결정하고 그 방향을 가리킬 의지를 품었다.

오랜 시간 그들이 품고 있던 군주로서의 자질이 깨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주인께서 원하시는 것이 있다면, 이루어 드릴 수 있도록 목숨을 초개처럼 던져서라도 수행해 내는 것이 아랫것들의 의무.”

그런 그를 향해, 쌍둥이 주인들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 그럼 하씨 가문에 부끄럽지 않을 외출복을 골라 주세요.”

그가 껄껄 웃었다.

“물론입니다.”

그는 이것저것 외출복들을 골라 들며, 그녀들에게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이 노복(老僕)이 대공자님의 소식에 대해 들었던 것이 있사온데.”

“큰오라버니의 소식?”

“뭔가요? 뭔가요?”

한없이 충성스럽고, 또한 그만큼이나 가진 능력이 뛰어난 집사장은 낙양검가 내에 자체적인 정보망이 있었다.

사공녀가 정보부처에서 약식 보고서를 받았던 무렵, 그 개요에 대해서 그가 이미 파악하고 있던 것도 그 정보망의 힘 덕분이었다.

“신뢰도가 얼마나 있는 정보인지는 모르겠으나, 들리는 바에 따르면.”

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두 분께서 만나시길 고대하시던 그 대공자께서 곧 검가에 들르실지도 모른다고 하더군요.”

* * *

낙양검가 특등급 폐관수련장.

어젯밤 대공자의 호위를 담당했던 호위제장이 자신의 직속상관인 호위각주에게 보고하고 있었다.

보고를 전부 들은 호위각주가 그에게 되물었다.

“정녕 자네가 본 것이 틀림없는가?”

그녀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예, 몇 번이나 재확인을 거쳤습니다. 분명합니다.”

그가 확신을 담아 대답했다.

"어젯밤 대공자께서 펼쳐 보이셨던 그 진각은, 틀림없이 태상가주님의 진각이었습니다.”

그는 어젯밤 죄악계곡의 임시 지휘 천막에서 연소현이 남겼던 그 진각의 흔적을 홀린 듯이 바라보고만 있던, 바로 그 호위제장이었다.

“…연소현. 그 아이가 이때까지 무공을 숨긴 것도 모자라서.”

연소현의 고모이자, 태상가주의 누나인 호위각주가 손을 들어 아연한 표정을 감추었다.

"그 '괴물'의 독문무공을 익혔다고…?”

태상가주, 즉 자신의 남동생을 괴물이라 하는 그녀의 말에는 불가해한 것을 향한 외경이 짙게 담겨, 큰 거리감을 만들고 있었다.

“하하하핫!”

옆에서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린것은 다름 아닌 이공녀, 천의무봉 연서린이었다.

“역시 그 녀석답군. 이제까지 누구도 익혀 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아버지의 검을 익혀 냈단 것인가!”

그 말을 들은 그녀의 스승이자 고모, 호위각주가 뒤를 돌아봤다.

“너는 그 아이가 내공을 다룰 수 있는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더냐?!”

스승의 호통에도 연서린은 태연히 어깨를 으쓱였다.

“스승께서는 모르셨습니까? 저는 다들 알고 계신 건 줄로만 알았습니다.”

능청스러운 그녀의 말에 스승의 눈길이 날카로워졌다.

“뭣이라고?!”

연서린이 자신의 머리를 긁적였다.

“내공의 재능? 무공의 자질? 그 정도는 그냥 '슬쩍 보면' 다들 아는 것 아닙니까?”

천의무봉이라 불리는 이 희대의 천재가 보는 세상은, 과연 어떤 모습인 것인가.

그 말에 호위각주와 호위제장 두 사람은 순간 말문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

여태껏 무공밖에 모르는 척을 하며 살아온 연서린은 이번에도 그렇게 태연히, 주변인들에게 자신이 알고있던 것을 털어놓지 않고 넘어갔다.

“…연서린.”

연서린이 스승의 눈초리에 깃든 감정을 읽어내지 못할리가 없었다.

“이야! 소현이 그 녀석이 아버지의 검을 익혔다니, 이거 나도 쉬고있을 틈이 없겠구나!”

그녀는 마음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소현아. 네 날개를 활짝 펼치거라. 그러면 아무리 격이 다른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천치들이라도, 천지를 뒤덮은 너의 날개를 보지 못할 수가 없을 터이니.’

연서린은 어깨를 풀며, 연무장 쪽으로 돌아갔다.

"......."

멀리 하늘을 올려다보며 자신의 남동생, 태상가주의 모습을 떠올린 호위각주의 얼굴이 가늘게 떨려 왔다.

'그 괴물 같던 자가 남긴 큰아들놈이 결국...."

그 표정에 담긴 것은 질시인가, 증오인가, 한인가, 고통인가.

'또 제 아비처럼 내 앞을 가로막으려 드는 것인가…!’

그녀는 멀어지는 연서린의 등으로 그 시선을 옮겼다.

'이번에는 반드시 내가 이길 것이다! 나의 제자가 검가에서, 이 중원국에서 최고가 될 것이야!’

* * *

죄악의 골짜기.

대공자-사공자 합동 사업 본부.

사공자 연비의 집무실.

“이씨 가문이 멸족했다고?”

기괴할 정도의 광소를 터트리는 소년의 모습이 있었다.

지팡이를 짚은 노파, 사공자의 최측근인 곽 노인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을 정정해 주었다.

“멸족까지는 아니고, 가문이 사라진 정도입니다만….”

사공자 연비는 그런 말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멍청한 놈들! 아둔한 놈들!”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 것 같았다.

“이 낙양은 어리석은 자들로 들끓고 있어! 이 도시의 그리고 본가의 진정한 주인이 되실 큰형님도 몰라보고, 이를 드러내는 놈들!”

그가 이씨 가문의 파멸 과정이 담긴 현월각의 보고서를 높이 들어 보이며 외쳤다.

그것은 피와 죽음으로 가득한 자랑스러운 승리의 기록이었다.

“이것이 우리의 전쟁이고, 이것이 우리가 따르는 군주의 힘이다!”

임무에 파견된 자들을 제외하고, 그 자리에 모여 있던 측근들이 고개를 숙였다.

“청씨 가문과 공씨 가문이 이렇게 치고 달려 나가고 있는데, 우리가 뒤처질 수는 없다!”

그가 책상을 내리쳤다.

“모두 각자 맡은 바 임무에 뼈를 묻을 기세로 임하라 전해라!”

겨우 십삼(十三) 세.

자그마한 소년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것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한 박력과 살기였다.

“갑자기 굴러 들어온 자들에게 밀릴 수는 없다!”

소년의 커다란 목소리가 집무실에 울려 퍼졌다.

“큰형님의 가장 가까운 곳에 서는 것은 우리, 사천의 피를 이은 자들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전의를 고취시키는 주군의 외침에 그의 측근들이 일제히 답했다.

“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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