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편 멸문지화(滅門之禍)
중년 여인이 연기를 뿜으며, 연소현에게 궐련을 든 손을 들어 보였다.
“대공자. 시작하기 전에, 질문이 있습니다.”
상석에 앉은 연소현이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말씀하시죠.”
“여기 있는 모두는, 각기 다른 사업체의 대리인이지만. 공통점이 있다면, 전부 강남과 낙양을 연결하는 상로(商路)와 관련이 있는 이들이지요.”
그렇기에 그들이 이씨 가문의 사업체, 영와상단의 인수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그녀는 주변을 슬쩍 둘러보며 말했다.
“아직 여기 있는 이들 중 누구도, 사패천과 직접 관계를 유지할 뿐. 검가의 이공자와는 손을 잡지 않았지만….”
“애초에 여기 계신 분들은 낙양에 본가를 둔 가문의 소속이 아니시지.”
“맞습니다. 허나….”
그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형편에 따라서는, 언제라도 이공자와 손을잡고 대공자의 등에 칼을 겨눌 수 있는 이들입니다. 게다가 대공자께선 영와상단을 운영하실 수 없지요.”
중년 여인은 손에 든 궐련을 한 모금 빨아들인 다음 허공에 천천히 그 연기를 흘리며 말했다.
“그렇다면….”
그녀의 뱀 같은 시선은 연소현에게서 조금도 떨어지지 않았다.
“대공자께 엄청난 비용을 치르고, 영와상단을 인수하는 것이 아니라. 이공자와 손잡는 대신 양해를 구해 영와상단이 차지하고 있던 영역과 상로들을 빼앗으면 되는 것이 아닐까요?”
어차피 이씨 가문은 더 이상 힘이 없었다.
이공자는 이씨 가문을 대신해 합류하겠다는 새 전력이 영와상단을 먹어 치우겠다는 것 정도는 허락할것이 뻔했다.
"그리고 또 하나.”
중년 여인의 혓바닥이 짙은 연지를 바른 입가를 슬쩍 훑었다.
“만일 검가의 후계자 다툼에 끼어드는 것이 부담되는 것이 문제라면….”
그녀가 손을 들어 주변을 가리켰다.
“애초에 대공자님이든 이공자든, 누구도 거치지 않고, 여기있는 우리 사업체들끼리 힘을 합쳐, 영와상단의 영역과 상로를 가져오면 그 뿐이겠지요.”
불편하지만 사실이었다.
“…흠흠.”
대리인들이 연소현의 눈을 피했다.
그들 중 누군가는 헛기침을 했고, 누군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으며, 누군가는 수염을 쓰다듬었다.
승냥이의 입에서 먹이를 뺏어 오니, 이제는 구렁이들이 달려드는 형세였다.
다들 사패천의 영역에 발을 하나씩 담그고 있는 이들 아니랄까봐, 생각하는 것부터가 사갈(蛇蝎)과 다를바 없었다.
“과연 흥미로운 이야기였소.”
연소현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들이 그렇게 한다면야, 본 대공자의 손에서 영와상단을 빼앗아 나눠 먹는것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요.”
누군가 하나가 슬쩍 손을들며 끼어들었다.
“…그러니 가격을 조금 합리적으로 조정해 주신다면야, 얼마든지 평화로운 거래가 이루어질 수 있을것 같습니다.”
그 말에 다들 속으로 음흉한 미소를 공유했다.
애초에 그들의 노림수는 그것이 었다.
이공자와 손을 잡아 낙양검가의 후계자 정쟁에 끼어드는 것도 아니고, 제값을 주고 대공자로부터 영와상단을 사들이는 것도 아니다.
언제 누가 뒤통수를 칠지 모르는 연합을 이뤄 대공자와 대립하는 것도 까다롭다.
저렴하게 영와상단을 먹어 치울 수 있다면, 그것이 최선책이었다.
“그것은 조금 어렵겠소.”
연소현이 고개를 저었다.
“굳이 대공자께서 영와상단을 지키시려, 이 상황에 저희와 대립까지 하실 필요는-.”
연소현이 그 말을 끊었다.
“그대들과 대립까지 할 필요는 없지. 그대들이 합심하면 결국엔 전부 빼앗길 터인데.”
“그렇다면 어째서-.”
“하지만 내 장담하지.”
연소현이 다리를 꼬고 몸을 의자에 깊이 묻었다.
“본 대공자가 쥔 영와상단을 노리고 가장 먼저 포문을 연 자의 가문은....“
그가 턱을 들고 오연한 시선으로 좌중을 바라보았다.
“내 손수, 그 가문을 이씨 가문꼴로 만들어 버릴 것이오.”
"......."
뭉게뭉게 실내를 떠돌던 연기가 그대로 얼어붙어 버리는 것 같았다.
연소현은 한 점의 인위적인 기세도 일으키지 않았고, 살기라고는 조금도 드러내 보이지 않았다.
기세도 살기도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되면, 다음 이 자리에는 영와상단과 함께, 본 대공자에게 박살 난 가문의 상단 또한 매물로 올라오게 되겠지.”
그저 담담하게, 그리고 오만하게, 좌중의 인물들에게 하나하나 시선을 두었을 뿐.
그들 중 누구도 감히 연소현과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어디 한번. 본 대공자와 일전을 벌여 보시겠소?”
모두가 침묵했다.
"......."
그것은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힘 있는 가문을 대리하는 그들에게는 통하지 않았을 말이었다.
하지만 오늘 모든 것이 달라졌다.
연소현이 움직이자, 명예밖에 모르던 청씨 가문의 판관들이 움직였다.
아직도 믿어지지가 않지만, 황도 십육가문중 공씨 가문 전체가 대공자의 뒤에 있는 것이 분명해지고 있었다.
거리낌 없이 낙양검가의 대공자에게 달려들 정도로 세를 과시하던 이씨 가문이 하루아침에 풍비박산 났다.
지금 자신들이 구매를 노리는 영와상단부터가, 채 온기도 식지 않은 이씨 가문의 따끈따끈한 시신이나 다름없었으니.
“…어이쿠!”
누군가 하나가 급히 손을 털었다.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있던 연초가 전부 타 버리는 것도 모르고 있었던 까닭이었다.
그 외마디 외침에, 만년 빙하처럼 얼어붙어 있던 실내의 공기가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웅성거림이 시작됐다.
“…확실히 대공자는 자신의 실력을 이번에 제대로 보였소.”
“이러면 만약 우리가 연합해도, 누구도 먼저 대공자를 향해 이를 드러내지 않으려 할 것이오.”
“애초에 저런 말을 듣고 난 다음에, 연합 전선을 펴려는 가문 자체가 없지 않겠소?”
연소현은 서로 의견을 주고받는 이들에게 충분한 시간을 준 후에야 입을 열었다.
“어느 가문 하나가 영와상단을 통째로 삼키면, 이공자 놈의 원한을 살 수도 있겠지.”
수군거리던 대화들이 멎어 들고, 자연스럽게 좌중의 시선이 연소현에게로 모여들었다.
“그의 요청을 받은 사패천이 기껏 매입한 상로를 막아 버리면, 일이 곤란해질 것은 뻔하고.”
연소현이 좌중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본 대공자가 영와상단을 지역별로 쪼개어 파는 것이오.”
한 가문이면 몰라도, 여러 가문이 영와상단을 부분적으로 사들였다고, 그들의 상로를 전부 막아 버릴 수는 없었다.
그 상로들은 사패천에게 있어서도 화북의 부를 끌어오는 동맥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대공자의 전략에 고개를 끄덕일 때, 처음 질문을 던졌던 중년 여인이 입을 열었다.
"대공자님.”
그녀는 자신이 피우던 궐련을 비벼 꺼 버리며 말했다.
"가격을 제시해 주시죠.”
* * *
가문의 본가가 털렸다.
원로들은 구속되었으며, 가주는 없어졌고, 현직 관료에 있던 구성원들은 실종되었고, 가문의 뿌리와 다름없던 상단은 조각나 매각되고 있었다.
본디, 멸문지화(滅門之禍)라 함은, 한집안의 구성원들이 몰살을 당하는 재앙을 일컬었다.
이씨 가문의 일원들은 대부분이 생존해 있었지만, 그들은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잃고, 그 오랜 세월동안 쌓아 왔던 원한과 증오만이 그 가산(家産)으로 남았다.
잔챙이에 불과하거나 천운이 따라 살아남은 이들은 급히 몸을 숨기고 낙양을 떠나고 있었다.
그들은 다시는 어디서도 자신의 성씨를 밝히지 못하리라.
낙양의 정가(政街)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떠돌기 시작했다.
“이씨 가문이 불과 한나절도 되지 않아, 검가의 대공자에 의해 멸문지화를 당했다.”
낙양의 권력자들이 누구랄 것 없이 현 상황에 온몸의 촉각을 곤두 세우고 있었다.
* * *
그리고 대공자 연소현이 영와상단을 조각내어 처분하고 있던 그 시점.
마치 발등에 불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뛰어다니는 이들이 있었다.
바로, 일찍부터 낙양검가의 이공자와 손을 잡고 있었던 가문들이었다.
“가주님! 가주님!”
낙양에 본가를 둔 어느 유력 가문.
관복을 입은 이 하나가 허파가 터져라 가주를 부르며 안마당에 모습을 드러냈다.
관모도 손에 벗어 들고 헐레벌떡 뛰어들어오는 그를, 나이든 가주가 안마당으로 직접 뛰어내려가 맞이했다.
“그, 그래! 어떻더냐? 그 소문이 사실이더냐?!”
체통을 누구보다도 소중하게 여기던 평소의 가주라고는 믿기가 힘들 정도의 태도였다.
“예, 예! 원래라면 지금쯤 관청에서 퇴청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할 이씨 가문의 현직 관료들이 아무도 보이질 않습니다!”
그 말에 왕씨 성을 쓰는 가주가 펄쩍 뛰었다.
“그 말이 참말이더냐?! 하나도 보이질 않았다고?!”
“제가 감히 어느 안전(案前)이라고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왕씨 가문 소속의 현직 관료가 정신없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저 이씨 가문의 현직 관료들이 보이지 않는 것을 넘어서, 누구도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질 않습니다! 마치 그런 사람은 잘 모르겠다는 태도들입니다!”
“이, 이런…!”
왕씨 가주가 이마를 감싸 쥐었다.
“가주님! 가주님!”
이어서 정보상 이곳저곳에 보냈던 가문의 일원들이 안마당으로 달려 들어왔다.
“그 공씨 가문에서 손을 쓴 것이 맞는 것 같답니다! 그것도 일의 규모와 처리 속도로 볼 때, 가문 전체가 나선 것이 틀림없답니다!”
“황도십육가문인 바로 그 공씨 가문 말입니다!”
왕씨 가주가 벌컥 소리를 질렀다.
“공씨 가문이 황도십육가문인 것을 누가 모르느냐?! 그게 아니라, 도대체 왜 그놈들이 대공자의 편에 섰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냐?! 애초에 북망산 전대 가주들은 황도의 본가와 뜻을 달리한다면서!”
나이 든 가주의 목에 핏대가 서고, 입에서는 침이 튀었다.
“게다가 청씨 가문 놈들은 대관절 뭘 잘못 처먹었길래 대공자의 사냥개처럼 굴고 있는 것이냐고?! 뭣 하나 제대로 알아 오는 것이 없단 말이더냐?!”
그가 역정을 부리자 가문의 일원들이 쩔쩔매며 고개를 숙였다.
평소라면 속으로 욕이라도 하련만, 지금 상황은 가주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었기에, 그들조차도 환장할 노릇이었다.
“뭣들 하고 있느냐?! 전부 다시 돌아가서 제대로 된 정보를 건져오란 말이다!”
일원들이 숨을 고를 여유도 없이 다시 안마당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들이 헐레벌떡 각자의 마차들을 타고 대문을 벗어나는 것을 보던 왕씨 가문의 가주의 시선이 초조함에 떨려 왔다.
당장이라도 저 거대한 본가의 대문을 뚫고 대공자의 철갑요새가 들이닥칠 것만 같았다.
"......."
이씨 가문의 몰락은 너무나 빨랐다.
이공자와 손잡고 있던 다른 가문들이 도와줄 겨를조차도 없었다.
그 대공자는 번갯불에 콩을 구워먹듯 유력 가문 하나를 처리해버렸다.
이대로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채비를 갖추거라! 당장 장씨 가문의 가주를 만나봐야겠다!”
동맹들을 만나야 할 시간이었다.
* * *
“이, 이게 무슨…?”
장씨 가문은 그의 왕씨 가문과 마찬가지로 이공자 세력에 속한 유력 가문이었다. 그런 장씨 가문의 대문앞에서, 왕씨 가문의 가주가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장씨 가문의 대문 앞은 짐을 바리바리 싸 들고 떠나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마치 적군의 진격을 피해 달아나는 피난민들의 행렬을 보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인지 알아보겠습니다!”
마차에서 먼저 내린 집사들이 장씨 가문의 본가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자, 자네!”
마차의 창밖으로 낯익은 얼굴을 발견한 왕씨 가주가 손을 내밀어 가리키며 소리쳤다.
“자네는 장씨 가문의 대농장을 담당하던 이가 아닌가?!”
그 외침에 돌아본 이의 얼굴 표정이 대번에 난처한 기색으로 가득해졌다.
“어딜 모르는 척인가?! 당장 이리 와 보게!”
장씨 가문의 일원이 한숨을 쉬며, 왕씨 가주의 근처로 다가왔다.
무슨 일인지 다그쳐 묻는 왕씨 가주에게 그가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답했다.
“…보시는 그대로입니다. 다들 짐을 싸서 낙양을 떠나는 중이지요.”
“장 가주는?! 가문의 중진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본가 내에 계시지 않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의 시선이 가문의 재산을 아무렇게나 들고 떠나는 이들을 향했다.
가문의 가주나, 중진들이 있었다면, 저들이 저렇게 할 수 있겠느냐는 의미였다.
'...이미 낙양을 뜬 것인가?!’
꼴을 보아하니, 이씨 가문이 멸문지화를 당했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잠적한 것이 분명했다.
“가주님! 장씨 가주의 침실이고, 집무실이고, 이미 텅 비었습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가주를 모시던 측근 중에 누구도 보이질 않습니다!”
집사들이 달려와 외치는 말을 들으며, 왕씨 가문의 가주가 뒤로 머리를 기댔다.
'...전선(戰線)이 무너지고 있는 것인가.’
대공자 연소현을 인정사정없이 물고 뜯었어야 할, 유력 가문 하나가 전선에서 탈주한 것이다.
'나도 판단을 내려야 할 때인가. 장씨 가문의 가주처럼…?’
그는 문득 비상시를 대비해 수립해 두었던 탈출 계획을 떠올리다가, 고개를 거칠게 내저었다.
'아니다!'
아직 전쟁은 제대로 치르지도 않았고, 자신의 가문은 건재했다.
제대로 싸워 보지도 않고, 이날 이때까지 쌓아 온, 명성, 부, 권력, 그 모든 것을 버리고 도망을 택하다니.
'멍청한 장씨 놈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마부석에 앉은 측근에게 외쳤다.
“당장 검가로 가자! 검가 이공자의 진영으로!”
그리고 그 시각.
왕씨 가문뿐만이 아니라, 다른 가문의 가주들을 태운 마차들 또한 이공자의 진영으로 향하고 있었다.